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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시기 중국의 코리안 디아스포라 -고조선 ․ 고구려 ․ 부여계 이주민 집단 연구-
A Study on Korean Diaspora in china during Weijinnanbei Dynasties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시간강사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6S1A5B5A07920371
선정년도 2016 년
연구기간 1 년 (2016년 09월 01일 ~ 2017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이동훈
연구수행기관 목원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고에서 '遺民'이라는 용어 대신에 디아스포라(Diaspora) 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은 유민의 본래의 의미가 ‘멸망한 나라의 백성’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고구려가 멸망하기 이전에 중국으로 유입된 이들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로 적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디아스포라’의 사전적 정의는 팔레스타인을 떠나 전 세계에 흩어져 유대교의 관습과 규범을 따르며 살아가는 유대인 또는 그들의 거주인을 지칭한다. 후에는 그 의미가 확장되어 본토를 떠나 타지에서 자신들의 규범과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민족 집단 또는 그 거주지를 가리키는 용어로도 사용되었다. 위진남북조 시기에 중국으로 유입된 고구려, 부여, 고조선계 집단은 그 사료가 극히 제한적이지만, 한정된 사료를 통해서도 그러한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이들 이주 집단을 ‘코리안 디아스포라’라고 지칭했다.
    그런데 해당 이주민들은 중국으로 유입된 이후에도 오랫동안 족적 정체성을 유지했다. 현재 묘지명과 각종 문헌 등을 통해서 전하는 고구려 유민은 그 출신성분이 귀족이었기 때문에 중국에 융합되려는 모습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성을 고구려 유민 전체에 확대 적용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유민은 당말 이정기 등 고구려계 절도사들의 활약에서 나타나듯이 오랜 세월에 걸쳐 그들의 족적 정체성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위진남북조시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에는 고구려계 이주민뿐만 아니라 낙랑계와 부여계 유민도 중국에서 활약했다.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사료라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이들은 중국으로 이주한 이후에도 집단적으로 거주하면서 위진남북조가 끝나는 순간까지도 漢族에 동화되지 않은 채 족적 정체성을 유지하였다. 중국 내의 디아스포라였던 것이다.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는 중국내 소수민족인 먀오족과 고구려유민과의 관련성을 연구한 이인희 박사가 사용한 바 있지만, 위진남북조시기 중국으로 유입된 고조선계, 부여계, 고구려계 이주민의 성격을 정의하는데도 적용할 수 있다.
    본고는 아직 연구가 미흡한 위진남북조 시기 중국으로 이주한 코리안 디아스포라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 정리와 함께 이들 이주민 집단의 성격과 특징에 대한 연구인 것이다.


  • 기대효과
  • 코리안 디아스포라에 대한 학계의 연구는 한 왕조가 멸망한 이후에 異國에 남겨졌던 遺民의 역사에 집중되었다. 고구려 백제 유민사 연구와 발해 유민사 연구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왕조 멸망과는 별개로 평상시에도 소규모의 전란으로 인해, 혹은 정치적 박해나 자연재해를 피해 중국으로 유입된 코리안도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러한 경우 국외 이주는 일시적이고, 소규모로 진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역사의 기록에는 누락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역사가들이 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연구자가 개별적으로 전하는 이러한 종류의 기록에 설사 주의를 기울였다고 하더라도, 이주자가 국외로 이주할 당시 원래의 조국이었던 해당 왕조가 아직도 존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遺民으로 지칭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또 각각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틀이 없었기 때문에 연구에 나서기에는 저어되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코리안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을 고대사에 적용함으로써 개별적이고 단편적인 이러한 사실들을 하나로 묶어서 연구할 수 있는 틀이 만들어졌다. 본 연구 방법은 역사가들의 눈에 중요시되지 않았던 이러한 단편적인 사례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한국사를 연구하는데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풍성하게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본 연구는 시기적으로 고구려 멸망 이후에 집중되었던 기존 연구를 위진남북조시기까지 소급함으로써 관련 연구를 더욱 선도할 것으로 예상된다. 나아가 고구려와 발해 멸망 이후 중국 내에 남아 있던 유민들의 역사도 언젠가는 중국에 동화되어 버리고 마는 ‘遺民史’가 아닌, 국가가 망했어도 민족의 혼은 살아 있는 ‘코리안 디아스포라’라는 시각으로 새롭게 접근함으로써 민족사의 지평을 넓힐 것으로 기대된다. 교육적 측면에서는 어떠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했던 ‘코리안 디아스포라’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코리안’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을 자각하게 할 것이다. 또한 고구려와 발해 멸망 이후 역사무대가 한반도로 축소된 ‘國家史’와는 별개로, ‘民族史’적 관점에서 민족의 역사를 고찰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한국사의 범위를 동북지역 및 중국 전체로 확대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또한 본 연구는 한중간의 역사전쟁인 동북공정과 동북공정의 이론적 토대가 되고 있는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을 반박하는 유력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주지하듯이 고구려 역사의 귀속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에서 특히 강조되고 있는 사항 중의 하나는 고구려 멸망 후 유민들의 거취문제이다. 이들은 고구려 멸망 후 중국으로 이주한 고구려 유민들이 한족에 동화됨으로써 고구려사 는 결국 중국사에 귀속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당대 후기 절도사로 활약한 고구려 유민들의 활동에서 여실히 드러나듯이 고구려 유민의 중국으로의 동화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위진남북조시기에 중국으로 이주한 코리안 디아스포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고구려의 역사 귀속문제와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을 실증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자료들이다. 본 연구는 중국으로 이주한 고구려 부여 등 우리의 선조들이 한족에 동화되었고, 결국 현재의 중화민족을 형성했다는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을 부정하는 역사 자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본 연구 이후에 코리안 디아스포라에 관한 총체적인 연구가 진행되면 통일적다민족국가론뿐만 아니라 향후 추진될 중국의 역사왜곡 등 관련 사실에 대한 학술적인 대응도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 연구요약
  • 지금까지 위진남북조 시기에 중국으로 유입된 한국계 이주 집단 즉 ‘코리안 디아스포라’ 관련 연구는 北魏 후기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高肇와 高照容과 高英로 대표되는 高氏 일족에 집중되었다. 해당 고씨 일족은 중국에 유입된 이후 당시 북중국의 名門士族인 渤海高氏를 자칭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을 그대로 신뢰하여 이들 일족을 중국의 전통적인 渤海高氏로 인식하거나, 혹은 그와는 반대로 渤海高氏 전체를 고구려 계통으로 이해하는 연구도 있었다. 새로 출토된 고씨 일족 관련 묘지명에 관한 연구에서도 이러한 오류가 발견되었는데, 정확한 족속을 판별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고증 작업이 필요한 실정이다. 그 밖에 고구려 출신의 인물로서 後燕 최후의 황제를 역임한 高雲이 주목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중국에서 출토된 한국고대 유민자료를 통해 陝西 지역에 위치한 고구려계 유민으로 추정되는 자료가 소개되기도 했다. 그 밖에 고구려 왕실 출자의 渤海高氏에 주목하는 연구와 요서지역으로 유입된 고조선계 유민에 대해 검토가 진행되기도 했다.
    위진남북조시기 중국으로 이주한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대부분 4세기 초 모용씨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연나라로 강제 이주된 부여계 집단과 고구려계 집단, 낙랑군 멸망과정에서 연나라로 이주한 고조선계 집단, 그리고 장수왕 후기 고구려 국내의 정치적 사정으로 인하여 북위로 이주한 집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으로 이주한 고조선계 집단에는 중국에서 한반도로 이주한 한족 출신도 있었지만, 고조선 토착주민 계열도 적지 않았다.
    이들 집단 중에서 일부는 그들의 출자를 중국의 전설적인 인물이나 성씨가 같았던 다른 漢族계열의 명문가문에 의탁하였다. 그러므로 성씨를 통하여 중국에서 활동한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검출하는 작업은 쉬운 일은 아니다. 본고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元和姓贊』『通志』氏族略, 『新唐書』 宰相世系表 등 중국의 역대 성씨 관련 문헌들을 세밀히 조사하고, 위진남북조 시기에 제작된 묘지명과 造像記 등을 집중적으로 검토하려고 한다.
    4~5세기 중국으로 이주한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먼저 고구려와 연접한 요서지역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당시 요서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던 모용씨정권이 점차 강성해짐에 따라 중원지역으로 이주했다. 그 후 북위가 등장하여 모용씨를 대신하면서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대부분 平城을 중심으로 한 북중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 후 현재의 산서성과 섬서성, 산동성 지역 등에 정착했다. 본고는 이들이 이동했던 지역을 본격적으로 조사하려고 한다. 특히 요서지역에 교치되었던 낙랑군, 대방군, 요동군 등 교치군현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비정하는 작업을 병행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 중국 정사와 청나라 말기와 민국 시기에 간행된 지방지를 분석하고, 80년대 이후 진행된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고조선계 유민과 부여계 포로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했던 해당 지역을 직접 답사할 것이다. 아울러 각종 묘지명과 造像記 기록을 바탕으로 하여 산서지역과 섬서지역 등에 위치한 코리안 디아스포라 집거지에 대한 자료를 정리할 것이다.
    위진남북조시기 중국으로 이주한 대다수의 북방민족들이 위진남북조가 종식되는 순간까지도 그 족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1980~90년대 중국학계의 관련 연구를 통해 이미 밝혀진 바 있다. 이러한 사실은 현행 중국의 각종 民族志 연구를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본고는 이러한 연구 성과를 소개하는 한편, 이러한 사실이 당시 고조선 고구려 부여계 등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그러므로 이들 이주민 집단을 '코리안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으로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것이다. 해당 사실은 해당 이주민집단을 통솔하던 지배층이 역임한 관직의 성격 분석과 이주민 집단이 집단적으로 집거한 지역에 위치한 造像記의 기록 분석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즉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북중국에서 한인과 북방민족들과 함께 거주하면서도 끝까지 동화되지 않고 족적 정체성을 유지했던 것이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위진남북조시기 중국의 코리안 디아스포라
    -고조선 ․ 고구려 ․ 부여계 이주민 집단 연구-

    본 연구는 중국의 위진남북조시기 중국으로 이주한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행적을 추적한 논문이다. 본고에서 '遺民'이라는 용어 대신에 디아스포라(Diaspora) 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은 유민의 본래의 의미가 ‘멸망한 나라의 백성’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국가가 멸망하기 이전에 중국으로 유입된 이들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로 적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연구에 의하면 ‘디아스포라’는 고유의 족적 정체성과 함께 새로 이주된 지역에 소속감 등 심리적으로 양속적(兩屬的)인 속성을 보인다고 한다. 이 시기에 중국으로 이주한 고조선, 고구려, 부여계 이주집단은 모두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었던 존재이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이들을 모두 ‘디아스포라’라고 정의했다.
    이 시기에 중국에서 활약한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크게 3~4세기에 이주한 집단과 5~6세기에 이주한 집단으로 구분할 수 있다. 3~4세기에 이주한 디아스포라로는 고조선(古朝鮮), 고구려(高句麗), 부여계(夫餘) 계통의 이주민 집단을 들 수 있으며, 5~6세기에 이주한 디아스로파로는 고구려계 집단을 들 수 있다.
    고조선계 이주민 집단은 313년과 314년 낙랑군이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멸망한 이후 중국의 요서지역으로 이주한 집단이다. 대표적으로는 낙랑왕씨(樂浪王氏), 창려한씨(昌黎韓氏), 요동동씨(遼東冬氏)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전연(前燕)의 수도인 극성(棘城) 근처에 집단으로 거주했다. 부여계 이주민 집단은 3세기 말에서 4세기 전반기에 전연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포로의 신분으로 이주한 집단이다. 이들 역시 극성 주위의 라마동이라는 지역에 집단적으로 거주했다는 사실이 고고학 발굴을 통해 확인되었다. 고구려계 이주민 집단 역시 4세기 초에 전연과의 군사적 충돌 결과 발생했는데, 전쟁포로이거나 인질의 신분으로서 합류했다. 고구려계가 전연으로 이주한 직후 거주한 지역에 대해서는 정확히 확인이 되지 않지만, 고조선계와 부여계와 마찬가지로 전연의 초기 수도인 극성 부근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와 우문선비(宇文鮮卑) 등 주변세력과의 각축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요서지역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 전연 정권은 국가의 발전 전략을 중국 내지의 정권쟁탈에 뛰어들어 이들과 자웅을 겨루는 방향으로 수립하게 되었다. 전연은 당시 중국 북방의 패자였던 후조(後趙)와의 전쟁에서 연이어 승리하면서 종국에는 북중국의 동부지역을 제패하면서 전진(前秦)과 동진(東晉) 정권과 천하통일을 놓고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전연의 중심지 역시 영역의 확대에 따라 용성(龍城)에서 계(薊), 그리고 업(鄴)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코리안 디아스포라 역시 이와 같은 코스를 따라 이동하게 되었다. 다만 고조선계 이주민 집단은 대부분 극성 부근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연(前燕)이 전진(前秦)에게 멸망당한 후 선비족(鮮卑族)들은 전진의 국책에 따라 전진의 지역적 기반이었던 관중(關中)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 때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일부도 관중지역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료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10여 년 후 전진(前秦) 정권이 몰락하고, 후연(後燕)이 건국되는 과정에서 대다수의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후연의 건국을 지지하지만, 여암(餘岩)이 이끄는 일부 부여계 집단은 후연 정권에 합류하는 대신에 부여가 위치한 동북방향으로 이주하다가 요서지역에 머물러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고 후연과 다투기도 하였다. 또한 후연의 마지막 왕인 고구려계 출신 고운(高雲)의 존재도 확인된다. 이들의 행적을 통해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중국으로 이주한 지 반세기가 훨씬 지난 후에도 여전히 각각 고구려와 부여의 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4세기 후반 북위(北魏)가 후연(後燕)을 대신하여 중원을 차지하게 되자, 북위는 고구려 이주민 집단을 북위의 초기 수도인 평성(平城)으로 이주시켰다. 평성의 현재 지명인 대동(大同)에는 당시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던 고구려계 인물의 유적이 확인된다. 이들의 성씨는 고씨(高)와 개씨(蓋)인데, 특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개(蓋)씨과 관련된 유적이 다수 발견된 점이 흥미롭다. 또한 고조선계 성씨로는 낙랑 왕씨 인물들이 다수 확인된다. 과거 왕(王)씨와 탁왕(拓王)씨의 관계에 대해서 의문을 표하는 견해가 있었지만, 연구 결과 탁왕씨는 왕씨에서 유래한 성씨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5세기 후반 고구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고구려에서 북위정권으로 이주하는 인물들이 사료에 다수 확인된다. 원래부터 평양에 토착하고 있었던 왕(王)씨와 한(韓)씨, 그리고 고구려 왕실의 성씨인 고(高)씨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행적 중 중국에서 확인되는 성씨는 고구려 고씨이다. 고구려 고씨는 북위에서 고관대작을 역임하는데, 대표적으로 북위 선무제(宣武帝)의 모친인 문소황후(文昭皇后)와 그 오빠인 고조(高肇)를 중심으로 한 일족이 확인된다. 그 밖에 북제(北齊)를 건국한 고환(高歡)을 고구려 출신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494년 북위는 수도를 평성에서 낙양(落陽)으로 천도하였다. 그에 따라 코리안 디아스포라도 낙양으로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남아 있는 자료로는 이를 확인하기 힘들다. 오히려 천도 이후에도 평성에 그대로 남아 북위의 최전선에서 유연 등 북방민족을 견제하는 군사적 업무에 담당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한편 관중(關中)지역에도 고구려 유민들의 행적이 확인된다. 특히 불교조상기(佛敎造像記)에서 개(蓋)씨의 존재가 확인이 되는데, 과거에는 이를 강족(羌族)으로 파악했으나, 현재는 이를 고구려 계통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힘을 받고 있다. 이들의 관중으로의 이주 시기는 370년대 전진에 의해 전연이 멸망하면서 이주했을 가능성과, 북위가 평성(平城)에서 낙양으로 천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관중지역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모두 상정할 수 있다. 그러나 평성에서 개씨 일족의 유적이 다수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평성에 거주하고 있다가 자연스럽게 산서성(山西省)에 이웃한 섬서성(陝西省) 즉 관중 지역으로 이주했을 개연성이 높다.
    위진남북조시기 중국에서 활약한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수백 년 동안 그 족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당시 중국의 이민족정책에서 주요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한나라 때부터 중국의 한족(漢族)왕조는 자국에 복속된 유목민족을 분산 해체시키는 대신에, 중국 내지로 이주하여 북방민족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면서 그들의 고유의 사회와 풍속을 유지하도록 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리하여 중국 내지로 이주한 이민족들은 비록 정치적으로는 중국왕조에서 파견한 관리들의 감시와 통제를 받았지만, 고유의 사회습속을 유지할 수 있었다. 중국왕조가 이들의 사회조직을 해체시키지 않은 것은 유목민족들이 가지고 있었던 강력한 군사력을 이용하여 내부의 반란을 진압하거나, 외부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정책은 한족(漢族)을 대신하여 북방을 장악한 이민족정권에게도 계승되었다. 따라서 고구려 부여 이주민 집단 역시 그러한 이유로 중국화되지 않고, 고유의 족적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위진남북조시기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중국에서 장기간 활동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몇 개의 소집단으로 분리되어 분산 거주하는 상황을 피할 수 없었지만, 6세기 관중지역에서 발견된 불상조상기(佛敎造像記)에서 확인되듯이 여전히 해당지역에서 고유의 습속을 유지하면서 족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 영문

  • This study is a paper which traced the whereabouts of the Korean Diaspora who emigrated to China during the period of Wei-Jin Kingdoms, Northern and Southern Dynasties of China. The reason for using the concept ‘Diaspora’ instead of the term ‘Yumin(遺民: Drifting people)’ is that it is not appropriate to refer to this group who flowed in China before a nation was not destroyed yet as ‘Yumin’ as the original meaning of ‘Yumin’ is ‘the people of a fallen nation.’
    According to the existing research, ‘Diaspora’ is said to show bi-affiliated attributes psychologically such as a sense of belonging to new migrant region, etc, together with its indigenous legacy identity. All the Gojoseon, Goguryeo & Buyeo-origin emigrant(expatriate) group to China were the beings having such an attribute, so this study defined them as ‘Diaspora’ without exception.
    The Korean Diaspora, who played an active part in China during this period, can be roughly divided into one group who emigrated to China during the 3rd~4th century, and another group who emigrated during the 5th~6th century.
    As the Diaspora who emigrated to China during the 3rd~4th century, the Gojoseon, Goguryeo & Buyeo-origin emigrant(expatriate) group can be exemplified while as the Diaspora who emigrated during the 5th~6th century, Goguryeo-origin emigrant group can be exemplified.

    The Gojoseon-origin emigrant group is the one who emigrated to liao xi area of China after Nakrang Commandery was destroyed by King Macheon of the Goguryeo kingdom in 313 and in 314.
    Representatively, the Wangs of Nakrang, the Hans of Changryeo, and the Dongs of Yodong, etc. formed this group. They settled down near jíchéng(棘城)-the capital of Qiányān(前燕) in group. Meanwhile, the Buyeo-origin emigrant group is the one which emigrated as a status of a prisoner of war(after Buyeo was defeated in the war with Qiányān(前燕)from the late 3rd century to the early 4th century. The fact that they also settled down at the area called Lamadong in the vicinity of jíchéng(棘城) was identified through the archaeological excavation.

    The Goguryeo-origin emigrant group came to form as a result of a military collision with Qiányān(前燕) in the early 4th century, and they joined the group as a status of prisoners of war, or hostages. The area where Goguryeo-origin emigrant group settled down immediately after they emigrated to Qiányān(前燕) isn’t accurately identified, but it is estimated that they might be also placed in the vicinity of jíchéng(棘城)-the initial capital of Qiányān(前燕) in common with the Gojoseon-origin emigrants, or Buyeo-origin emigrants.
    The Qiányān(前燕)regime, which got to seize hegemony at liao xi are as it won a victory at the fierce competition with its peripheral powers like Goguryeo and Umunseonbi(宇文鮮卑), etc., came to set up a state development strategy in the direction of contending for supremacy over its rival powers by plunging into a struggle for political power of the Chinese inland region. Qiányān(前燕) came to contend for supremacy over the whole country unification against Qiánqín(前秦)& DōngJìn(東晉)regimes as it won a victory at the war against the then hegemony-holder of the northern region of China-hòu zhào(後趙) in a row, and conquered the eastern region of North China in the end. The capital of Qiányān(前燕)also came to move from Lóngchéng(龍城) to jì(薊), and Yè(鄴) according to territory expansion, and Korean Diaspora also got to move along the course like this. Nevertheless, most of the Gojoseon-origin emigrant group seemed to remain in the vicinity of jíchéng(棘城).

    After Qiányān(前燕)was destroyed by Qiánqín(前秦), Seonbi tribes came to move to Guānzhōng(關中)region, which was once a regional foundation of Qiánqín(前秦), in compliance with the state policy of Qiánqín(前秦). At this moment, a part of Korean Diaspora is estimated to move to Guānzhōng(關中)region, but the historical materials, which can support this estimation, have not been identified yet.
    In the process of the ruin of Qiánqín(前秦)regime ten years after, and state foundation of Hòuyān(後燕), a large majority of Korean Diaspora supported the state foundation of Hòuyān(後燕), but a part of Buyeo-origin emigrant group led by Yeoam(餘岩) stayed at liao xi area on their way to the northeast direction where Buyeo was located instead of joining Hòuyān regime, and formed an independent force, also being at feud with Hòuyān regime. In addition, identified is the existence of Kowun(高雲)of Goguryeo origin, who was the last king of Hòuyān(後燕). Also, confirmed is the fact that Korean Diaspora still didn’t lose a legacy identity of Goguryeo and Buyeo respectively even after the elapse of well over half a century since they moved to China through their movements.

    In the late 4th century, when BěiWèi(北魏)took possession of Zhōngyuán took possession of Zhōngyuán(中原) in replacement of Hòuyān(後燕), BěiWèi(北魏) got the Goguryeo-origin emigrant group to move to Píngchéng(平城)-the initial capital of BěiWèi(北魏). At dàtóng(大同), which is the present place name of Píngchéng, identified are remains of Goguryeo-origin persons who lived in this region at that time. Their family names are Go(高) clan and Gae(蓋) clan; particularly, an interesting part is that the obscure ruins associated with Gae clan were discovered in large quantities. In addition, as a Gojoseon-origin family name, persons of the Wangs of Nakrang are discovered in great numbers.

    In the past, there existed an opinion raising a question about the relations between Wang(王)clan and Takwang(拓王) clan, but as a result of the research, it was confirmed that Takwang(拓王) clan is the family name derived from Wang(王)clan.

    Identified are a large number of persons in historical materials, who emigrated to BěiWèi(北魏) regime from Goguryeo after King Jangsu of Goguryeo transferred the capital to Pyeongyang in the late 5th century, and the representative family names include Wang(王)clan and Han(韓) clan, who originally settled in Pyeongyang indigenously, and Goguryeo royal family name-Go(高) clan, etc. The family name identified in China among their movements is Goguryeo Go(高)clan. The Goguryeo Go(高)clan worked in a high office rank, and representatively, identified is one whole family centering on wénzhāo huánghòu(文昭皇后), who was a mother of xuānwǔdì(宣武帝)of BěiWèi(北魏), and her older brother gāo zhào(高肇). Besides, there is also a view understanding gāo huān(高歡), who founded BěiQí(北齊), as a native of Goguryeo.

    In 494, BěiWèi(北魏) transferred its capital to luò yáng(落陽) from Píngchéng(平城). Accordingly, Korean Diaspora is estimated to also move to luò yáng, yet it’s difficult to identify this through the currently remaining materials; rather, it is estimated that Korean Diaspora might take charge of military work for holding northern nations like Róurán(柔然) in check at the forefront of BěiWèi(北魏)by remaining at Píngchéng(平城) as ever even after BěiWèi(北魏)’s transfer of the capital.

    Meanwhile, Goguryeo Yumin(drifting people)’s movements are identified at Guānzhōng(關中)district as well. Particularly, the existence of Gae(蓋)clan in Buddhist zaoxiangji(佛敎造像記:records about an originator, maker, origin and production period of a Buddhist image)is grasped; in the past, it was understood as Qiāngzú(羌族), but at present, the opinion understanding it as Goguryeo descent is receiving strength. Concerning Korean Yumin’s period of emigration to Guānzhōng(關中), it is possible to presume both the possibility of emigration as Qiányān(前燕) was destroyed by Qiánqín(前秦) in the 1370s and the possibility of their natural influx into Guānzhōng(關中)district in the process of BěiWèi(北魏)’s transfer of the capital to luò yáng(落陽) from Píngchéng(平城). However, seeing that ruins of the whole family & relatives of the Gae clan are discovered in great quantities at Píngchéng(平城), it is highly likely that they might naturally emigrated to Shǎnxīshěng(陝西省)which neighbored Shānxīshěng(山西省), i.e. Guānzhōng(關中)district after living at Píngchéng(平城).

    The main reason for the fact that Korean Diaspora, who did active work in China during the period of Wei-Jin Kingdoms, Northern and Southern Dynasties, was able to maintain their legacy identity for hundreds of years can be found from the then Chinese policy for ethnic nations.

    Since the period of Chinese Han, China’s Han Dynasty carried out a policy which made it possible for northern nations to maintain their own society and custom by permitting them to settle down collectively and emigrating to the inland areas of China instead of dispersing and dissolving the nomadic tribes subjugated to the own country.

    Therefore, although the ethnic nations, who emigrated to inland areas of China, were subject to surveillance and control of the Chinese Dynasty-dispatched officials politically, they were able to maintain their own social manners and customs.

    The reason for the Chinese Dynasties not to dissolve ethnic nations’ social organization lay in suppression of internal rebellions, or defense of external attacks by taking advantage of nomadic nations’ powerful military strength.

    Such a policy was also handed over to ethnic political regimes which seized the northern regions on behalf of Han Chinese. Accordingly, for that reason, Goguryeo & Buyeo emigrant groups could also maintain their own legacy identity as it was without being naturalized to China. The Korean Diaspora during the period of Wei-Jin Kingdoms, Northern and Southern Dynasties of China couldn’t avoid the situation where they resided in dispersion when it was naturally separated into some sub-groups in the process of doing activity for long periods of time in China, but as identified in Buddhist zaoxiangji(佛敎造像記) discovered in Guānzhōng(關中)district in the 6th century, Korean Diaspora maintained their legacy identity while still maintaining their own manners and customs at the relative area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위진남북조시기 중국의 코리안 디아스포라
    -고조선 ․ 고구려 ․ 부여계 이주민 집단 연구-

    본 연구는 중국의 위진남북조시기 중국으로 이주한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행적을 추적한 논문이다. 본고에서 '遺民'이라는 용어 대신에 디아스포라(Diaspora) 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은 유민의 본래의 의미가 ‘멸망한 나라의 백성’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국가가 멸망하기 이전에 중국으로 유입된 이들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로 적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중국에서 활약한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크게 3~4세기에 이주한 집단과 5~6세기에 이주한 집단으로 구분할 수 있다. 3~4세기에 이주한 디아스포라로는 고조선(古朝鮮), 고구려(高句麗), 부여계(夫餘) 계통의 이주민 집단을 들 수 있으며, 5~6세기에 이주한 디아스로파로는 고구려계 집단을 들 수 있다.
    고조선계 이주민 집단은 313년과 314년 낙랑군이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멸망한 이후 중국의 요서지역으로 이주한 집단이다. 부여계 집단과 고구려계 이주민 집단은 3세기 말에서 4세기 전반기에 전연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포로의 신분으로 이주한 집단이다. 이들은 모두 전연의 수도인 극성이나 그 주변에 거주했다. 전연은 영역 확대에 따라 수도를 용성(龍城)에서 계(薊), 그리고 업(鄴)으로 천도하게 되었는데, 코리안 디아스포라 역시 이와 같은 코스를 따라 이동하게 되었다. 다만 고조선계 이주민 집단은 대부분 극성 부근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진(前秦)에 일시적으로 멸망당한 모용선비는 후연(後燕)을 건국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일부 부여계 집단은 요서지역으로 이동한 후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고 후연과 다투기도 하였다. 또한 후연의 마지막 왕인 고구려계 출신 고운(高雲)의 존재도 확인된다. 이들의 행적을 통해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중국으로 이주한 지 반세기가 훨씬 지난 후에도 여전히 각각 고구려와 부여의 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4세기 후반 북위(北魏)가 후연(後燕)을 대신하여 중원을 차지하게 되자, 북위는 고구려 이주민 집단을 북위의 초기 수도인 평성(平城)으로 이주시켰다. 현재 평성 지역에서는 고구려계 인물의 유적이 확인된다. 이들의 성씨는 고씨(高)와 개씨(蓋)인데, 특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개(蓋)씨과 관련된 유적이 다수 발견된 점이 흥미롭다. 또한 고조선계 성씨로는 낙랑 왕씨 인물들이 다수 확인된다.
    5세기 후반 고구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고구려에서 북위정권으로 이주하는 인물들이 사료에 다수 확인된다. 이들의 행적 중 중국에서 확인되는 성씨는 고구려 고씨이다. 대표적으로 북위 선무제(宣武帝)의 모친인 문소황후(文昭皇后)와 그 오빠인 고조(高肇)를 중심으로 한 일족이 확인된다. 494년 북위는 수도를 평성에서 낙양(落陽)으로 천도하였다. 그에 따라 코리안 디아스포라도 일부 낙양으로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상당수는 천도이후에도 평성에 그대로 남아 북위의 최전선에서 유연 등 북방민족을 견제하는 군사적 업무에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관중(關中)지역에도 고구려 유민들의 행적이 확인된다.
    위진남북조시기 중국에서 활약한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수백 년 동안 족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중국의 이민족정책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한나라 때부터 중국왕조는 자국에 복속된 유목민족을 중국 내지로 이주시키고 그들의 고유의 사회와 풍속을 유지하도록 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리하여 중국 내지로 이주한 이민족들은 비록 정치적으로는 중국왕조의 감시와 통제를 받았지만, 고유의 사회습속을 유지할 수 있었다. 중국왕조가 이들의 사회조직을 해체시키지 않은 것은 유목민족들이 가지고 있었던 강력한 군사력을 이용하여 내부의 반란을 진압하거나, 외부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정책은 한족(漢族)을 대신하여 북방을 장악한 이민족정권에게도 계승되었다. 따라서 고구려 부여 이주민 집단 역시 그러한 이유로 중국화되지 않고, 고유의 족적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기존 연구에서는 고구려 백제 멸망 이후 중국으로 이주한 유민들에 대해서 遺民史라는 관점에서 접근했다. 하지만 일부 지배층을 제외한 상당수는 오랫동안 중국에 동화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발해 멸망 이후 중국에 남아 있던 발해 유민과 원나라에 끌려갔던 고려인, 조선 전기에 한반도에서의 빈곤한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중국으로 이주했던 이주민과 병자호란 등으로 인해 중국으로 이주한 이주민 중 상당수는 청나라 말기까지 중국에 동화되지 않은 채 디아스포라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이들은 원래의 거주지를 떠난 지 수백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중국의 특정지역에서 여전히 집단적으로 거주하면서 族的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 집단에 대해서는 유민과는 다른 개념인 코리안 디아스포라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코리안 디아스포라에 대한 학계의 연구는 한 왕조가 멸망한 이후에 異國에 남겨졌던 遺民의 역사에 집중되었다. 고구려 백제 유민사 연구와 발해 유민사 연구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왕조 멸망과는 별개로 평상시에도 소규모의 전란으로 인해, 혹은 정치적 박해나 자연재해를 피해 중국으로 유입된 코리안도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러한 경우 국외 이주는 일시적이고, 소규모로 진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역사의 기록에는 누락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역사가들이 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연구자가 개별적으로 전하는 이러한 종류의 기록에 설사 주의를 기울였다고 하더라도, 이주자가 국외로 이주할 당시 원래의 조국이었던 해당 왕조가 아직도 존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遺民으로 지칭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또 각각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틀이 없었기 때문에 연구에 나서기에는 저어되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코리안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을 고대사에 적용함으로써 개별적이고 단편적인 이러한 사실들을 하나로 묶어서 연구할 수 있는 틀이 만들어졌다. 본 연구 방법은 역사가들의 눈에 중요시되지 않았던 이러한 단편적인 사례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한국사를 연구하는데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풍성하게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본 연구는 시기적으로 고구려 멸망 이후에 집중되었던 기존 연구를 위진남북조시기까지 소급함으로써 관련 연구를 더욱 선도할 것으로 예상된다. 나아가 고구려와 발해 멸망 이후 중국 내에 남아 있던 유민들의 역사도 언젠가는 중국에 동화되어 버리고 마는 ‘遺民史’가 아닌, 국가가 망했어도 민족의 혼은 살아 있는 ‘코리안 디아스포라’라는 시각으로 새롭게 접근함으로써 민족사의 지평을 넓힐 것으로 기대된다. 교육적 측면에서는 어떠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했던 ‘코리안 디아스포라’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코리안’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을 자각하게 할 것이다. 또한 고구려와 발해 멸망 이후 역사무대가 한반도로 축소된 ‘國家史’와는 별개로, ‘民族史’적 관점에서 민족의 역사를 고찰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한국사의 범위를 동북지역 및 중국 전체로 확대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또한 본 연구는 한중간의 역사전쟁인 동북공정과 동북공정의 이론적 토대가 되고 있는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을 반박하는 유력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주지하듯이 고구려 역사의 귀속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에서 특히 강조되고 있는 사항 중의 하나는 고구려 멸망 후 유민들의 거취문제이다. 이들은 고구려 멸망 후 중국으로 이주한 고구려 유민들이 한족에 동화됨으로써 고구려사 는 결국 중국사에 귀속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당대 후기 절도사로 활약한 고구려 유민들의 활동에서 여실히 드러나듯이 고구려 유민의 중국으로의 동화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위진남북조시기에 중국으로 이주한 코리안 디아스포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고구려의 역사 귀속문제와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을 실증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자료들이다. 본 연구는 중국으로 이주한 고구려 부여 등 우리의 선조들이 한족에 동화되었고, 결국 현재의 중화민족을 형성했다는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을 부정하는 역사 자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본 연구 이후에 코리안 디아스포라에 관한 총체적인 연구가 진행되면 통일적다민족국가론뿐만 아니라 향후 추진될 중국의 역사왜곡 등 관련 사실에 대한 학술적인 대응도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 색인어
  • 고조선, 고구려, 부여, 이주민집단, 족적정체성, 전연, 북위, 극성, 용성, 평성, 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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