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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일제 강점기 울릉도 사회에 관한 연구
A Study on Ulleungdo Societ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학문후속세대양성_학술연구교수& #40;인문사회& #41;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6S1A5B5A02021397
선정년도 2016 년
연구기간 3 년 (2016년 07월 01일 ~ 2019년 06월 30일)
연구책임자 유미림
연구수행기관 강원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는 일제 강점기 울릉도 사회상을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울릉도 사회상이란 역사 및 정치행정, 산업, 금융재정, 교육, 교통통신, 치안을 포함한 사회 전반의 상황을 의미한다.
    일제 강점기 울릉도 사회에 관해서는 연구가 수행된 적이 거의 없다. 그 이유는 첫째, 독도를 둘러싸고 한일 양국간 영유권 문제가 국가적인 의제이다 보니 연구자들도 ‘독도’ 연구에 집중해왔기 때문이며, 둘째, 강점기 자료가 총독부 간행물, 통계자료, 저술과 신문·잡지, 일본인 기록 등 방대하므로 이를 조사·검토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큰 반면, 밝혀질 수 있는 내용은 제한적이라고 여겨서이다. 조선총독부의 시정연보, 경상북도 관련 시정통계, 신문·잡지를 검색하는 일은 그 번거로움이 더욱 크다. 그런데 최근에는 강점기 자료들이 많이 정리·공개되고 있고 그 가운데 일부는 온라인으로도 검색이 가능해지는 등 연구 환경이 많이 달라졌다.
    한편 그동안 주력해온 ‘독도’ 연구가 기존의 사료 안에서 중복연구를 반복하고 있으므로 새로운 사료를 발굴하기 위해서도 ‘울릉도’로 그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대되고 있다. 현재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양국의 주장은 팽팽히 맞서고 있다. 우리는 1905년 이전 독도가 한국의 고유영토였음을 강변하지만, 일본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새로운 사료의 발굴이 절실한 시점이다. 그런데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일제 강점기에 ‘독도’를 언급한 문헌이 없다. 조선총독부 체제 하의 문헌에서 ‘독도’가 언급된 경우를 발견한다면, 이는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입증하는 데 매우 유리한 증거가 된다. 일본의 논리대로라면, 독도가 일본 영토가 된 이후로는 조선총독부의 관할 아래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서 강점기 역사를 복원하기 위한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독도 영유권 입증을 위한 사료 발굴 차원에서도 ‘울릉도’ 사회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수행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강점기 전후의 문헌자료를 전부 조사한다. 검토할 문헌에는 강점기 이전과 통감부 체제하의 지리지 및 강점기 지리지, 1910년 이전 외무성 관리의 ‘울릉도 현황’ 보고서, 신문과 잡지, 조선총독부 시정연보와 통계서, 일본인의 저술과 구술서, 한국인의 기록이 포함된다. 본 연구는 이들 자료를 검토, 식민통치체제에서 울릉도 사회의 여러 양상을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본 연구의 연차별 세부목표는 다음과 같다.
    1년차에는 1900-1910년 사이에 간행된 지리지 및 신문 기사를 검색하여, ‘울릉도’와 관련된 내용을 전부 추출하여 분석한다. 지리지는 1900년부터 1910년 사이의 조선·일본 지리지를 검토하되, 수로지를 포함한다. 1900년부터 1910년 사이의 신문은 일본의 울릉도 침탈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응이 주를 이루고 있으므로 그 내용을 검토한다. 부산 영사관의 관리들은 병합 이전 울릉도 상황을 외무성에 보고했는데 그 보고서도 분석한다. 1906년 울릉도를 조사한 오쿠하라의 저술은 강점기 이전의 울릉도를 자세히 기술하고 있으므로 강점기의 양상과 비교하기에 적절한 자료이다.
    2년차 연구는 1911년부터 1945년 사이에 간행된 지리지 및 신문·잡지, 일본인의 현지조사 기록을 검토하여 울릉도 사회를 본격적으로 조명하는 데 목표를 둔다. 지리지는 1910년을 기점으로 전후의 양상을 비교·분석한다. 신문기사는 분석할 내용을 항목으로 설정하여 각 항목마다 검토하되 10년을 단위로 해서 비교 검토한다. 사회상 고찰을 위해 검토해야 할 항목은 주로 인구, 경제·산업, 행정, 치안, 교육, 학교, 종교, 재해, 일본인 현황, 지명변화 등이다. 이 시기에 일본인들이 조사한 울릉도 상황은 울릉도 자연과 지명의 주요 내용을 구성한다.
    3년차 연구는 조선총독부 간행물과 경상북도 통계자료, 일본인 구술기록, 한국인의 회고담 등을 검토한 뒤 1∼2년차 연구 내용과 종합하여 울릉도 사회의 전체상을 총체적으로 도출해내는 데 목표를 둔다.

  • 기대효과
  • 본 과제의 연구결과가 기여할 수 있는 분야는 크게 학문적 기여와 정책적 기여로 나눌 수 있다.
    우선 본 과제는 그동안 연구의 공백상태로 있던 강점기의 울릉도 역사와 사회상을 복원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본다. 지금까지 일제 강점기 울릉도 사회와 일본인의 수탈 상황이 연구된 적이 없었다. 본 연구가 밝혀낼 강점기 울릉도 사회상에는 다음과 같은 세부 사항이 포함된다. 울릉도의 연혁, 행정 구획의 변화, 인구, 농업, 상업·무역, 금융, 재정, 어선 보유 현황, 어획고, 교통, 통신, 체신, 전기전력 시설, 경찰, 교육현황, 위생, 종교, 기후, 기근·자연재해, 양잠, 인삼 등 부업, 도민의 이주 상황, 일본인 현황 등이다. 현재 『울릉군지』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인구변화와 학교 숫자 정도이다. 이를 제외한 기타 항목에 대한 파악은 울릉도 사회뿐만 아니라 일본의 식민통치 현황과 수탈상황을 함께 입증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이런 실상이 밝혀지면 역사교과서나 경상북도 관련 교재 및 군지의 강점기 부분을 보완하는 데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본 연구결과는 기존 연구의 오류를 바로잡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울릉도’를 집중적으로 다룬 것으로 『울릉군지』(1989, 2007)가 있는데, 일제 강점기가 매우 소략할 뿐만 아니라 오류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기술한 내용의 출전을 밝히지 않은 경우가 많아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하기가 어렵다. 본 과제는 군지의 내용을 검증하고 나아가 오류가 많은 ‘호칭’과 관련하여 호칭의 유래를 밝힐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며, 군지에 기술된 내용의 출전을 추적한다.
    두 번째, 본 과제의 성과를 활용할 수 있는 분야는 울릉도와 독도를 관할하고 있는 경상북도와 울릉군의 정책 수립에서이다. 울릉군은 독도와 관련된 기념관과 박물관을 설립해왔지만 최근에는 해양 관련 기관을 신설하고 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울릉도의 역사와 문화 관련 콘텐츠이다. 울릉군은 특산물 및 관광자원과 관련된 문화콘텐츠를 개발하고 있지만, 올바른 역사와 유래가 확립되어 있지 않으면 오류 없는 콘텐츠를 개발하기가 쉽지 않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지명과 사물, 이를테면 호박엿과 명이나물, 깍새, 살구남과 행남, 흑작지와 현포, 예선창과 왜선창, 통구미 등을 보더라도 명확한 유래를 제공하고 있는 연구서가 드물다. 본 과제는 사물과 지명 유래를 추적하기 위해 근대 이전 문헌부터 검토하여 체계적인 설명을 제공하고 이로써 콘텐츠 개발 및 관련 정책 수립에 유용한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본 과제는 독도 영유권과 연계시킬 만한 단서를 찾을 수 있도록 관련 정보를 제공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울릉도 역사는 독도 어업의 역사를 포함한다. 울릉도의 일본인은 1920년대 초반에는 독도에서 전복을 채취하다가 1925년경에는 독도의 근부어업권을 사들였고 한국인을 고용하여 어로활동을 하고 통조림공장을 운영했다. 패전 후 울릉도의 한인들이 독도로 가 어로활동을 했던 것은 강점기 동안에도 독도가 그들 생활공간의 일부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은 강점기에 독도에서 어로활동을 했던 자국민의 구술을 집중적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본 과제는 강점기 울릉도민의 독도 어로 활동을 일본인과 한국인의 기록을 통해 입증하고 이를 독도 영유권과 연계시킬 수 있도록 논리적 근거를 제공할 것이다. 본 과제가 울릉도 역사의 복원, 나아가 독도 관련 사료의 발굴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영토권의 확립과 공고화를 기하는 국가 정책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다.

  • 연구요약
  • 본 연구는 일제 강점기 울릉도 사회상을 총체적으로 고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 울릉도 사회상이란 울릉도의 연혁과 정치행정, 산업, 금융재정, 교육, 교통통신, 치안, 재해상황 등을 포함한 사회 전반의 현황을 의미한다.

    연차별 연구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1년차에는 1900-1910년 사이에 간행된 지리지 및 신문 기사에서 ‘울릉도’ 관련 내용을 검토함으로써 병합 이전 울릉도의 양상을 살펴본다. 이 시기의 신문은 주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가 관련 사실을 보도했다. 1906년 시찰단의 일원이었던 오쿠하라 헤키운(奥原碧雲)은 당시 울릉도의 상황, 즉 도민의 생업과 수출입 현황, 교통, 풍속과 정치, 일본 이주민에 대해서까지 상술하고 있으므로 1906년의 울릉도 사회를 고찰하기에는 가장 적절한 문헌이다. 오쿠하라의 저술을 부산영사관 관원들의 보고서와 대조해보면, 일본의 정책적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2년차에는 1911년부터 1945년 사이에 간행된 지리지 및 신문·잡지를 검토하여 울릉도 사회상을 본격적으로 도출해내는 작업을 한다. 1910년 이전의 지리지가 과거의 정치체제, 풍속 등의 기술에 역점이 놓였다면, 병합 이후는 지리지 제목(『최근 조선사정 요람』, 『최신 조선지지』 등)이 말해주듯이, 최근 정보를 수집하여 기술하는 데 역점이 놓여 있다. 수로지는 병합 후인데도 조선 수로지와 일본 수로지가 둘 다 울릉도와 독도를 다루고 있어 호칭 혼란을 겪고 있으므로 그 양상을 검토한다.
    강점기 울릉도 현황을 가장 빠르게 알려준 매체는 신문이다. 특히 매일신보와 동아일보는 가장 많이, 그리고 자주 보도한 매체이므로 이들이 울릉도 상황을 어떻게 보도했는지 그 차이에 주목하면서 검토한다. 『동광』, 『조선』 『조선휘보』, 『별건곤』 『삼천리』 『신천지』 등의 잡지에도 울릉도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으므로 이로써 당시 지식인들의 관심분야와 울릉도 인식 수준을 알 수 있다. 울릉도를 조사한 바 있는 이도시야 쓰토무(石戶谷勉),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 도리이 류조(鳥居龍藏) 등의 기록을 검토하여 울릉도 사회 및 자연지리에 관한 인식을 살펴본다.

    3년차 연구의 목표는 조선총독부 간행물과 일본인 기록, 한국인 거주자의 기록 등을 검토한 뒤 2년차 분석내용을 함께 종합하여 울릉도의 총체적인 사회상을 그려내고자 한다. 조선총독부가 현세(現勢)를 조사한 자료에는 울릉도의 현황을 함께 기술하고 있으므로 이를 검토한다. 울릉도에 거주했던 손순섭과 문보근의 기록을 검토하되 개인 기록과 공식 기록의 차이에 유념하면서 오류를 교차 검토한다. 1950년대 초 일본 외무성은 강점기 울릉도·독도에서 활동했던 어업인을 조사한 바 있는데, 그 가운데 울릉도와 마산에서 통조림공장을 운영했던 오쿠무라 헤이타로(奧村平太郞)에 관한 행적을 추적하여 독도와의 관련성도 밝혀낸다.

    모든 자료에 대한 검토를 마치면 이를 다시 시기별, 주제별로 분류· 종합하여 일본 통치기 울릉도의 정치경제적 변화, 주민과 일본인과의 관계, 생활상, 재난상황 등을 포함한 전체적인 사회상을 도출할 것이다.
    연구방법은 기본적으로는 문헌검토를 위주로 한다. 검토 대상은 지리지와 수로지, 일본인의 저술, 조선총독부 간행물, 신문, 잡지, 일본 외무성 기록, 개인 기록 등 모든 기록물을 포함한다. 문헌 조사와 수집은 도서관 조사를 기본으로 하되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한다. 일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외에도 아시아역사자료센터와 국회도서관에서 디지털 자료를 일부 제공하므로 이를 활용한다. 필요한 경우 울릉도와 일본에 출장을 가서 자료를 수집하며, 울릉도 주민도 면담한다. 신문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카인즈에서 제공하는 ‘고신문 DB’를 활용하고, 필요한 경우 영인본이나 마이크로필름을 열람한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이 연구는 일제 강점기 울릉도 사회상을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일제 강점기 울릉도 사회상을 보여주는 문헌은 지리지와 조선총독부 통계서, 울릉도청의 조사기록, 신문 잡지, 울릉도민의 기록, 그리고 일본인의 기록 등이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런 자료를 망라하여 분석하지 않아 강점기 울릉도사회의 전체상이 조망된 적이 없었다. 1910년 이전에는 주로 지리지 등에서 울릉도 현황을 다루었는데, 선학(先學)의 지리지를 답습한 경우가 많다. 선학의 지리지는 실지를 조사하고 쓴 기록이기보다는 문헌에 의거한 것이 많아 오류도 적지 않다. 울릉도의 수산자원이 주목을 받으면서 지리지는 점차 수산지의 성격을 띠고 그 내용도 자세해졌다. 울릉도에는 일본인이 개척 이전부터 왕래하고 있었으므로 개척령(開拓令) 이후 입도하기 시작한 한국인이 증가하면서 양국민이 갈등을 빚는 경우가 많고 자원을 무단으로 침탈해가서 1899년과 190년에는 잦은 조사가 있었다. 특히 1900년에는 양국이 공동조사단을 파견하여 울릉도에 살고 있는 양국인을 대질 심문하여 조사하여, 도감이 일본인의 수출 화물에 100분의 2를 세금으로 징수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일본 조사단은 울릉도의 산림과 면적 등을 자세히 조사했으나 해산물이나 목재에 대한 전망은 밝지 않다고 보고했다.

    1902년 일본은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경찰관 주재소를 신설하고 부산영사관 소속의 경위와 순사 3명을 주재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때의 보고서인「한국 울릉도 사정」를 보면, 당시 한인은 556호, 3,340명이었다. 일본인들은 상인조합을 결성하고 목재와 해산물을 일본으로 가져가고 있었지만 한인들은 일본인의 배를 이용하여 울산이나 부산으로 가서 필수품을 사와야 할 형편이었다. 그나마도 1년에 2-3번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울릉도의 교통편은 열악했다.

    1905년 일본이 독도를 불법으로 편입한 이후 1906년 시찰단에 의한 본격적인 조사와 외무성 관리에 의한 조사가 있었는데 이들 조사로 밝혀진 것은 울릉도 산품에 대하여 일본인들이 울도군에 수출세를 납부하고 일본으로 수출했다는 사실이다. 1904-1905년의 울릉도 수출품에는 독도강치가 포함되어 있었다. 1909년경 일본인은 224가구, 768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1907년에는 일상조합이 폐지되고 ‘일본인회’가 조직되었는데 회원은 450명 정도였다.
    1910년 7월경의 한국인은 4900여 명이고 일본인은 209가구정도였는데 1913년에는 한국인이 6900여 명, 일본인이 1230(기록에 따라 2천 여 명)여 명으로 늘었다.

    이렇듯 울릉도의 상황은 개척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를 신속히 알린 것은 신문이었다. 1900년 이전에는 개척민의 정착과정이나 인구 변동, 일본인 침탈에 대한 도감의 보고를 주로 보도했다면, 울도군이 되는 시기를 전후해서는 도감 배계주의 소송 건, 일본인 화물에 대한 과세 건, 일본인의 철수 건 등을 주로 보도했다. 신문은 또한 울릉도의 오징어어획고, 인삼 재배, 특용작물, 재난 상황, 교육기관, 교통 통신 문제에 대해서도 보도했다. 신문은 몇 번(1913, 1924, 1928, 1931, 1934)에 걸쳐 울릉도를 소개하는 특집 기사를 실었고, 1934년은 기근과 폭설이 있던 해여서 그와 관련된 보도가 잦았다. 신문이 보도한 인구 통계는 조선총독부 통계와 다른 경우가 있으므로 비교해서 볼 필요가 있다.

    잡지도 울릉도를 소개하는 글을 실었는데 특히 안용복의 행적이나 울릉도의 민속, 식물 생태 등에 관한 양국 지식인의 글을 실었다. 특히 일본인은 울릉도의 식물이나 문화를 조사하여 무리하게 일본과의 연결성을 찾거나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으로 엮으려 하였다.

    일제 강점기 울릉도 사회상의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조선총독부가 조사하여 간행한 통계자료이다. 통계자료는 인구와 직업별 통계, 경지면적, 과수, 특용작물, 어획고, 축우, 양잠, 농작물, 교육기관, 학생 숫자, 공공기관과 조합, 조합원, 교통과 선박 보유현황, 토지가격, 항로, 위생상태, 무역, 상공업, 각종 공동단체와 산업단체 등을 망라하고 있다. 조선총독부는 임야정보와 수출입 현황, 수산물 어획고, 학교의 입학생 숫자는 물론이고 각 가구의 가축 숫자 및 암수 현황, 저금 액수, 각 종교의 신도 숫자까지 파악하여 기술했다. 울릉도에서 주요 부업은 양잠이었고, 축우(畜牛)가 활발해서 가구 당 소 2마리를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할 정도였다. 1930년대에는 김양식도 이뤄지고 있었다. 조합 활동이 활발해서 1930년대에 학교조합은 102명, 금융조합 887명, 울릉도농회(鬱陵島農會) 1220명, 울릉도어업조합 600명이 조합원이었다. 1936년 울릉도에는 의사 1명, 산파 1명, 의생(醫生) 2명, 약종상 8명, 수의사 1명이 있었다. 항로는 월 4회 내지 5회 부산과 울릉도 및 울릉도-사카이항을 운항하는 기선이 있어 교통을 담당했다.

    본 과제에서 중점적으로 밝힌 부분은 일본에 의한 울릉도 침탈사이다. 대부분의 통계서는 인구 변화 및 행정체제의 변화를 아울러 기술했다. 울릉도의 무역 및 상공업은 개척 당시는 매우 유치한 수준이었으나 점차 상거래가 많아져 중매업자가 생겨났다. 1928년에는 20여 만 엔의 수출, 17여 만 엔의 수입이 있을 정도가 되었다. 1910년대와 1920년대의 어획고를 통계 낸 문헌은 드물지만, 특히 오징어 제품은 현지 어업조합의 위탁판매에 부쳐져 사카이미나토를 경유하여 일본 각지와 중국에 수출되거나 부산으로 내갔다. 1930년대에 어획된 주요 수산물은 고등어와 오징어였다. 조선총독부는 울릉도의 자원 침탈을 위해 1911년 어업조합과 수산조합 설립에 관한 규정을 두었고, 어업조합규칙(1912)을 공포했다. 1914년 600명의 회원으로 조직된 어업조합은 일본인이 조합장과 이사, 감사 등으로 있으면서 침탈에 앞장섰다. 한국인이 어업조합장이 된 것은 해방 후인 1946년 2월이다.

    일본인은 울릉도청을 비롯한 공공기관의 행정을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공동단체와 산업단체도 지배하며 식민정책 수행에 앞장섰다. 이들이 기록한 시정자료는 그들의 시각에 따라 통계를 냈을 뿐 양국인의 생산과 분배 현황이 어떠한지, 그 가운데 한인이 얼마나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당했는지에 관해서는 언급한 바가 없다. 당시 공공기관장과 무역업자, 수산업자, 선박 주인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강점기 통계 자료는 이 점을 감안하고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강점기 자료는 개척 이후부터 해방 이전까지 울릉도 사회의 변모를 엿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 영문
  • A Research of Ulleungdo Societ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purpose of this Research is to examine the overall picture of Ulleungdo societ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Documents that show Ulleungdo society in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nclude geography and statistics of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survey records of Ulleung-gun, newspapers and magazines, records of Ulleungdo residents, and Japanese records. However, until now, the overall picture of the colonial Ulleungdo society, which did not analyze all such materials, has never been revealed. Before 1910, Ulleungdo’s society was explained by geography, but in many cases it followed the geography of the predecessor scholar. The geography written by the predecessor is often based on the document rather than a record of investigating the field, so there are many errors. As Ulleungdo's fisheries resources began to attract attention, the geography of Ulleungdo gradually took on the character of a fishery geography and its contents became more concrete.

    Japanese people came and went before Ulleungdo was pioneered, but since the pioneering Koreans came in and the number increased significantly, people in both countries often struggled. Moreover, the Korean Empire frequently conducted field surveys in 1899 and 1900 when Japanese people illegally brought resources to Japan illegally. In particular, in 1900, both Korea and Japan dispatched a joint survey team to investigate the people of the two countries living on Ulleungdo through a quality inquiry. The joint survey team grasped the fact that the island supervisor collected 2% tax on export cargo to Japanese. The Japanese survey team reported in detail the forest and area of Ulleungdo to the country, but reported that the prospects for seafood and timber were not bright.

    In 1905, after Japan illegally incorporated Dokdo into Japan, the Japanese public-private inspection team and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officials investigated Ulleungdo in earnest. These surveys revealed the fact that Japanese people exported Ulleungdo products to Japan by paying an export tax to the Uldo county governor. During 1904-1905, Ulleungdo's exports included Dokdo’s sea lions.
    Around 1909, the Japanese had 224 families and a population of 768 people living on Ulleungdo. In 1907, the Japanese merchant association was abolished, and the “Japanese society” was organized to have about 450 members. Around July 1910, there were 4,900 Koreans population and about 209 Japanese families, but in 1913 there were 6900 Koreans population and 1230 Japanese people (2,000 people differ based on records).

    In this way, Ulleungdo has been hatched since its development. And it was the newspaper that reported this hatching most quickly. Before 1900, the newspaper mainly reported on the settlement process of the pioneers, population movements, and the reports of the island inspector of the Japanese invasion. However, before and after the time of becoming Uldo-gun(county), the newspaper mainly reported on the lawsuits of the Dogam(Ulleungdo supervisor), the case of Japanese cargo and the withdrawal of the Japanese. The newspaper also reported on Ulleungdo's squid catch, ginseng cultivation, special crops, disaster situation, breeding equipment, traffic and communication issues in Ulleungdo. The newspaper published a special article introducing Ulleungdo multiple times, and since 1934 was a year of famine and snowstorm, there were many reports related to it. The demographic statistics reported by the newspapers may differ from the statistics of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The magazine also wrote a statement of intellectuals from both countries introducing Ulleungdo, but in particular, a statement about the ancestry of Ahn yong-bok and the folklore and plants of Ulleungdo. In particular, the Japanese surveyed Ulleungdo's plants and cultures and tried to search for connections with Japan forcibly, or to use the logic that their ancestors were the same.

    The best representation of the hatchery of Ulleungdo societ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s the statistical data published by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Statistical data include population and cultivated area, fruit trees, special crops, catch, cattle, sericulture, crops, breeding equipment, public equipment and associations, current ship ownership, land status, route, sanitary conditions, Documents related to trade, commerce and industry, and various traps.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described forest information, import/export status, fishery catches, number of enrolled students, as well as the number of livestock and it’s male and female status, as well as the number of worshipers in each sect.
    Cattle were also active so that each housekeeper aimed to raise two cows. The main side job on Ulleungdo was sericulture. In the 1930s, laver culture was also practiced. In 1936 Ulleungdo had 1 doctor, 1 midwife, 2 acupuncturists, 8 Company selling medicine ingredients and 1 veterinarian. On Ulleungdo there were steamers that operated Busan and Ulleungdo, Ulleungdo and Sakaiminato 4-5 times a month.

    The focus of this research is the history of Japan's invasion of Ulleungdo. Most statistics documents describe both demographic and administrative regimes. Ulleungdo's trade and commerce and industry were very childish at the time of its reclamation, but gradually the number of merchants left and middlemen were born.
    In the fishery industry, squid products were sold by consignment sales by local fishermen's associations, exported to various places in Japan and China and transferred to Busan via Sakaiminato. The main marine products caught on Ulleungdo in the 1930s were mackerel and squid. The Korean government promulgated the fishery association rules in 1912 for the invasion of fishery resources on Ulleungdo. The fishermen's union led the invasion with the Japanese being the union head, directors and auditors. The Japanese dominated not only the administration of public machinery, but also the various common and industrial sites, leading the colonial policy.
    The administrative documents recorded by the Japanese only gave statistics based on that perspective. And the statistics do not describe how the Koreans and Japanese are in production and distribution, and how the Japanese exploited resources and vitality from the Koreans. At that time, the public captain, traders, fishermen, and shipowners were all Japanese. We need to take this into consideration when looking at the oligopoly statistics. Despite these limitations, however, the oligopoly materials are meaningful in that they provide a glimpse of the Ulleungdo from the beginning of its development until its release.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이 연구는 일제 강점기 울릉도 사회상을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일제 강점기 울릉도 사회상을 보여주는 문헌은 지리지와 조선총독부 통계서, 울릉도청의 기록, 신문 잡지, 울릉도민의 기록, 그리고 일본인의 조사 기록 등이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런 자료를 분석하지 않아 강점기 울릉도의 전체상이 조망된 적이 없었다. 1910년 이전에는 주로 지리지 등에서 울릉도 현황을 다루었는데, 1890년대 선학의 지리지를 답습한 경우가 많다. 울릉도 수산자원이 주목을 받으면서 지리지는 점차 수산지의 성격을 띠었다. 울릉도에는 일본인이 개척 이전부터 왕래 혹은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한인과 갈등을 빚는 경우가 많아 여러 차례 양국 정부가 조사한 적이 있다. 1900년에는 양국 공동조사단이 양국인을 대질 심문하여 조사했고, 1902년에는 일본인 경찰관리가 주재하면서 현황을 조사하여 본국에 보고했다. 당시 일본인들은 상인조합을 결성하고 목재와 해산물을 일본으로 가져가고 있었지만 한인들은 일본인의 배를 이용하여 울산이나 부산으로 가서 필수품을 사와야 할 형편이었다. 그나마도 1년에 2-3번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울릉도의 교통과 선박은 열악했다.

    1905년 일본이 독도를 불법으로 편입한 이후 1906년 시찰단에 의한 본격적인 조사와 외무성 관리에 의한 조사가 있었는데 이들 조사로 밝혀진 것은 울릉도 산품에 대하여 일본인들이 수출세를 납부하고 일본으로 수출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수출품에는 독도강치가 포함되어 있었다.

    울릉도가 주목받는 섬이다보니 신문 보도가 잦았다. 1900년 이전에는 개척민의 정착과정이나 인구 변동, 일본인 침탈에 대한 도감의 보고가 주를 이루었다면, 울도군이 되기 전에는 도감 배계주의 소송 건, 일본인 화물에 대한 과세 건, 일본인의 울릉도 철수 건 등이 주로 보도되었다. 신문은 또한 울릉도의 경제 특히 오징어 어획이나 인삼 재배, 특용작물 재배 현황, 재난 상황, 교육기관, 교통 문제에 대해서도 보도했다. 잡지 역시 울릉도에 대해 소개하는 글을 실었는데 특히 안용복의 행적이나 울릉도의 민속, 식물 생태 등에 관한 양국 지식인의 글을 실었다.

    조선총독부는 울릉도의 자원 침탈을 위해 어업조합과 수산조합 설립에 관한 규정을 두었고, 어업조합규칙을 공포했다. 1914년 600명의 회원으로 조직된 어업조합은 일본인이 조합장과 이사, 감사 등으로 있으면서 침탈에 앞장섰다 . 한국인이 어업조합장이 된 것은 해방 후인 1946년 2월이다.

    일제 강점기 울릉도 사회상의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조선총독부가 조사하여 간행한 국세조사 및 통계서이다. 통계서는 인구 통계와 경지면적, 과수, 특용작물, 어획고, 축우, 양잠, 농작물, 교육기관과 학생 수, 공공기관과 조합, 조합원, 교통현황, 항로, 위생상태, 무역, 상공업, 각종 공동단체와 산업단체 등을 망라하고 있다. 조선총독부는 임야정보와 수출입 현황, 수산물 어획고, 학교의 입학생 숫자는 물론이고 각 가구의 가축 숫자 및 암수 현황, 저금 액수, 각 종교의 신도 숫자까지 파악하여 기술했다.
    다만 당시 공공기관장과 무역업자, 수산업자, 산박 주인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그런 만큼 산업경제는 철두철미 식민지 수탈체제로서 영위되어 양국인의 생산과 분배 현황이 어떠한지, 한인이 얼마나 많은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당했는지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강점기 통계 자료는 이 점을 감안하고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강점기 자료는 개척 이후부터 해방 이전까지 울릉도 사회의 변모를 엿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는 울릉도 사회가 개척기부터 일제 강점기에 이르는 동안 어떻게 개척되었으며 얼마나 일본이 침탈했는지를 밝혔으므로 그동안 공백상태로 있던 일제 강점기 울릉도 사회상을 밝히는 데 기여했다. 1883년부터 이주가 시작되고 1900년에 울도군으로 승격되었지만 그 추이를 기술한 것은 신문 기사를 제외하면 많지 않다. 현재 『울릉군지』로 파악되는 내용도 인구 변화와 학교 현황 정도에 불과하다.

    본 연구의 결과를 활용할 수 있는 분야는 기념관과 박물관 등의 콘텐츠, 관광안내서와 안내판 제작, 『울릉군지』 개정판에서이다. 울릉도에 건립된 기념관과 박물관은 대체로 독도와 관련된 것이지만, 최근에는 울릉도 관련 해양 기관의 건립이 증가하고 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일제 강점기의 울릉도 역사이다. 울릉도 관련 문화콘텐츠는 주로 특산물 및 관광자원과 연계되어 있는데, 콘텐츠 개발을 하기 위해서도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정확한 역사와 유래이다.

    본 과제는 기존 간행물의 오류를 바로잡는 데도 기여할 것이다. 『울릉군지』(2007)는 ‘전설’ 항목에서 지명의 유래를 일부 언급했지만, 수토기록에서부터 검찰사 이규원의 기록, 강점기 자료에 이르기까지 그 추이를 기술하지 않아 잘못 인용된 유래와 표기가 많다.

    울릉도 역사의 복원은 물론 독도 관련 사료의 발굴, 나아가 독도 영유권 입증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독도 영유권을 공고히 한다는 명분 아래 개발한 교재(부교재)를 보면, 대부분 강점기 역사에 대해서는 기술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울릉도 역사는 독도 어업의 역사를 포함한다. 오쿠무라 헤이타로는 1921년경부터 독도에서 전복을 채취하다 1925년경에는 독도의 근부어업권을 사들였고 한국인을 고용하여 전복과 소라 등의 채취활동을 해왔다. 울릉도민은 이 때문에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계속 인식하며 활용할 수 있었고, 자연히 독도에 대한 영유인식도 지속할 수 있었다. 일본의 패전 후 울릉도의 한인들이 독도로 가서 어로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독도가 그들 생활공간의 일부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본 과제는 울릉도 한인의 독도 어로를 일본인의 증언기록을 통해 입증함으로써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재확인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 색인어
  • 울릉도, 오징어, 지리지, 도세일반(道勢一斑), 도사(島司), 도세(島勢), 울릉군지,
  • 연구성과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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