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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조선후기 서얼 지식인의 계보학-학적 층위와 실학적 지향을 중심으로-
Genealogy of Sŏŏl(庶孼) Intellectual in the late of Chosŏn Dynasty -Focused on Academic horizons and Orientation of Silhak(實學)-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학문후속세대양성_학술연구교수& #40;인문사회& #41;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6S1A5B5A02022214
선정년도 2016 년
연구기간 3 년 (2016년 07월 01일 ~ 2019년 06월 30일)
연구책임자 손혜리
연구수행기관 성균관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과제에서는 시기적으로는 실학사상의 전성기 인물이며 유파로는 이용후생파와 실사구시파를 아우르고 있는 서얼 출신의 지식인인 成海應(1760~1839)과 李圭景(1788~1863)을 주목하여 이들의 학적 층위와 실학적 지향에 대해서 규명하고자 한다.
    성해응은 15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硏經齋全集』을 저술하였다. 이는 조선후기 학문·사상·문학·역사·지리·금석·서화·古董 등 그야말로 다채로운 총서류 저술로서 독자들에게 유용하고 흥미로운 지식 정보를 제공한다. 그는 특히 󰡔詩經󰡕을 중심으로 경전 연구에 치력하였는데, 六經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학문을 위한 학문이 아닌 실용을 위한 經世學이었다. 또 당시 유행하던 고증학에 경도되어 ‘漢宋兼掌’을 주장할 만큼 漢學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고 據事直筆의 기록태도를 견지하였다.
    그로부터 한 세대 뒤인 五洲 李圭景(1788~1856)은 조부인 李德懋(1741~1793)와 부친 李光葵(1765~1817)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의 개화사상 형성에 가교 역할을 한 인물이다. 또 앞 시기에 활약했던 李晬光과 李瀷 등의 실학적 성과를 수집하여 조선후기 학술사에 족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의 저술인『五洲衍文長箋散稿』는 당대의 최신 문물과 기술 및 지식의 집대성을 시도한 것이다.
    성해응과 이규경은 後四家의 뒤를 이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까지 활동한 서얼 출신의 지식인이다. 성해응은 일본을 가본 적이 없는 박지원과 이덕무·유득공·박제가의 일본인식에 큰 영향을 주었던 성대중의 아들이며, 이규경은 이덕무의 손자이다. 이들은 실학사상의 전성기 인물로 이용후생파와 실사구시파를 아우르고 있다는 점 이외에도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우선 신분적으로 서얼 출신이면서 뛰어난 학적·문학적 역량을 지니고 있으며, ‘성대중-성해응-성우증’, ‘이덕무-이광규-이규경’으로 이어지는 家學을 전승하였다. 더욱이 성대중과 이덕무는 절친하였으며, 이후로도 世交를 유지하였다. 성해응은 1788년부터 1800년까지 규장각 검서관으로 재임하였는데 당시 교서관 교리였던 부친 성대중과 나란히 내외각에서 근무하였다. 이규경도 조부와 부친이 검서관으로 성해응과 비슷한 시기에 규장각에서 함께 근무한 바 있다. 한편 이들은 당대 유행하던 고증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박학을 추구하고 실증적인 학문방법을 중시하였다. 그 과정에서 명말 청초에 활약했던 고증학의 개황자인 顧炎武의 영향을 받은 사실이 문집의 곳곳에서 확인된다. 또『연경재전집』과『오주연문장전산고』라는 방대한 분량의 문집을 남겼다. 이는 실증과 박학을 추구한 총서류 저술로 두 서얼 지식인의 실학사상이 온축되어 있다.
    본 연구자는 이러한 공통점을 포착하여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까지 활동했던 규장각 검서관 출신의 서얼 지식인인 성해응과 이규경을 주목하고 이들의 저술인『연경재전집』과『오주연문장전산고』를 통독한 뒤 학술과 문학적인 측면에서 뛰어난 작품을 선별하여 번역하고 그 특징과 의미를 분석하고자 한다. 그리고 시문에 표출된 실학사상을 규명하여 이들의 학적 층위와 실학적 지향을 입증할 것이다.
    따라서 본 과제는 규장각 검서관으로 재임하면서 각종 국내외 귀중본을 두루 열람하고 국고문헌을 편찬 및 교정했던 이력을 염두에 두고 성해응과 이규경이 방대한 저술을 하게 된 동인을 실증적으로 접근하여 탐색하고자 한다. 조선후기 다양한 지식정보를 어떻게 수용하고 변주하였으며 자기화하여 방대한 저술을 남기게 된 것인지, 박학 추구, 漢學에의 경도, 고증적 학문방법 적극 활용, 총서류 저술의 편찬 배경과 방식 및 의미 그리고 이를 통한 학적 층위와 실학적 지향 등을 중심으로 입증할 것이다. 그 결과 18세기 전반에 흥기하여 후반에 정점을 찍으며 꽃을 피웠던 이용후생파의 실학사상이 19세기 전반에 전개된 양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家學의 전승과 계승을 통한 종적, 그리고 검서관 출신의 인적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한 횡적 계보를 교직한다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 조선 지성사의 일면을 해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본 연구는 그동안 담론에 치우쳤던 조선후기 서얼 지식인의 계보학을 구체적인 작품 분석 등 좀 더 세밀한 결을 따라 입증하고 다기한 층위를 확인한다는 점에서 조선후기 학술사와 지성사에 의미가 있다.
  • 기대효과
  • 본 과제의 연구 성과를 통해 발생할 학문적·사회적 파급효과를 예상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성해응과 이규경을 중심으로 한 서얼 지식인들의 학적 층위와 실학적 지향을 통해 조선후기 서얼의 계보학을 탐색할 수 있다. 18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이덕무·유득공·박제가 등은 조선후기 대표적인 서얼 지식인들로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활동하였으며 실학적 사고를 견지하였다. 또 수 차례의 연행을 통해 청의 선진문물을 배우고자 한 결과 북학사상을 지향하였다. 이들을 이어 본 과제에서 다룬 성해응과 이규경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주로 활동한 서얼 출신 지식인들로 각각 방대한 분량의 총서류 저술인『연경재전집』과『오주연문장전산고』를 기록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활약했던 남인 출신의 정약용과 이학규, 양명학파인 李勉伯의 실학사상과의 비교 고찰을 통해 19세기 전반기 서얼 출신 지식인들의 학적 위상과 지형도를 재구할 수 있다.
    둘째,『연경재전집』과『오주연문장전산고』의 인용서목을 전수조사하고 정리하여 분석함으로써 동아시아 서적 수입과 유통, 활용 및 다채로운 지식 정보의 수용과 변주의 구체적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연경재전집』과『오주연문장전산고』는 經史를 비롯하여 학술, 사상, 문학, 지리, 금석, 서화, 풍속, 제도 등 다양한 분야를 두루 포괄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인용서목 또한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망라하였다. 또 성해응과 이규경은 방대한 자료를 널리 취하여 증거를 제시하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고증적 학문태도를 적극적으로 실행한 만큼, 두 저술에 등장하는 인용서목을 통해 조선후기 학술사의 경향을 이해하고 지성사의 외연을 확장할 수 있다.
    셋째, 조선후기 널리 유행한 고증학과 실학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유추할 수 있다. 18세기 이후 조선의 지성계는 박물학적 지식과 고증적 관심이 저술태도의 하나로 부각되고 계승되었다. 박학한 지식과 엄정한 고증을 통하여 학술적 관심사를 연구하는 고증적 학문이 이 시기에 널리 유행하였으며 그 영향은『연경재전집』과『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여실히 표출된다. 실학은 조선후기 형식만을 추구하는 성리학을 비판하며 등장했는데 자유로운 비판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실증적인 방법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그 성과를 실생활에 활용하려는 것이다. 성리학이 초기의 참신한 기운을 잃고 현실 생활과 동떨어진 이론에만 치우치게 되자 사실에 입각한 비판 정신이 제기되고 청에서 들어온 고증학과 서양의 과학적 사고 방식을 받아들여 새로운 학풍이 일어났다. 고증학은 한국 실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학문으로서 매우 치밀하고 꼼꼼하게 실증적 귀납적 연구 방법을 선택하여 종래의 경서 연구 방법을 혁신하였다. 학계에서는 중국 청대의 고증학과 실학 또는 추사의 실학에 고증학이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고증학과 실학의 상관성을 포착한 연구가 시도된 바 있다. 본 과제에서 구체적인 작품 분석을 통해 이해도가 심화된다면 한국한문학사와 한국사상사에서 보다 다각도에서 흥미로운 논의를 이끌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넷째, 본 과제를 통해『연경재전집』과『오주연문장전산고』는 학술적 가치가 제고되어 19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저술 중 하나로 자리잡고, 성해응과 이규경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실학자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다섯째,『연경재전집』과『오주연문장전산고』는 여러 분야에 걸쳐 방대한 분량이 수록되어 있으며 고증적 학문방법을 활용하여 신뢰할 만한 지식과 정보를 대거 제공하는 만큼, 시문학과 경학뿐만 아니라 법률·역사·미술·풍속사·제도사 등 인접학문에 지식정보의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끼치는 영향이 크다.
  • 연구요약
  • 본 과제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규장각 검서관으로 활동하며 방대한 저술을 남긴 성해응과 이규경을 주목하여, 가학의 전통과 계승을 통한 종적 계보와 고증적 학풍과 실학적 지향을 담지한 검서관 출신 문사들의 횡적 계보를 교직하여 조선후기 서얼 지식인의 계보학을 규명하고자 한다. 이들 외에도 이 시기에 활동한 검서관 출신의 서얼 지식인으로 유득공·유본학·유본예 부자와 박제가·박장임 부자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성해응과 이규경에 비하여 가학의 전통과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총서류 저술 또한 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본 과제에서는 실학의 전성기에 활동하고 이용후생파와 실사구시파의 면모를 아우른 성해응과 이규경을 논의의 중심에 둔다. 먼저 이들이 모두 규장각 검서관 출신임을 염두에 두고 조선후기 검서관의 역할과 임무가 훗날 총서류 저술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탐색할 것이다. 이를 위해 성대중과 성해응, 이덕무·이광규·이규경이 검서관으로서 편찬하고 교정한 국고문헌의 목록을 조사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 또 󰡔연경재전집󰡕과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인용서목을 조사 정리한 뒤 검서관 시절 편찬하고 교정한 국고문헌과의 상관성 및 영향관계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이는 본 과제를 위한 연구의 기반으로서 조선후기 서얼 지식인들이 다양한 지식정보를 수용하고 변주하며 자기만의 논리로 펼치게 된 지적 연원을 탐색할 수 있다.
    이를 통해 1년차에는 조선후기 서얼 지식인들의 총서류 저술 편찬 배경과 인용서목을 조사하고 정리, 분석한다. 조선후기 서얼 지식인의 학적 층위와 실학적 지향을 해명하기 위한 전제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활약한 서얼 지식인들이 대부분 규장각 검서관 출신임을 염두에 두고 이들이 편찬하고 교정했던 국고문헌의 목록을 조사하고 정리, 분석한다. 이어 성해응의『연경재전집』과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인용서목을 조사하고 정리, 분석하여, 조선후기 서얼 지식인들이 방대한 지식정보를 수용하고 변주하여 기록한 총서류 저술의 편찬 배경을 탐색할 것이다. 이를 통해 조선후기 서얼 지식인들의 다채로운 지식정보 수용 양상과 지적 교류 및 그 체계를 확인하여 조선후기 서얼 지식인의 학적 층위와 실학적 지향을 규명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할 것이다. 2년차에는 ‘성완-성몽량-성대중-성해응’, ‘이덕무-이광규-이규경’으로 이어지는 家學의 전통과 계승을 중심으로 한 조선후기 서얼 지식인들의 종적 계보학을 고찰한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가학의 전통과 계승을 통한 실학적 사고의 형성과 이용후생-성대중과 성해응을 중심으로」와 「조선 후기 서얼 지식인의 고염무에 대한 인식과 수용, 그리고 경세학-이덕무와 이규경을 중심으로」를 발표할 예정이다. 3년차에는 서얼 지식인들의 인적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하여 학적 층위와 실학적 지향을 통해 조선후기 서얼 지식인의 횡적 계보학을 규명한다. 성대중과 성해응, 이덕무와 이규경은 뛰어난 역량을 지닌 서얼 출신의 지식인들로 평생 동안 재야에서 학문 활동을 한 이규경을 제외하곤 모두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서얼이라는 비슷한 처지에다 규장각 검서로 활동한 경력,『청장관전서』·『연경재전집』·『오주연문장전산고』라는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역작을 저술하였다.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두고 구체적인 작품 분석을 통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주로 활동한 성해응과 19세기 전반에 주로 활동한 이규경의 학문과 저술 및 사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해명해야 한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성해응과 이규경의 七經孟子考文에 대한 인식-일본 학술을 바라보는 시각을 중심으로」와「조선후기 서얼 지식인의 계보학-학적 층위와 실학적 지향을 중심으로」를 발표할 것이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 과제의 성과를 연차별로 소개하면서 연구 내용을 요약하고자 한다.
    첫째, ‘成仁鎬의 1869년 연행 체험과 淸 문사와의 千里心交’이다. 竹澗 成仁鎬(1815~1887)는 조선 후기 서족 명문의 후손으로, 그의 집안은 성완-성몽량-성대중 등 3대에 걸쳐 제술관이나 서기로 일본 사행에 종사하였다. 19세기에 들어와, 부친 성우증과 숙부 성헌증에 이어 성인호는 1869년 동지사행에 자제군관으로 참여하여 『遊燕錄』 1책을 저술하였다. 이는 1869년 연행과 관련하여 전하는 유일한 저술인 만큼 자료적 가치가 있다. 따라서 최근 발굴된 문집인 『竹澗集』 2책을 바탕으로 성인호의 생애와 저술을 소개하고 『유연록』을 함께 검토하여 관련 기록의 부재로 공백화된 1869년 연행에 관한 제 양상을 구체적으로 논증하였다. 이를 통해 학계에 소개되지 않은 한 서족 문사의 생애와 저술, 연행 체험과 청 문사와의 교유 양상과 의미를 규명하여 이 시기 연행록 연구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가 있다.
    둘째, ‘성해응의 서북 지역에 대한 인식과 비판- 『續罪言』을 중심으로’이다. 조선 후기 정조 대에 규장각 검서관을 역임한 서족 출신의 지식인인 成海應(1760∼1839)의 「續罪言」을 중심으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진단하고 19세기 전반 서북 지역의 민심을 수습하며 제도적 모순을 개혁하기 위해 학적 대응을 한 사실을 주목하였다. 「속죄언」은 글을 쓸 만한 처지가 아닌데 외람되이 쓴다는 의미심장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獎人才」․「擇守令」․「通吏胥」․「禁倖民」․「罷妓樂」․「正田制」․「正軍制」․「畜貨財」 등 8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종의 서북지역 개혁안이다. 이러한 인식과 비판은 이후 서북 지역에 부임하는 지방관을 전송하면서 쓴 글에서 반복되어 강조되는 만큼 지속적이고 체계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소수의 세도가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民에 대한 수탈이 가중되던 19세기 전반의 세도정치를 비판하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성해응은 서북 지역을 개혁하기 위한 비전과 대책을 지니고 있었지만 실행할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를 정책화하여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지위에 있던 이들에게 자신의 개혁안을 제시하고 강조함으로써 어지러운 세상과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고자 한 것이다. 경세의식의 소산인 셈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조선 후기 한 서족 지식인의 학적 대응을 통해 시대적 사명에 부응한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셋째, ‘成海應의 送序를 통해 본 경세의식’이다. 성해응이 저술한 22편의 送序를 대상으로 전체 작품의 개요를 파악한 뒤 내용을 분석하고 의미를 도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송서란 길 떠나는 이를 전송하며 위로와 격려를 해주는 글이다. 성해응의 송서 작품을 주목하는 이유는 조선 후기 사상 가장 많은 편수의 송서를 저술하였거니와 여기에는 사명을 받고 연행을 가거나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이를 전송하는, 즉 공적인 영역의 송서가 14편이나 실려 있기 때문이다. 성해응은 송서를 써 준 대상과 世交가 있는데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저술에 치력할 때 지은 작품이 대부분이다. 학문이 노성한 상태에서 본인의 의식이 잘 집적되어 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성해응은 청도군수로 부임하는 金箕書에게 改量의 중요성과 민생의 안정을 강조하였으며, 연행하는 조카 成佑曾과 趙萬永에게는 중국에 변고가 있을 경우 조선이 영향을 받아 위험해질 것을 경계하고 覘國을 통해 대비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 연장선에서 이천과 춘천 등 한때 고대 국가의 수도였던 동국의 경계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식견을 지니기도 하였다. 그의 송서에는 조선 후기 사회의 근간을 뒤흔든 체제 모순에 대한 비판이 지속적이면서도 강도 높게 제기되어 있다. 특히 서북 지역뿐만 아니라 삼남의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이에게 탐관오리와 간악한 吏胥, 倖民 등으로 이루어진 구조적 병폐를 지적하고 올바른 인재를 등용할 것을 거듭 강조하였다. 송서에 표출된 성해응의 이러한 의식은 실학적 사고에 바탕을 둔 경세의식의 소산이라 평가할 수 있다.
    넷째, ‘成大中의 實用에 대한 認識과 經世學’이다. 18세기 영・정조 대에 교서관 교리와 북청부사 등을 역임한 靑城 成大中(1732~1809)은 조선 후기 史上 서족 출신으로 가장 높은 품계에 오른 인물이다. 그 배경에는 순정한 학식과 필법을 구사하여 정조의 지우를 입은 것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순정한 문체만큼 주목해야 할 것이 그가 ‘學의 用’과 ‘文의 敎’를 강조한 점이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성대중의 實用에 대한 認識을 바탕으로 實心實政을 행하여 時弊를 구제하는 데 주력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였다.
    성대중은 연행하는 이를 전송하면서 비록 오랑캐의 나라이긴 하지만 삼대 예악의 옛터인 만큼 서적과 측후, 兵刑田郭 제도와 같은 선진 문물을 수용하여 저들의 장점을 취하고 우리의 단점을 공격하여 자강의 방책으로 삼을 것을 당부하였다. 또 울진・흥해・북청 등의 지방관으로 재임하면서 호전법을 시행하여 군역의 폐단을 제거하는 등 지속적이면서 적극적으로 實政에 임하였다.
    요컨대 성대중의 ‘實用’의 궁극적 목표는 세상의 교화 즉 ‘經世學’인 것이다. 이를 통해 六經을 근본으로 하여 古를 지향하는 등 복고적 문학론을 견지한 것과는 또 다른 층위에서 실심실정을 통한 실용과 경세학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실행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이상의 연구 성과를 통해, 학적 층위와 실학적 지향을 중심으로 한 조선 후기 서얼 지식인의 계보학을 확인하였다.
  • 영문
  • I would like to summarize the findings by introducing the results of this research project by year.
    First is A Study on Sŏng, InHo’s Experience as Diplomatic Envoy to China and Companionship of Scholars in Qing Dynasty in the Late 19th Century.
    This paper studies a longing for village through experience as a diplomatic envoy to China and the companionship of scholars in Qing Dynasty. Sŏng, InHo’s family participated in diplomatic envoy to Japan as a recorder(Called Chesulkwan) for three generations. In the 19th century, Sŏng, InHo went to China as a diplomat(Called Chachekunkwan) in diplomatic mission of 1869, and wrote Yuyŏnlok(󰡔遊燕錄󰡕). It is a valuable material which is the only record of diplomatic mission in the year of 1869.
    So, this paper introduced Sŏng, InHo’ life and his book through Chukkanjip(󰡔竹澗集󰡕), and also demonstrated an aspect of diplomatic mission in 1869 through Yuyŏnlok. It is very meaningful to investigate a descendant from a concubine(Called Sŏchok)’s life, his writing, and aspect of friendship of scholars in Qing Dynasty, and set the fundament of yŏnhaenglok research.
    Second is A Study on the Perception and Criticism of Sŏng Haeŭng(成海應)’s Northern Region- Focused on Sokchoeŏn(「贖罪言」)
    This paper examines cause of the Hong Kyŏngnae rebellion and academic response to reform institutional contradiction settling the public sentiment of the Northern region in the early 19th century focused on Sokchoeŏn of Sŏng Haeŭng who was an intellectual of descendants from a concubine and inspector of the archive in King Jeongjo period. Sokchoeŏn contains unmerited meaning, and is made up of eight books such as Changinjae(「獎人才」), T'aeksuryŏng(「擇守令」), T'ongisŏ(「通吏胥」), Kŭmhaengmin(「禁倖民」), P'agirak(「罷妓樂」), Chŏngjŏnje(「正田制」), Chŏnggunje(「正軍制」), Ch'uk'wajae(「畜貨財」). It is a kind of a reform plan of the Northern region.
    These perceptions and criticisms are general and systematic through writing of saying farewell to a provincial governor who goes the Northern region. And it implies criticism of power politics in the early 19th century.
    Sŏng Haeŭng had a vision to reform the Northern region, but he was not in a position to practice. So, he wanted to relieve the poor who had fallen into a state of distress through his reform. It is philosophy of governance(經世意識). It’s from this point that this paper can be confirmed aspects of meeting the demands of the times for academic response to an intellectual of descendants from a concubine in the late Chosŏn Dynasty.
    Third is A Study on the Governing Awareness through Sŏng Haeŭng’s Songsŏ
    This paper aims to analyze content and deduce meaning with twenty-two songsŏ(送序 farewell document) which was written by Yŏn'gyŏngjae Sŏng Haeŭng. Songsŏ is document that farewells and encourages departees. In this paper, the main reason I have noticed is that Sŏng Haeŭng wrote songsŏ in the majority, and fourteen songsŏ are about the public realm. Furthermore, most of the works are related to a traditional friendship between families. He wrote them after resigning from office, so it is expressed in his awareness on the condition of ripeness level of study.
    Sŏng Haeŭng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improvement(改量) and stabilization of public welfare to Kim Kisŏ who left for Cheongdo governor. And he made a request for spying for China(called 覘國) to Sŏng Uchŭng and Cho Manyŏng who visited China as public duty. In this regard, he showed a special interest in frontier awareness of ancient countries’s capital such as Icheon and Chuncheon. In addition, songsŏ contains criticism of contradiction in system significantly. Especially he pointed out to local government of northwestern province and the three southern provinces official structural problems, and attached importance to appoint competent people. Sŏng Haeŭng’s consciousness that is expressed in his songsŏ is based on thought of Silhak, and can assess a result of economic consciousness.
    Forth is Seong Dae-Jung’s Awareness of practicality and Confucian Statecraft Learning.
    Seong Dae-Jung, who successively served as Gyoseogwan Gyori and Bukcheong Busa during the reign of King Yeong-jo and King Jeong-jo in the 18th century, was the person who reached the highest rank as a descendant of a concubine throughout the late Joseon period. In the background, receiving warm friendship of King Jeong-jo by and having unequivocal knowledge and a style of penmanship played an important role. However, what should receive attention as his unequivocal style of writing is that he emphasized ‘the utility of learning’ and ‘ruling over the world well through sentences.’
    Bearing this in mind, this study concretely found out the fact that he devoted himself to getting rid of the evils of the times through a sincere mind and practical politics based on his awareness of practicality Sending a person who was going to China, Seong Dae-Jung advised him to take their strengths by accepting advanced cultures, such as books, meteorological observation and Military, criminal law, land, castle system and to attack our weaknesses to take them as measures for strengthening ourselves since it was the old site of the rites and music during three periods though it was a country of barbarians, In addition, successively serving at local posts in Uljin, Heunghae and Bukcheong, he continuously and actively took part in practical politics, enforcing civil laws(Hojeon) to eliminate the evils of military service.
    In sum, the ultimate goal of Seong Dae-Jung’s ‘utility’ is the enlightenment of the world, that is, ‘Confucian Statecraft Learning(Gyeongsehak).’ Through this, he can be evaluated as a figure that had and practiced a strong will for utility through Silsim-Siljeong(實心實政) and Confucian Statecraft Learning at a level different from sticking to the retrospective view of literature based on the Six Confucian Classics through Silsim-Siljeong.
    Through the above research results, I confirmed the genealogy of Sŏŏl Intellectual in the late of Chosŏn Dynasty focusing on academic horizons and Orientation of Silhak of Sŏŏl Intellectual in the Latter Half of 18th Century and the First Half of 19th Century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成海應은 방대한 분량의『硏經齋全集』을 저술하였다. 이는 총서류 저술로서 독자들에게 유용하고 흥미로운 지식 정보를 제공한다. 그는 경전 연구에 치력하였는데, 六經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학문을 위한 학문이 아닌 실용을 위한 經世學이었다. 또 당시 유행하던 고증학에 경도되어 漢學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고 據事直筆의 기록태도를 견지하였다. 한 세대 뒤인 李圭景은 조부인 李德懋와 부친 李光葵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의 개화사상 형성에 가교 역할을 한 인물이다. 저술인『五洲衍文長箋散稿』는 당대의 최신 문물과 기술 및 지식의 집대성을 시도한 것이다.
    성해응은 박지원과 이덕무·유득공·박제가의 일본인식에 큰 영향을 주었던 성대중의 아들이며, 이규경은 이덕무의 손자이다. 이들은 실학사상의 전성기 인물로 이용후생파와 실사구시파를 아우르고 있다. 따라서『연경재전집』과『오주연문장전산고』를 통독한 뒤 학술과 문학적인 면에서 뛰어난 작품을 선별하여 특징과 의미를 분석하였다. 그 결과 시문에 표출된 실학사상을 규명하여 학적 층위와 실학적 지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연구 결과를 간략하게 제시해 둔다.
    첫째, 成仁鎬는 조선 후기 서족 명문 출신이다. 그의 집안은 3대에 걸쳐 제술관이나 서기로 일본 사행에 종사하였다. 부친과 숙부에 이어 성인호는 1869년 동지사행에 참여하여『遊燕錄』1책을 저술하였다. 이는 1869년 연행과 관련하여 전하는 유일한 저술인 만큼 자료적 가치가 있다. 최근 발굴된『竹澗集』2책을 바탕으로 성인호의 생애와 저술을 소개하고『유연록』을 검토하여 관련 기록의 부재로 공백화된 1869년 연행에 관한 제 양상을 구체적으로 규명하였다.
    둘째, 成海應의 「續罪言」을 중심으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진단하고 19세기 전반 서북 지역의 민심을 수습하며 제도적 모순을 개혁하기 위해 학적 대응을 한 사실을 주목하였다. 「속죄언」은 글을 쓸 만한 처지가 아닌데 외람되이 쓴다는 의미심장한 뜻을 담고 있으며, 「獎人才」․「擇守令」․「通吏胥」․「禁倖民」․「罷妓樂」․「正田制」․「正軍制」․「畜貨財」 등 8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종의 서북지역 개혁안이다. 여기에는 소수의 세도가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民에 대한 수탈이 가중되던 19세기 전반의 세도정치를 비판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성해응은 서북 지역을 개혁하기 위한 대책을 지녔지만 실행할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지위에 있던 이들에게 자신의 개혁안을 제시하고 강조함으로써 어지러운 세상과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고자 하였다. 경세의식의 소산인 셈이다. 이 지점에서 조선 후기 한 서족 지식인의 학적 대응을 통해 시대적 사명에 부응한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셋째, 성해응이 저술한 22편의 送序를 대상으로 논의하였다. 성해응은 청도군수로 부임하는 金箕書에게 改量의 중요성과 민생의 안정을 강조하고, 연행하는 조카 成佑曾과 趙萬永에게는 중국에 변고가 있을 경우 조선이 영향을 받아 위험해질 것을 경계하고 覘國을 통해 대비할 것을 당부하였다. 연장선에서 이천과 춘천 등 한때 고대 국가의 수도였던 동국의 경계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식견을 지니기도 하였다. 그의 송서에는 조선 후기 사회의 근간을 뒤흔든 체제 모순에 대한 비판이 지속적이면서도 강도 높게 제기되어 있다. 특히 서북 지역뿐 아니라 삼남의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이에게 탐관오리와 간악한 吏胥, 倖民 등으로 이루어진 구조적 병폐를 지적하고 올바른 인재를 등용할 것을 거듭 강조하였다. 이러한 의식은 실학적 사고에 바탕을 둔 경세의식의 소산이라 평가할 수 있다.
    넷째, 영정조 대에 교서관 교리와 북청부사 등을 역임한 成大中은 서족 출신으로 가장 높은 품계에 오른 인물이다. 그 배경에는 순정한 학식과 필법을 구사하여 정조의 지우를 입은 것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순정한 문체만큼 주목해야 할 것이 ‘學의 用’과 ‘文의 敎’를 강조한 점이다. 성대중의 實用에 대한 認識을 바탕으로 實心實政을 행하여 時弊를 구제하는 데 주력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였다.
    성대중은 연행하는 이를 전송하면서 오랑캐의 나라이긴 하지만 삼대 예악의 옛터인 만큼 서적과 측후, 兵刑田郭 제도와 같은 선진 문물을 수용하여 저들의 장점을 취하고 우리의 단점을 공격하여 자강의 방책으로 삼을 것을 당부하였다. 또 울진・흥해・북청 등의 지방관으로 재임하면서 호전법을 시행하여 군역의 폐단을 제거하는 등 지속적이면서 적극적으로 實政에 임하였다. 성대중의 實用의 궁극적 목표는 세상의 교화 즉 經世學인 것이다. 복고적 문학론을 견지한 것과는 다른 층위에서 실심실정을 통한 실용과 경세학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실행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첫째, 성해응과 이규경을 중심으로 한 서얼 지식인들의 학적 층위와 실학적 지향을 통해 조선후기 서얼의 계보학을 탐색할 수 있다. 18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이덕무·유득공·박제가 등은 조선후기 대표적인 서얼 지식인들로 규장각 검서관으로 활동하였으며 실학적 사고를 견지하였다. 또 수 차례의 연행을 통해 청의 선진문물을 배우고자 한 결과 북학사상을 지향하였다. 이들의 사상과 업적을 계승한 성해응과 이규경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주로 활동한 서얼 출신 지식인들로 각각 방대한 분량의 총서류 저술인『연경재전집』과『오주연문장전산고』를 기록하였다. 이들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남인 출신의 정약용과 李學逵, 양명학파인 李勉伯 등과의 비교 고찰을 통해 19세기 전반 서얼 출신 지식인들의 학적 위상과 지형도를 재구할 수 있다.
    둘째,『연경재전집』과『오주연문장전산고』의 인용서목을 전수조사하고 정리하여 분석함으로써 동아시아 서적 수입과 유통, 활용 및 다채로운 지식 정보의 수용과 변주의 구체적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연경재전집』과『오주연문장전산고』는 經史를 비롯하여 학술, 사상, 문학, 지리, 금석, 서화, 풍속, 제도 등 다양한 분야를 두루 포괄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인용서목 또한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망라하였다. 또 성해응과 이규경은 방대한 자료를 널리 취하여 증거를 제시하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고증적 학문태도를 적극적으로 실행한 만큼 두 저술에 등장하는 인용서목을 통해 조선후기 학술사의 경향을 이해하고 지성사의 외연을 확장할 수 있다.
    셋째, 조선후기에 유행한 고증학과 실학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유추할 수 있다. 18세기 이후 조선의 지성계는 박물학적 지식과 고증적 관심이 저술태도의 하나로 부각되고 계승되었다. 박학한 지식과 엄정한 고증을 통하여 학술적 관심사를 연구하는 고증적 학문이 이 시기에 널리 유행하였으며 그 영향은『연경재전집』과『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여실히 표출된다. 실학은 자유로운 비판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실증적인 방법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성과를 실생활에 활용하려는 것이다. 성리학이 초기의 참신한 기운을 잃고 현실 생활과 동떨어진 이론에만 치우치게 되자 사실에 입각한 비판 정신이 제기되고 청에서 들어온 고증학과 서양의 과학적 사고 방식을 받아들여 새로운 학풍이 일어났다. 고증학은 한국 실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학문으로서 매우 치밀하고 꼼꼼하게 실증적 귀납적 연구 방법을 선택하여 종래의 경서 연구 방법을 혁신하였다. 학계에서는 중국 청대의 고증학과 실학 또는 추사의 실학에 고증학이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고증학과 실학의 상관성을 포착한 연구가 시도된 바 있다. 본 연구 과제에서 구체적인 작품 분석을 통해 이해도가 심화된다면 보다 다각도에서 흥미로운 논의를 이끌 수 있을 것이다.
    넷째,『연경재전집』과『오주연문장전산고』는 여러 분야에 걸쳐 방대한 분량이 수록되어 있으며 고증적 학문방법을 활용하여 신뢰할 만한 지식과 정보를 대거 제공하는 만큼 시문학과 경학뿐만 아니라 법률·역사·미술·풍속사·제도사 등 인접학문에 지식정보 전달의 매개로서 일정한 역할을 할 것이다.
  • 색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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