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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도학의 특징과 시대변화에 따른 실천전략의 변화 양상 연구 : 17세기 大一統의 春秋義理와 宗法, 義起의 국가 적용 논리를 중심으로
A study of the philosophical characteristic and the practical strategy of last Josun Dynasty Neo-Confucianism : focused on the 17th Century applicative logics of Great Unification and Clan Rules in Neo-Confucianism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7S1A5A2A01025545
선정년도 2017 년
연구기간 3 년 (2017년 07월 01일 ~ 2020년 06월 30일)
연구책임자 정도원
연구수행기관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ㆍ문화연구소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조선유학은 17세기 전후로 국내외 현실 변화에 따라 집단지성이 실천적 차원에서 분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본 연구는 이 집단지성의 기본 틀이 도학이라고 보고, 이를 기준으로 사회사상, 특히 春秋와 禮의 논리를 분석한다. 그리고 이를 현대의 시각에서 이루어진 평가와 비교하여, 그 특징과 의의, 한계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후기 사회사상을 도학의 지평에서 이루어진 일원적 체계로 규정하고, 도학의 구조적 특성을 근거로 실제 논의를 검토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현재까지 이루어진 연구 성과를 투영한다면 보다 풍부하고 의미 있는 결과를 산출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조선후기 유학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있다. 또한 이를 종합적인 시각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도 적지 않다. 하지만 막상 그 토대로 “도학”을 고려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조선후기 유학 자체가 자신을 “도학”으로 규정하고 있음에도, 그 특성을 고려하여 분석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이러한 구조적 특징을 고려하지 않는 분석으로는 분야별로 나뉜 현재의 연구 성과들을 소통시켜 종합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도학의 제 영역을 단절시켜 조선후기 유학의 또 다른 모습인 실학과의 대조 이해도 어렵게 만든다. 이렇게 되면 조선후기 유학을 사상의 본령이나 내재적 원인에 따라 규명할 수 없다.
    도학은 內聖外王의 실천을 모토로 한다. 따라서 모든 경세에 관한 논의는 理學-心學의 전제 위에 있어야 한다. 春秋義理를 논하든 服制를 是非하든 원론적으로는 하나의 理로 一貫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벗어난 논의는 도학에 대한 객관적 차원의 평가가 될 수는 있어도, 도학 자체에 대한 적확한 이해에 기초했다고 할 수는 없다. 典禮論爭 및 黨爭과 연결된 禮學을 조선의 『朱子家禮』 이해로 한정하거나 道學的 歷史意識과 對中國 外交 등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春秋義理를 政治史나 華夷論의 차원에서만 검토하는 것은 도학의 이러한 특성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각 분야의 논의를 도학의 지평에서 종합하여 조선후기 유학의 전모를 파악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매우 시급하다고 하겠으며, 이를 위해서는 17세기 춘추와 예에 집중한, 도학적 지평에서의 사회사상 분석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춘추나 예에 관한 논리가 어떠한 도학적 근거에서 도출되었는지 따져볼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현재의 평가, 즉 기존 연구 성과와의 비교는 학계의 평가가 조선유학에 대한 정당한 이해에 기초한 것인지, 혹은 조선유학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확인시켜줄 수 있다. 이러한 평가 위에서 조선후기 사상사에 대한 이해는 진일보 할 것이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조선후기 유학이 도학으로서 17세기 전후 국내외 현실 변화에 따라 실천적인 차원에서 분화하고 있으며, 특히 사회사상이 도학의 지평에서 일원적인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大一統을 정점으로 하는 17세기 전후의 󰡔춘추󰡕에 관한 도학자들의 의리론과 예학의 宗法秩序, 특히 “義起”로 표현되는 각종 變禮 상황에서의 도학자들의 판단 방식에 주목한다. 도학이 추구하는 一理의 세계관이 어떻게 “義理”-춘추의리와 예학적 의리를 막론하고-로 구체화하는가 하는 관점에서 조선후기 사상을 분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논의가 일종의 사회실천 전략으로서 국가사회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당쟁이라고 판단되므로, 조선후기 사상사를 중심으로 당쟁사까지 아우르는 스펙트럼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이를 도학적 시각을 벗어난 현대의 연구와 비교 검토함으로써, 17세기 유학이 가지는 시대적 의미와 한계 또한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더 나아가 17세기 국내외의 변화된 현실 속에서 도학파가 분열하는 원인과 그리고 새로운 실천전략의 등장을 검토함으로써, 조선후기 유학을 ‘시대 현실과 도학적 역사의식이 빚어낸 자기 전개의 결과인가?’로 파악할 수 있는가 하는 사상사적 화두에 답하고자 한다.
  • 기대효과
  • 1. 본 연구는 조선후기 유학, 특히 17세기 무렵의 춘추의리론과 예학사상을 도학적 체계에서 검토하고, 이를 학계의 기존 평가와 비교하여 조선후기 유학 내지 사회사상에 대한 종합적이면서 객관적인 이해를 획득하고자 한다. 17세기 전후의 사회사상은 도학의 사회적 실천이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이를 도학 중심의 사상사 영역으로 일원화하게 되면, 병자호란 이후의 급격한 국내외 정세 변화에 대한 조선유학의 대응을 統合的으로 考察하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다.
    2. 17세기 유학의 의미에 관한 학계의 연구는 분야별로 집중되어 있고, 동일 주제라도 사학계나 정치학계의 연구와 철학계의 연구가 동일 지평에서 소통되고 있지 못하다. 본 연구는 이러한 현재의 연구를 소통시켜 종합적인 시각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통합할 수 있고, 이를 기초로 보다 진전된 조선후기 유학에 대한 이해를 가져올 수 있으리라 보는 것이다. 이에 도학 내지 의리를 배제한 현대적 관점에서의 평가를 포괄하게 되면 내성외왕의 도학 구조가 현실에서 논의 또는 실현되는 양상에 대한 보다 具體的인 資料의 産出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3. 16세기 이래 조선유학은 도학의 모토 아래 내성과 외왕을 본말의 체계로 구축한다. 이학-심학 논의가 내성의 本이라면 “춘추-출처-예학-경세”는 외왕의 末이다. 따라서 외왕론은 “의리”로 일관된다. 이러한 주종식 본말론을 비판하고 양자를 도기론식 병행구조로 변경하고 있는 것이 실학이다. 도학과 실학이 내성과 외왕의 관계 설정만 다를 뿐 실제 내용에서는 중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후기 유학의 사회사상, 특히 춘추의리론 및 예학사상 등에 대한 탐구는 그대로 實學 硏究에 適用될 수 있다. 이는 조선후기 도학의 사회사상과 실학에 대한 새로운 연구 지평으로 이어질 수 있다.
    4. 이 논의를 정치, 역사적 시각에서의 분석 및 현 사회의 제 문제와 견주어 봄으로써 지금, 우리 사회의 여러 담론 확장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조선후기의 담론들은 중국이나 일본에 대한 이해, 즉 화이론 혹은 중화주의와 같은 대외 관계 인식과 자기 인식을 포함한다. 일상에서의 예학세계 실현 논의 또한 일상의 윤리에 대한 고민은 상당부분 현대 사회의 문제와도 겹치는 주제이다. 때문에 사회통합과 이념 통일, 사회적 진로 제시라는 조선후기 사회적 과제와 그에 대한 유학의 답변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매우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다. 17세기 조선도학의 시대인식과 역사의식, 사회통합론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함으로써 현 우리 사회의 대외관계나 사회통합 방향 모색 등에 도움을 줄 수도 있고, 傳統 談論의 現代的 繼承이라는 측면에서도 논의의 활성화를 기대 할 수 있을 듯하다.
    * 부수적으로, 본 연구가 주자의 원론으로부터 16세기까지의 담론을 종합적으로 고찰하여 논의 기준을 설정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산출되는 『춘추』와 『가례』, 전례논쟁, 당쟁 등에 대한 연구 성과는 旣存 硏究를 豊富하게 할 수 있으며, 이 관점이나 성과는 그대로 18-19세기 유학에 대한 論議로 擴張될 수 있다.
  • 연구요약
  • 연구목적 : 조선후기 유학의 춘추의리론과 예학적 판단 논리를 도학의 지평에서 종합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이러한 조선후기 유학 내지 도학으로서의 특징이 어떠한 시대인식과 역사의식 속에서 국가사회에 실천되고 있었는가를 규명한다. 또한 이러한 규명의 내용을 현재의 학계 입장과 비교 검토함으로써 조선후기 유학에 대한 이해의 진전 및 영역별로 나눠 진행된 현 연구의 소통을 추구한다. 아울러 당시 도학의 현실이 현재 우리사회의 현실과 매우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판단하므로, 이러한 연구 결과가 전통 담론의 현대적 재해석 내지 현대적 담론으로의 전환 가능성을 타진한다.
    연구내용 : 본 연구는 조선유학이 17세기 전후 국내외 현실 변화에 따라 집단지성이 실천적 차원에서 분화하는 양상을 보인다고 보고, 이 지성의 기본 틀을 구축하고 있는 도학을 기준으로 사회사상, 특히 춘추와 예의 논리를 분석하고, 다시 이를 현대의 시각에서 이루어진 평가와 비교해보고자 한다. 평가와 비교의 기준은 주자의 담론과 이에 대한 조선유학의 이해이다. 주자의 담론은 『대전』 및 『어류』를 기준으로 예학의 경우 『의례경전통해』와 『가례』, 춘추의리론의 경우 『춘추호씨전』과 『정씨경설』을 검토하여 정리할 것이다. 이에 대한 조선유학의 이해는 『춘추』의 경우 『경학자료집성』의 춘추부 및 정몽주, 조광조, 이황 등의 논설, 예학은 이황, 송익필, 김장생, 정구의 저작을 중심으로 주요 저술을 선별할 것이다. 17세기 이후 저술은 관련 문헌이 증가되고 전례논쟁이 본격화되므로 논쟁 당사자들의 서신이나 연관 저술의 비중을 증가시키되, 『춘추』의 경우 송시열, 송준길 등의 관련 저술이 부족하므로 이유장과 박세채의 저술로 내용을 보완하도록 할 것이다.
    연구방법 : 본 연구는 크게 “원론분석 및 기준 설정 → 16세기 이전 춘추의리 및 예학 인식 → 17세기 전후 춘추의리 및 예학 인식”의 3 단계로 진행할 것이다. 17세기 이후 이에 관한 논의를 사계-우암을 중심으로 한 서인-노론이 주도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들의 주장과 이에 대한 반론으로서의 남인들의 주장을 비교하는 형식으로 진행할 것이다. 준비 단계에서는 자료 분석을 위한 주제어 고정 작업을 자료의 선별 작업과 동시에 진행하고, 종료 단계에서는 정치학 내지 역사학계의 자료를 종합하여 고찰하는 작업을 추가할 것이다.

    1-1. 『공양전』과 大一統에 대한 송대 이전 담론과 朱子 및 『춘추호씨전』을 중심으로 한 도학자들의 춘추의리 비교
    1-2. 麗末 신진사대부들의 大一統, 華夷觀 및 小中華論과 16세기까지의 도학자들의 春秋義理 검토 : 포은, 정암, 퇴계를 중심으로 “一理와 用夏變夷”에 관한 입장 및 방법론 조명
    1-3. 17세기 국제정세 변화와 우암의 “中華” 인식 및 復讎義理 : 남계, 백호와의 비교 및 참조.

    2-1. 『의례경전통해』와 『가례』를 중심으로 한 주자의 종법 및 의리 인식 규명
    2-2. 麗末 『가례』의 도입, 퇴계와 사계의 『가례』 적용 방식의 차이 검토(한강 참조) : 義理, 變禮, 時王之制와 수양·솔선수범의 준거로서의 예학
    2-3. 17세기 방국례와 가례의 접점과 國統의 문제 : 『국조오례의』, 우암, 미수, 백호의 주장 비교.

    3-1. “理一”과 “一本”의 당위 속 大一統과 宗統 이해 : 주자의 도학과 『춘추』 및 예학 이해
    3-2. 주자학의 정착과 사회실천론으로서의 『춘추』 및 『가례』: 퇴율을 기준으로 한 도학과 禮治의 실현 논리 검토. 학파별로 구분하여 특징 분석.
    3-3. “無二日, 無二斬”의 정합성과 시대 변화, 그리고 도학의 분열 : 서인-노론에서 호락의 분열과 북학의 등장, 성호좌파와 우파의 분열 및 『춘추』, 예학 이해의 변화 등을 검토(주자학 내부의 분열에 대한 원인 분석과 실학적 관점에서의 연구를 종합하여 상호 교차 검증)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1. 주자의 정통적 사회실천론과 ‘義理’․‘義起’의 현실화 논리

    본고는 주자의 사회실천론을 “정통론적 사고의 현실화”라는 차원에서 검토해보고자 하였다. 유가의 正統論은 周代의 禮 문화에 대한 공자의 재해석과 이에 근거한 사회문화담론, 또는 五倫의 正名을 내핵으로 하는 禮治 시스템에 관한 담론이며, 그 핵심에 “春秋義理”가 있다. 이는 仁의 상호윤리, 즉 “君君臣臣 父父子子”의 윤리를 중심으로 한 “正統的 判斷”이다. 주자의 이에 대한 입장은 두 편의 저술, 즉 󰡔자치통감강목󰡕과 󰡔의례경전통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자치통감강목󰡕은 역대사를 正名의 正統論에 근거하여 일관되게 서술한, 공자의 󰡔춘추󰡕를 이은 正統의 역사서로 평가된다. 이 책에서 주자는 “尊王賤覇”라는 道學의 논리에 따른 그의 도덕적 역사인식을 그대로 내보이고 있다. 주자는 尊王의 紀綱을 말하면서도 주체의 心法과 實踐, 즉 君君臣臣의 책무를 강하게 요구하는데, 이는 주자의 “綱目”이 道學의 춘추의리를 응축한 歷史觀이자 주체의 자기점검을 먼저 요구하는 心學이며 內修에 바탕을 둔 사회 실천전략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건륭제는 󰡔자치통감강목󰡕을 春秋義理에 근거하여 敬의 心法으로 읽어야 한다고 하였다. 한편 󰡔의례경전통해󰡕는 古禮를 말하지만 實學과 時用 혹은 時王之制로서의 전환을 전제한, 治道로서의 禮書였다. 때문에 이 책은 기존의 五禮 중심 체제를 벗어나 󰡔대학󰡕 팔조목의 체제를 따라 家-鄕-邦國-王朝의 순서로 내용을 구성하고, 특히 家禮와 鄕禮 사이에 學禮를 둔다는 특징이 있었다. 주자의 禮學이 成人, 成家 후 出世, 內聖 후 外王이라는 구도에 따른 “儀禮”이자, 爲己之學 즉 心學을 본령으로 하는 正名의 禮學이며, 小學에서 大學까지 일관되는 涵養을 본령으로 하는 道學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의 修身을 기본으로 하는 內聖外王의 체계 속에서 주체의 도덕성을 강하게 요구하는 君君臣臣의 正名적 사고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의례경전통해󰡕와 󰡔자치통감강목󰡕은 같은 맥락 또는 같은 義理의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자치통감강목󰡕과 󰡔의례경전통해󰡕의 의리는 효종과 광종에게 올린 두 봉사(「무신봉사」, 「기유의상봉사」)를 통해서도 압축적으로 확인된다. 내용과 진술체계가 거의 같은 이 두 봉사에서 주자는 일관되게 군주의 마음을 문제삼음으로써 “군주의 인격과 정치행위를 일신하여 국가 기강을 정비하는[一新德業 重整綱維]” 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특히 그는 春秋義理에 근거한 “聖學”을 강조하고, 금나라와의 전쟁 같은 것은 이러한 자기 수양 혹은 내정개혁의 성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주장하였다. 주자의 尊王은 단순히 군주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王道의 담지자를 정통으로 높인다는 것이며, 이는 正名의 입론을 엄격히 적용한 바탕에서 성립할 수 있는 것이었다.
    주제어 : 正名, 正統, 義理, 󰡔儀禮經傳通解󰡕, 󰡔資治通鑑綱目󰡕

    2. 조선 도학파의 內聖外王論과 一理의 현실적 의미
    본고는 15-16세기 조선의 道學을 중심으로, ‘內聖의 外王으로의 전개 논리와 이때 주요하게 동원된 理 담론의 실제 의미’를 분석하고자 하였다. 15-16세기 조선 도학은 국가사회에 제시할 統合, 統率의 대원칙을 內聖外王의 차원에서 모색하였다. 퇴계나 율곡의 聖學이 바로 이런 실천적 목적에서 나온 결과였으며, 義理와 世道, 禮敎로 압축되는 17세기 도학 역시 이 맥락에서 전기 유학과 연결되고 있었다. 이러한 논의의 중심에 ‘理’ 담론이 있었다. 理에 관한 당시의 담론은 內聖外王의 실천적 여과를 거쳐 ‘聖學’으로 구체화되었고, 一理, 尊理, 一本이라는 당위적이면서도 실천적인 결론을 도출하였다. 理가 모든 인식과 실천의 근거이자 내용이라는 전제였으므로, 一理, 一本, 尊理의 ‘一’과 ‘尊’은 內聖外王의 차원에서 사회를 통합, 운영하고자 하는 주체의 실천 방향을 가리키고, 理는 그 실천과 교화의 준거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이는 모든 존재가 理에 따라 성립된다면, 현실 역시 이 지평에서 일관되어야 하고, 국가사회는 이 理의 절대·보편에 근거하여 운영되어야 한다는 신념 및 역사의식의 산물이었다. 禮와 道理·義理의 담론들 역시 이를 사회기강의 확립 및 이를 통한 이상적 정치 구현이라는 방향으로 전개한 결과였다. 후기 도학의 ‘大一統’이나 ‘尊周大義’를 일관된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조선전기 도학의 논의는, 그러므로 당시의 현실과 맞닿아 진행된 역사적 산물인 동시에 도학 정통에 관한 역대의 담론을 계승한 역사의식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중국에서 수입한 주자학을 우리 현실 속 道學으로 구현하고자 한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에 필연적으로 전제되어야 할 理에 대한 주체의 자기체험적 인식은 용이하지 않았다. 더욱이 조선후기처럼 당파적 대립이나 시대 변화가 사상계에 크게 영향을 미칠 때, 이러한 理에 대한 담론은 당리당략이나 정치적 정당성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 왜곡될 수 있었다. 주체 속 一理의 획득이 결국은 자신들 정권의 정당성 확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당위에 대한 이해에 필연적으로 수반되어야 하는 현실 이해를 오로지 理의 지평에만 한정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不離不雜의 양면적 확장 가능성을 제한하게 되었고, 여기에 자신들의 현실적 이해마저 결부되면서 논의의 지평은 더더욱 협소해졌다. 北學이나 성호좌파와 같은 ‘탈도학적’ 사고가 대두된 시기가 이때와 겹치는 것은, 결코 시대적 우연일 수 없었다.
    주제어 : 道學, 內聖外王, 현실인식, 一理, 尊理

    3. 17세기 도학실천론의 사상적 특징과 정치적 의미
    도학자들은 당위적 목적과 주체적 신념, 그리고 계승되어온 진리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현실을 파악하고 대처하려고 하였다. 이들에게 현실은 ‘가치판단’ 혹은 ‘선택’의 場이다. 신념과 당위에 따른 실천이 합리나 효율보다 우선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특히 17세기에 두드러진다. 현실과의 괴리도 그만큼 크다. 그런데도 이런 입장이 강화된 데는 까닭이 있다. 본고는 이를 사상사적 맥락에서 검토해보고자 하였다.
    17세기에는 당파 혹은 학파 간의 다툼이 심각하였다. 大一統의 원칙과 世道, 北伐의 강령을 공유하면서도 內修外攘의 실제에서 논리가 갈리고 “斯文亂賊” 혹은 “經禮壞亂”으로 서로를 비판하였다. ‘世道’ 혹은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념적으로 대립하였기 때문이다. 학파와 당파를 일치시키고 학파의 비조를 道統에 연결하여 世道와 義理 혹은 학문적, 정치적 리더십을 행사하는 것이 17세기 도학 정치의 기본 방식이었다. 道統, 즉 주자학적 정통성은 학문적 정통성인 동시에 정치적 정당성이기도 하였다.
    17-18세기 理學은 정파와 관계없이, 현실에서 理의 보편성 혹은 공공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세도자임자로서 사회의 진로를 분명히 하고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여야 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여러 개혁정책도 강구되었다. 이를 위한 道統이고 주자학이었다. 하지만 理의 보편성에 대한 검토가 민생의 안정을 위한 현실 사회 분석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우암이나 백호나 對症的 時務를 논의할 뿐, 현실 분석에 기초한 經世의 그림은 제시하지 못했다. 사상적인 골격이나 시대 과제에 대한 인식이 같았음에도, 상대의 주장을 배척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절대화하는 모습만 남게 되었다. 이는 시대를 자신들의 관념 속에서 규정하고, 이에 어긋나는 주장은 모두 이단으로 모는 정치적 엄숙주의와 닫힌 담론으로 이어졌다. 이는 분명한 17세기 도학의 한계였지만, 정치·경제적 욕망을 도덕으로 포장하였던 때문은 아니었다.
    이 시기에는 같은 시대 담론이나 사상적 토대를 가지면서도 이를 극복하기 위한 사상 변화도 일어나고 있었다는 점에서, 17세기 사상사를 새로운 세계관과 열린 담론으로 가기 위한 긴 사상 변화의 과정에서 보아야 할지, 농업·유교 국가 조선이라는 현실에 갇힌 도학적 세계관의 한계로만 이해해야 할지 좀 더 숙고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주제어 : 世道, 尊王, 攘夷, 道學, 古經
  • 영문
  • 1.A Study on The Strategy of Moral and Cultural Society Reform in Zhouxi's Neo-Confucianism
    This paper examines Zhūzǐ's social practice in Yílǐjīngzhuàntōngjiě(儀禮經傳通解) and Zīzhìtōngjiàngāngmù(資治通鑑綱目) as a “realization of orthodox thought”. The orthodoxy of Confucianism is a social and cultural discourse based on the reinterpretation of Confucius on the culture of Li(禮) of Zhōu(周) country. It is also a discourse on the deposit system that focuses on the righteousness of the king. The core is the “Moral of Spring and Autumn(春秋義理)”, which is “orthodox judgment” based on the moral law that “the king should be a king and a servant should be a servant”. Zīzhìtōngjiàngāngmù of Zhūzǐ(朱子) is an orthodox history book that follows the Confucian Spring and Autumn(春秋), consistently describing the history based on the orthodoxy of the definite. This history book follows the moral law of the Neo-Confucianism that “the legitimacy should be raised and the hegemonism should be passed.” Zhūzǐ's Moral of Spring and Autumn, while referring to the principle of exaltation of the king, strongly demand true heart and good practice in the subject. It is a moral practice philosophy that requires reading the history of the Confucian ethics that condensed the moral values ​​and checking itself first, and it has a practical strategy that prioritizes domestic reform. Therefore, the emperor Qiánlóng said that this book should be read as a teaching to reverence the mind according to spring and autumn. On the other hand, Yílǐjīngzhuàntōngjiě is a book about ancient rituals, but presupposes a transition to a system that responds to actual academic and practical needs or the demands of the present dynasty. This book is a rite for governance. For this reason, it follows that the system of Dàxué is out of the existing five-ritual centered system, and the contents are formed in the order of the blood family, the local village, the local government, and the kingdom. In particular, there is a school rite between rituals related to blood relatives and local rites. It is a ritual according to the stereotypical composition that it becomes an adult and goes to society after assuming a family, and it implements ideal politics after being perfect man. It is a ceremony for completing oneself and a righteous justice. This is because it follows the principle of education of Neo-Confucianism that is based on the cultivation of humanity from minor education to elite education. In Dàxué(大學)'s self-fulfillment, social practice is the principle that ethical thought is strongly demanding the morality of the subject. This is the same as Yílǐjīngzhuàntōngjiě and Zīzhìtōngjiàngāngmù. Zhūzǐ is consistent in both policy proposals put forward by Xiàozōng(孝宗) and Guāngzōng(光宗), the emperor of Sung Dynasty. In these proposals, Zhūzǐ consistently addressed the morality of the monarch and sought to establish a "regime of national discipline by renewing the character and political act of the monarch". In particular, it emphasized that the achievement of reality is achieved through the achievement of such self-cultivation or domestic reform. From the standpoint of Zhūzǐ, it can be seen that the legitimacy and authority of a monarch is not merely a monarchy, but a moral justification and social approval.
    [Key words] rectification of names(正名), legitimacy(正統), practical moral law(義理), Yílǐjīngzhuàntōngjiě(儀禮經傳通解), Zīzhìtōngjiàngāngmù(資治通鑑綱目)

    2. A Study on the Neo-Confucianism of Chosun dynasty – focused on the practical theory of Li(理) and the awareness of reality
    In this paper, I tried to analyze the development of practical theory in Chosun dynasty, especially focused the 15th and 16th century practical Neo-Confucianism(道學) in terms of the actual meaning of Li(理). The Neo-Confucianist in early period of Chosun dynasty sought the principle of integration and leadership to be presented to the national society from the perspective of realization of self and social ideal(內聖外王). The conclusions based on this was the One(一理), worship the Li(尊理), and the same origin(一本). The mottoes of late school was also in this context. The reality is also consistent with this horizon, and the national society should be operated on the basis of the absolute and universal of this theory. The moral philosophy of Yulgok and Toegye was a practical result sought in this premise, and the various ways of practicing the doctrines of the 17th century can be concluded in this context, which can be compressed into the righteousness(義理), the real moral(世道), and edification based on the ritual(禮敎). The "one" and "worship" is a kind of practical direction because the Li(理) at this time is the standard of practice and edification. This means that they were trying to embody Neo-Confucianism into our real world.
    The discussions of Chosun dynasty were progressive historical products in connection with the actual situation of Chosun dynasty. Especially, since the discussions of Neo-Confucianists reflect their historical consciousness as the orthodox school. At the core of these discussions was the discourse of ‘Li(理)’. Therefore, the discourse on Li(理) was embodied as ‘the Holy Study(聖學)’ through the practical filtration of Neo-Confucian Doctrine, that is realization of self and social ideal, and it was linked to practical discussion of ritual, righteousness and duty.
    However, it is not easy for the subject to perceive Li(理), and when the partisan confrontation or the change of the age act largely as in the late Chosun Dynasty, it was a problem that it could be distorted in order to secure the political justice. The disconnection of academic exchanges between the West Party(西人) and the South Party(南人) and the disputes within each school could be understood in this context, and the reason why the West Party(西人)-the Oldman’s Party(老論) had disputed themselves there was. The securing of the Subjective(主體) in the first place led to the legitimacy of their regime. In other words, the absence of the One(一理) and the political conflict and the limits of the school vision are overlapped and it can be the reality of the controversies of the late Chosun dynasty. Inevitably, the real understanding that accompanies this reality is limited to the horizon of Li(理) only, thus limiting the two-dimensional extensibility of the practicality and ideality(不離不雜), and this has been reduced to the horizon due to their realistic understanding. It seems to have provided a motivation for the students to think about their own ideas.
    Key Words : dàoxué, realization of self and social ideal, awareness of reality, the One, worship the Li

    3. A Study on the Philosophical Characteristics and Political Implications of the 17th Century Korean Neo-Confucianism
    Neo-Confucianists try to grasp and cope with reality on the premise of their purpose, subjective beliefs, and belief in the inherited truth. For them, the reality is the “value judgment” or the “choice”. Therefore, practice based on beliefs and standards takes precedence over realistic choices or efficient actions. This was prominent in the 17th century. This paper attempted to examine the causes of these characteristics in the vein of the history of thought.
    Conflicts between the 17th-century factions and schools show ideological confrontations to secure political legitimacy or to take the lead in society or to establish the right public opinion. This responsibility countered WooAm, who took the position that people with both Neo-Confucianism of zhuxi and school orthodoxy should take responsibility, and BaekHo introduced a way of claiming that authority in the ancient Confucian Classics comes first. This led to criticism by Neo-Confucianists called ‘heresy’. When WooAm criticized ToeGye's moral philosophy, claiming that he was responsible for the formation of a moral social circumstance, academic descendents such as GalAm confronted it. When WooAm tried to bring YulGok and WooGye to the Confucian shrine, scholars inherited Toegye’s Confucianism criticized YulGok and WooGye for their behavior and academic purity. It was because they thought they were the heirs of the Neo-Confucianism of zhuxi.
    The fact that BaekHo expressed interest in the philosophy of ToeGye and YulGok, while insisting on the study of ancient Confucian Classics, was driven by the interests of reality. This is because he doubted the legitimacy of the WooAm’s Neo-Confucianism, which borrowed this authority. It was the method of exercising academic and political leadership at the time that it had the power to create a social atmosphere and moral judgment by calling its own school or partisan an orthodox successor to the Neo-Confucianism of zhuxi. This is why they share a policy of authenticity, responsibility for forming a moral society, and attack of the Qing Dynasty, while criticizing the other as a heresy and taking a different position on economic and social stability.
    As scholars and politicians, it was necessary to clearly provide the way for society to meet the demands of the times, but it was necessary to politically analyze how to establish a moral social atmosphere, review moral standards, and examine social ideals for the stability of people's lives. It has not been able to provide a blueprint for state operations. Only the countermeasures for each problem in reality were presented. It was not a policy competition with a philosophical background, but a political confrontation over authenticity. More advanced policy discourses are embodied in the 18th century. The 17th-century Joseon Neo-Confucianism of zhuxi is an extreme example of how public Li(理), subject's moral convictions, and historical callings can be embodied in a collapsing social order. It is necessary to consider whether this is due to changes in the times or whether it is because of Joseon, an agricultural and Confucian state.
    Keywords : public opinion(世道), guarding the legitimate regime(尊王), drive out the barbarians(攘夷), Neo-Confucianism of zhuxi(道學), ancient Confucian Classics(古經)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과제는 총 3편의 논문과 이를 위한 준비 논문을 산출하였다. 먼저 도학파 이전 주자학 내의 大一統과 주자학 이해, 특히 예학적 측면을 검토하여 「양촌 권근의 역사의식과 주자학 이해 : 이원적 사고와 大一統의 華制」를 작성하였고, 이후 16세기 도학파의 실천의 철학적 배경을 확인하기 위해 「퇴계와 율곡의 心學과 外王으로의 전환 논리」를 작성하였다. 특히 「퇴계와 율곡의 心學과 外王으로의 전환 논리」에서는 조선 도학의 두 축인 퇴계학파와 율곡학파의 실천론이 사물인식과 도덕실천에서 어떠한 차이를 가지는지에 분석하였다. 그 결과 퇴계가 正常을 지키며 非正常을 다스린다는 입장에서 주체의 天理 담지를 확신하면서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한다면, 율곡은 현실 속에 “하나”의 바름을 세우고 時宜에 따라 변통하는 주체를 강조하였다. 특히 율곡은 현실 속에서 예외 없이 公理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전 작업을 바탕으로 산출한 연구성과는, 조선 도학 실천론의 기준이 되는 주자의 실천론을 춘추의리에 근거한 역사의식으로 정리한 자치통감강목과 일상 속 유교적 삶과 교화를 추구한 의례경전통해를 중심으로 살핀 「주자의 정통적 사회실천론과 ‘義理’·‘義起’의 현실화 논리」와 조선 도학의 특징이자 모든 도학 실천 논리의 근거인 理의 의미를 內聖外王論의 틀에서 검토한 「조선도학파의 內聖外王論과 一理의 현실적 의미」이다. 이 두 결과를 바탕으로 본 연구의 주제인 “17세기 大一統의 春秋義理와 宗法, 義起의 국가 적용 논리를 중심으로 한, 조선후기 도학의 특징과 시대변화에 따른 실천전략의 변화 양상”을 검토하여 「17세기 도학실천론의 사상적 특징과 정치적 의미」를 발표하였다.
    주자의 실천론에 관한 연구에서 검토한 것은 도학에서 말하는 正統과 義理의 의미를 역사의식과 예학의 차원에서 고정하고, 이러한 명제들이 실제 어떠한 형태로 드러나는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검토 결과 주자의 尊王은 기강을 말하면서도 주체의 책무를 강하게 요구하는 심학적 자기 수양을 전제로 하고 있었으며, 古禮는 실학과 時用을 전제로 한 治道로서의 예학이었다. 즉 군주의 인격과 정치행위를 일신하여 국가 기강을 정비하고자 한다고 정리될 수 있었다. 15-16세기 조선 도학파의 실천론은 모든 존재가 한 理에 따라 성립하므로 현실 역시 이 지평에서 일관되어야 하고, 국가 사회는 이 理의 절대·보편에 근거하여 운영되어야 한다는 신념 및 역사의식의 산물이었다. 이는 당시 현실과 맞닿아 진행된 역사의 산물인 동시에 도학 정통에 대한 역대의 담론을 계승한 것으로서, 주자학을 우리 현실 속 道學으로 구현하고자 한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17세기 이후 보이는 ‘大一統’이나 ‘尊周大義’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었다. 또한, 이러한 논리에 주체의 자기체험적 인식이 용이하지 않다는 점도 분명하였다. 이는 大義의 당파적 왜곡의 가능성이 존재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판단되었다.
    17세기 도학실천론은 자기 수양의 리더십과 道統의 확보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주자의 담론과 16세기까지의 논의 양상을 계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급격한 사회 변동 속에서 도학자적 시각에서의 현실과 유교질서 회복 노력은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大義와 道統을 놓고 당파적 왜곡 역시 분명히 드러났다. 17세기 사상계를 대변한 우암과 백호의 논리를 비교해보면 이런 문제가 더욱 쉽게 드러나므로 이를 중심으로 분석을 진행하였는데, 그 결론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1. 양자 공히 大一統의 원칙과 世道, 北伐의 강령을 공유하였으나, 內修外攘을 실현하는 실제 정책 추진 방식에서 논리가 갈렸다.(학파와 당파를 일치시키고 학파의 비조를 道統에 연결하여 世道와 義理 혹은 학문적, 정치적 리더십을 행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世道’ 혹은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념적으로 대립하여, 상대를 “斯文亂賊” 혹은 “經禮壞亂”으로 비판하였다.)
    2. 양자 공히 세도자임자로서 사회의 진로를 분명히 하고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고자 하였다.(17-18세기 理學은 정파와 관계없이, 현실에서 理의 보편성 혹은 공공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여러 개혁정책도 강구되었지만, 理의 보편성에 대한 검토가 민생의 안정을 위한 현실 사회 분석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결국, “우암이나 백호나 對症的 時務를 논의할 뿐, 현실 분석에 기초한 經世의 그림은 제시하지 못했다. 사상적인 골격이나 시대 과제에 대한 인식이 같았음에도, 상대의 주장을 배척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절대화하는 모습만 남게 되었다. 이는 분명한 17세기 도학의 한계였지만, 정치·경제적 욕망을 도덕으로 포장하였던 때문은 아니었다”는 결론을 최종적으로 도출하였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현재 본 연구자는 연구 과정에서 확인한 추가적인 분석 필요 사항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특히 도학적 사고와 실학적 사고의 접점에 대한 분석에 집중하여 소론 실학자로 평가되는 인물들의 기원이 되는 우계 성혼의 도학과 임진왜란 경험이 빚어낸 현실 판단 및 대처 방식의 변화를 검토하여 발표하였고, 소속된 한국철학문화연구소의 장기 과제에 관련한 연구 주제를 포함시키도록 하였다. 이 연구는 대동법 관련 연구를 진행하는 역사학계 학자들과의 공동 세미나로 진행할 수 있도록 추진 중이다. 이를 통해 구체성이 결여된 것으로 평가되는 도학자들의 개혁담론을 재평가하고, 公理로 표현되는 “공공의 보편성” 내지 “공공의 생명원리”가 어떻게 내부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는지를 추적하고자 한다. 미조구치 유조 등의 보고가 적절했다면, 이러한 작업들은 단순히 조선 후기에 한정되지 않고 동북아 사상적 변화지도를 그리는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2. 이와 아울러 이러한 연구 주제는 식민사관의 왜곡으로부터 조선 유학의 참모습을 밝히고, 그 한계과 긍정성을 아울러 보는 긍정적 시각을 형성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를 위해 더욱 구체화된 논문들을 산출할 필요가 있으며, 역사학계와의 공동 세미나 등을 통해 보다 세밀한 검토를 진행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이는 교육 현장과 연구 현장에서 동시에 진행되어야 할 사항이므로, 1차 본 연구자가 소속된 연구소의 연구 주제로 추진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연구자들과의 성과 교류에도 노력할 계획이다.
    본 과제의 성과로 제출한 논문은 다음과 같다.
    「주자의 정통적 사회실천론과 ‘義理’·‘義起’의 현실화 논리」(󰡔민족문화󰡕52, 2018)
    「조선도학파의 內聖外王論과 一理의 현실적 의미」(󰡔율곡학연구󰡕39, 2019)
    「17세기 도학실천론의 사상적 특징과 정치적 의미」(󰡔퇴계학보󰡕 147, 2020)
    상기 논문들은 다음과 같은 준비 단계를 거쳤다.
    「양촌 권근의 역사의식과 주자학 이해 : 이원적 사고와 大一統의 華制」(󰡔유교사상문화연구󰡕 68집, 2017)
    「퇴계와 율곡의 心學과 外王으로의 전환 논리」(󰡔퇴계학보󰡕144, 2018)
    과제 종료 후 다음과 같이 후속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우계 성혼의 현실 판단과 제도개혁론 : 도학적 사고와 현실적 사고의 접점이라는 측면에서」(게재 예정)
  • 색인어
  • 도학, 일리(一理), 춘추대의, 대일통(大一統), 의리(義理), 종법, 의기(義起), 북벌, 예치(禮治)
  • 연구성과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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