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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의 빈곤 –16~18세기 향촌 양반지주층의 경제생활-
The poverty of the rich -A study of economic life of local Yangban Landlords in the 16th to 18th century Korea-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5S1A5A2A01015030
선정년도 2015 년
연구기간 2 년 (2015년 05월 01일 ~ 2017년 04월 30일)
연구책임자 정진영
연구수행기관 안동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이 연구과제는 조선시대, 16-18세기 향촌 양반지주가의 경제생활의 실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조선시대 향촌 양반층의 존재형태를 관념적으로나 계량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인 삶의 문제로 이해하고자 한다.
    조선시대, 특히 16, 17세기 우리가 흔히 재지사족이라고 부르는 향촌의 양반지주들은 상당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일반적인 사료를 통해서 만이 아니라 분재기 등 고문서 자료의 분석을 통해서 구체적인 수치로도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재지사족층의 경제적 규모는 대체로 수백 두락의 전답과 수백 명의 노비로 표현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들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중소지주라고 한다. 물론 이러한 중소지주적 기반이 재지사족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경제적 기반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더라도 적어도 상당히 광범위하게 존재했다는 점을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재지양반층의 경제적 기반은 조선후기 특히 18세기 이후에도 그대로 지속되지는 않는다. 일부의 양반층은 여전히 중소지주적인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보다 많은 양반층은 점차 토지와 노비를 상실해 가고 있었던 것이 일반적인 사정이었다. 농민층의 분화 못지않게 양반층에 있어서도 경제적인 분화가 진전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연구과제에서 주목하는 것은 바로 18세기 이후에도 여전히 중소지주적인 경제적 기반을 유지하고 있던 향촌의 양반층들이다. 그러나 이 연구과제의 목표는 이들의 경제적 기반이나 지주경영의 내용이 아니라 이들의 실질적인 경제생활이다.
    향촌 양반지주층의 경제적 기반이나 지주경영에 대해서는 역시 많은 연구 성과가 축적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의 경제생활에 대한 연구 성과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었다고 생각된다. 수백 두락의 전답과 수백 명의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면, 이들은 부자였고, 부자들의 경제생활은 말할 것도 없이 풍족하였음에 틀림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자들의 풍족한 경제생활에 대해 역사연구자들이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지 못했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연하게 풍족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조선시대의 부자들의 경제생활도 그렇게 당연하게 풍족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들이 남긴 다양한 자료들에서 ‘빈궁’이나 ‘곤궁’, 혹은 ‘가난’이라는 표현들을 심심하지 않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의 표현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청빈(淸貧)’이 조선시대 선비들의 이상적인 생활이었기 때문에 ‘가난’이라는 말을 상투적으로 쓰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부자간이나 혹은 형제간에 주고받는 편지글이나 차라리 일상생활의 치부책에 가까운 일기류에서의 가난에 대한 걱정이나 양식의 절핍을 한탄하고 있는 표현들은 분명 상투적인 표현과는 먼 것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것은 몰락양반이나 경제적인 기반을 점차 상실해 가던 양반들의 이야기가 아니고 엄연히 중조지주적인 기반을 확보하고 있는 가문의 경우이며, 어쩌다가 한두 번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해마다 때마다 심지어는 너무 자주 반복되고 있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부자들의 풍족’의 당연함이 아니라, ‘부자들의 빈곤’이라는 비상한 문제다. 부자들의 빈곤, 이것은 그 자체로서 성립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향촌 양반지주층의 전형적인 특질은 아니라 하더라도 엄연히 존재했던 현실의 일부였음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연구과제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바로 이 같은 ‘부자들의 빈곤’의 문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들 부자들에게서 빈곤의 문제가 얼마나 일상적이었는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행장이나 묘갈문 등 공식적이고 상투적인 글에서가 아니라 사적이면서도 내밀한 기록인 편지와 일기류에서 두루 폭넓게 확인하고자 한다. 이와 동시에 분재기와 매매명문, 호구자료 등을 통해 구체적인 재산의 규모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연구과제의 핵심은 지주들의 ‘가난’이나 ‘빈곤’을 확인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가난이나 빈곤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밝히는 것이 보다 중요한 과제이다. 빈곤의 요인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선 자연재해를 들 수 있다. 알고 있듯이 조선시대의 농업은 풍수해와 한발뿐만 아니라 충해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다음으로는 흔히들 ‘봉제사 접빈객’으로 표현되는 소비의 규모와 큰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 외에도 여러 요인들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통해 조선시대 재지 양반지주가의 경제생활의 실체를 확인해 보고자 한다.
  • 기대효과
  • 이 연구는 조선시대 양반들의 다양한 기록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가난이나 ‘빈곤’이라는 문제를 통해 조선시대 향촌 양반지주층의 경제생활을 검토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조선시대 재지양반들의 지주경영의 구체적 실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이 연구는 조선 양반사회의 실상을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양반에 대한 이해, 특히 경제생활과 관련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이해를 수정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조선시대 특히 양반에 대해 아직도 너무 많은 오해를 하고 있다. 그 상당수는 계급론적 선입견에서 구체성이 결여된 추측에서 오는 결과라 생각된다.
    양반 지주층의 ‘빈곤’의 성격을 보다 분명하게 할 수 있다면 역사학에서는 일방적으로 양반지주층은 풍족하게 살았으며 ‘빈곤’의 기록은 가식에 불과하다는 식의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며, 다른 한편 국문학이나 사상사연구에서는 ‘빈곤’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여 양반들의 살림살이가 기본적으로 빈곤하였다는 식의 오해를 수정하는 효과를 가져 올 수 있을 것이다. 즉, 양반 지주층의 경제생활을 통해 양반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이 아니라 이 연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고문서자료가 발굴됨으로써 그 자체로서 학계에 기여하는 바가 클 것이다.
  • 연구요약
  • 1) 연구방법

    가. 기존 고문서자료의 적극적인 활용
    조선시대 향촌 양반지주층의 경제생활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남긴 다양한 고문서 자료들을 적극 발굴하여야 한다. 여기서 굳이 고문서자료를 언급하는 것은 조선시대 양반들은 대부분 청빈함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았고, 경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선비의 체통에 어긋나는 일로 생각하였다. 때문에 공개적이거나 또는 공식적인 글에서는 경제적인 문제와 관련된 글들이 아예 없거나 아니면 청빈하게 살았다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해 두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글을 통해서는 향촌 양반층의 실질적인 경제생활의 진면목을 파악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하여 향촌 양반층이 실재로 경제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양반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치산이재에 아주 밝았으며, 이를 다양한 형태의 문서로 정리해 두고 있었다. 말하자면 향촌 양반층의 실질적인 경제생활을 살피기 위해서는 문집 등의 공개된 자료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흔히들 사문서 혹은 고문서라고 부르는 문서류에서 찾아질 수 있다.
    고문서 자료는 이미 많이 공간되어 있다. 이 연구에서는 이들 고문서 자료를 적극 이용하고자 한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고문서자료들이 미공개 된 채로 존재하고 있다. 이 연구에서는 이들 새로운 고문서자료를 적극적으로 발굴하여 활용하고자 한다.

    나. 보편적인 상황 속에서 구체적인 사례를 검토한다.
    대부분의 지역 사례연구들은 구체적인 사례 그 자체에만 지나치게 매몰된 나머지 보편적 혹은 전체적인 사정을 망각해 버리기 일쑤이다. 따라서 그 특수성만이 확대 과장됨으로써 그것이 우리 역사상에서 어떠한 위치와 의미를 가지는 지가 모호한 경우가 없지 않았다.
    이 연구는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는 차원에서 보편적인 상황 속에서 구체적인 사례를 검토하고자 한다. 보편적인 상황이란 우선은 향촌 양반층의 일반적인 경제규모를 살필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이미 많은 연구성과와 사례연구가 있기 때문에 쉽게 해결될 수 있다. 다음으로는 이들 양반지주들의 다양한 자료에서의 ‘빈곤’에 대한 언급들이 얼마만큼 자주 그리고 폭넓게 등장하는 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빈곤에 대한 기록들은 행장류의 상투적인 글에서뿐만 아니라 가족 내부에서 주고받은 편지나 개인의 일기류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다. 다시 말해 지주적 기반을 가진 부자들이 가난을 상투적인 글에서만이 아니라 아주 진솔한 자기 기록에서도 폭넓게 언급되어 있음을 살피고자 한다. 이로써 이 연구과제에서 검토하고자 하는 ‘부자들의 빈곤’ 문제가 특수한 하나의 사례가 아니라 조선시대 향촌 양반지주층의 경제생활의 보편적인 한 현상이었음을 살피고자 한다.

    다. 새로운 자료의 발굴을 통한 구체적인 사례연구
    이 연구에서는 새로운 자료로 대구의 경주최씨가의 다양한 문서를 활용하고자 한다. 경주최씨가에는 가문의 경제적 규모를 확인할 수 있는 분재기와 매매명문, 호구자료(호구단자, 준호구) 등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가문의 수입과 지출을 파악할 수 있는 추수기, 용하기 등도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방대한 일기자료를 남기고 있다. 일기 자료에는 다양한 농사정보와 함께 경제생활의 현황을 담고 있다. 이를 통해 첫째, 최씨가문이 18세기에도 여전히 지주적 경제규모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최씨가문의 수입과 지출의 규모, 또는 소비유형 등을 검토할 수 있다. 셋째, 지주적 경제규모에도 불구하고 최씨가문은 늘 경제적 궁핍을 걱정해야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들 자료는 미공개자료들이다.

    2) 예상되는 목차

    󰡔부자들의 빈곤 : 16~18세기 향촌 양반지주층의 경제생활󰡕

    가) 1차 년도 : 「18세기 향촌 양반지주가의 경제생활 –대구 경주최씨가의 경우-」
    1. 머리말
    2. 최씨가와 자료
    3. 최씨가의 경제규모와 수입
    1)소유 토지와 노비의 규모
    2)수입 : 추수기의 분석
    4. 최씨가의 소비형태와 지출규모 : 「用下記」분석
    1)소비형태 : 위선사업과 종족규휼사업
    2)지출의 규모
    5. 맺음말

    나) 제2차 년도 : 「부자들의 빈곤, 16-18세기 향촌 양반지주층의 경제생활」
    1. 머리말
    2. 16~18세기 향촌 양반지주층의 ‘빈곤’
    1) 경제적 기반
    2) ‘빈곤’의 구체적 내용과 양상
    3. 16~18세기 향촌 양반지주층의 ‘빈곤’ 성격
    1) 자연재해와 ‘빈곤’
    2) 접빈객 봉제사와 ‘빈곤’
    3) 족친.농민에 대한 구휼과 ‘빈곤’
    4. 맺는말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이 연구는 앞서 검토하였던 16~18세기 향촌 양반지주층의 빈곤을 18세기 중엽 한 특정가문을 중심으로 다시 확인함과 아울러 이들의 ‘가난’이나 ‘빈곤’이 어디에서 원인하는 것인지, 이를 어떻게 극복.대응해 나갔는지에 대해 개괄적으로나마 살펴본 것이다.
    검토 대상 가문인 대구의 경주 최씨가는 관직자도 배출했고, 중소지주 또는 그 이상의 경제적 기반을 학보 혹은 유지했으며, 특히 최흥원은 학문적으로도 크게 명성을 떨쳤다. 또한 최씨가에는 분재기와 매매명문 등과 함께 최흥원(1705~1786)이 남긴 방대한 <<曆中日記>> 등의 자료가 있다.
    최흥원의 <<역중일기>>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형제들과 족친들, 외가와 사돈가, 그리고 다양한 인물들의 빈곤과 관련된 내용들이 아주 빈번하게 나타난다. 빈곤의 원인은 자연재해와 많은 식구들, 그리고 봉제사 접빈객 등이었고, 곡식과 돈을 빌리거나 토지와 노비를 팔거나 관의 환곡 등을 통해 여기에 대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최씨가에서도 주위의 인척과 여러 사람들에게 빌려주거나 토지를 매득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씨가에서는 助祭庫와 別庫 등 다양한 문중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것은 물론 제사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흉년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는 다만 그 본래의 기능만을 고집할 수 없었다. 최씨가에서는 여기에도 크게 의지할 수 있었다.
    흉년이나 빈곤에 대한 이상과 같은 대응은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임시미봉책에 불과했다. 따라서 흉년이나 빈곤이 장기적 혹은 주기적으로 계속되는 상황에서는 점점 더 극한 상황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사정에서 18, 19세기를 거치면서 점차 더 많은 양반들이 경제적으로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음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최씨가의 빈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았다. 최씨가의 경우는 빈곤의 일상화라기보다는 차라리 일시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몰락’의 길로 내몰렸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적은 양이지만 전답의 매득과 상당한 재원을 필요로 하는 건축도 꾸준히 계속되었다. 최씨가의 빈곤은 말하자면 ‘부자들의 빈곤’인 셈이다. 가난해서가 아니라 지출이 과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빈곤은 조선 후기 향촌 양반지주가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당시의 농업경영이 자연적인 조건에 크게 제약됨으로써 안정적이지 못했음도 분명해 보인다.
  • 영문
  • This study reconfirmed the poverty of the landed gentry in country villages in the 16th - 18th centuries that was reviewed in the previous study mainly based on a specific family in the mid-18th century, and generally examined where their ‘poverty’ or ‘penury’ was originated and how they coped with and responded to it.

    The Gyeongju Choi clan family in Daegu, the target family of the study, produced government officials and secured or maintained their financial foundation as an owner of the small and medium-sized lands or higher. In particular, the Choi family left Yeok-Joong-Il-Gi (曆中日記) written by Choi Heung-won (1705 – 1786), along with the records of property inheritance and trading statements.

    The journal Yeok-Joong-Il-Gi by Choi Heung-won frequently described the issues related to poverty in himself, brothers, relatives, relatives of his mother’s and wife’s sides and many other people. The reasons for poverty were natural disaster, the large number of family members and reception of the guests of ancestral rites, and the family handled the issue by borrowing grain and money or selling lands and slaves or using the Grain Loan System (Hwangok) of provincial government. However, these were not just unilateral measures because the Choi family also often lent lands or grain to many relatives and neighbors or purchased lands from them.

    Such responses to bad years or poverty were only temporary remedies rather than the fundamental solutions. Therefore, when bad years or poverty continued for a long time or occurred periodically, the gentry were forced to be placed in more extreme situations. In these circumstances, it can be assumed that more and more of the gentry had to face a financial collapse in the 18th - 19th centuries.

    Lastly, there is a question left about how to understand poverty of the Choi family. In this case, the family’s poverty was temporary rather than habituated poverty. Therefore, they were not forced to ‘collapse.’ The family continued to buy small farmlands and constructed buildings that required a considerable amount of finance. Poverty experienced by the Choi family was so-called ‘poverty of the rich.’ They experienced poverty because of excessive spending rather than being poor. Such poverty was commonly found in the families of the landed gentry in country villages in the late Joseon Dynasty. It is also considered evident that agricultural management was unstable as it was significantly limited by the natural condition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이 연구는 앞서 검토하였던 16~18세기 향촌 양반지주층의 빈곤을 18세기 중엽 한 특정가문을 중심으로 다시 확인함과 아울러 이들의 ‘가난’이나 ‘빈곤’이 어디에서 원인하는 것인지, 이를 어떻게 극복.대응해 나갔는지에 대해 개괄적으로나마 살펴본 것이다.
    검토 대상 가문인 대구의 경주 최씨가는 관직자도 배출했고, 중소지주 또는 그 이상의 경제적 기반을 학보 혹은 유지했으며, 특히 최흥원은 학문적으로도 크게 명성을 떨쳤다. 또한 최씨가에는 분재기와 매매명문 등과 함께 최흥원(1705~1786)이 남긴 방대한 <<曆中日記>> 등의 자료가 있다.
    최흥원의 <<역중일기>>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형제들과 족친들, 외가와 사돈가, 그리고 다양한 인물들의 빈곤과 관련된 내용들이 아주 빈번하게 나타난다. 빈곤의 원인은 자연재해와 많은 식구들, 그리고 봉제사 접빈객 등이었고, 곡식과 돈을 빌리거나 토지와 노비를 팔거나 관의 환곡 등을 통해 여기에 대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최씨가에서도 주위의 인척과 여러 사람들에게 빌려주거나 토지를 매득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씨가에서는 助祭庫와 別庫 등 다양한 문중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것은 물론 제사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흉년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는 다만 그 본래의 기능만을 고집할 수 없었다. 최씨가에서는 여기에도 크게 의지할 수 있었다.
    흉년이나 빈곤에 대한 이상과 같은 대응은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임시미봉책에 불과했다. 따라서 흉년이나 빈곤이 장기적 혹은 주기적으로 계속되는 상황에서는 점점 더 극한 상황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사정에서 18, 19세기를 거치면서 점차 더 많은 양반들이 경제적으로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음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최씨가의 빈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았다. 최씨가의 경우는 빈곤의 일상화라기보다는 차라리 일시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몰락’의 길로 내몰렸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적은 양이지만 전답의 매득과 상당한 재원을 필요로 하는 건축도 꾸준히 계속되었다. 최씨가의 빈곤은 말하자면 ‘부자들의 빈곤’인 셈이다. 가난해서가 아니라 지출이 과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빈곤은 조선 후기 향촌 양반지주가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당시의 농업경영이 자연적인 조건에 크게 제약됨으로써 안정적이지 못했음도 분명해 보인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제2차 년도의 연구 내용은 제1차 년도에서 제기하였던 향촌 양반지주층의 빈곤을 다시 한 번 확인함과 아울러 이들의 ‘가난’이나 ‘빈곤’이 어디에서 원인하는 것인지, 이를 어떻게 극복ㆍ대응해 나갔는지에 대해서 개괄적이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앞의 연구가 16~18세기의 몇몇 양반가문을 중심으로 한 산발적인 검토였다면, 이 연구는 영남의 한 특정가문, 대구의 경주최씨 백불암 최흥원(1705~1786) 가문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이 가문에는 최흥원이 남긴 방대한 일기(<<曆中日記>>)와 여러 고문서 자료들이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 자료가 이 연구를 사실상 가능하게 하였다. 따라서 검토의 대상 시기는 대략 18세기 중반이 된다.
    검토 대상 가문인 대구의 경주 최씨가는 관직자도 배출했고, 중소지주 또는 그 이상의 경제적 기반을 학보 혹은 유지했으며, 특히 최흥원은 학문적으로도 크게 명성을 떨쳤다. 또한 최씨가에는 분재기와 매매명문 등과 함께 최흥원(1705~1786)이 남긴 방대한 <<曆中日記>> 등의 자료가 있다.
    최흥원의 <<역중일기>>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형제들과 족친들, 외가와 사돈가, 그리고 다양한 인물들의 빈곤과 관련된 내용들이 아주 빈번하게 나타난다. 빈곤의 원인은 자연재해와 많은 식구들, 그리고 봉제사 접빈객 등이었고, 곡식과 돈을 빌리거나 토지와 노비를 팔거나 관의 환곡 등을 통해 여기에 대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최씨가에서도 주위의 인척과 여러 사람들에게 빌려주거나 토지를 매득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씨가에서는 助祭庫와 別庫 등 다양한 문중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것은 물론 제사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흉년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는 다만 그 본래의 기능만을 고집할 수 없었다. 최씨가에서는 여기에도 크게 의지할 수 있었다.
    흉년이나 빈곤에 대한 이상과 같은 대응은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임시미봉책에 불과했다. 따라서 흉년이나 빈곤이 장기적 혹은 주기적으로 계속되는 상황에서는 점점 더 극한 상황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사정에서 18, 19세기를 거치면서 점차 더 많은 양반들이 경제적으로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음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최씨가의 빈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았다. 최씨가의 경우는 빈곤의 일상화라기보다는 차라리 일시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몰락’의 길로 내몰렸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적은 양이지만 전답의 매득과 상당한 재원을 필요로 하는 건축도 꾸준히 계속되었다. 최씨가의 빈곤은 말하자면 ‘부자들의 빈곤’인 셈이다. 가난해서가 아니라 지출이 과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빈곤은 조선 후기 향촌 양반지주가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당시의 농업경영이 자연적인 조건에 크게 제약됨으로써 안정적이지 못했음도 분명해 보인다.
    제2차 년도에서 활용한 <<역중일기>>는 백불암 최흥원(1705년 ; 숙종 31 ~ 1786년 : 정조 10)이 1735년에서 1786년까지 장장 51년간 자신의 삶을 기록한 이른바 생활일기이다. 학계에 그 전모가 공개되고 구체적으로 활용된 것은 이 연구가 처음이다. 이것은 총 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 1권은 1735년(을묘, 31세, 영조 11)에서 1746년(병자, 41세, 영조 22)까지 10년간의 기록으로 329쪽의 분량이고, 제 2권은 1747년(정묘, 영조 23)에서 1755년(을해, 50세, 영조 31)에 이르기까지 9년간의 기록으로 250쪽의 분량이다. 제 3권은 1756년(병자, 51세, 영조 32)에서 1764년(갑신, 59세, 영조 40)에 이르기까지 8년간의 기록으로 313쪽의 분량이다. 제 4권은 1765년(을유, 60세, 영조 41)에서 1786년(병오, 82세, 정조 10)에 이르기까지 23년간의 기록으로 178쪽이다. 모두 52년간의 기록이라고 하나 매일 기록한 것은 1737년부터 1770년에 이르기까지의 44년에 해당한다. 총 분량은 1070쪽에 달한다.
    <<역중일기>> 앞으로 번역되어 다양한 방면에서 구체적 자료로서 활용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이용한 본 연구성과는 향후 <<조선후기 사람들의 생활사>>를 집필하는데 기초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 색인어
  • x향촌 양반지주, 빈곤, 경주 최씨가, 최흥원(1705~1786), <<역중일기>>, 봉제사 접빈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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