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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중종 ․ 명종대 정몽주 인식
Recognition for Jeong Mong-Ju in Jungjong and Myungjong Period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시간강사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14S1A5B5A07042482
선정년도 2014 년
연구기간 1 년 (2014년 09월 01일 ~ 2015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김보정
연구수행기관 부산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의 목적은 조선 전기 중종 ․ 명종대 사림의 정몽주 인식을 통하여 조선 전기 성리학의 이해과정을 살펴보는데 있다. 정몽주는 성리학의 핵심인 의리명분을 몸소 실천한 고려의 충신이자 절의의 상징으로 조선시대를 아울러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인물이다. 반면, 성종대 이후 등장하는 사림은 의리명분론을 사회실천의 이념구현으로 실행하는 부류들이다. 그러므로 조선 전기 성리학의 이해과정을 ‘충’ 혹은 ‘절의’ 등의 추상적인 개념보다는 당대의 사림들이 정몽주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에서 살펴보려는 것이다. 사서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조선전기는 크게 세 차례에 걸쳐 정몽주 인식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① 문종대 『고려사』의 열전, ② 성종대 『동국통감』의 고려기, ③ 중종대 박상의 『동국사략』의 열전이다.
    조선은 건국이후 그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전대의 역사인 『고려사』의 편찬에 착수하여 태종 ․ 세종대의 개수과정을 거쳐 문종대 기전체『고려사』를 완성하게 된다. 편년체『고려사』에서 예상하지 못한 열전의 항목이 독립하면서 우왕 ․ 창왕이 신우 ․ 신창으로 폄하되어 반역전에 입전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정몽주는 조선건국을 반대한 반역자로 효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신전에 입전된다. 문종대 정몽주의『고려사』제신전의 입전은 조선 초기 정몽주에 대한 인식의 완결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정몽주에 대한 인식의 특징은『삼강행실도』의 ‘충신’과『용비어천가』의 ‘난신’의 이중적 구도를 모두『고려사』에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왕위찬탈로 왕위에 오른 세조는 자신의 정통성 확립을 위해서 기존에 편찬된 사서를 아울러 통사의 편찬, 즉『동국통감』의 편찬을 시도한다. 하지만『동국통감』은 세조대 완성하지 못하고 성종 16년에 가서야 완성된다. 이러한 연유로『동국통감』의 새로운 사론은 김종직의 문인인 최보에 의해 주로 서술된다. 즉,『동국통감』의 새로운 사론은 사림의 역사인식이라 할 수 있다.『동국통감』의 고려기는 節義와 관련되는 포폄부분에서 많은 내용이 보충되면서, 정몽주에 관한 많은 치적들도 새로이 수록된다.『고려사』에 비해 『동국통감』에서 정몽주 인식은 절의가 강조되면서 ‘충신’의 이미지로 확고해진다.
    연산군이후 훈척과 사림간의 무오(1498), 갑자(1504)사화를 겪고, 중종반정으로 등장한 중종대 사림은 조광조를 중심으로 도학정치를 펼치며, 정몽주를 조선 성리학의 비조로 삼고, 지속적으로 문묘종사의 상소문을 올리고 논의한다. 그 결과 조선 중종12년(1517) 정몽주의 문묘종사가 이루어지면서 조선 전기 정몽주에 대한 평가가 일단락 짓게 된다. 하지만 성종대 김종직계열의 사림이 훈척화된 이후, 또 다시 사림간의 기묘사화(1519)를 겪으면서 조광조가 사사되고, 명종원년 을사사화(1545)가 일어난다.
    중종대는 그 이전의 관찬사서와 달리 사림에 의해 사찬사서가 최초로 나오는 시기이며, 정몽주에 대한 평가가 일단락 짓는 시기이다. 이 시기의 사림들은 관찬사서인『동국통감』의 방대한 양을 축약하여 재정리한 사찬사서인『동국사략』들을 편찬하는데, 중종대 박상의『동국사략』과 명종대 유희령의『표제음주동국사략』이 대표적이다. 한영우는『동국통감』이 성종대 김종직계열의 영남사림들의 인식을 대변한다면,『동국사략』은 중종 ․ 명종대 사림간의 입장 차이는 있지만, 김굉필계열의 기호사림의 인식을 반영한다고 전한다. 그러나 박상의 『동국사략』편찬연대를 추정하지 않은 까닭에 중종12년 정몽주의 문묘종사를 간과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영남사림과 기호사람의 정몽주에 대한 인식은 드러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박상은 정몽주의 문묘종사를 『동국사략』에 어떻게 반영하였는지를 살펴보고, 이러한 점을『동국통감』과 비교해야 할 것이다. 또한 『동국사략』의 편찬자인 박상은 선조대 이후 서인으로부터 추앙을 받고, 그의 조카 박순이 선조대 영의정을 지낸 서인의 영수라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보더라도 중종 ․ 명종대의 정몽주 인식은 중요한 연구대상이며 조선전기 성리학 이해과정의 한 단면을 조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 기대효과
  • 정몽주는 청소년 위인전 도서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청소년에게 미치는 그 영향력도 지대하다. 최근 김인호의 연구는 그러한 맥락에서 한 개인의 인물이 추숭되는 과정에서 과도하게 왜곡되거나 과장되어 전해진 사례를 지적하고 있다. 정몽주가 고려의 충신임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나 그 인식이 조선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며 그 인식의 변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하는 점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선행 연구는 태종대 절의지사, 세종대 『삼강행실도』의 충신 혹은 『용비어천가』의 난신 등 이중적 구도에서 성종대 사림의 『동국통감』에서 충신을 거쳐, 중종대 문묘종사가 되면서 성현으로 숭배되고, 조선후기 영조대 두문동72현으로 추앙되어 그 인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정몽주와 관련된 각 지방에서 전설이 신화가 되면서 이야기거리가 되어 우상화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당대 활동하였던 정몽주와 조선시대 인식하고 있는 정몽주와의 괴리가 생기고, 청소년 위인전에는 문학 작가들에 의해 좀 더 각색되면서 왜곡되고 있다. 올바른 위인전이 되려면 당대 인물연구와 더불어 사후 그에 대한 인식의 흐름이 제대로 된 연구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위인전에서 정몽주에 대한 왜곡과 과장은 그대로 이어질 것이다. 필자는 본 연구를 통하여 그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본 연구는 올바른 위인전의 바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청소년의 올바른 사회 교육에도 학문적 기여 및 파급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일반 대중들은 역사적 인물을 인문학 교양서, 영화, 드라마 등을 통하여 쉽게 접하고 있다. 역사적 인물을 시간적, 공간적 개념으로 확대하여, 인문학인 文史哲의 학문간의 소통 가운데 일반 대중의 인문학 강좌, 인문학 교양서의 사회적 확대가 용이해졌다. 그러나 청소년의 위인전 못지 않게, 일반 대중을 위한 인문학 교양서 역시 작가의 과장과 왜곡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최근 영화와 드라마에서 사극의 붐으로 인물에 대한 재해석이 시도되고 있으며, 여기에는 작가나 감독의 생각이 전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청소년의 위인전과 마찬가지로, 그 기저에 올바른 역사적 이해가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일반 대중에게 미치는 사회적 영향 역시 지대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본 연구는 정몽주라는 역사적 인물이 각색되고 과장되는 인문학 교양서및 드라마의 대중화에도 사회적 파급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 연구요약
  • 본 연구의 방법은 중종 ․ 명종대 편찬된 사찬사서와 그 편찬자, 즉 박상의 『동국사략』, 유희령의 『표제음주동국사략』을 통하여 정몽주 인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史書는 그 시대 편찬자의 사관을 잘 반영하고 있다. 특히, 이 시기 사림의 사찬사서는 당대 사림의 사관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정사에 의존하였던 정몽주의 ‘절의’, ‘충신’ 등 충신론에 대해 연구방법론상으로 한 단계 진일보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즉, 사상사 연구의 한 방법론으로 인물연구와 사학사연구로 진행되어 온 史書를 접목하여 새로운 연구방법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본 연구의 중점 내용은 중종 ․ 명종대 사림의 정몽주 인식, 즉 16세기 사림의 정몽주 인식이다. 본문 내용은 크게 ① 중종대 사림의 정몽주 인식과 ② 명종대 사림의 정몽주 인식으로 나눌 수 있다.
    ①은 중종대 문묘종사 논의, 박상의『동국사략』 및 편찬자 박상을 통하여 살펴볼 것이다. 세조대 양성지에서 시작된 정몽주의 문묘종사 논의는 성종대 사림을 거쳐 중종대 오면 빈번해지면서, 그 대상도 정몽주, 이색, 권근에서 정몽주, 김굉필로 바뀌게 된다. 결국 중종12년 정몽주만이 문묘종사된다. 의리명분을 실천한 절의의 상징인 정몽주의 문묘종사는 사림의 정체성과 성리학 도통의 정통성을 사림에게 동시에 가져다 준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는 성종대 『동국통감』의 정몽주 인식이 ‘충신’이었다면 중종대 사림의 정몽주 인식은 ‘성현’으로 추숭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당연히 중종대 사림인 박상의 『동국사략』에 반영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동국사략』의 편찬자인 박상은 조선후기 서인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그의 조카 박순은 서인의 영수인 점을 볼 때, 『동국사략』의 정몽주 인식은 조선후기 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의 문집인 『눌재집』에 보이는 정몽주 관련 내용도 살펴볼 예정이다.
    ②은 명종대 임고서원의 설립, 유희령의 『표제음주동국사략』 및 편찬자 유희령을 통하여 살펴볼 것이다. 임고서원은 정몽주를 모신 서원으로, 사림간의 정쟁이었던 두 차례의 기묘(1519), 을사(1545) 사화 이후에 설립된다. 임고서원의 설립배경, 그 위상을 통하여 명종대 사림의 정몽주 인식을 살펴 볼 수 있다. 유희령의『표제음주동국사략』은 명종대 을사사림의 입장에서 『동국통감』을 축약하여 정리한 사서이다. 당대 사림들의 사서가 중국의 『십구사략』의 영향을 받고 있는데 비해 유희령의『표제음주동국사략』은 『십팔사략』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박상의 『동국사략』과는 입장차이가 있을 것이며, 이는 정몽주 인식에서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유희령은 당대 사림들과 달리 그의 정치적 배경이 훈척의 정치성향이 짙다. 이러한 점에서도 박상과는 다른 정몽주 인식을 그의 저서에 반영되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문집인 『몽암집』도 아울러 살펴볼 것이다.
    ①, ② 를 통하여 조선전기 16세기 사림의 정몽주 인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과정에서 조선전기 성리학 이해의 척도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선조대『동사찬요』의 편찬자 오운이 정몽주의 문집인 『포은집』(영천구간본) 의 교정에 참여하고 나서 『동사찬요』를 개찬하게 된다. 개찬한 오운의 『동사찬요』는 고려말 기사에서 16세기의 『동국사략』보다는 15세기의 『동국통감』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조선후기 남인의 사서편찬에 영향을 주었고, 남인들이 즐겨 읽는 사서가 된다.
    이는 당대 사림들이 정몽주 인식을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과 성리학 도통의 정통성을 찾으려는 반증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중종 ․ 명종대 정몽주 인식은 조선전기 주장성리학의 정몽주 인식에서 조선후기 조선성리학의 정몽주 인식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대변하는 교량적 역할을 하고 있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는 조선 전기 중종 ․ 명종대 사림의 정몽주 인식을 통하여 조선 전기 성리학의 이해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연산군이후 훈척과 사림간의 무오(1498), 갑자(1504)사화를 겪고, 중종반정으로 등장한 중종대 사림은 중종 12년(1517) 정몽주의 문묘종사를 성사시키면서 조선 전기 정몽주에 대한 평가를 일단락 짓게 된다. 그러나 성종대 김종직계열의 사림이 훈척화된 이후, 또 다시 사림간의 기묘사화(1519)를 겪고, 명종원년 을사사화(1545)가 일어난다.
    중종대는 그 이전의 관찬사서와 달리 사림에 의해 사찬사서가 최초로 나오는 시기이며, 정몽주에 대한 평가가 일단락 짓는 의미 있는 시기이다. 이 시기의 사림들은 관찬사서인『동국통감』의 방대한 양을 축약하여 재정리한 사찬사서인『동국사략』類를 편찬하는데, 중종대 박상의『동국사략』과 명종대 유희령의『표제음주동국사략』이 대표적이다.
    15세기 『동국통감』이 성종대 김종직계열의 영남사림들의 인식을 대변한다면, 16세기 『동국사략』은 중종 ․ 명종대 사림간의 입장 차이는 있지만, 김굉필계열의 기호사림의 인식을 반영한다. 15세기 『동국통감』과 달리 16세기 『동국사략』에서는 정몽주의 외교적인 使行, 공양왕 옹립의 관여, 공양왕대 최대 정치 사건인 ‘윤이 이초의 난’에 대한 정몽주의 변론 등이 모두 생략되어 있다. 공양왕대 정몽주의 정치활동을 모두 생략한 것은 중종대 문묘종사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동국사략』의 편찬자인 박상은 선조대 이후 서인으로부터 추앙을 받고, 그의 조카 박순이 선조대 영의정을 지낸 서인의 영수라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선조대 이후 서인, 노론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배경과도 무관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며, 선조대 오운의 『동사찬요』가 편찬되는 배경과도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이는 당대 사림들이 정몽주 인식을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과 성리학 도통의 정통성을 찾으려는 반증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중종 ․ 명종대 정몽주 인식은 조선전기 주자성리학의 정몽주 인식에서 조선후기 조선성리학의 정몽주 인식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대변하는 교량적 역할을 하고 있다.
  • 영문
  • This study is investigated the understanding process of Chosun Confucianism through the recognition of Jeong Mong-Ju in age of Jungjong and Myongjong King of early Chosun.
    After the age of Yeonsangun, Muosahwa(1498) and Kabjasahwa(1504) were happened by between Hunchuck and Sarim. The Sarilm in age of Jungjong have concluded the evaluation about Jeong Mong-Ju in early Chosun by confucian engaged. However, after the Sarim in age of Sungjong were became Hunchuck, Kimyosahwa(1519) was happened by Sarims, and then Eulsasahwa was happened in the first year of Myongjong.
    In age of Jungjong, for the first time, a history books was published by Sarim, it meant that the evaluation about Jeong Mong-Ju was concluded. Sarim have compiled Dongkuksaryak, this book was shortened and rearranged Dongkuktonggam. The typical examples were Dongkuksaryak of Park Sang in age of Jungjong and Pyojaeumjudongkuksaryak of Yui Hee-Ryeong in age of Myongjong.
    Dongkuktonggam in 15th century was represented the recognition of Yeungnam Sarim which it was lined by Kim Jong-Jik in age of Sungjong. Dongkuksaryak in 16th century was represented the recognition of Giho Sarim which it was lined by Kim Goeng-Pil. Unlike Dongkuktonggam in 15th century, Dongkuksaryak in 16th century have omitted the discussion of Jeong Mong-Ju about 'Yunyi yicho’s revolt' in age of Gongyang King. The deletion about the political activity of Jeong Mong-Ju in age of Gongyang King have relevance to confucian engaged in age of Jungjong.
    In addition, Park Sang, who was the editor of Dongkuksaryak, was held in high esteem from Seoin after in age of Sunjo. Park Soon, his nephew, was worthy of notice because he was the leader of Seoin. We thought that it correlated with the political background Seoin and Noron after in age of Sunjo, and the publication background of Dongsachanyo of Oh Un in age of Sunjo.
    This meant that the Sarim at the time desired to establish legitimacy of Neo-Confucianism and their identities through the recognition of Jeong Mong-Ju. The recognition of Jeong Mong-Ju in age of Jungjong and Myongjong played the bridge role by representing the process from his recognition in early Chosun to late Chosun.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조선 전기 성리학 이해과정을 살펴보려는 일환으로써 사서를 통하여 중종 명종대 정몽주 인식을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중종대는 정몽주가 문묘종사되는 시기이며 최초로 사찬사서가 편찬되는 시기이다. 구체적으로 16세기 박상의 동국사략과 유희령의 표제음주동국사략을 통하여 15세기 동국통감의 정몽주 인식과 비교고찰하여 보았다. 그 결과 15세기 동국통감과 달리 16세기 동국사략에서 정몽주의 사행, 공양왕의 옹립관여, 공양왕대 윤이이초의 사건에 대한 정몽주의 변론 등은 모두 생략되고 있다. 특히, 공양왕대 정몽주의 정치활동은 전혀 기록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중종 12년 정몽주의 문묘종사와 관련 사안이라 보여진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결과는 두 가지 관점에서 활용할 수 있다.
    첫째, 청소년의 교육학적 관점이다. 본 연구를 통하여 정몽주란 역시적 인물의 올바른 위인전의 바탕이 되어 청소년의 사회교육에도 학문적 기여 및 파급효과가 있다.
    둘째, 일반 대중의 사회학적 관점이다. 역사적 인물이 각색되고 과장되는 인문학 교양서 및 드라마의 대중화에도 사회적 파급효과가 있다.
  • 색인어
  • 정몽주, 중종, 문묘종사, 박상, 동국사략, 유희령, 표제음주동국사략, 임고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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