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십국시기 도성사의 전면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天子之國’을 지향했던 前·後蜀, 吳·南唐, 南漢, 閩 뿐 아니라, 중원왕국을 正朔으로 인정하면서도 실질적인 독립왕국을 유지하려 했던 吳越, 楚의 도성에 관한 개별적인 접근과 비교사적인 접근이 동시에 요망된다. 본 연구에서는 우선 ...
오대십국시기 도성사의 전면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天子之國’을 지향했던 前·後蜀, 吳·南唐, 南漢, 閩 뿐 아니라, 중원왕국을 正朔으로 인정하면서도 실질적인 독립왕국을 유지하려 했던 吳越, 楚의 도성에 관한 개별적인 접근과 비교사적인 접근이 동시에 요망된다. 본 연구에서는 우선 역사적인 영향력과 자료문제를 고려하여 成都와 江寧府를 연구의 대상으로 설정하였다. 1차 년도에는 성도를, 2차 년도에는 강녕부를 중심으로 각각 전통유교의례의 계승과 지역의례의 수용 과정을 면밀하게 검토해보고, 종합적으로 비교해보면서 공통점과 차이를 분석해 볼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첫 번째로 전, 후촉과 남당시기 도성의 구조와 전통 의례공간의 특징에 대해서 검토해 볼 것이다. 해당지역의 지형적 특징과 군사적으로 각축을 벌이던 현실적 정황을 함께 고려하면서 『周禮考工記』의 “左祖右社, 面朝后市”의 공간개념이 어떻게 계승되고 변용되는지 살펴볼 것이다. 두 번째로는 성도와 강녕부의 의례공간에 당대 후반기이래로 발생하는 예제의 변화가 어떻게 반영되었는지에 대해서 검토해보면서, 그 시대적 의의에 대해서 고찰해 것이다. 당대후반기 국가의례에 발생하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 도교의 국가의례 진입과 의례의 개방성 증대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현종 天寶연간부터 본격화되는데, 天寶8載(749)에 현종은 唐室의 조상신으로 받들어지던 노자에게 ‘聖祖大道玄元皇帝’라는 존호를 추증하였다. 天寶10載(749)에는 태청궁에서 親祭를 올리고 다음날에는 太廟에서 제사를 받든 뒤 삼일 째에 南郊 원구단에서 제천의례를 거행했는데, 이후 太淸宮-宗廟-南郊로 이어지는 일련의 새로운 대제사체계가 정례화 되었다. 前蜀의 王建은 杜光庭을 황태자의 스승으로 초청하여 闕內에서 金籙齋를 거행한 바 있으며, 王衍 역시 靑城山 上淸宮을 방문하여 직접 초재에 참여하였다. 또한 唐이 老子를 聖祖로 추존한 것을 모방하여, 同姓 仙人 王子晉을 ‘聖祖至道玉宸皇帝’로 추존하고 상청궁에 銅像을 봉안하여 제사를 받들었다. 당말이래 예제의 변화가 십국정권에 의해서도 계승되고 있음을 반영해주는 일례인데, 좀 더 다양한 사례들에 철저한 분석을 통해서 이 시기 도성의례의 전개에 보이는 특징과 의의에 대해 검토해 볼 것이다. 세 번째로 본 연구에서 지역사묘 등 현지 지역신앙이 도성의 경관변화와 도시민의 일상생활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주목해 볼 것이다. 왕건은 전촉 건국과 더불어 先賢제사의 일환으로 張魯, 諸葛亮, 張儀, 張飛, 鄧艾등에게 王號와 公號를 추존하였으며, 후촉은 도성의 劉備廟 옆에 諸葛武侯祠를 건립한 바 있다. 또한 李氷에게도 大安王과 應聖靈感王이라는 존호를 추증하여 지역수호신의 위상을 공인해주었다. 지역신에 대한 우대조치는 南唐정부에서도 확인되는데, 당시 절서지역에서 戰神으로 폭넓게 받들어지던 陳果仁 神에게 武烈帝의 帝號를 책봉해주고, 도성 강녕부에 ‘正南面之尊’을 반영하여, 사묘를 건립해주었다. 지역신앙이 의례공간의 변화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기 위해서, 우선 成都와 江寧府의 현지지역신앙과 외지민간신앙의 유입과 변동과정을 면밀하게 검토할 것이다. 다음으로 지방지와 비문 등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도시 내외의 사묘분포도를 작성하고 주변 환경과의 연관관계에 대해서도 검토해 볼 것이다. 지방의례와 廟會의 준비과정과 전개과정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의례와 도성사회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