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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三韓一統意識과 ‘開國’ 인식
The Notion of “Three Hans are One”(三韓一統意識) and the Cognition about Beginning of Nation(開國) in Goryo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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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5S1A5A2A01011476
선정년도 2015 년
연구기간 1 년 (2015년 05월 01일 ~ 2016년 04월 30일)
연구책임자 윤경진
연구수행기관 경상국립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모든 국가는 선행한 국가에 대한 계승을 표방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한편, 동질의식을 확보하여 내적 통합의 이념적 기반을 마련한다. 이러한 이념을 통상 ‘역사계승의식’으로 부르고 있다. 한 국가의 역사계승의식을 이해하는 것은 해당 국가의 정체성을 확인함과 동시에 국가 운영의 방향을 가늠하는 매개가 된다. 이것은 단순한 명분에 머물 수도 있지만, 영토 문제처럼 현실 정책의 배경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한 국가의 전개 과정에서 여러 형태의 역사계승의식이 공존할 수 있고, 사안에 따라 강조되는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역사계승의식은 그 자체가 역사적 산물이자 시간에 따른 변화의 속성을 가지는 것이다. 고려의 역사계승의식에서도 이러한 원리는 그대로 관철되고 있다.
    그간 고려의 역사계승의식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었지만, 대개 고려의 정체성 및 북방 영토개척과 관련하여 고구려계승의식에 모아졌다. 특히 2000년대 중반 중국의 東北工程이 진행되면서 그에 대한 대응으로서 고구려와 고려의 역사적 연결성을 강조하는 연구가 활발해졌다. 이에 비해 고려 역사계승의식의 또 한 축인 ‘三韓一統意識’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실정이다.
    三韓一統意識은 三韓 내지 三國이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정치적 지향과 더불어 自國이 三韓을 一統하여 수립되었다는 의식을 포함한다. 삼한일통의식은 주로 신라 통일전쟁기, 혹은 중대 초기 역사의식으로 다루어졌다. 하지만 삼한일통의식이 사회적으로 전면 부각된 것은 나말려초였다. 이 시기 금석문에는 사회 분열에 따른 위기의식과 더불어 이를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는 ‘一統三韓’의 지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에 맞추어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一統三韓’의 실현으로 간주되었고, 태조 왕건은 역사적으로 ‘三韓을 一統한 군주’로 평가되었다. 따라서 삼한일통의식은 고려의 역사의식으로서 그 전개 양상과 의미에 대한 구체적인 탐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특히 고구려계승의식이나 신라계승의식은 정체성의 측면에서 나머지 국가를 배제하는 의미를 가진다. 반면 ‘통합’에 초점을 둔 삼한일통의식은 계승의 관점에서 보면 三韓의 범주에 포섭되는 모든 존재를 아우르는 이념으로 귀결된다. 삼한일통의식의 바탕에는 배타적 계승에 대한 부정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은 더 높아진다.
  • 기대효과
  • 본 연구는 신라 삼한일통의식에 대한 비판적 연구에 참고될 수 있다. 삼한일통의식이 9세기 중반에 성립된 것이라면, 응당 당시에 성립하게 된 배경과 그것이 당시 정치 사화에 미친 영향 등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신라 하대 정치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 풀어갈 과제이지만, 여기에는 역사계승의식의 정치적 함의에 대한 이해가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 본 연구는 그러한 접근의 방법론적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다.
    한편 고려시대 역사계승의식, 특히 삼한일통의식의 전개에 대한 연구의 출발점을 마련할 수 있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함께 확립된 삼한일통의식은 고려 일대에 걸쳐 유지되지만 그 내용과 사회적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각 시기마다 역사계승의식의 내용을 천착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본 연구는 그러한 작업을 본격적으로 도모하기 위한 기초 작업에 해당한다.
    본 연구의 성과는 사회적 측면에서도 기여하는 바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동안 통합을 통한 민족 형성의 전기로 주목된 것은 신라의 통일이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였고, 그 땅에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渤海가 건국되었다. 그럼에도 신라의 삼국 통일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는 핵심 요소가 바로 삼한일통의식이다. 그러나 삼한일통의식이 9세기 중반에 성립된 것이라고 보면, 이러한 평가는 상당히 후퇴할 수밖에 없다. 그에 상응하여 고려의 통일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현재의 우리 사회가 삼한일통의식에 입각한 통합의 가치를 설정한다고 할 때 그 준거는 응당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본 연구는 사회적 필요에 원용될 수 있는 삼한일통의식의 구체적인 내용을 산출하는 토대가 될 수 있다
  • 연구요약
  • 본 연구는 고려의 체제 이념으로서 삼한일통의식의 구체적인 내용을 그 준거가 된 후삼국 통일과 관련하여 살펴보려는 것이다. 내용의 초점은 太祖의 이념 및 정책을 통해 삼한일통의식의 지향을 확인하고, ‘開國’을 왕건의 즉위가 아닌 후삼국 통일을 준거로 인식하는 양상을 제시하는 데 있다.
    태조는 敎書와 訓要十條 등을 통해 ‘一統三韓’에 대한 그의 인식을 드러내었다. 즉위 교서에서 태조는 弓裔가 이루지 못한 海內의 겸병을 전망하였고, 태조 15년 諭示에서도 西京의 地力에 의지해 三韓을 一統하겠다는 지향을 보였다. 訓要十條에서도 三韓 山川의 陰佑에 힘입어 ‘一統三韓’의 大業을 이루었다고 평가하였다. 경종 때 金傅(경순왕)를 尙父로 책봉하는 글에도 ‘一統三韓’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후삼국 통일에 따라 책봉된 三韓功臣은 체제 통합의 이념으로서 삼한일통의식을 직접 구현하는 사례이다. 통상 창업주의 즉위에 공을 세운 사람들은 開國功臣으로 지칭되지만, 고려에서 태조즉위공신은 삼한공신에 포괄되었다. 이후 공신 후손 녹용과 관련된 법제에는 다양한 형태의 공신 칭호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삼한공신을 준거로 변용된 것들이다.
    고려의 ‘開國’에 대한 인식은 그 준거가 태조의 즉위가 아니라 후삼국 통일이었다. 태조의 즉위는 국왕 교체를 통해 高麗로 회귀한 것으로 통상적인 ‘開國’의 명분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에 후삼국 통일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태조-경종대 配享功臣 13명 중 11명에 ‘開國’ 칭호가 포함된 것은 성종 때 배향공신을 일괄 지정하면서 三韓功臣이었던 사람을 표시한 것이다.
    개국이 후삼국 통일을 지칭하는 가장 단적인 사례는 후삼국 통일로부터 기념을 산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고려 일대에 걸쳐 그 사례를 찾을 수 있는데, 숙종 원년 南京 건설을 건의한 金謂磾 상서에서 “開國 후 160여 년에 木覓壤에 도읍하라”는 도참을 인용한 것이 대표적이다. 숙종 원년은 후삼국을 통일한 해로부터 161년이 된다. 원 간섭기에 들어서면서 태조 즉위를 준거로 삼는 모습이 혼재되어 나타나기도 하지만, 고려말까지도 후삼국 통일을 기준으로 인식하는 기조는 유지되었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는 고려의 체제 이념으로서 삼한일통의식의 구체적인 내용을 그 준거가 된 후삼국 통일과 관련하여 살펴본 것이다. 내용의 초점은 太祖의 이념 및 정책을 통해 삼한일통의식의 지향을 확인하고, ‘開國’을 왕건의 즉위가 아닌 후삼국 통일을 준거로 인식하는 양상을 제시하는 데 있다.
    태조는 敎書와 訓要十條 등을 통해 ‘一統三韓’에 대한 그의 인식을 드러내었다. 즉위 교서에서 태조는 弓裔가 이루지 못한 海內의 겸병을 전망하였고, 태조 15년 諭示에서도 西京의 地力에 의지해 三韓을 一統하겠다는 지향을 보였다. 訓要十條에서도 三韓 山川의 陰佑에 힘입어 ‘一統三韓’의 大業을 이루었다고 평가하였다. 경종 때 金傅(경순왕)를 尙父로 책봉하는 글에도 ‘一統三韓’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후삼국 통일에 따라 책봉된 三韓功臣은 체제 통합의 이념으로서 삼한일통의식을 직접 구현하는 사례이다. 통상 창업주의 즉위에 공을 세운 사람들은 開國功臣으로 지칭되지만, 고려에서 태조즉위공신은 삼한공신에 포괄되었다. 이후 공신 후손 녹용과 관련된 법제에는 다양한 형태의 공신 칭호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삼한공신을 준거로 변용된 것들이다.
    고려의 ‘開國’에 대한 인식은 그 준거가 태조의 즉위가 아니라 후삼국 통일이었다. 태조의 즉위는 국왕 교체를 통해 高麗로 회귀한 것으로 통상적인 ‘開國’의 명분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에 후삼국 통일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태조-경종대 配享功臣 13명 중 11명에 ‘開國’ 칭호가 포함된 것은 성종 때 배향공신을 일괄 지정하면서 三韓功臣이었던 사람을 표시한 것이다.
    개국이 후삼국 통일을 지칭하는 가장 단적인 사례는 후삼국 통일로부터 기념을 산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고려 일대에 걸쳐 그 사례를 찾을 수 있는데, 숙종 원년 南京 건설을 건의한 金謂磾 상서에서 “開國 후 160여 년에 木覓壤에 도읍하라”는 도참을 인용한 것이 대표적이다. 숙종 원년은 후삼국을 통일한 해로부터 161년이 된다. 원 간섭기에 들어서면서 태조 즉위를 준거로 삼는 모습이 혼재되어 나타나기도 하지만, 고려말까지도 후삼국 통일을 기준으로 인식하는 기조는 유지되었다.
  • 영문
  • Examined in this study is a historical fact that the term “Foundation of the Country(‘開國’),” during the Goryeo period, actually referred to the unification of the Later three dynasties(後三國), instead of Founder king Taejo(太祖) Wang-Geon(王建)’s enthronement.
    Goryeo proclaimed that it was a successor dynasty to Goguryeo, and endeavored to unite the later three dynasties. Its operation system and institutions were based upon the very notion that three Hans had been one all the time. Vassals who helped Wang Geon and contributed to his enthronement were never called as “Meritorious vassals for the foundation of the country(開國功臣),” but were instead included in the “Three Hans’ Meritorious vassals(三韓功臣),” which referred to vassals who contributed to the unification of the later three dynasties.
    It was the same with the term “Foundation of the Country(‘開國’),” which we can find from many Goryeo records, as they also referred to the unification of the country, instead of the founder king’s rise to the throne. Goryeo also perceived the beginning point of the dynasty as the year of its unification. In the ending days of Goryeo, a new view considering the starting point of the dynasty to have been Wang Geon’s year of enthronement slowly began to prevail, yet during the better part of the entire Goryeo period, unification of the peninsula was continuously considered as a much more important and definitive marker. Founder king Taejo was also defined as “The King who reunited(一統) the Three Hans(三韓).”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이 연구는 고려의 ‘開國’이 태조의 즉위보다 후삼국 통일을 가리키는 말로 인식되었음을 밝힌 것이다.
    고려는 고구려 계승에서 출발했지만 이후 후삼국 통일을 과제로 삼고 있었고, 통일 후에도 三韓一統意識에 입각한 체제 운영을 도모하였다. 태조의 즉위를 도운 공신은 開國功臣으로 칭해지지 않고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운 三韓功臣에 포함되었다. 삼한공신은 이후 공신 책봉의 준거가 되었다.
    고려시대 기록에 보이는 ‘개국’ 용어도 대개 후삼국 통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또한 고려는 자국의 역사를 산정하는 기점을 후삼국 통일에로 잡으면서 이를 ‘개국’으로 인식하였다. 고려말에는 태조 즉위부터 계산하는 인식도 나타나지만, 고려 일대에 걸쳐 후삼국 통일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더 일반적이었다. 태조 또한 ‘三韓을 一統한 군주’로 평가되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먼저 본 연구 결과는 유관 분야의 연구에 토대를 제공한다. 우선 신라 삼한일통의식에 대한 비판적 연구에 참고할 것이다. 삼한일통의식이 9세기 중반에 성립된 것이라면, 응당 당시에 성립하게 된 배경과 그것이 당시 정치 사화에 미친 영향 등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신라 하대 정치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 풀어갈 과제이지만, 여기에는 역사계승의식의 정치적 함의에 대한 이해가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 본 연구는 그러한 접근의 방법론적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다.
    한편 고려시대 역사계승의식, 특히 삼한일통의식의 전개에 대한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을 것이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함께 확립된 삼한일통의식은 고려 일대에 걸쳐 유지되지만 그 내용과 사회적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각 시기마다 역사계승의식의 내용을 천착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본 연구는 그러한 작업을 본격적으로 도모하기 위한 기초 작업에 해당한다.
    본 연구의 성과는 사회적 측면에서도 활용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 그동안 통합을 통한 민족 형성의 전기로 주목된 것은 신라의 통일이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였고, 그 땅에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渤海가 건국되었다. 그럼에도 신라의 삼국 통일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는 핵심 요소가 바로 삼한일통의식이다. 그러나 삼한일통의식이 9세기 중반에 성립된 것이라고 보면, 이러한 평가는 상당히 후퇴할 수밖에 없다. 그에 상응하여 고려의 통일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현재의 우리 사회가 삼한일통의식에 입각한 통합의 가치를 설정한다고 할 때 그 준거는 응당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본 연구는 사회적 필요에 원용될 수 있는 삼한일통의식의 구체적인 내용을 산출하는 토대가 될 수 있다
  • 색인어
  • 三韓一統意識), 三韓功臣, 太祖, 開國, 開國功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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