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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발굴 오영진 일기(1947-1974) 연구
Not excavated Oh, Younjin diary (1947-1972) studies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신진연구자지원사업& #40;인문사회& #41;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5S1A5A8014942
선정년도 2015 년
연구기간 1 년 (2015년 05월 01일 ~ 2016년 04월 30일)
연구책임자 김윤미
연구수행기관 계명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수자의 목적은 새로 발굴된 오영진(吳泳鎭, 1916~1974)의 일기를 정리하고 고찰하는데 있다. 이를 통해 해방 후 오영진의 일기에 나타나는 구체적인 기록들을 근거로 당시 한국 영화연극계의 제작 시스템, 일제식민지 시기를 거쳐 반공이데올로기로 재편되는 한국 문화계 인사의 미국화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 그리고 이러한 문화정치의 변화과정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구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해방 직후 한국영화연극현장의 실제에 좀 더 다가가고자 하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국가재건의 문화이데올로기로 선택된 자유 민주주의 사상이 일제식민지 말기 국가재건의 이데올로기와 결별 혹은 혼재를 이루며 어떻게 자기검열을 강화시켜 왔는지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다.
    오영진은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학과를 졸업하고 식민 말기에는 영화평론가이자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고, 해방 이후 제3공화국에 이르기까지 극작가, 영화평론가,『문학예술』잡지 발행인, 영화제작자, 정당정치인 등 다양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서북 출신 기독교인으로 소련 군정하의 북한에서 조만식의 조선민주당 창당 과정에 참여했으나 1947년 월남했으며, 1953년 미 국무성의 리더스 그랜트로 미국을 다녀온 후 반공영화 제작에 참여하고 한국영화예술협회를 창립하는 등 활발한 문화정치의 중심에서 활동했다. 때문에 오영진 일기연구를 통해 본고는 오영진의 사상 연구뿐만 아니라 한국의 영화와 연극의 태동기, 한국에 대한 미국의 문화정치, 한국의 현대사 등 다양한 분야의 학제 간 연구를 활발하게 불러일으키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오영진이 남긴 그의 일기는 1947년부터 1974년까지로, 거의 30년간 오영진에 의해 씌어진 것이다. 일기에는 북한에서 조선민주당 창당에 관여하기도 했던 그의 정치적 행보에 대한 회상과 월남 후 국립극장 창당과 관련하여 유치진과의 관계, 하버드 옌칭 연구소와 미국 대학 순방, 1963년 남한에서의 조선민주당 재건 활동, 문예진흥원 개설 추진 등, 해방 후 오영진의 문화정치활동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들어 있다. 해방 후 오영진의 이러한 활동경력과 반공영화제작 등 민속을 소재로 한 작품 창작 활동으로 인해 학계에서는 그를 민족주의 극작가로 평가하고 있다. 그동안 오영진의 희곡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으나 오영진의 영화 활동에 대한 연구는 최근 시작단계에 있다.
    학계에서 한국연극사와 영화사는 분리되어 연구되어졌는데 본고는 오영진 일기 연구를 통해 나누어진 두 분야의 융합연구를 촉진하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한국연극사에서 오영진은 풍자희극, 역사극, 전통수용을 성공적으로 재현한 극작가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5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오영진은 한국영화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지만, 오영진의 연극과 영화활동의 상관관계가 통합적으로 연구되어지지 않고 있다. 오영진 연구뿐만 아니라 해방 전후 한국영화와 연극, 문화정치 등 다양한 영역에서 융합연구가 진행된다면 당대 사실 관계의 오류가 수정될 수 있으며, 오영진 일기연구는 이러한 연구를 촉발시키는데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오영진의 일기에 나타나는 공적체험뿐만 아니라 오영진의 개인사적체험에도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일기’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기록된 오영진의 지난 30년 간 생활은 개인적인 수난으로 점철된 나날이었다. 특히 월남하자마자 남파된 공산당원에게 총탄을 맞은 그는 그때의 후유증으로 평생을 시달렸으며, 일제식민지의 잔재를 벗어나려는 자기검열로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힘들 정도로 ‘일본적인 것’에 대한 결벽증에 시달려야 했다. 일기는 사회구성원의 심리적 메커니즘을 통해 문화변동의 지속성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텍스트임에도 오영진 일기는 지금까지 한 번도 다뤄진 적이 없었다. 일기라는 매체를 통하여 당대를 구성하는 방식에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미시사적 연구 방법으로 진행되는 이 글은 한국영화연극에 관련된 기존의 서술에 대한 사실 관계를 분명히 하려는 목적 또한 가지고 있다.
  • 기대효과
  • 본 연수를 진행하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연수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첫째, 오영진 일기에 대한 미시사적 연구는 한국의 영화연극, 문화정치와 관련된 기존서술에 대한 사실 관계의 오류를 바로잡는데 기여할 수 있다. <조선민주당>창당 자료와 조만식 선생에 대한 회고, 1949년 국립극장 건립과 관련하여 유치진 이해랑과의 만남, <인생차압>과 <십대의 반항>과 관련한 표절시비, 이승만 일대기 영화관련 일화 등에 대한 기술은 당대 영화제작 시스템과 월남민의 반공주의와 생활상, 미군정의 일제식민지 지식인에 대한 미국화 방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는데 기여할 수 있다. 오영진은 특히 공적인 행사의 진행과정과 세부적인 사항을 일기에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각각의 인물에 대한 사적인 견해도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공식일정은 영어로 기술된 부분이 많고, 한글과 한자 일본어는 사적인 견해를 기술할 때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서술방식은 오영진의 정치적 무의식과 언어이데올로기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는데 적합하므로 오영진 일기연구는 이러한 연구를 발전시키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 본 연구에서 발굴되고 정리된 일기 원본과 영인본 자료, 오영진의 공연증언 관련 자료와 팜플렛, 시나리오와 희곡 친필 원고 등의 자료는 아카이브 형성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와 연극 두 분야에서 활약한 오영진의 예술자료 정리 및 서지화 작업은 빠른 시일 안에 이뤄져야 하며 본고는 그러한 작업에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다. 본질적으로 오영진 일기 연구는 오영진 일기의 가치를 알리고, 그의 일기를 자료의 소장에 그치지 않고 문화예술인들에게는 풍부한 창조력의 원천으로 사용하고, 통섭과 융합을 목적으로 하는 인문학연구자들에게는 연구의욕을 고취시키는 자산으로써 사용하도록 기여할 것이다.

    셋째, 오영진 일기 연구는 학제 간 융합을 촉구하는 오영진학회를 창립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그리고 오영진 일기 연구는 오영진 연구에 전환점을 제공하며 한국영화와 연극 두 분야의 융합연구 뿐만 아니라 정치문화사와의 연구를 촉발하는 데에도 기여할 것이다. 1947년에서 1974년까지 근 30년 동안 기록된 오영진 일기에는 해방과 분단, 6.25 전쟁과 휴전협정, 4·19와 5·16, 한일협정 등 다양한 역사적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오영진은 아세아 문화재단의 도움으로 하버드옌칭연구소와 미국대학의 연극영화 교육 프로그램과 각 주의 문화행정을 견학한 일과 영어로 된 공연안내와 공연티켓 가격까지 꼼꼼하게 기록했다. 오영진의 일기는 한국문화정치의 출발점과 한국대중문화의 생성발전 과정을 기록한 사료적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오영진 일기 연구는 오영진이 참여했던 다양한 문화장르들(영화, 연극, 문화, 정치) 간의 융합과 소통을 촉진시키는데 상당부분 기여할 것이다.

    오영진 일기는 지금까지 한 번도 다뤄진 적이 없다. 본고에서 다루는 오영진 일기는 근 30년 동안 기록된 것으로 한국의 정치, 사회, 문화 연구에 있어서 사료적 가치를 지닐 뿐만 아니라 학제 간 활발한 논의를 불러일으키는데 기여할 것이다. 더구나 오영진의 일기에 나타나는 일상에 대한 미시사적 연구는 당대 정치 사회 문화적 정서를 전달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오영진 일기 연구는 외부의 언어이데올로기를 수용하면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립했던 오영진의 정치적 무의식을 밝히는 일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문화변동의 핵심과 저변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영진 일기 연구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급격한 다문화적 사회의 문화변동 연구에 방향을 제시하는데에도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 연구요약
  • 본 연수는 새로 발굴된 오영진(吳泳鎭, 1916~1974)의 일기를 정리하고 고찰하는데 목적이 있다. 일기는 사회구성원의 심리적 메커니즘을 통해 문화변동의 지속성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텍스트임에도 오영진 일기는 지금까지 한 번도 다뤄진 적이 없었다. 일기라는 매체를 통하여 당대를 구성하는 방식에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미시사적 연구 방법으로 진행되는 이 글은 한국영화연극에 관련된 기존의 서술에 대한 사실 관계를 분명히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 해방 후 오영진의 일기에 나타나는 구체적인 기록들을 근거로 당시 한국 영화연극계의 제작 시스템, 일제식민지 시기를 거쳐 반공이데올로기로 재편되는 한국 문화계 인사의 미국화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 그리고 이러한 문화정치의 변화과정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고찰하였다. 그럼으로써 해방 직후 한국영화연극현장의 실제에 좀 더 다가가고자 하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국가재건의 문화이데올로기로 선택된 자유 민주주의 사상이 일제식민지 말기 국가재건의 이데올로기와 결별 혹은 혼재를 이루며 어떻게 자기검열을 강화시켜 왔는지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다.
    오영진이 남긴 일기는 1947년부터 1974년까지로, 거의 30년간 오영진에 의해 씌어진 것이다. 1916년생인 오영진의 100주기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영화와 연극 두 분야에서 활약한 오영진의 예술자료 정리 및 서지화 작업은 빠른 시일 안에 이뤄져야 하며 오영진 일기 연구는 그러한 작업에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다. 본 연구에서 발굴되고 정리된 일기 원본과 공연자료와 팜플렛, 시나리오와 희곡 친필 원고 등의 자료는 아카이브 형성에 기여할 수 있다.
    본 연수자가 발굴한 오영진의 일기는 여러 권의 대학노트가 시기별로 묶여 있다. 1947년에서 1950년까지, 1951년에서 1960년까지, 1960년에서 1969년까지,1974년 7월 23일까지 이렇게 네 묶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영진의 일기는 해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일어와 한자 영어로 씌어져 있다. 그러나 오영진이 이화여자대학교 정신병원에서 서거하기 3개월 전까지 쓴 1974년 7월 23일까지의 일기는 한글로 이루어져 있다.
    오영진의 일기 연구를 위해 먼저 해독하기 힘든 그의 일기를 읽는 지난한 작업을 거쳐야만 한다. 본 연수자는 그러한 작업을 수년 동안 진행해 왔으며 일부 해독하기 어려운 글자는 남겨두고 한글과 한자로 컴퓨터에 정리하였다. 더구나 오영진이 사용한 일어와 한자는 약자로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글자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오영진 일기 연구는 일종의 미시사적 연구방법 뿐만이 아니라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도 고찰되어야 한다. 당대 사회를 세밀하게 관찰하되 그 연구 대상의 범위를 넓게 잡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이전의 역사 연구에서 주목되지 못했던 본질적인 여러 현상들을 가시화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오영진 일기에 대한 미시사적 연구는 한국의 영화연극, 문화정치와 관련된 기존서술에 대한 사실 관계의 오류를 바로잡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영진 일기 연구는 민족주의 개념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게 될 것이다.
    <조선민주당>창당 자료와 조만식 선생에 대한 회고, 1949년 국립극장 건립과 관련하여 유치진 이해랑과의 만남, <인생차압>과 <십대의 반항>과 관련한 표절시비, 이승만 일대기 영화관련 일화 등에 대한 기술은 당대 영화제작 시스템과 월남민의 반공주의와 생활상, 미군정의 일제식민지 지식인에 대한 미국화 방식을 구체적으로 고찰하게 될 것이다. 오영진은 특히 공적인 행사의 진행과정과 세부적인 사항을 일기에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각각의 인물에 대한 사적인 견해도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공식일정은 영어로 기술된 부분이 많고, 한글과 한자 일본어는 사적인 견해를 기술할 때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서술방식은 오영진의 정치적 무의식과 언어이데올로기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는데 적합하므로 오영진 일기연구는 이러한 연구를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이 연구는 1958년 7월 17일부터 1959년 12월 31일까지 오영진에 의해 기록된 일기를 고찰한 것이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1958년에서 1959년은 한국영화의 중흥기에 속하며, 영화평론가이자 시나리오 작가로 활발한 활동을 했던 오영진이 한국영화의 국제화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오영진은 문화정치의 중심에서 활동했으며 이러한 다양한 활동들을 일기에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영진의 일기는 한국영화연극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정치에도 새로운 시각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텍스트이다.
    1958년 일기에는 아시아재단과 국방부 정훈국 자문위원 활동을 통해 국제적 네트워크와 군용영화 제작의 기반을 조성했던 오영진의 활동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기에는 아시아 재단에 보내는 편지 초안이 기록되어 있는데 오영진은 이 편지에서 “아시아영화제에 상영되는 작품은 그것을 상영하는 지역의 토어로 더빙”되어야 하며 “영화예술과 기술의 발전 향상과 공동 연구를 위한 특종의 institute의 설치”를 제안하고 있다. 또한 일기에는 군부대 시찰경험과 민간영화기획사와 국방부의 만남을 주선하며 군용영화제작환경의 초석을 마련하는 과정도 기록되어 있다.
    1959년 오영진의 일기에는 <십대의 反抗>과 <인생차압>의 표절시비, 이에 대한 법적 대응과정, 영화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의 원작시나리오를 빼앗긴 것에 대한 울분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영화계에 만연한 외화 표절 문제를 제기했던 오영진이 역으로 표절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는데, 그의 문제제기는 외화와 한국영화의 영향관계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이와 같이 1959년은 표절논란으로 영화계에서 오영진의 피해의식이 가중되는 시기였으나 젊은 비평가인 이영일, 호현찬과 함께 새로운 영화운동 모색에 오영진이 동참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또한 오영진은 뉴욕에서 영화교류를 위해 군인출신 맥카시를 만나거나 영화 <시집가는 날> 판매를 위해 콜롬비아사 등 영화 관계자들과의 만남을 시도하는 과정을 일기에 기록했다. 브로드웨이에서의 상연을 위해 <시집가는 날>의 뮤지컬 각색을 시작하게 되는 계기와 성화저작권 문제해결과정에서 미국인 선교사에 대한 실망감을 일기에 드러내기도 했다.
    오영진은 일기를 자신의 “인생을 위한 증빙서류”로 보았고, 그가 더 이상 관여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한 사람의 reporter 입장”으로 일기를 기술하고자 했다. 이러한 거리두기를 통해 외부의 문화를 전유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하지만 결국 실패하게 되고, 오영진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분기점이 오영진의 일기에서는 1958년에서 1959년까지다. 앞으로 이 시기의 전과 후에 기술된 오영진의 일기연구가 보강된다면 1958년에서 1959년을 기점으로 변화하는 한국영화연극계의 문화정치 현실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 영문
  • The study on diaries of Oh Yeong-Jin
    -A Review of Korean Film Culture Throgh the Analysis of Youngjin Oh’s Diaries from 1958-1959


    In this study I intended to review the diaries recorded by Oh Yeong-Jin (1958.7.17-1959.12.31). The Period from 1958 t0 1959 belongs to the heyday of Korean films. Also Oh yeong-Jin who was active as a film critic and a writer played a pivotal role in this period. In that time, he actively worked in the center of culture and politics and got into details of these various experiences in his diary. Therefore, his diary is a crucial text which can give new perspectives to society, culture and politics as well as Korean films.
    In 1958, it records the details of his works, building the foundation of global network and military film-making through acting as Asia Foundation consultant. In his diary, there is the draft of the letter which would be sent to Asia Foundation, suggesting that “works that plays in Asia Film festival should be dubbed into the native language of the area where they are played” and “There should be the installation of the special institute for the improvement of film art and the development of tech, and collaboration.” Also in this document, there are experiences that he visited the military units and the processes building the foundation of environment of military film-making by arranging the meeting between private film agency and the Department of Defense.
    In 1959, it records a plagiarism scandal of <Rebellion of teenagers> and <Life of differential pressure>, legal action against it and resentments about losing the possession of the scenario , <The independence association and young man, Syngman Rhee> . The year of 1959 was the period for Oh Yeong-Jin to increase his victim mentality, but this time of year was also the period that he participated to the new film movement with young critics. In addition, he records that he met Maccacy, a former military man, for the exchange of films in New York and the process of trying making the meeting with movie professionals such as the company of Columbia for selling of <Wedding Day>. He started musical adaptation of <Wedding Day> for its run on Broadway and he revealed the disappointment about Americans and missionaries during the problem-solving process of Holy Picture property.
    Likewise, Oh Yeong-Jin recorded process of public events, and published the works based on them to a daily newspaper or magazines. However, published works were not exactly same with his documents, because his personal feelings entered into it. For Oh Yeong-Jin, diaries was more considered as an method that reach to self-awareness accepting outside language ideology than of record. With this, it can be found in his diaries that Oh Yeong-Jin’s Political unconscious is endless culture war with the empire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오영진의 일기를 연구하면서 <인생차압>, <십대의 반항>에 따른 표절시비, 이승만 일대기 영화관련 일화, 정훈위원 활동과 당대 영화제작 시스템과 해방 후 지식인의 미국화 과정을 구체적으로 규명할 수 있었다. 또한 오영진은 미국에서의 공식일정을 기록할 때 영어를 일상어처럼 한글과 함께 기술했는데 해방 전 일어로 시나리오를 창작했던 오영진이 해방 후 영어로 공식 문서를 작성하고 일기에 영어를 일상어처럼 사용하는 과정을 살펴보면서 일기쓰기는 오영진에게 지배자의 언어를 자기의 언어로 전환하는 자기교육의 한 방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영진의 일기에는 아시아재단과 국방부 정훈국 자문위원 활동을 통해 국제적 네트워크와 군용영화 제작의 기반을 조성했던 오영진의 활동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군부대 시찰경험과 민간영화기획사와 국방부의 만남을 주선하며 군용영화제작환경의 초석을 마련하는 과정도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영화계에 만연한 외화 표절 문제를 제기했던 오영진이 역으로 표절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는데, 그의 문제제기는 외화와 한국영화의 영향관계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표절시비에 대한 법적 대응과정, 영화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의 원작시나리오를 빼앗긴 것에 대한 울분이 기록되는데 1959년은 표절논란으로 영화계에서 오영진의 피해의식이 가중되는 시기였으나 젊은 비평가인 이영일, 호현찬과 함께 새로운 영화운동 모색에 오영진이 동참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오영진은 콜롬비아사 등 영화 관계자들과의 만남을 시도하는 과정과 브로드웨이에서의 상연을 위해 <시집가는 날>의 뮤지컬 각색을 시작하게 되는 계기, 성화저작권 문제해결과정에서 미국인 선교사에 대한 실망감을 일기에 드러내기도 했다.
    오영진은 일기를 자신의 “인생을 위한 증빙서류”로 보았고, 그가 더 이상 관여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한 사람의 reporter 입장”으로 일기를 기술하고자 했다. 이러한 거리두기를 통해 외부의 문화를 전유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하지만 결국 실패하게 되고, 오영진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분기점이 오영진의 일기에서는 1958년에서 1959년까지다. 앞으로 이 시기의 전과 후에 기술된 오영진의 일기연구가 보강된다면 이 시기를 기점으로 변화하는 한국영화연극계의 문화정치 현실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오영진의 일기에는 아시아재단과 국방부 정훈국 자문위원 활동을 통해 국제적 네트워크와 군용영화 제작의 기반을 조성했던 오영진의 활동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오영진은 일기에 <십대의 反抗>과 <인생차압>의 표절시비, 이에 대한 법적 대응과정, 영화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의 원작시나리오를 빼앗긴 것에 대한 울분을 기록했는데 1959년은 표절논란으로 영화계에서 오영진의 피해의식이 가중되는 시기였으나 젊은 비평가인 이영일, 호현찬과 함께 새로운 영화운동 모색에 오영진이 동참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오영진은 뉴욕에서 영화교류를 위해 군인출신 맥카시를 만나거나 영화 <시집가는 날> 판매를 위해 콜롬비아사 등 영화 관계자들과의 만남을 시도하는 과정을 일기에 기록했다. 브로드웨이에서의 상연을 위해 <시집가는 날>의 뮤지컬 각색을 시작하게 되는 계기와 성화저작권 문제해결과정에서 미국인 선교사에 대한 실망감을 일기에 드러내기도 했다. 오영진은 일기를 자신의 “인생을 위한 증빙서류”로 보았고, 그가 더 이상 관여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한 사람의 reporter 입장”으로 일기를 기술하고자 했다. 이러한 거리두기를 통해 외부의 문화를 전유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하지만 결국 실패하게 되고, 오영진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분기점이 오영진의 일기에서는 1958년에서 1959년까지다. 앞으로 이 시기의 전과 후에 기술된 오영진의 일기연구가 보강된다면 이 시기를 기점으로 변화하는 한국영화연극계의 문화정치 현실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오영진 일기 연구는 오영진 연구에 전환점을 제공하며 한국영화와 연극 두 분야의 융합연구 뿐만 아니라 정치문화사와의 연구를 촉발할 것이다. 오영진은 아세아 문화재단의 도움으로 하버드옌칭연구소와 미국대학의 연극영화 교육 프로그램과 각 주의 문화행정을 견학한 일과 영어로 된 공연안내와 공연티켓 가격까지 꼼꼼하게 기록했다.
    또한 오영진 일기에는 <인생차압>과 <십대의 반항>과 관련한 표절시비, 신상옥 감독과 <꿈> 각색과 이승만 일대기 영화관련 일화 등 기존에 알려진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었다. 이는 한국의 영화연극, 문화정치와 관련된 기존서술에 대한 사실 관계의 오류를 바로잡는데 자료적 근거로 활용될 수 있다.
  • 색인어
  • 오영진 일기, <십대의 反抗>, <인생차압>, <시집가는 날>, 정훈국 자문위원, 한국영화
  • 연구성과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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