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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원대 운남과 서남방 변경지역간의 네트워크
The Network around the Southwestern Border of Yunnan province during the Yuan Dynasty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5S1A5A2A01014738
선정년도 2015 년
연구기간 2 년 (2015년 05월 01일 ~ 2017년 04월 30일)
연구책임자 배숙희
연구수행기관 홍익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운남지역은 중국의 서남부에 위치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미얀마, 남쪽은 라오스, 베트남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귀주성과 광서장족자치구와 경계하고, 북쪽으로는 사천성, 서북쪽으로는 서장자치구와 연결되어 있다. 운남의 지리적인 위치는 특수하여, 중국과 동남아시아, 남아시아의 3대 구역으로 이어지는 위치에 있다.
    특히 원대는 남조 대리국으로 약 500년 가까이 독립되어 있던 운남지역을 통치하에 넣었으므로 서남방 변경정책과 인접국으로의 영토 확장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원나라가 운남행성을 설치한 이후에도 서남쪽 변경지역에 있던 제만들은 反元하였으므로 원나라는 운남행성을 통해 諸蠻들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원나라가 대리 서쪽의 금치 제만을 어떻게 초유해 나가고, 제만은 또한 어떻게 귀부해 오는지, 緬國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운남행성이나 운남왕은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는 중요한 문제이므로 제대로 규명하고자 한다. 운남행성의 관료(愛魯, 忽辛, 나시르 딘, 에센 테무르 등)로서 征緬과 관련된 인물들의 역할과 운남왕간의 길항관계, 그리고 변경지역의 충돌이 이 경계지역과 경계민의 생활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는 변경지역을 한계와 가능성이 동시에 공존하는 역동적인 장소로 인식하고 중원지대에 비해서 주변부인 서남 변경지역에서 새로운 제도가 실시(이를테면 土司제도 등)되는 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한다. 물론 행성제도하에서 실시된 토관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도 본 연구의 중요 검토 문제중의 하나이다.
    본 연구에서는 또한 원나라와 서남 변경 주변국가간의 교류를 살펴보고자 하는데 원나라는 征緬을 위한 관료기구를 설치하고(이를테면 征緬行省을 설치하였는데 후에 면중서성, 군민부, 총관부를 설치), 이어 緬國과 경계에 있던 八百媳婦國에 대한 조처 및 인접국인 老告에 대한 일련의 정책 등은 오늘날 운남을 중심으로 한 인접국에 대한 정책에도 시사점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원나라 통치하로 들어간 지역들(자발적인 귀부와 강제적인 정벌을 다 포함)에 土官을 설치하여 통치하고, 한편으로 역참을 설치하였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원나라의 동남아 국가에 대한 전쟁의 결과(실패 측면을 강조)만 가지고 소극적으로 평가했지만 본 연구에서는 그 과정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서 좀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이들 지역에 설치된 토사제도가 향후 중국의 토사제도의 원류가 됨을 강조할 계획이다. 특히, 이전 송대까지는 서남방지역과 직접적인 교류보다는 대리국이 緬國(중국 사적에서는 蒲甘國이라 칭해짐)과 교류하였기 때문에 중원왕조와는 소원한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몽골이 대리국을 멸망시킴으로서 서남방정책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원나라가 운남행성을 중심으로 한 서남변경 국가와의 정복전은 실제로 운남행성의 영역 확대를 가져왔음은 물론이고 인접국과의 국제 관계를 변화시켰으며 이들 지역에 토관이 설치되면서 원나라의 통제하로 들어갔다. 당송시대 기미정책과 달리 원대는 소수민족 지역도 括戶와 繳稅 등에서 내지지역과 동일하게 하였다. 토관제도는 당송의 기미정책에 비해 직접 통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변경지역의 토사들은 대체로 當地 통치자들이 주동적으로 내속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토사의 수량이 많고 분포 범위가 넓고 沿襲 시간이 비교적 길다. 토사의 설치, 관리 및 각 토사의 정치적인 성향과 귀속은 원나라의 서남변경과 주변국간의 관계에서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문제의 연구는 중국 서남변경사, 중국과 서남방 주변국의 관계사 연구를 활성화시키는데도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기존의 중국학계에서는 토사 연구의 유래가 오래되어 연구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토사제도 연구가 대체로 중국 정치제도사의 범주에 국한되어 있었을 뿐 운남 변경지역 토사제도에 주목하여 중국과 주변국간의 관계까지 범위를 넓혀 토사제도의 특수성과 중국과 주변국간의 관계에서의 작용은 주목하지 못했다. 본 연구에서는 오늘날의 태국 북부지역, 미얀마 북부지역, 라오스 북부지역의 변경지역 토사를 연구함으로서 원나라와 서남방 관련국간의 교류를 살펴보고자 한다.
  • 기대효과
  • 본 연구를 통해 국내에 연구가 미비한 중국 서남방 변경지역과 인접국가가 원대에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원나라의 征緬戰을 통해 운남지역의 행성제와 종왕간의 관계를 재고해 보고, 경계지역과 경계민의 생활에 어떠한 변화가 오게 되는지도 살펴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연구계획대로 진행이 된다면 다음과 같은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원대에 운남지역을 중심으로 대리지역을 지나서 서남방 변경에 위치한 金齒지역과 인접국 緬國, 八白媳婦國, 老告 등과 정복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諸蠻(종족의 구성을 포함하여)을 어떻게 초유하는 정책을 펴는지? 또 제만은 어떻게 귀부해 오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필요한 관료 기구를 설치하고 통치하는 과정을 통해(征緬을 위한 기구, 변경지역을 정복한 후 土官을 설치하여 통치) 원나라의 서남방 변경 정책과 인접국의 관련성을 밝힐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둘째, 기존의 동남아시아 연구에서 비교적 강조되어 온 원나라의 동남아 정복전의 실패라는 결과론적 관점에서 벗어나 운남에서 육로를 통한 인접국가의 진출과 교류의 중요성과 가능성을 재차 확인하고 중국내지에서 실행된 토사제도와 변경지역의 토사제도를 비교해 보고 그 특징을 나름대로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고려와 유사하게 六事가 요구되었던 安南(베트남) 연구 등의 후속 연구를 끌어내어 원나라의 정복전을 재평가할 수 있다.
    셋째, 중국과 경계에 있는 緬國 등의 인접국의 역사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그동안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중세 중국과 인접국간의 문화교류를 심도있게 이해 할 수 있다. 특히, 그동안 동양사 교육에서 중원 중심의 편중된 시각이나 내용을 보충하여 원나라와 동시대에 있었던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문화, 중국과의 관계를 대학에서 교육하여 안목을 넓힘은 물론이고 이러한 연구성과를 출판하여 일반인에게도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
    넷째, 원나라의 다양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소수민족 지역의 통치에도 반영되어 이전 왕조보다 제도의 진전이 있었으며 원나라의 서남방 변경지역의 통치는 오늘날 중국에서 주장하고 있는 번속이론과는 차이가 있음을 발힐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 연구요약
  • 金齒는 白夷의 별칭으로 지금의 다이족(傣族)의 선민이다. “金齒”라는 명칭은 “用金套包牙齒”에서 기원하는데 후에 종족의 명칭이 되었다. 지명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지금의 운남 서남부의 광대한 지역이다. 《원사》 지리지에 의하면, 금치등처선무사는 대리지역 서남에 위치하고, 서쪽으로 緬國과 접하며, 그 서쪽에 土蠻이 무릇 8종이라 하였다. 그 중에서 팔백식부의 白夷는 남부 변경지역에 聚居하였다. 금치지역이 중요한 이유는 이처럼 이 지역을 경계로 緬國, 八百媳婦國, 老告와 국경을 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나라의 金齒 지역에 대한 정책과 통치는 운남의 어느 지역보다도 중요한 거점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몽골제국이 1254년 대리를 평정한 후 백이 금치등의 제만을 계속 정벌하고, 운남행성이 건립되기 이전인 중통 원년에 금치 백이의 제 추장이 자제를 보내 조공하자 중통 2년에 永昌에 金齒등처선무사를 설치하여 통치하였다. 지원 5년 금치 제만 이몽골이 면국으로 들어가는 길을 막았으므로 원나라에서는 계속 제만에 대한 초유정책을 실시하였다. 운남행성 평장정사인 사이드아잘이 諸蠻을 통치하여 표면적으로 보면 원나라가 운남행성을 통치한 듯하나 운남제부는 원나라가 통치한 기타지역처럼 훈복하지 않았다. 지원 14년 干額 총관 阿禾가 緬國을 배반하고 원나라에 귀부하자 면왕이 출병하여 간액을 침략하였다. 아화가 원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大理路의 몽고천호 忽都, 대리총관 信苴日이 군사를 동원하여 도와주었는데 이를 元緬전쟁이라 한다. 처음에는 원나라가 불리하였는데 怯烈이 大理에 와서 충분한 준비를 하여 승리로 이끌었고, 이를 계기로 운남행성좌우사원외랑으로 승진하였다. 운남행성에서는 지원 15년 10월 운남제선위사도원수 納速刺丁을 보내 몽고, 釁, 僰, 머시에군 3천 8백40여명이 10월에 다시 征緬하여 “3만5천200戶”를 招降하였다. 이에 이르러, 모든 금치지역이 원나라의 판도안으로 들어왔다. 지원 16년 忙古帶가 정면전에서 돌아와서 副都元帥로 옮겨졌으며 1284년에 망고대가 운남도원수가 되어 緬夷를 공격하여 후에 대리금치등처선위사도원수가 되었다. 대리금치등처선위사사도원수부는 원나라가 남방에 설치가 가장 이르고, 존속기간이 가장 길고 통치 구역이 가장 넓고 행정 관할 임무가 중요한 변방지역의 선위사라 할 수 있다. 지원 19년 조정에서는 다시 면국의 일을 의논하여 제왕 相吾[答]兒가 여러 장수를 이끌고 征緬하게 하였다. 정면전이 벌어지고 있을 즈음에 마르코 폴로가 운남에 出使하였을 것으로 보기 때문에 마르코 폴로의 기록을 통해 정면전이나 금치지역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원 24년 원나라 군대가 파간에 진군하여 “喪師가 7천여명이나 되었으며, 緬國이 비로소 평정되어 이에 해마다 방물을 바치기로 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운남왕(애노), 제왕(상오답아, 친왕 합합) 그리고 운남행성 관원(愛魯, 忽辛, 나시르 딘, 에센 테무르) 등이 협력하여 금치등 제만을 초유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보통 군사적인 사무는 운남행성이 처리하였다. 그러므로 대 남방과 관련된 전쟁의 임무는 운남지역에서 처리하고 각 민족에서 군대를 징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원군의 몇 차례 정면전쟁으로 243년간 지속된 파간왕조가 몰락하여 몇몇 掸邦으로 되거나 중국에 신복하였다. 운남행성의 소재지가 中慶으로 옮겨가고 나서도 대리지역은 지리상의 잇점으로 인하여 서남 변방을 통제하는데 유리하였으며, 운남왕이 대리에 거주한 것도 서남방 지역의 제만을 통제하고 변경 인접국으로의 영토확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원나라는 중국 서남방 변경지역에서 시행한 토사제도를 면국경내까지 시행, 후지원 4년(1338) 원 조정은 면국 북부에 邦牙등처선위사도원수부를 설치하였다가 지정 2년(1242년에 폐지하였다. 雲遠路군민총관부, 蒙光路군민부, 木邦路군민부, 木朵路 등 토사의 부서를 설립하여 면국에 대해 통치하였다. 이렇게 하여 지금의 保山, 德宏에서 大盈江을 따라 이라와티강과 접하는 수륙 교통 노선을 개척하여 동남아의 관계가 더욱 밀접해지게 되었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원나라와 면국간의 충돌은 원면 여정중 중요한 금치지역의 추장에 의해 야기되었다. 원면전의 구체적인 경과를 살펴보았는데 정면전이 벌어지고 있을 즈음에 마르코 폴로가 금치지역에 출사하였으므로 폴로의 기록을 통해 금치지역의 정보를 활용하였지만 정확하지 않은 부분도 밝힐 수 있었다. 정면전의 루트는 면국과의 왕래에서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가 되었다. 서남으로 영역이 확대되고 행정기구가 개편되어 영창부, 등총부를 비롯하여 路의 설치로 영역이 확대되었다. 후에 정면전을 통해 木邦路 등 10 개의 로가 면국 경내에 신설되었다. 금치 등 제만을 포함한 운남지역 뿐만 아니라 정면전의 결과 면국이 원나라의 통제에 들어가고 나서, 상공된 금은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금치 등 제만의 변경지역엔 정면전이나 기타 여러 이유로 유우하는 여러 종족(백족, 몽골인, 회회인, 서하인, 한인 등)의 장수들과 현지의 토관이 혼거하였다. 특히, 금치 등 제만지역에 설치된 안무사, 선무사, 초토사, 각 로의 총관, 선위사 등엔 토관이 주로 임용되었는데 이들 토관을 분석한 결과, 금치 등 제만지역의 토관 성명과 承襲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정면전에 참가한 장수의 성명, 종족과 정면전 때의 직함, 전쟁이 끝난 후 관직의 변천, 운남에 정착했는지의 여부도 중요하므로 이에 대한 분석도 하였다. 대리국을 정벌할 때나 운남행성이 설치될 때, 원나라의 정책에 의해 운남으로 이주해 와서 정착하였는데 운남에서 임직하고 있으면서 금치 등 제만의 정벌이나 정면전과 안남의 경략에 참여하고 전쟁에 끝난 뒤에 그 공적으로 승진하였으며 혹자는 운남을 떠나지 않고 정착하였다.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중엽에 버간왕조가 점차 쇠퇴하고 경내의 샨족, 맹족 등 민족의 수령의 세력이 점차 커져서 중앙왕조에 대한 이심력도 증가하였다. 1271년 쿠빌라이는 면국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273년 다시 사신을 보냈으나 처형당하였으므로 江頭城(지금의 바모)를 공점하여 정면전이 시작되었다. 이 후에도 몇차례 정면전이 발생하여 버간왕조가 멸망하였는데 기존엔 원과의 전쟁이 멸망원인으로 강조하였는데, 내란도 중요한 요인에 속한다. 나라띠하빠띠의 아들 쪼소와가 1289년에 버간으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버간이 혼란해지자 샨족 삼형제가 미엔사잉(木連城), 멕커야(米加耶), 삔레(賓里)를 차지하였다. 쪼소와는 이들이 점령한 지역을 인정해주고 1297년 1월에 몽골군에 복속하여 성종은 쪼소와의 작은 아들 소닛(1298-1312)을 왕위에 세웠다. 1303년에 몽골이 철수하고 띠하뚜는 1309년에 스스로 왕이 되어 삔야(邦牙)에 왕실을 짓고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원면간의 사신왕래는 면국에서 23차례 원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원나라는 7차례 면국에 사신을 보냈다. 쪼소와의 아들이 후계자가 되자 친아들 아띤크야의 반발을 사 스가잉에 새로운 왕국을 열었다. 1331년 우즈나가 통치하던 삔야에 홍수가 나 1364년 삔야왕이 샨족과 연대하여 스가잉을 공격하고 미얀마 북부는 샨족에게로 넘어갔다. 면국이 이처럼 분열되어 있었으므로 원나라와 사신왕래가 이루어졌던 나라는 번간이기는 하겠지만 다른 두 나라간의 관계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측의 기록엔 면전이라고만 되어있지 이러한 변화까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좀더 자료의 보충이 이루어져야 한다. 대리에서 버간왕조까지 50일여정이며 영창, 등총,간애,건도국,강두성이 있다. 팔백식부국은 치앙마이에 독립된 왕국 난나국으로 원명시기의 문헌에서는 八百媳婦國이라 기록되어 있다. 대덕 초년에 팔백식부국이 자주 운남변경을 공격하여 대덕 5년에 팔백식부를 정복하였으나 팔백식부국에 도달하지 않아 토관 타절, 송융제의 반란에 직면하여 실패한 후 성종이 정복전을 일으키지 않고 수성의 군주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13세기말 망래왕이 원교근공책을 써서 남방의 수코타이와 연합하여 버간과 함께 역량을 집중하여 1292년에 여왕국을 병합하고, 1338년에 부요국을 점령하여 중국 서남부에서 강국이 되었다. 팔백식부국과 교류를 살펴보면, 인종 황경 원년에 팔백식부국에서 사신과 꼬끼리 방물을 보내 교류가 시작되었다. 태정 4년에 팔백국왕이 두 차례나 중국을 방문하여 원나라의 책봉을 받고자 하였다. 원나라는 蒙慶선위사도원수부를 설치하여 선위사도원수에 임명하였다. 8년이 지나 명칭을 팔백선위사도원수부로 고치고 비단과 전폐 등을 주어 우의를 표시하였다. 1312-1330년까지 팔백국은 8차례 입공하여 쌍방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수코타이 왕조가 태족이 건립한 첫 번째 정권이라 생각했지만 그 이전에 이미 치앙마이에 팔백식부국등 태족이 건립한 나라가 있었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외에 처리(현 시쐉바나)와 노고 지역까지도 원나라의 통치범위가 확대되었으며 군민총관부를 두어 통치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 원나라와 윈난 지역의 금치 등과, 면국 북부, 팔백식부국, 수코타이, 처리, 노고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영문
  • Jinchi and the other ethnic groups dwelled in Myanmar and the border areas in the south-western region of Yunnam. They were important political forces. Since the posture of Jinchi on various matters in regional and national levels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relation of Yuan dynasty with Myanmar. Yuan exerted serious efforts through various policies to expand its influences to the southwestern region. Yuan considered geopolitical positions of the ethnic groups including jinchi and the increases in their population, debating the administrative. Status of their dwelling districts dian to lu. Yuan also established jinmincongguanfu in the districts, appointing Zhangling, leaders of the ethnic groups to the government positions as Dalugaci or Zhfushi in the Chongguanfu.
    As the southwestern borderland gained importance during the Yuan period the influential area of the border land was changed from Dali to Yongchang. The persons including Dalijincidengchuxuanweishi who were appointed as Tuguan were usually, in many cases, avorigines, Boren who had served as civil officials in Daliguo. As the Yuan’s need to conquer Myanmar grew greater even constructed to pass through strategic areas of military importance in the land of Jinchi and other ethnic groups. This could be arrtibuted for the gaining importance of Yongchang area.
    To effectively, govern the vast extended land the Yuan dynasty established servant, Xuanweishi, Anfushi, Chutaoshi and Chongguanfu in Xuanweishiyuanshoufu, and also quite a few Tuguan. It was not unusual to appoint the surrendered leaders of the various ethnic groups as Tuguan, Zhangling, the leaders of various races who participated in Zhaoyu and Zhengmianzhan were also as Tuguan, Anong Tuguan there were variety of races, such as Dali aborigines Boren, Muselms, Xixia, Mongols and even Hanren. Tuguan from servant and zhangling of these various races, in some cases moved to others to their descendants.
    The Tugan system enforced in the south western border lands during the Yuan period was in some aspect, transitional system with a trait of the Liuguan system. The various races moved to the borderlands also showed a tendency to be assimilated with local people. while the changes due to the immigration policies were important also local power was confirmed to exert a great influence in introducing a new system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원나라와 면국간의 충돌은 원면의 여정에서 중요한 금치지역의 추장에 의해 야기되었다. 원면전의 경과를 살펴보았는데 정면전이 벌어지고 있을 즈음에 마르코 폴로가 금치지역에 출사하였으므로 폴로의 기록을 통해 금치지역의 정보를 활용하였다. 정면전의 루트는 면국과의 왕래에서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가 되었다. 서남으로 영역이 확대되고 행정기구가 개편되어 영창부, 등총부를 비롯하여 路의 설치로 영역이 확대되었다. 후에 정면전을 통해 木邦路 등 10 개의 로가 면국 경내에 신설되었다. 금치 등 제만을 포함한 운남지역 뿐만 아니라 정면전의 결과 면국이 원나라의 통제에 들어가고 나서, 상공된 금은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금치 등 제만의 변경지역엔 정면전이나 기타 여러 이유로 유우하는 여러 종족(백족, 몽골인, 회회인, 서하인, 한인 등)의 장수들과 현지의 토관이 혼거하였다. 특히, 금치 등 제만지역에 설치된 안무사, 선무사, 초토사, 각 로의 총관, 선위사 등엔 토관이 주로 임용되었는데 이들 토관을 분석한 결과, 금치 등 제만지역의 토관 성명과 承襲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정면전에 참가한 장수의 성명, 종족과 정면전 때의 직함, 전쟁이 끝난 후 관직의 변천, 운남에 정착했는지의 여부도 중요하므로 이에 대한 분석도 하였다. 대리국을 정벌할 때나 운남행성이 설치될 때, 원나라의 정책에 의해 운남으로 이주해 와서 정착하였는데 운남에서 임직하고 있으면서 금치 등 제만의 정벌이나 정면전과 안남의 경략에 참여하고 전쟁에 끝난 뒤에 그 공적으로 승진하였으며 혹자는 운남을 떠나지 않고 정착하였다.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중엽에 버간왕조가 점차 쇠퇴하고 경내의 샨족, 맹족 등 민족의 수령의 세력이 점차 커져서 중앙왕조에 대한 이심력도 증가하였다. 1271년 쿠빌라는 면국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273년 다시 사신을 보냈으나 처형당하였으므로 江頭城(지금의 바모)를 공점하여 정면전이 시작되었다. 이 후에도 몇차례 정면전이 발생하여 버간왕조가 멸망하였는데 기존엔 원과의 전쟁이 멸망원인으로 강조하였는데, 내란도 중요한 요인에 속한다. 나라띠하빠띠의 아들 쪼소와가 1289년에 버간으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나라가 혼란해지자 샨족 삼형제가 미엔사잉(木連城), 멕커야(米加耶), 삔레(賓里)를 차지하였다. 쪼소와는 이들이 점령한 지역을 인정해주고 1297년 1월에 몽골군에 복속하여 성종은 쪼소와의 작은 아들 소닛(1298-1312)을 왕위에 세웠다. 1303년에 몽골이 철수하고 띠하뚜는 1309년에 스스로 왕이 되어 삔야(邦牙)에 왕실을 짓고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원면간의 사신왕래는 면국에서 23차례 원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원나라는 7차례 면국에 사신을 보냈다. 쪼소와의 아들이 후계자가 되자 친아들 아띤크야의 반발을 사 스가잉에 새로운 왕국을 열었다. 1331년 우즈나가 통치하던 삔야에 홍수가 나 1364년 삔야왕이 샨족과 연대하여 스가잉을 공격하고 미얀마 북부는 샨족에게로 넘어갔다. 원나라와 사신왕래가 이루어졌던 나라는 번간이기는 하겠지만 다른 두 나라간의 관계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측의 기록엔 면전이라고만 되어있지 이러한 변화까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좀더 자료의 보충이 이루어져야 한다. 대리에서 버간왕조까지 50일여정이며 영창, 등총,간애,건도국,강두성이 있다. 팔백식부국은 치앙마이에 독립된 왕국 난나국이 출현했는데 원명시기의 문헌에서는 八百媳婦國이라 기록되어 있다. 대덕 초년에 팔백식부국이 자주 운남변경을 공격하여 대덕 5년에 팔백식부를 정복하였으나 팔백식부국에 도달하지 않아 토관 타절, 송융제의 반란에 직면하여 실패한 후 성종이 정복전을 일으키지 않고 수성의 군주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13세기말 망래왕이 원교근공책을 써서 남방의 수코타이와 연합하여 면전의 버간과 함께 역량을 집중하여 1292년에 여왕국을 병탄하고, 1338년에 부요국을 점령하여 중국 서남부에서 강국이 되었다. 팔백식부국과 원나라간의 교류를 살펴보면, 인종 황경 원년에 팔백식부국에서 사신과 꼬끼리 방물을 보내 원과 교류하게 되었다. 태정 4년에 팔백국왕이 두 차례나 중국을 방문하여 원나라의 책봉을 받고자 하였다. 원나라는 蒙慶선위사도원수부를 설치하여 선위사도원수에 임명하였다. 8년이 지나 명칭을 팔백선위사도원수부로 고치고 비단과 전폐 등을 주어 우의를 표시하였다. 1312-1330년까지 팔백국은 8차례 입공하여 쌍방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수코타이 왕조가 태족이 건립한 첫 번째 정권이라 생각했지만 그 이전에 이미 치앙마이에 팔백식부국등 태족이 건립한 나라가 있었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외에 처리(현 시쐉바나)와 노고 지역까지도 원나라의 통치범위가 확대되었으며 군민총관부를 두어 통치하였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를 통해 국내에 연구가 미비한 중국 서남방 변경지역과 인접국가
    (미얀마북부, 오늘날의 태국 일부, 라오스 일부)가 원대에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네트워크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는 남은 과제이지만 본 연구는 경계를 초월하는 공통적인 요소가 있음을 숙지할 수 있었다.(예를들면 불교문화 등) 본 연구결과는 첫째, 원대에 운남지역을 중심으로 서남방 변경에 위치한 金齒지역과 인접국 緬國, 八白媳婦國, 老告 등을 정복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諸蠻(종족의 구성을 포함하여)과 전쟁이나 협상을 통해 왕래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필요한 관료 기구를 설치하고 통치하는 과정을 통해(征緬을 위한 기구, 변경지역을 정복한 후 土官을 설치하여 통치) 원나라의 서남방 변경 정책과 인접국의 관련 정책이 어느정도 밝혀졌다고 생각된다. 둘째, 기존의 동남아시아 연구에서 비교적 강조되어 온 원나라의 동남아 정복전의 실패라는 결과론적 관점에서 벗어나 운남에서 육로나 수로를 통한 인접국가의 진출과 교류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으며 수코타이의 전사인 팔백식부국의 존재를 어느정도 밝혔으며 원나라와의 교류까지도 살펴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었고 또한 安南(베트남)을 비롯한 후속연구를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셋째, 중국과 경계에 있는 미얀마 북부, 태국의 일부 등 인접국의 역사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중국과 인접국간의 문화교류를 심도있게 이해 할 수 있었다. 특히, 그동안 동양사 교육에서 중원 중심의 편중된 시각이나 내용을 보충하여 원나라와 동시대에 있었던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문화, 중국과의 관계를 대학에서 교육하여 안목을 넓힘은 물론이고 이러한 연구성과를 출판하여 일반인에게도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 연구를 진행한 후, 애초에 제기하지는 않았지만 연구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새로운 측면도 고려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⓵ 명대초까지 연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명대에 중국과 팔백식부국의 관계는 더 밀접해져 홍무 21년에서 정덕 8년(1388-1513) 까지 팔백에서 중국에 사절을 파견한 것이 33차례, 명나라가 4차례 파견하였다. 명사에서 팔백을 운남토사조에 넣었고 외국전에 넣지 않은 것은 팔백이 이미 명나라의 “속국”인 것으로 보인다. 명나라는 四夷館에 팔백식부국관을 설립하여 蘭那泰문을 번역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 가정 간(1522-1566)에 면전에 겸병되고 刀氏가 景線으로 피하여 小八百이라 하였다. 치앙마이가 면전에 의해 오랫동안 통치되어졌고 후에 1773년에 치앙마이를 수복하였다. 이 후에 치앙마이는 전쟁으로 파괴되고 방콕 왕조 초기에 치앙마이가 비로소 태국의 판도에 들어오게 된다.
    ⓶ 여말선초의 토관제와 비교할 필요성이 있다. 조선후기에 유형원은 토관의 혁파(폐지)를 주장하면서 “우리나라의 토관제가 중국과 이름은 같지만 실제로는 다르다는(名同而實異)라고” 주장하였다.(반계수록 보유 권 1, 군현제) 그러나 토관이 실시된 세 지역은 (동녕부, 쌍성총관부, 탐라총관부) 원나라의 통치하에 있다가 수복되었기 때문에 중국의 토관제와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본인의 1차 연구에서도 밝혔듯이 원나라의 토관제는 서남변방지역에서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원나라가 통치할 시기에 이 지역에 토관제가 실시되지 않았는데 고려에서 수복한 후에 토관제가 실시되었는지는 의문이다.(제주도는 예외를 보임, 제주도는 원나라가 직접 통치한 시기가 있으므로 이미 토관 관련 직명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향후 토관의 명칭과 중국의 토관제와 유사한 직명이 실시되었는지는 좀더 연구해 보아야 한다.
    ⓷ 관광지로서의 효과: 주지하듯이 치앙마이는 태국 제2대 도시이다. 치앙마이는 관광 휴향지로 잘 알려져 있으나 역사적인 측면은 그다지 강조되지 못하였다. 오늘날 문화에 관심이 증가하고 있으므로 기존에 이해가 부족한 팔백식부국의 역사나 문화에 대해서 이해하기 쉽게 소개할 필요가 있다. 치앙마이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이전 蘭那고성을 참관하고, 山地박물관을 답사함으로서 그 시대의 삶을 이해해 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더다라데비 치앙마이(Dhara Dhevi chiang Mai) 호텔은 휴양과 문화 향유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변경도시에 관심을 가져볼 수 있다. 이를테면 캥퉁(Kengtung)의 변경도시 타킬렉(Thakhilek)과 매싸이(Mae Sai, 태국과 미얀마의 변경을 지나 태국 치앙라이(Chiang Rai)의 변경도시) 등이 발전하기 시작한 시점이 원나라 시기이므로 향후 어떠한 변화를 보이는지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 색인어
  • 원대, 운남지역, 서남변경, 금치, 원면전, 토사제, 면국, 팔백식부국, 영창, 운남왕, 버간왕조, 네트워크, 변강지역, 역참, 사신왕래, 초유정책, 수코타이, 치앙마이, 쌴국, 망래왕. 토관, 원-팔백식부 전쟁, 섬국. 처리, 노고, 군민총광부, 토관, 태국과 중국간의 관계.
  • 연구성과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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