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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 현종대 정몽주 인식
Recognition for Jeong Mong-Ju during the time from Injo's reign through Hyeonjong's reign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시간강사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6-S1A5B5A07-2016S1A5B5A07919431
선정년도 2016 년
연구기간 1 년 (2016년 11월 01일 ~ 2017년 10월 31일)
연구책임자 김보정
연구수행기관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의 목적은 17세기 붕당기 인조 ~ 현종대 정몽주 인식을 통하여 17세기 조선성리학의 이해과정을 살펴보는데 있다. 정몽주는 성리학의 핵심인 의리명분을 몸소 실천한 고려의 충신이자 절의의 상징으로 조선 600년 동안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인물이다. 또한 그의 문집인 『포은집』은 조선시대 가장 많이 간행된 문집이기도하다. 당대 성리학자들의 인식은 그들의 문집과 사서를 통하여 알 수 있는데 특히, 사찬사서는 당대의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척도이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17세기 인종반정이후 서인과 남인의 정몽주 인식을 당대의 사서를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 초기 정몽주 인식에서는 관찬사서『고려사』․『고려사절요』를 통하여 태종 ․ 세종대의 정몽주에 대한 이중적 인식을 밝혔다. 정몽주에 대한 충신의 인식이외에 태종 ․ 세종은 제왕의 입장에서 보는 난신의 인식도 병존한다는 사실이다. 세조 ․ 성종대는『동국통감』을 통하여 정몽주에 대한 훈척과 사림의 인식을 비교 검토한 결과 세조대 훈척들의 정몽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잔존함을 알 수 있었고 성종대 사림들의 사론에서 부정적 인식을 극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종 ․ 명종대 사림들의『동국사략』을 통하여 살펴본 결과 정몽주의 문묘종사에 약점이 될 수 있는 우왕대 이후의 활동이 모두 생략되고 있었다. 이는 선조 ․ 광해군대 오운의『동사찬요』에도 그대로 이어져서 공양왕 옹립과정에 참여한 기록은 삭제되고 있다. 그러나 선조대 윤두수의『成仁錄』에서는 송의 문천상과 나란히 절의로써 成仁한 인물로 칭송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점은 기존의 정사 및 문집의 자료에서 한 단계 발전된, 人物史 연구를 史書를 통한 史學史 연구와 결합시켜서 새로운 연구방법론을 제시하였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새로운 연구방법론을 바탕으로 17세기 인조 ~ 현종대의 정몽주 인식을 유계의『여사제강』과 홍여하의『휘찬여사』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7세기 중반 사서인『여사제강』(국립중앙도서관 한古朝53-나6) 과『휘찬여사』(국립중앙도서관 한古朝53-나2-2) 에서 16세기『동국사략』, 오운의 『동사찬요』와 달리 정몽주의 공양왕대 기록을 산삭하지 않고 모두 공통적으로 수록하고 있었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점을 주목하여 당파, 학파에 따른 역사인식을 지양하고 17세기 사서를 통하여 인조 ~ 현종대 정몽주 인식을 조명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염두에 두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중종대 문묘종사이후 사찬사서에서 삭제되었던 정몽주의 공양왕대 행적이 인조반정이후 사찬사서에서 다시 수록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둘째, 17세기 이후 사찬사서는 정권에서 실세한 남인이 편찬한 것이 대부분인데 그 가운데 유독 서인인 유계가 서술한『여사제강』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정권을 주도한 서인들은 당연히 정사에서 그들의 인식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는데 비해, 반면 실세한 남인들은 사찬사서를 통하여 자신들의 역사인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계가『여사제강』의「공양왕기」에서 정몽주가 살해당하였다고 서술한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셋째, 인조반정이후 서인과 남인의 두 사서에서 정몽주의 절의를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서술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유계의『여사제강』의 초판본에 수록된「공양왕기」가 영조 25년 개판과정에서 산삭되는 것과도 무관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현 단계에서 17세기 인조반정이후 인조 ~ 현종대의 정몽주 인식을 살펴보는 것은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17세기 붕당기 서인과 남인의 정몽주 인식은 18세기 탕평기 노론의 정몽주 인식을 살펴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할 것이며, 또한 16세기 중종 ․ 명종대 및 선조 ․ 광해군대 사림의 정몽주 인식과 17세기 인조 ~ 현종대의 정몽주 인식의 차이를 비교 검토해보는 것도 성리학 이해의 척도를 가늠하는 한 방편이 될 것이다.
  • 기대효과
  • 1. 청소년의 교육학적 관점이다. 정몽주는 청소년 위인전 도서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청소년에게 미치는 그 영향력도 지대하다. 역사학계에서 김인호의 연구는 그러한 맥락에서 한 개인의 인물이 추숭되는 과정에서 과도하게 왜곡되거나 과장되어 전해진 사례를 지적하고 있다. 정몽주가 고려의 충신임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나 그 인식이 조선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며 그 인식의 변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하는 점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선행 연구는 태종대 절의지사, 세종대 『삼강행실도』의 충신 혹은 『용비어천가』의 난신 등 이중적 구도에서 성종대 사림의 『동국통감』에서 충신을 거쳐, 중종대 문묘종사가 되면서 성현으로 숭배되고, 조선후기 영조대 두문동72현으로 추앙되어 그 인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정몽주와 관련된 각 지방에서 전설이 신화가 되면서 이야기거리가 되어 우상화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당대 활동하였던 정몽주와 조선시대 인식하고 있는 정몽주와의 괴리가 생기고, 청소년 위인전에는 문학 작가들에 의해 좀 더 각색되면서 왜곡되고 있다. 올바른 위인전이 되려면 당대 인물연구와 더불어 사후 그에 대한 인식의 흐름이 제대로 된 연구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위인전에서 정몽주에 대한 왜곡과 과장은 그대로 이어질 것이다. 본 연구에서 그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본 연구는 올바른 위인전의 바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청소년의 올바른 사회 교육에도 학문적 기여 및 파급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 일반 대중의 사회학적 관점이다.
    일반 대중들은 역사적 인물을 인문학 교양서, 영화, 드라마 등을 통하여 쉽게 접하고 있다. 역사적 인물을 시간적, 공간적 개념으로 확대하여, 인문학인 文史哲의 학문간의 소통 가운데 일반 대중의 인문학 강좌, 인문학 교양서의 사회적 확대가 용이해졌다. 그러나 청소년의 위인전 못지 않게, 일반 대중을 위한 인문학 교양서 역시 작가의 과장과 왜곡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최근 영화와 드라마에서 사극의 붐으로 인물에 대한 재해석이 시도되고 있으며, 여기에는 작가나 감독의 생각이 전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한 예로 작년에 끝난 공영방송의 주말 드라마 정도전을 들 수 있다. 극 중에서 주인공인 정도전의 행적과 역할을 강조하다보니 정몽주가 정도전보다도 연배가 많음에도 불과하고 실제로 분장한 배우들의 연배는 그 반대였다. 정도전이 더 나이가 많은 배우가 뽑히게 되다 보니, 분장에서도 상대적으로 정몽주가 더 젊게 표현되는 아이러니가 생겼다. 청소년의 위인전과 마찬가지로, 그 기저에 올바른 역사적 이해가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일반 대중에게 미치는 사회적 영향 역시 지대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본 연구는 정몽주라는 역사적 인물이 각색되고 과장되는 인문학 교양서 및 드라마의 대중화에도 사회적 파급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 연구요약
  • 본 연구 내용은 조선 인조~현종대 편찬 간행된 서인 유계(1607~1664)의『여사제강』과 남인 홍여하(1620~1674)의『휘찬여사』를 통하여 17세기 붕당기 정몽주 인식을 살펴보려고 한다. 17세기 붕당기는 각 정파의 입장에서 선대의 역사를 재해석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사찬사서가 나오게 된다. 16세기 전반 중종대 문묘종사로 정몽주에 대한 평가가 일단락 된 뒤, 16세기 후반의 변화는 이 시기 서원의 건립과 병행하여 각 정파의 정통성과 성리학의 도통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성리학의 비조로 인정된 정몽주가 각 지역의 서원에 제향된다는 점이다. 대표적 서원은 정몽주의 출생지역인 영천의 임고서원, 정몽주의 묘가 있는 용인의 충렬서원, 정몽주의 순절터인 개성의 숭양서원이다. 영천 임고서원이 남인의 중심지라면 충렬서원은 서인의 중심지로서 각각 정몽주를 자파의 비조로 여겨 성리학의 도통론에서 그 정통성을 자처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선조대 사림인 윤두수는 『성인록』을 간행하게 된다. 또한, 서인인 윤두수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한다면 『성인록』은 16세기 박상의 『동국사략』의 영향을 다분히 받고 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한편, 오운은 영천 임고서원에서 간행된 『포은집』중간본(영천초각본) 교정에 참여하고 난 이후『동사찬요』를 개찬하게 된다. 당시 유성룡의 주도하에서 간행된 『포은집』 영천초각본은 영천 임고서원에서 간행된 것으로 유성룡이 발문을 쓰고 있으며, 남인의 입장에서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반영하듯 개찬한 오운의 『동사찬요』는 고려말 기사에서 16세기의 『동국사략』보다는 15세기의 『동국통감』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조선후기 남인의 사서편찬에 영향을 주었고, 남인들이 즐겨 읽는 사서가 된다.
    이러한 16세기 후반의 변화는 인조반정을 기점으로 하여 사서 편찬에서 또다시 변화를 가져온다. 17세기 초반 홍여하는『휘찬여사』를 편찬하게 된다. 홍여하의 『휘찬여사』는 15세기 『고려사』를 축약한 것으로 기전체 형식을 따르며, 특히, 고려말 조선건국을 반대한 인물들에 대한 내용을 많이 수록하고 있다. 『고려사』에 없는 길재, 서견, 김주, 이양중의 열전은 광해군대 오운의 『동사찬요』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17세기 후반 송시열이 서문을 쓴『포은집』봉화각본 간행되고 나서, 뒤이어 유계의『여사제강』이 현종 8년 간행된다. 유계의 『여사제강』은 임천에 유배되었던 인조 15년(1637)에서 인조 18년(1640) 사이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계는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등과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함께 동문수학한 대표적인 서인이다. 단적인 예로 유계의 문집인 『시남집』의 서문은 송시열이 쓴 것이다. 유계의 『여사제강』은 16세기 박상의 『동국사략』을 수용하며, 당대 홍여하의 『휘찬여사』와 달리 강목체사서이다. 유계는「공양왕기」에서 ‘殺門下侍中鄭夢周’ 라 하여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죽임을 당하다는 의미에서 ‘誅’가 아니라 ‘殺’로 표현하고 있다.
    17세기 붕당기의 두 사서는 형식면에서는 기전체와 강목체로써 판이하게 다르며, 그 영향을 받고 있던 전대의 사서 역시 다르지만, 내용면에서 공통적인 면이 있다. 즉, 16세기 중종대 『동국사략』과 광해군대 『동사찬요』에서 삭제되었던 공양왕대의 정몽주 행적이 17세기 인조반정이후 편찬되는 사찬사서에서 당파와 상관없이 공양왕대의 정몽주 행적이 모두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행연구에서 붕당기 서인과 남인의 정파대립과정에서 당연히 정몽주 인식의 차이가 드러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몽주의 절의를 강조하는 측면에서 한 목소리를 내는 점은 주목해야할 부분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점을 주목하여 17세기 붕당기의 정몽주 인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이는 16세기 중종 및 선조 ․ 광해군대 정몽주 인식과의 차별성을 살펴봄으로써 조선전기 주자성리학과 조선후기 조선성리학의 차이를 가늠하는 한 방편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17세기 붕당기 서인과 남인의 정몽주에 대한 인식을 당대 사찬사서를 통하여 살펴보았다. 대표적인 사서는 서인인 유계의 『여사제강』과 남인인 홍여하의 『휘찬여사』이다. 이 두 사서는 형식면에서는 강목체와 기전체로써 판이하게 다르며, 그 영향을 받고 있던 전대(前代)의 사서 역시 다르지만, 내용면에서 공통적인 면이 있다. 즉, 16세기 중종대 『동국사략』과 광해군대 『동사찬요』에서 삭제되었던 정몽주의 고려 말기 공양왕대 행적이 17세기 인조반정이후 편찬되는 사찬사서에서 당파와 상관없이 모두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붕당기 서인과 남인의 정파대립과정에서 당연히 정몽주 인식의 차이가 드러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몽주의 절의를 강조하는 측면에서 한 목소리를 내는 점은 주목해야할 부분이다. 특히, 정권을 주도하고 있는 서인의 입장에서 쓴 유계는『여사제강』의「공양왕기」에서 ‘殺門下侍中鄭夢周’ 라 하여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죽임을 당하다는 의미에서 ‘誅’가 아니라 잔혹함을 강조하는 ‘殺’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영문
  • In the 17th century, we studied the recognition about Jeong Mong-Ju of Seoin and Namin through history books. Representative books were Yeosajegang by Yu Gye in the Seoin and Hwichanyeosa by Hong Yeo Hwa in the Namin. The two history books differed in the form by Kangmok style and Kijeon style, so were different from the previous books, but the contents were a little common. Jeong Mong-Ju's achievements were later deleted from Dongkuksaryak during the King Jung-Jong era in the 16th century and Dongsachanyo during the Gwanghaegun era. However, those were described everything regardless of party affiliation in history books published after Injobanjeong in the 17th century. Although it was necessary to reveal the difference between the ruling and opposition parties (Seoin and Namin), it was noteworthy to speak up in the aspect of emphasizing Jeong Mong-ju's intention. Especially, written on the part of the Seoin who leaded the regime, Yu gye described it directly in Gongyangwang's history of Yeosajaegang.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이 연구 내용은 인조 ~ 현종대의 정몽주 인식, 즉 17세기 붕당기의 정몽주 인식이다. 17세기 붕당기는 각 정파의 입장에서 선대의 역사를 재해석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사찬사서가 나오게 된다.
    16세기 전반 중종대 문묘종사로 정몽주에 대한 평가가 일단락 된 뒤, 16세기 후반의 변화는 이 시기 서원의 건립과 병행하여 각 정파의 정통성과 성리학의 도통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성리학의 비조로 인정된 정몽주가 각 지역의 서원에 제향된다. 대표적 서원은 정몽주의 출생지역인 영천의 임고서원, 정몽주의 묘가 있는 용인의 충렬서원, 정몽주의 순절터인 개성의 숭양서원이다. 영천 임고서원이 남인의 중심지라면 충렬서원은 서인의 중심지로서 각각 정몽주를 자파의 비조로 여겨 성리학의 도통론에서 그 정통성을 자처하고 있었다.
    이러한 16세기 후반의 변화는 인조반정을 기점으로 하여 사서 편찬에서 또다시 변화를 가져온다. 17세기 초반 홍여하는『휘찬여사』를 편찬하게 된다. 홍여하의 『휘찬여사』는 15세기 『고려사』를 축약한 것으로 기전체 형식을 따르며, 특히, 고려말 조선건국을 반대한 인물들에 대한 내용을 많이 수록하고 있다. 『고려사』에 없는 길재, 서견, 김주, 이양중의 열전은 광해군대 오운의 『동사찬요』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17세기 후반 송시열이 서문을 쓴『포은집』봉화각본 간행되고 나서, 뒤이어 유계의『여사제강』이 현종 8년 간행된다. 유계의『여사제강』은 임천에 유배되었던 인조 15년(1637)에서 인조 18년(1640) 사이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계는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등과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함께 동문 수학한 대표적인 서인이다. 단적인 예로 유계의 문집인 『시남집』의 서문은 송시열이 쓴 것이다. 유계의 『여사제강』은 16세기 박상의 『동국사략』을 수용하며, 당대 홍여하의 『휘찬여사』와 달리 강목체사서이다.
    17세기 붕당기의 두 사서는 형식면에서는 기전체와 강목체로써 판이하게 다르며, 그 영향을 받고 있던 전대의 사서 역시 다르지만, 내용면에서 공통적인 면이 있다. 즉, 16세기 중종대 『동국사략』과 광해군대 『동사찬요』에서 삭제되었던 공양왕대의 정몽주 행적이 17세기 인조반정이후 편찬되는 사찬사서에서 당파와 상관없이 공양왕대의 정몽주 행적이 모두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붕당기 서인과 남인의 정파대립과정에서 당연히 정몽주 인식의 차이가 드러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몽주의 절의를 강조하는 측면에서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이 연구는 다음에서 학문적, 사회적 발전의 기여도를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1. 청소년의 교육학적 관점이다.
    정몽주는 청소년 위인전 도서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청소년에게 미치는 그 영향력도 지대하다. 역사학계에서는 그러한 맥락에서 한 개인의 인물이 추숭되는 과정에서 과도하게 왜곡되거나 과장되어 전해진 사례를 지적하고 있다. 정몽주가 고려의 충신임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나 그 인식이 조선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며 그 인식의 변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하는 점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선행 연구는 태종대 절의지사, 세종대 『삼강행실도』의 충신 혹은 『용비어천가』의 난신 등 이중적 구도에서 성종대 사림의 『동국통감』에서 충신을 거쳐, 중종대 문묘종사가 되면서 성현으로 숭배되고, 조선후기 영조대 두문동72현으로 추앙되어 그 인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정몽주와 관련된 각 지방에서 전설이 신화가 되면서 이야기거리가 되어 우상화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당대 활동하였던 정몽주와 조선시대 인식하고 있는 정몽주와의 괴리가 생기고, 청소년 위인전에는 문학 작가들에 의해 좀 더 각색되면서 왜곡되고 있다. 올바른 위인전이 되려면 당대 인물연구와 더불어 사후 그에 대한 인식의 흐름이 제대로 된 연구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위인전에서 정몽주에 대한 왜곡과 과장은 그대로 이어질 것이다. 본 연구에서 그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본 연구는 올바른 위인전의 바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청소년의 올바른 사회 교육에도 학문적 기여 및 파급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 일반 대중의 사회학적 관점이다.
    일반 대중들은 역사적 인물을 인문학 교양서, 영화, 드라마 등을 통하여 쉽게 접하고 있다. 역사적 인물을 시간적, 공간적 개념으로 확대하여, 인문학인 文史哲의 학문간의 소통 가운데 일반 대중의 인문학 강좌, 인문학 교양서의 사회적 확대가 용이해졌다. 그러나 청소년의 위인전 못지 않게, 일반 대중을 위한 인문학 교양서 역시 작가의 과장과 왜곡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최근 영화와 드라마에서 사극의 붐으로 인물에 대한 재해석이 시도되고 있으며, 여기에는 작가나 감독의 생각이 전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청소년의 위인전과 마찬가지로, 그 기저에 올바른 역사적 이해가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일반 대중에게 미치는 사회적 영향 역시 지대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본 연구는 정몽주라는 역사적 인물이 각색되고 과장되는 인문학 교양서 및 드라마의 대중화에도 사회적 파급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 색인어
  • 정몽주, 유계, 홍여하, 여사제강, 휘찬여사, 인조, 현종, 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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