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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화예술 공간으로서 17-18세기 ‘老北京’의 풍경
Old Beijing's Landscape as the Space of History and Culture-art in the 17-18th Century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시간강사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14S1A5B5A07041720
선정년도 2014 년
연구기간 1 년 (2014년 09월 01일 ~ 2015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최형섭
연구수행기관 서울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는 만주족(滿洲族)이 통치하던 청조(淸朝, 1644-1911)가 들어선 전반기, 수도 북경의 변화된 모습을 살펴보고 당시 문인들의 글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老北京’의 풍경을 재현해 봄으로써, 독특한 시대상을 반영하는 역사와 문화예술의 공간으로서 도시의 성격을 살펴보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3천 여 년 전에 성(城)이 축조된 이래 북경은 요(遼) 왕조(907-1125) 때부터 따진다면 1100년에 가까운 도성(都城)의 역사를, 금(金) 왕조(1115-1234) 때부터 계산하면 860년 가까운 도성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오랜 역사 속에서 수도 북경은 계성(薊城), 연경(燕京), 중도(中都), 대도(大都), 북경(北平)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며, 왕조의 변천 및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각기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며 발전해 왔다.
    1272년 칭기즈칸(成吉思汗, Chinggis Khan,1162-1227)의 손자 쿠빌라이(忽必烈, Khubilai, 1215-1294)는 옛 금(金) 왕조의 수도였던 중도성을 새롭게 중건한 후 대도(大都)라고 개명하였다. 대도란 몽골어로 ‘Khanbaliq(汗八里)’, 즉 ‘위대한 칸의 거주지’라는 뜻이다. 명실상부한 세계 제국이었던 원 왕조의 수도가 되면서 북경은 이전의 중도성에 비해서는 그 규모가 훨씬 방대한 거대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14세기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은 강남 지역에서 기병(起兵)한 후 남경(南京)을 수도로 명(明) 왕조(1368-1644)를 건립하였다. 그는 대도성을 완전히 파괴한 후 개평(北平)이라 개명했다. 그 후 반세기가 지난 후 명의 3대 황제였던 영락제(永樂帝, 1402-1424)는 1420년 오늘날의 자금성(紫禁城)을 완성한 후 천도를 하였고, 북경이라는 명칭도 그때 생겨나게 되었다. 이후 북경은 만주족이 통치하던 청 왕조를 거쳐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에 이르기까지 명실상부한 중국 수도로서의 명성을 굳건히 유지하고 있다.
    제국의 수도로써 북경의 풍경은 그 오랜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변화를 거쳐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거칠게 말하더라도 몽고족이 통치하던 원 왕조 시대와 15세기 초 자금성이 축조된 이후의 북경은 분명 다른 모습을 띠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명 왕조를 뒤이어 제국의 주인이 된 만주족이 북경에 입성한 이후, 1860년 북경 조약 체결과 1900년 의화단사건 이후 체결된 신축조약(辛丑條約)으로 서구 열강의 공관(公館)들이 들어서고 선교사들이 활동하던 시기,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북경은 상당히 다른 양태를 보였을 것이 분명하다. 필자가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단순히 외관적인 도시의 규모나 건축물의 배치도에 있어서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당시 북경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추구하던 문화와 예술, 거리의 풍경과 분위기, 정치적인 성격의 도시 정비사업으로 인한 변화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도시의 풍경은 단순히 규모나 건축물과 같은 외형적인 모습을 뛰어넘어 역사 ․ 문화 ․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한 시대의 특징을 반영하는 인문학적 코드로 읽을 필요가 있다.
    필자는 특히 청조가 들어선 이후의 북경의 변화된 풍경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만주족이 한족을 지배하던 청조의 시기, 북경은 분명 이전 한족 중심의 비교적 단일한 왕조였던 명조 때와는 다른 모습을 띠고 있었을 것이다. 만주족이 지배하였던 270년 가까운 청조의 역사 중에서도 필자는 특히 17세기 중후반부터 18세기에 이르는 왕조의 전반기 북경의 풍경이 어떻게 바뀌었고, 그 도시를 배경으로 살아갔던 문인들의 삶과 문화는 어떠했는지 본 연구를 통해 재현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도시가 단순히 거리나 건축물의 배치와 같은 물리적인 형태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독특한 특징을 반영하는 역사이자 문화의 공간으로 읽을 수 있다는 인식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수도 북경의 다양한 모습과 풍경을 통하여 17-18세기 만주족이 통치하던 청 왕조 시대의 변화상과 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 기대효과
  • (1) 연구결과의 학문적 기여
    본 연구는 만주족이 통치하던 청조가 들어선 전반기, 수도 북경의 변화된 모습을 살펴보고 당시 문인들의 글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老北京’의 풍경을 재현해 봄으로써, 독특한 시대상을 반영하는 역사와 문화예술의 공간으로서 도시의 성격을 살펴보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본 연구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 역사, 지리, 문학, 공연 예술, 민속학, 도시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는 통합적인 연구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도시를 역사적 공간으로 파악하고 문화 예술적인 관점에서 도시를 파악하는 이러한 시도는 인문학의 경계를 확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본 연구의 첫 번째 학문적 기여로는 바로 이런 학제 간의 장벽과 경계를 허물고 인문학의 경계를 확장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둘째, 지금까지 ‘老北京’에 관한 연구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문화대혁명 시기(1966-1976)에 나타난 변화나 시기를 위로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20세기 전후에 거의 대부분의 연구가 집중되어 있었다. 연구가 그렇게 집중될 수 밖에 없었던 제일 큰 원인은 자료의 문제이다. 20세기를 전후해서는 외국인들이 남겨 놓은 기록과 사진,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발표된 자료 등 다양한 시청각, 문헌 자료들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그렇지만 19세기 전반기 정도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地方志나 筆記 여기저기에 산재되어 있는 자료를 긁어모아야 한다는 접근상의 어려움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老北京의 풍경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20세기를 전후하여 그 이후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7-18세기 老北京의 풍경을 다루고 있는 필자의 논의는 이런 측면에서 지금까지의 연구를 보완하고 내용을 풍부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명청 시기는 그 어떤 시기보다 조선과의 왕래와 교류가 빈번하던 시기였다. 특히 한국학 분야에서는 한일 교류 관계와 더불어 한중 교류 관계에 대한 연구를 상당히 인기있는 테마로써 중요한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朴趾源의 ≪熱河日記≫에서 나타난 것처럼 조선 사신들이 중국에 체류하며 보고 들은 다양한 경험에 대한 연구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17-18세기 老北京의 풍경을 다루고 있는 필자의 연구는 한중 교류 관계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에게도 어느 정도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는 흥미로운 내용이 될 것이다.
    (2) 연구결과의 교육적 기여
    우리는 현재 기술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그 변화 속도가 매우 빠른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기술 문명은 인간에게 많은 생활상의 편의를 제공해 주었지만, 기술 문명이 인간을 압도하게 되면서 소외감을 느낀 인간은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그리워하고 있다. 최근 KBS에서 방영된 바 있는 ‘인문학 콘서트’와 같은 프로그램을 비롯하여 문화관, 도서관 등에서 인문학 관련 프로그램들은 다투어 마련하는 것도 이런 현상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본 연구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 ‘老北京’의 다양한 풍경에 관한 것이다. 현재 관광업계에서도 현대화된 고층 빌딩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옛날의 향수와 문화를 느낄 수 있는 ‘베이징 후퉁 여행’ 같은 상품이 인기를 얻고 있다. 방송사에서 ‘올드 베이징’에 관해 다룬 다큐도 상당히 많은데, MBC에서 방영된 ‘인문기행중국-베이징의 方을 걷다’, EBS에서 방영된 ‘아시아 테마 기행-문화예술의 중심 베이징’, NHK에서 방영된 ‘아시아 고도이야기 제1편 뒷골목에 살아있는 황도(皇都) 중국 베이징(Beijing)’과 같은 것들이다. 본 연구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 이처럼 일반 대중들도 쉽게 흥미를 느낄 수 있는 老北京의 풍경에 관한 것이다. 본 연구가 다루고자 하는 老北京의 풍경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20세기 전후, 혹은 5,60년대의 풍경보다 몇 백 년은 더 거슬러 올라간 17-18세기의 老北京의 풍경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다루어졌던 내용을 보다 풍성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 결과를 통해 도출된 내용은 대학의 교양 수업이나 보다 대중적인 인문학 강좌에서도 충분히 흥미를 끌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 연구요약
  • 본 연구는 만주족이 통치하던 청 왕조가 들어선 전반기, 수도 북경의 변화된 모습을 살펴보고 당시 문인들의 글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老北京’의 풍경을 재현해 봄으로써, 독특한 시대상을 반영하는 역사와 문화 공간으로서의 도시의 성격을 살펴보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본 연구는 크게 다음 세 가지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첫째, 북경에 관하여 비교적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는 문헌들을 검토하여 ‘북경에 관한 기록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광서순천부지(光緒順天府志)≫의 통계에 따르면 북경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문헌은 121종이나 되지만,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저서는 10여 종 정도이다. 북경출판사에서 펴낸 ‘북경고적총서(北京古籍叢書)’ 시리즈에는 북경에 관해 기록하고 있는 중요한 문헌들이 거의 대부분 포함되어 있다. 대체로 한(漢) 왕조부터 원대(1271-1368)의 시기까지 북경에 관한 문헌 기록은 거의 대부분 유실되어 지금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존하는 최초의 북경에 대한 기록은 한대 이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연단자(燕丹子)≫를 들 수 있다. 원대 웅몽상(熊夢祥)의 ≪석진지(析津志)≫는 북경에 관해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는 지방지적인 성격을 띤 최초의 저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15세기 자금성(紫禁城)이 축조되고 명 왕조가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몇몇 전문적인 서적들이 출현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청조에 들어서면서 그러한 성격의 책들은 더욱 증가하였다. 필자는 먼저 근대를 맞이하기 이전인 전통 시기 수도 북경에 관한 기록의 역사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둘째, 만주족이 북경으로 진입하게 되면서 도시의 풍경에 어떤 변화가 발생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청조가 들어선 후 황실과 황궁, 귀족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내성(內城)에는 팔기군(八旗軍)이 거주하게 되었다. 병농일치의 팔기군이 북경에 거주하게 되면서 ××영방(營房), 두우록(頭牛錄), 이우록(二牛錄), 앙방장경호동(昂邦章京胡同) 등과 같은 독특한 거리 명칭들이 새롭게 생겨났다. 명대 외성은 전문(前門) 일대가 비교적 번잡했던 것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황량한 벌판이었다. 반면 청대에는 내성에서 쫓겨난 한족들이 외성으로 이주하면서 인구도 많아지고 번화한 새로운 거리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명대 공터였던 선무문(宣武門) 밖에 서횡가(西橫街), 중회강(中橫街), 동횡가(東橫街) 등의 거리가 생겨난 것이 그것이다. 명대에 나온 장작(張爵)의 ≪경사오성방항호동집(京師五城坊巷胡同集)≫, 장일규(蔣一葵)의 ≪장안객화(長安客話)≫, 우혁정(于奕正)․유동(劉侗)의 ≪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과 청대 장길오(張吉午)의 ≪강희순천부지(康熙順天府志)≫, 19세기에 나온 주일신(朱一新)의 ≪경사방항지고(京師坊巷志稿)≫ 등을 비교 검토하면 명조와는 달라진 청조 북경의 모습을 어느 정도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역사와 정치 공간으로서 도시의 성격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문인들의 저서에서 발견되는 수도 북경에 대한 기억과 재현된 풍경들을 통해서 당시 문화예술의 공간으로서의 도시의 성격을 살펴보고자 한다. 고염무(顧炎武)의 <창평산수기(昌平山水記)>, 주이존(朱彝尊)의 ≪일하구문(日下舊聞)≫, 오장원(吳長元)의 ≪신원식략(宸垣識略)≫, 대로(戴璐)의 ≪등음잡기(藤陰雜記)≫, 반영폐(潘榮陛)의 ≪제경세시기승(帝京歲時紀勝)≫ 등은 17-18세기 북경의 풍경을 그리고 있는 대표적인 문헌 자료들이다. 필자는 북경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는 이런 문인들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명사들의 저택과 그들의 교유 모습, 명절과 축제, 공연예술, 서점 등 다양한 도시 속 문화 예술의 풍경을 지도와 연계해서 재현해 보고자 한다.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도시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이런 논의를 통하여 만주족과 한족이 어우러져 살게 되면서 새롭게 나타난 청조 전반기 북경의 변화된 모습과 특정 시기를 반영하는 하나의 문화 공간으로서 도시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는 만주족이 통치하던 청 왕조가 들어선 전반기, 수도 북경의 변화된 모습을 살펴보고 당시 문인들의 글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老北京’의 풍경을 재현해 봄으로써, 독특한 시대상을 반영하는 역사와 문화 공간으로서의 도시의 성격을 살펴보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본 연구는 크게 다음 세 가지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첫째, 북경에 관하여 비교적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는 문헌들을 검토하여 ‘북경에 관한 기록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북경에 관하여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는 저서는 대략 10여 종이다. 현존하는 최초의 북경에 대한 기록은 한대 이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연단자(燕丹子)≫를 들 수 있다. 원대 웅몽상(熊夢祥)의 ≪석진지(析津志)≫는 북경에 관해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는 지방지적인 성격을 띤 최초의 저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15세기 자금성(紫禁城)이 축조되고 명 왕조가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몇몇 전문적인 서적들이 출현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청조에 들어서면서 그러한 성격의 책들은 더욱 증가하였다. 먼저 전통 시기 수도 ‘북경에 관한 기록의 역사’를 정리해 보았다.
    둘째, 만주족이 북경으로 진입하게 되면서 도시의 풍경에 어떤 변화가 발생하였는지 살펴보았다. 청조가 들어선 후 황실과 황궁, 귀족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내성(內城)에 팔기군(八旗軍)이 거주하게 되었다. 만주족과 팔기군이 북경에 거주하면서 독특한 거리 명칭들이 새롭게 생겨났고, 한족들이 외성으로 이주하면서 번화한 새로운 거리가 출현하였다. 명조와 달라진 청조 북경의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역사와 정치 공간으로서 도시의 성격을 그려보고자 하였다.
    셋째, 문인들의 저서에서 발견되는 수도 북경에 대한 기억과 재현된 풍경들을 통해서 당시 문화예술의 공간으로서의 도시의 성격을 살펴보았다. 주이존(朱彝尊)의 ≪일하구문(日下舊聞)≫, 대로(戴璐)의 ≪등음잡기(藤陰雜記)≫, 반영폐(潘榮陛)의 ≪제경세시기승(帝京歲時紀勝)≫ 등은 17-18세기 북경의 풍경을 그리고 있는 대표적인 문헌 자료들이다. 필자는 북경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는 이런 문인들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명사들의 저택과 그들의 교유 모습, 명절과 축제, 공연예술, 서점 등 다양한 도시 속 문화 예술의 풍경을 그려보았다.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도시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이런 논의를 통하여 만주족과 한족이 어우러져 살게 되면서 새롭게 나타난 청조 전반기 북경의 변화된 모습과 특정 시기를 반영하는 하나의 문화 공간으로서 도시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영문
  • This paper intended to understand various change of the Qing capital Beijing and to reproduce memory and images of Beijing in literary works. The Manchu conquered China in 1644 and ruled over for more than 260 years until 1911. The Manchurian entry into Beijing produced much change. I would like to approach and to regard the city Beijing as the space of history and culture-art in this paper. The outline of this paper is as follows:
    First, I tried to write the history of records about Beijing through examining about 10 reference books. Yandanzi(燕丹子) in pre Han(202 BC–AD 220) was the first full record about Beijing, and Xiong Mengxiang(熊夢祥)’s Xijinzhi(析津志) in Yuan dynasty was the first local paper and systematic record about Beijing. Yingleti(永樂帝) built Zijincheng(紫禁城) in the early 15th century, and transferred the capital from Nanjing to Beijing. Records about Beijing became more and more increasing since the 15th century.
    Second, I examined the changing profile of the city after the Manchu entering into Beijing. The Eight Banners(八旗軍) were stationed in inner Beijing castle to ensure safety for imperial family and aristocracy in the early Qing dynasty. On the other hand, the Han Chinese must to move to outer Beijing castle. In these circumstances, the Manchurian distinct street names and new busy streets appeared. I tried to look at the capital beijing as historical and political space in this chapter.
    Third, I attempted to grasp beijing’s various aspects as cultural and artistic space in this chapter. Many literary man recorded memory and images of Beijing in their works. For example, Zhu Yizun(朱彝尊)’s Rixiajiuwen(日下舊聞), Dai Lu(戴璐)’s Tengyinzaji(藤陰雜記), Pan Rongbi(潘榮陛)’s Dijingsuishijisheng(帝京歲時紀勝) etc were representative works. I tried to extract and reproduce poetry club, traditional holiday and festival, performing arts, celebrity mansions and popular bookshop etc in these works.
    This paper will help to catch how the capital Beijng changed, according as the Manchu and the Han lived together since 1644, furthermore, and help to approach and understand the city Beijing in the perspective of the humanitie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만주족이 통치하던 청 왕조가 들어선 전반기, 수도 북경의 변화된 모습을 살펴보고 당시 문인들의 글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老北京’의 풍경을 재현해 봄으로써, 독특한 시대상을 반영하는 역사와 문화 공간으로서의 도시의 성격을 살펴보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본 연구는 크게 다음 세 가지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하였다.
    첫째, 북경에 관하여 비교적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는 문헌들을 검토하여 ‘북경에 관한 기록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광서순천부지(光緒順天府志)≫의 통계에 따르면 북경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문헌은 121종이나 되지만,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저서는 10여 종 정도이다. 북경출판사에서 펴낸 ‘북경고적총서(北京古籍叢書)’ 시리즈에는 북경에 관해 기록하고 있는 중요한 문헌들이 거의 대부분 포함되어 있다. 대체로 한(漢) 왕조부터 원대(1271-1368)의 시기까지 북경에 관한 문헌 기록은 거의 대부분 유실되어 지금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존하는 최초의 북경에 대한 기록은 한대 이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연단자(燕丹子)≫를 들 수 있다. 원대 웅몽상(熊夢祥)의 ≪석진지(析津志)≫는 북경에 관해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는 지방지적인 성격을 띤 최초의 저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15세기 자금성(紫禁城)이 축조되고 명 왕조가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몇몇 전문적인 서적들이 출현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청조에 들어서면서 그러한 성격의 책들은 더욱 증가하였다. 필자는 먼저 근대를 맞이하기 이전인 전통 시기 수도 북경에 관한 기록의 역사를 정리해 보았다.
    둘째, 만주족이 북경으로 진입하게 되면서 도시의 풍경에 어떤 변화가 발생하였는지를 살펴보았다. 청조가 들어선 후 황실과 황궁, 귀족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내성(內城)에는 팔기군(八旗軍)이 거주하게 되었다. 병농일치의 팔기군이 북경에 거주하게 되면서 ××영방(營房), 두우록(頭牛錄), 이우록(二牛錄), 앙방장경호동(昂邦章京胡同) 등과 같은 독특한 거리 명칭들이 새롭게 생겨났다. 명대 외성은 전문(前門) 일대가 비교적 번잡했던 것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황량한 벌판이었다. 반면 청대에는 내성에서 쫓겨난 한족들이 외성으로 이주하면서 인구도 많아지고 번화한 새로운 거리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명대 공터였던 선무문(宣武門) 밖에 서횡가(西橫街), 중회강(中橫街), 동횡가(東橫街) 등의 거리가 생겨난 것이 그것이다. 명대에 나온 장작(張爵)의 ≪경사오성방항호동집(京師五城坊巷胡同集)≫, 장일규(蔣一葵)의 ≪장안객화(長安客話)≫, 우혁정(于奕正)․유동(劉侗)의 ≪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과 청대 장길오(張吉午)의 ≪강희순천부지(康熙順天府志)≫, 19세기에 나온 주일신(朱一新)의 ≪경사방항지고(京師坊巷志稿)≫ 등을 비교 검토하는 방식으로 명조와는 달라진 청조 북경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역사와 정치 공간으로서 도시의 성격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셋째, 문인들의 저서에서 발견되는 수도 북경에 대한 기억과 재현된 풍경들을 통해서 당시 문화예술의 공간으로서의 도시의 성격을 살펴보았다. 고염무(顧炎武)의 <창평산수기(昌平山水記)>, 주이존(朱彝尊)의 ≪일하구문(日下舊聞)≫, 오장원(吳長元)의 ≪신원식략(宸垣識略)≫, 대로(戴璐)의 ≪등음잡기(藤陰雜記)≫, 반영폐(潘榮陛)의 ≪제경세시기승(帝京歲時紀勝)≫ 등은 17-18세기 북경의 풍경을 그리고 있는 대표적인 문헌 자료들이다. 필자는 북경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는 이런 문인들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명사들의 저택과 그들의 교유 모습, 명절과 축제, 공연예술, 서점 등 다양한 도시 속 문화 예술의 풍경을 지도와 연계해서 재현하고자 하였다.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도시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이런 논의를 통하여 만주족과 한족이 어우러져 살게 되면서 새롭게 나타난 청조 전반기 북경의 변화된 모습과 특정 시기를 반영하는 하나의 문화 공간으로서 도시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1) 연구결과의 학문적 기여
    본 연구는 만주족이 통치하던 청조가 들어선 전반기, 수도 북경의 변화된 모습을 살펴보고 당시 문인들의 글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老北京’의 풍경을 재현해 봄으로써, 독특한 시대상을 반영하는 역사와 문화예술의 공간으로서 도시의 성격을 살펴보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본 연구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 역사, 지리, 문학, 공연 예술, 민속학, 도시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는 통합적인 연구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도시를 역사적 공간으로 파악하고 문화 예술적인 관점에서 도시를 파악하는 이러한 시도는 인문학의 경계를 확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본 연구의 첫 번째 학문적 기여로는 바로 이런 학제 간의 장벽과 경계를 허물고 인문학의 경계를 확장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둘째, 지금까지 ‘老北京’에 관한 연구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문화대혁명 시기(1966-1976)에 나타난 변화나 시기를 위로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20세기 전후에 거의 대부분의 연구가 집중되어 있었다. 연구가 그렇게 집중될 수 밖에 없었던 제일 큰 원인은 자료의 문제이다. 20세기를 전후해서는 외국인들이 남겨 놓은 기록과 사진,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발표된 자료 등 다양한 시청각, 문헌 자료들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그렇지만 19세기 전반기 정도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地方志나 筆記 여기저기에 산재되어 있는 자료를 긁어모아야 한다는 접근상의 어려움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老北京의 풍경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20세기를 전후하여 그 이후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7-18세기 老北京의 풍경을 다루고 있는 필자의 논의는 이런 측면에서 지금까지의 연구를 보완하고 내용을 풍부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명청 시기는 그 어떤 시기보다 조선과의 왕래와 교류가 빈번하던 시기였다. 특히 한국학 분야에서는 한일 교류 관계와 더불어 한중 교류 관계에 대한 연구를 상당히 인기있는 테마로써 중요한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朴趾源의 ≪熱河日記≫에서 나타난 것처럼 조선 사신들이 중국에 체류하며 보고 들은 다양한 경험에 대한 연구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17-18세기 老北京의 풍경을 다루고 있는 필자의 연구는 한중 교류 관계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에게도 어느 정도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는 흥미로운 내용이 될 것이다.
    (2) 연구결과의 교육적 기여
    우리는 현재 기술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그 변화 속도가 매우 빠른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기술 문명은 인간에게 많은 생활상의 편의를 제공해 주었지만, 기술 문명이 인간을 압도하게 되면서 소외감을 느낀 인간은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그리워하고 있다. 최근 KBS에서 방영된 바 있는 ‘인문학 콘서트’와 같은 프로그램을 비롯하여 문화관, 도서관 등에서 인문학 관련 프로그램들은 다투어 마련하는 것도 이런 현상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본 연구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 ‘老北京’의 다양한 풍경에 관한 것이다. 현재 관광업계에서도 현대화된 고층 빌딩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옛날의 향수와 문화를 느낄 수 있는 ‘베이징 후퉁 여행’ 같은 상품이 인기를 얻고 있다. 방송사에서 ‘올드 베이징’에 관해 다룬 다큐도 상당히 많은데, MBC에서 방영된 ‘인문기행중국-베이징의 方을 걷다’, EBS에서 방영된 ‘아시아 테마 기행-문화예술의 중심 베이징’, NHK에서 방영된 ‘아시아 고도이야기 제1편 뒷골목에 살아있는 황도(皇都) 중국 베이징(Beijing)’과 같은 것들이다. 본 연구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 이처럼 일반 대중들도 쉽게 흥미를 느낄 수 있는 老北京의 풍경에 관한 것이다. 본 연구가 다루고자 하는 老北京의 풍경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20세기 전후, 혹은 5,60년대의 풍경보다 몇 백 년은 더 거슬러 올라간 17-18세기의 老北京의 풍경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다루어졌던 내용을 보다 풍성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 결과를 통해 도출된 내용은 대학의 교양 수업이나 보다 대중적인 인문학 강좌에서도 충분히 흥미를 끌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 색인어
  • 만주족(滿洲族), 노북경(老北京), 도시공간, 자금성(紫禁城), 팔기(八旗), 후퉁(胡同), 문화공간, 문인, 청조(淸朝), 18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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