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미국의 개념미술가 솔 르윗(Sol LeWitt, 1928~2007)의 <월 드로잉(Wall Drawings, 1968년~2007년)> 연작과 그 제작 방식을 분석하고, 작품을 둘러싸고 최근에 발생했던 법정소송을 사례로 들어, ‘오리지낼리티’라는 개념에 기존의 기준을 넘어서는 대안적인 의 ...
본 논문은 미국의 개념미술가 솔 르윗(Sol LeWitt, 1928~2007)의 <월 드로잉(Wall Drawings, 1968년~2007년)> 연작과 그 제작 방식을 분석하고, 작품을 둘러싸고 최근에 발생했던 법정소송을 사례로 들어, ‘오리지낼리티’라는 개념에 기존의 기준을 넘어서는 대안적인 의미와 새로운 가치를 모색하고자 한 연구이다.
<월 드로잉> 연작은 글자 그대로 벽에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의 패턴을 그리는 작업으로, 르윗이 1960년대 후반부터 근 40년 동안 반복적으로 제작했다. 그러나 작가인 르윗은 형태를 구상해서 작은 ‘도안’을 그리고 ‘증명서’를 작성했을 뿐이었고, 실제 드로잉은 작가가 고용한 수많은 ‘제도사’들이 작업했다. 이에 대해 르윗은 같은 작품이라도 다른 장소에 여러 차례 실현될 수 있고, 그의 설명서를 충실히 따르기만 했다면, 르윗 모르게 누군가가 그려놓은 것조차도 모두 ‘진품’이라고 인정했다. 그는 미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사물이 아니라, 작품에 내재한 ‘아이디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미술사학자 벤자민 부클로는 이와 같은 르윗의 작업 방식이 후기 자본주의 시대, 산업화된 사회의 전형적인 생산방식을 모방하는 ‘행정의 미학’이라고 보았다. 부클로를 비롯, 많은 학자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산업 경제가 제조업으로부터 후기 산업경제의 매니지먼트와 서비스업 중심으로 변모했고, 이에 따라 미술가들이 행하는 작업의 성격 또한 전체 노동의 변화에 따라 ‘제조업’에서 ‘서비스와 행정’으로 이행했다고 보았다. 르윗은 이러한 이행 과정의 핵심에 있는 주된 작가로 꼽혀왔는데, 특히 헬렌 몰레스워스는 르윗을 대표적으로 ‘법률과 계약 관계’에 의해 움직이는, ‘매니저’로서의 미술가로 분류했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그와 제도사들 간의 관계가 제품의 생산과 개발이 완전히 분리된 후기 산업사회의 매니저와 노동자의 관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음에 주목했다. 르윗은 특히 롤랑 바르트가 주장한 ‘저자의 죽음’에 충실하고자 했고, <월 드로잉>을 통해 오리지낼리티와 이것이 함의하는 ‘진품성(authenticity),’ ‘원작(original),’ 그리고 ‘근원적(originary)’ 주체로서의 개인, 즉 ‘저자(author)’ 등의 모더니즘적 가치들을 부정하며, 수정 혹은 파기를 유도했던 것이다. 따라서, 르윗의 <월 드로잉>은 미술품이 작가의 배타적 자산이라는 근거에 의해 작용하는 저작권법의 범주에서도 완전히 벗어난다. 2012년, <월 드로잉>의 증명서 분실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나아가 본 논문에서는 르윗이 <월 드로잉>을 통해 ‘물화’의 상태 보다는 비가시적인‘개념’을 중시하고, 작품을 지배하는 강력한 하나의 ‘저자’가 아닌 다수의 손에 의한협업을 지향하며, 고정된 결과물이 아니라, 즉흥적이고 직관적인 순간의 선택에 의해 변화할 수 있는 상황을 유도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작가와 다수의 타인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작품이 완성되는 <월 드로잉>은 필연적으로 미술가 개인의 천재적인 역량에 의해 작품이 탄생한다는 ‘오리지낼리티’의 기존 관념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는 기존 미술사학자들이 주장했던 후기 산업사회의 ‘행정’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협업적 창의성(collective creativity)’을 모델로 하는 21세기형 산업구조와 연결된다.
<월 드로잉>의 ‘협업적’ 방식은 과거 르네상스 이전의 중세적인 길드의 체계와 유사하다고 할 수도 있겠고, 오랜 기간 동안 구전(口傳) 혹은 필사의 과정을 거치면서 수정되고 더해졌던 중세의 글쓰기 방식과 연결된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협업적 창의성’은 사실 수세기전의 사례가 아니라, ‘분산’과 ‘공유’를 강조하는 대안적인 현대의 생산 방식이다. 본 연구에서는 르윗의 <월 드로잉>과 그 작업 방식이 개인이 독점하는 근대적인 ‘오리지낼리티’의 한계를 인식한 지점에서 출발한 ‘협업적 노동’의 결과물이라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