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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황조유민(皇朝遺民)' 연구
A Study onthe Natyralized Chinese and their Imperial Identity in Late Chosun Period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7S1A5A2A01024459
선정년도 2017 년
연구기간 3 년 (2017년 07월 01일 ~ 2020년 06월 30일)
연구책임자 우경섭
연구수행기관 인하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17세기 중반 한반도와 중국 대륙 사이에서 대규모 인구 이동이 발생했다. 명청교체의 과정에서, 수십 만에 달하는 한인(漢人)들이 전란을 피해 한반도로 건너왔다. 그리고 호란에 즈음하여 역시 수십 만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자발적 의지에 따라 혹은 청군의 포로가 되어 압록강 너머 만주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 시기 투로인(投虜人) 또는 피로인(被擄人)이라 칭해지는 조선 출신 중국 이주민에 관해서는 호란의 발발 원인 및 수습 과정을 규명하는 연구들 가운데 상당한 해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당시 향화인(向化人) 또는 황조인(皇朝人)이라 칭해지던 중국 출신 조선 이주민들은 사료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학계의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귀화 한인들에 대한 기록이 부족한 원인으로는 우선 당시 조선에 유입된 한인들이 주로 명·청 간 격전이 벌어지던 중국 요동(遼東) 및 산동(山東) 지역 변방민들이었기에 자체적인 기록을 남기기 어려웠다는 이유를 들 수 있다. 둘째로는 병자호란 패전 이후 청나라의 한인 송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조선 조정이 귀화 한인들에 관한 공개적 언급을 가급적 회피하려 했던 정황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으로, 국적을 바꾸는 행위 즉 귀화에 대한 동아시아 구래의 중화주의적 사고 역시 그들에 대한 기억을 제한하는 요인이었다. 이적으로 간주하던 여진인 혹은 일본인의 귀화를 ‘교화(敎化)를 향한 이주’ 즉 향화(向化)라 표현했던 것과 달리, 본디 중화(中華)의 백성인 한인들의 귀화는 전통적 향화 개념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사안이었다.
    중화의 백성들이 소중화(小中華)인 조선으로 이주하게 된 이때의 사건을 유교적 사유체계 안에서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었을까? 더욱이 명나라 멸망 이후 조선이 중화문명의 적통을 계승하였다는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의 세계관 아래에서, 조선후기 지식인들은 본디 중화의 백성이었던 한인들과 새롭게 중화의 계승자가 된 자신들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었을까? 이것이 바로 17~19세기 귀화 한인들을 둘러싼 조선 사회의 새로운 고민이었다.
    지금까지 귀화 한인에 관해서는 한족 이민사(移民史) 특히 화교사(華僑史)의 관점 및 양란을 전후한 시기 한·중관계사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연구들이 이루어진 바 있다. 그러나 귀화인을 둘러싼 조선후기의 정치사·외교사의 흐름에 주된 관심이 기울여지는 가운데 그들에 대한 조선왕조의 대응 내지 정책이 주목받았을 뿐, 정작 귀화인들의 구체적인 삶과 의식세계에 관해서는 깊이 천착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최근 한국 사회가 몸소 체험하고 있듯이, 이주 외국인 문제가 이민자에 대한 국가 정책 내지 외교 현안의 범주를 넘어 사회 내부의 정체성에 관한 근본적 고민을 환기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17세기 중반 한인들의 귀화가 조선후기 사회 내부에 초래한 정치·사상적 여파에 관해서는 아직 보충할 여지가 남아있는 듯하다.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 아래, 본 연구는 명청교체를 전후한 시기 한반도와 중국 대륙 사이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인구 이동과 그것이 촉발한 조선왕조의 정치사상적 변화 양상에 관심을 기울이며, 17세기 조선으로 귀화한 뒤 19세기 후반까지도 멸망한 명나라의 백성, 즉 ‘황조(皇朝)의 유민(遺民)’으로 자처했던 한족 귀화인들의 삶과 정체성을 탐색하는 종합적 연구를 완성하고자 한다.
  • 기대효과
  • (1) 조선후기 이민자들에 대한 선도적 연구
    조선시대에도 향화인이라 통칭되던 외국 출신 이민자들이 존재했다. 특히 명청교체를 전후한 17세기 중반 대규모의 명나라 출신 한인들이 귀화하여 황조유민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이들은 조선의 정치·외교·사상의 분야에서 적지않은 충격을 야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간 학계의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본 연구는 조선왕조의 역사를 일국사의 제한된 관점에서만 해석해 온 기존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조선 사회의 대표적 이민자 집단이었던 귀화 한인들에 대한 탐구를 통해 조선후기 역사의 감추어진 부분을 재발견하려는 시도로서 의미를 지닌다. 또한 정치·외교 및 문화교류의 분야에 치중되었던 한·중 관계사의 기존 영역을 벗어나, 양국의 경계에 걸쳐 있는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새롭게 규명한다는 점에서도 연구사적 의의를 기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2) 조선시대사를 바라보는 동아시아적 시야의 확충
    그간 조선과 명·청 간의 교류와 접촉은 주로 개별 국가를 역사의 주체로 상정하는 ‘관계사’의 시각 아래 검토되어 왔다. 그러나 17세기 명청교체를 전후하여 발생한 대규모 한인 이민자들의 문제는 국가 간 외교 현안을 초월하여 사회 내적인 다양한 문제들을 촉발시켰다는 점에서 정책사 또는 이주사의 시각을 넘어 새롭게 인식될 필요가 있다.
    귀화 한인들의 존재가 조선후기 사회의 제기한 내부적 충격에 주목하는 본 연구는 중화주의적 세계관을 견지하던 당시 조선인들의 정체성 문제를 해명하는데 최종적 목표를 두고 있다. 명나라 멸망 이후 중화의 적통이 조선으로 계승되었다고 자부하던 조선의 중화주의자들에게 ‘원래’ 중화였던 명나라 유민들의 출현은 복잡한 고민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귀화 한인들은 중화주의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황조유민이라는 관념적 지위를 얻을 수 있었지만, 사회적 차별이 실재하는 한 결국 조선의 사대부와는 구별되는 상이한 집단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궁극적으로 ‘조선(인)이란 무엇인가?’내지 ‘중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되었던 귀화 한인에 관한 고민은 조선후기 사회에 내재된 동아시아적 혼종성의 일면을 발견하고, 그간 일국사적 관점에서 이해되어 온 중화주의적 정체성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시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3) 연구결과의 활용
    본 연구의 결과물로서 산출되는 논문들은 사업 수행 기간 내에 <조선후기 皇朝遺民 연구>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될 것이며, 또한 연구 수행 과정에서 수집된 귀화 한인 관련 자료들은 향후 <조선후기 皇朝遺民 자료총서>(가제)로 간행될 예정이다.
  • 연구요약
  • (1) 17세기 황조유민의 귀화 과정
    1차년도의 중점 연구방향은 귀화 한인들의 유형별 분석 및 귀화 경위에 대한 탐색이다. 17세기 조선으로 귀화한 한인들의 유형은 1644년 명청교체를 기준으로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명 멸망 이전 ‘상국(上國)의 백성’의 자격으로 건너온 원병(援兵)과 요민(遼民)이고, 둘째는 명 멸망 이후 ‘황조(皇朝)의 유민’이라 자처하며 망명한 사대부들과 표류민들이다.
    동정장상(東征將相)으로 칭해지는 원병으로는 임란이 끝난 조선에 잔류하여 일가를 이루었던 浙江 片氏(경주), 蘇州 賈氏(울산), 浙江 彭氏(진해) 등의 집성촌이 현재에도 확인된다. 또한 후금이 명에 대한 본격적 공세를 취하면서 요동 지역 한인들의 이주가 본격화 되었는데, 모문룡(毛文龍)이 가도(椵島)를 점거하한 뒤 조선 경내로 유입된 한인들의 수는 수십 만에 달했다.
    한편 명의 사대부들 중 조선으로 망명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특히 병자호란 직후 인질로 끌려갔던 봉림대군은 1645년 조선으로 귀환하며 8명이 한인들과 동행했다. 수룡팔성(隨龍八姓)이라 칭해지던 이들은 귀화 한인들의 구심점으로 활동하며 효종을 도와 반청복명(反淸復明)의 대업을 도모했다. 또한 인조~현종 연간에는 태풍을 만나 표류하던 한인들이 조선에 도착하는 사건이 빈번했다. 특히 1667년(현종 8) 남명 영력제(永曆帝)의 책력을 지녔다고 주장하던 임인관(林寅觀) 등 한인 95명을 압송한 사건은 조야의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 시기 귀화 한인들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기억하는 하나의 징표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2) 18세기 황조유민에 대한 정책
    2차년도 중점 연구방향은 귀화 한인들이 조선에 정착해 가던 과정 및 귀화 한인에 대한 조선 정부의 대책을 검토하는 것이다.
    17세기 말까지 조선 정부는 귀화 한인들에 대한 체계적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였고, 그들은 청의 감시를 피해 궁벽한 외지에 숨어 사는 형편이었다. 귀화 한인들에게는 법률적으로 규정된 신역이 없었는데, 이는 그들이 여전히 조선의 백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했다.
    숙종 연간부터 법률적으로 방치되어 온 한인들을 조선왕조의 제도 안으로 편제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들 역시 중원 회복의 가능성이 사라져 버렸음을 깨닫게 되면서 점차 조선왕조의 통치 체제 안으로 편입되었다. 존주대의(尊周大義)의 확립을 강조했던 영조는 한인들에게 군직을 수여하고 우대의 뜻을 여러 차례 천명했다. 그리고 대보단 제사를 지낼 때 한인들의 참여를 상례로 삼고 충량과(忠良科)를 시행하여 한인들의 관직 진출 통로를 확대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귀화 한인들은 중화문명의 동전(東傳)을 상징하는‘황조유민’이라는 새로운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정조 역시 즉위 초부터 황조유민에 대한 각별한 우대를 거듭 신칙하며, 1790년 훈련도감에 소속된 한인아병을 한려(漢旅)로 새롭게 편제하고, 한려에 소속된 수룡팔성의 후손 중 3명을 선발해 대보단 수직을 담당토록 하였다.
    그러나 한인들의 실제 처지가 그리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조선중화주의의 이념 아래 향화인과 구분되는 황조유민이라는 관념적 지위를 얻었지만, 여전히 조선의 사대부와 구별되는 이질적 집단으로 존재하였다.

    (3) 19세기 황조유민에 대한 기억
    3차년도의 중점 연구방향은 귀화 한인에 대한 기록의 편찬과 황조유민으로서 정체성에 대한 탐색이다. 숙종~정조 연간 황조유민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얻게 된 뒤, 18세기 말부터 그들의 행적을 정리한 유민전(遺民傳) 등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귀화 한인들에 대한 기록은 편찬자에 따라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조선인의 저술로는 정조대 규장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작업들이 주목되는데, 성해응의 <황명유민전>이 대표적인 성과이다. 이들은 명나라 멸망 후 조선이 중화문명의 정통성을 계승하였다는 조선중화주의의 맥락 속에서 한인들의 귀화를 재인식하였다. 19세기에 들어서 한인의 후손들이 직접 선조들의 행적을 정리한 기록들을 편찬되었는데, 왕이문의 5대손 왕덕일(王德一)과 왕덕구(王德九) 형제가 그 작업을 주도했다. 그들은 선조들의 행적을 춘추대의의 실천이라는 관점에서 재평가하며, 조선인과 구별되는 황조유민으로서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귀화 한인의 존재는 조선 지식인들에게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던 듯하다. 명나라 멸망 이후 중화의 적통이 조선으로 계승되었다고 자부하던 조선중화주의자들에게 ‘원래’ 중화였던 명나라 유민들의 출현은 복잡한 고민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그들은 중화의 계승자로 자처하던 조선인과는 또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던 ‘황조의 후손’ 이었으며, 이같은 이중적 정체성이 선조들에 관한 저술을 통해 표출되었던 것이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1) 17세기 황조유민의 귀화 과정 : 1차년도의 중점 연구방향은 귀화 한인들의 유형별 분석 및 귀화 경위에 대한 탐색이다. 17세기 조선으로 귀화한 한인들의 유형은 1644년 명청교체를 기준으로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명 멸망 이전 ‘上國의 백성’이었던 援兵과 遼民이고, 둘째는 명 멸망 이후 ‘皇朝의 유민’이라 자처하며 망명한 사대부들과 표류민들이다.
    첫째 부류는 임진왜란 때 참전했다 잔류하거나 명청교체 즈음 조선으로 다시 건너온 이여송과 마귀 등 東征將士의 후예 22개 가문과, 1620년대 毛文龍의 東江鎭을 거점으로 삼아 평안도 일대에 이주한 수십만의 遼民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둘째 부류는 1645년 청의 볼모에서 풀려난 봉림대군과 함께 망명했던 王以文, 楊福吉, 馮三仕, 王美承, 裵三生, 王文祥, 鄭先甲, 黃功 등 8명으로, 隨龍八姓이라 칭해지게 된 이들은 조선후기 귀화 한인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또한 17세기 중반 중국 남부에서 일본 나가사키를 왕래하던 鄭成功 휘하의 관상들이 조선에 표류하는 일이 빈번하였는데, 漂漢이라 칭해지던 이들은 대부분 청으로 압송되었으나, 훗날 황조유민의 일원으로 기억되었다.
    (2) 18세기 황조유민에 대한 정책 : 2차년도 중점 연구방향은 귀화 한인들이 조선에 정착해 가던 과정 및 귀화 한인에 대한 조선 정부의 대책을 검토한 것이다. 17세기 말까지 조선 정부는 귀화 한인들에 대한 체계적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였고, 그들은 청의 감시를 피해 궁벽한 외지에 숨어 사는 형편이었다. 귀화 한인들에게는 법률적으로 규정된 신역이 없었는데, 이는 그들이 여전히 조선의 백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했다.
    숙종 연간부터 법률적으로 방치되어 온 한인들을 조선왕조의 제도 안으로 편제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들 역시 중원 회복의 가능성이 사라져 버렸음을 깨닫게 되면서 점차 조선왕조의 통치 체제 안으로 편입되었다. 존주대의의 확립을 강조했던 영조는 한인들에게 군직을 수여하고 우대의 뜻을 여러 차례 천명했다. 그리고 대보단 제사를 지낼 때 한인들의 참여를 상례로 삼고 忠良科를 시행하여 한인들의 관직 진출 통로를 확대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귀화 한인들은 ‘황조유민’이라는 새로운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정조 역시 즉위 초부터 황조유민에 대한 각별한 우대를 거듭 신칙하며, 1790년 훈련도감에 소속된 한인아병을 漢旅로 새롭게 편제하고, 한려에 소속된 수룡팔성의 후손 중 3명을 선발해 대보단 수직을 담당토록 하였다.
    특히 대보단 제사를 통해 존주대의를 선양함으로써 국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하였던 숙종·영조·정조의 치세 동안, 선무사와 무열사 등 임란 때 참전한 동정장사의 존재가 다시 부각되고 그 위상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인들의 실제 처지가 그리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조선중화주의의 이념 아래 향화인과 구분되는 황조유민이라는 관념적 지위를 얻었지만, 여전히 조선의 사대부와 구별되는 이질적 집단으로 존재하였다.
    (3) 19세기 황조유민에 대한 기억 : 3차년도의 중점 연구방향은 귀화 한인에 대한 기록의 편찬과 황조유민으로서 정체성에 대한 탐색이다. 숙종~정조 연간 황조유민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얻게 된 뒤, 18세기 말부터 그들의 행적을 정리한 遺民傳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귀화 한인들에 대한 기록은 편찬자에 따라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조선인의 저술로는 정조대 규장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작업들이 주목되는데, 성해응의 <황명유민전>이 대표적인 성과이다. 이들은 명나라 멸망 후 조선이 중화문명의 정통성을 계승하였다는 조선중화주의의 맥락 속에서 한인들의 귀화를 재인식하였다. 19세기에 들어서 한인의 후손들이 직접 선조들의 행적을 정리한 기록들을 편찬되었는데, 왕이문의 5대손 王德一과 王德九 형제가 그 작업을 주도했다. 그들은 선조들의 행적을 춘추대의의 실천이라는 관점에서 재평가하며, 조선인과 구별되는 황조유민으로서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귀화 한인의 존재는 조선 지식인들에게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던 듯하다. 명나라 멸망 이후 중화의 적통이 조선으로 계승되었다고 자부하던 조선중화주의자들에게 ‘원래’ 중화였던 명나라 유민들의 출현은 복잡한 고민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그들은 중화의 계승자로 자처하던 조선인과는 또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던 ‘황조의 후손’ 이었으며, 이같은 이중적 정체성이 선조들에 관한 저술을 통해 표출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조선에 귀화한 한인들 역시 복합적인 정체성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조선을 ‘我國’이라 부르면서도 皇明世臣의 후예임을 여전히 자부하던 그들은 비록 겉으로는 자신들이 치발을 면하고 중화의 의관을 보전함이 모두 ‘아국’의 크나큰 은혜라고 표현하지만, 조선의 풍속과는 또다른 명나라의 예법을 정체성의 근원으로 삼는 이중적 심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온 세상이 오랑캐 땅으로 변해버린 상황 속에서 명나라 황제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의식을 담은 罔僕之義라는 표현 속에는 대보단 수직관으로서 자부심과 동시에 그것밖에 할 수 없었던 사회적 차별에 대한 비판 의식, 더 나아가 자신들의 실제 처지를 伯夷와 叔齊에 견주며 조선에서도 출사하지 않은 절의로 포장하려는 절박한 의식이 담겨 있었다. 그들이 고집했던 永曆 연호는 바로 조선중화주의라는 보편적 세계관 속에서 또다시 차별받던 소수자로서 귀화 한인들의 모호한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 영문
  • (1) The naturalization process of Imperial People of Ming Dynasty in the 17th century : The main research direction of the first year is the analysis of the types of naturalized Chinese and the search for the naturalization process. The types of Imperial People of Ming Dynasty in the 17th century include 22 descendants of officials and soldiers who fought in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before the collapse of the Ming Dynasty in 1644, hundreds of thousands of people who moved to Pyongan Province in the 1620s, and eight families, including Wang Yi-wen, who has been in exile with the Bongrim Army, who was released from Qing's hostage in 1645, and a bureaucrat under Zheng Cheng-gong, who traveled to and from southern China in the mid-17th century.
    (2) Policies on Imperial People of Ming Dynasty in the 18th Century : The main research direction for the second year was to review the process of naturalization Chinese settling in Chosun and the measures taken by the Chosun government against naturalized Chinese. Under the Confucian Universalism of Chosun Dynasty, King Sukjong, King Yeongjo, and King Jeongjo, who wanted to embrace naturalized Chinese, carried out the policy of preferential treatment by offering government posts and conducting a project to promote their activities. However, the actual situation of naturalized Chinese has not improved much. Although they gained the ideological status of Imperial People of Ming Dynasty, they still existed as a heterogeneous group distinguished from the noble families of Chosun.
    (3) Memory of Imperial People of Ming Dynasty in the 19th Century : The main research direction of the third year is compilation of records on naturalized Chinese and search for identity as Imperial People of Ming Dynasty. Records on naturalized Chinese can be divided into two classes depending on the editor. The records, mainly composed of Gyujanggak of King Jeongjo, re-recognized the naturalization of the Chinese in the context of the Confucian Universalism of Chosun Dynasty that Chosun inherited the legitimacy of Chinese civilization after the collapse of the Ming Dynasty. In the 19th century, Chinese compiled records of their ancestors, which were led by Wang Yi-wen's 5th-generation son, Wang De-yi and Wang De-jiu. They reevaluated their ancestors' activities from the perspective of practicing Confucianism and sought to identify themselves as Imperial People of Ming Dynasty distinguished from Chosun people.
    The existence of naturalized Chinese seems to have not been as welcome to Chosun intellectuals. For Chosun intellectuals who boasted that the legitimacy of East Asian civilization was newly inherited to Chosun after the collapse of the Ming Dynasty, their emergence as "original civilizations" caused complicated worries. In short, they were the descendants of the emperor, who existed on a different level from the Chosun people who claimed to be the new heirs of civilization, and this dual identity was expressed through their writings on their ancestor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17세기 중반 명청교체를 전후한 시기 한반도와 중국 대륙 사이에서 대규모 인구 이동이 발생했다. 한족이 세운 명나라가 쇠퇴하고 만주족의 청나라가 흥기하는 과정에서, 수십 만에 달하는 한인(漢人)들이 전란을 피해 한반도로 건너왔다. 그리고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에 즈음하여 역시 수십 만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자발적 의지에 따라 혹은 청군의 포로가 되어 압록강 너머 만주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 시기 투로인(投虜人: 자발적으로 청나라에 망명한 조선인) 또는 피로인(被擄人: 청나라의 포로가 되어 끌려간 조선인)이라 칭해지는 조선 출신 중국 이주민에 관해서는 정묘·병자호란의 발발 원인 및 수습 과정을 규명하는 연구들 가운데 이미 상당한 해명이 이루어진 듯하다. 그러나 당시 기록들 가운데 향화인(向化人) 또는 황조인(皇朝人)이라 칭해지던 중국 출신 조선 이주민들은 사료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학계의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들 귀화 한인들에 대한 기록이 풍부하게 전해지지 못한 원인으로는 우선 당시 조선에 유입된 한인들이 주로 명·청 간 격전이 벌어지던 중국 요동(遼東) 및 산동(山東) 지역 변방민들이었기에 자체적인 기록을 남기기 어려웠다는 이유를 들 수 있다. 둘째로는 병자호란 패전 이후 청나라의 한인 송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조선 조정이 귀화 한인들에 관한 공개적 언급을 가급적 회피하려 했던 정황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으로, 국적을 바꾸는 행위 즉 귀화에 대한 동아시아 구래의 중화주의적 사고 역시 그들에 대한 기억을 제한하는 요인이었다. 이적으로 간주하던 여진인 혹은 일본인의 귀화를 ‘교화(敎化)를 향한 이주’ 즉 향화(向化)라 표현했던 것과 달리, 본디 중화(中華)의 백성인 한인들의 귀화는 전통적 향화 개념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사안이었다.
    중화의 백성들이 소중화(小中華)인 조선으로 이주하게 된 이때의 사건을 유교적 사유체계 안에서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었을까? 더욱이 명나라 멸망 이후 조선이 중화문명의 적통을 계승하게 되었다는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의 세계관 아래에서, 조선후기 지식인들은 본디 중화의 백성이었던 한인들과 새롭게 중화의 계승자가 된 자신들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었을까? 이것이 바로 17~19세기 귀화 한인들을 둘러싼 조선 사회의 새로운 고민이었다.
    지금까지 귀화 한인에 관해서는 한족 이민사(移民史) 특히 화교사(華僑史)의 관점 및 양란을 전후한 시기 한·중관계사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연구들이 이루어진 바 있다. 그러나 귀화인을 둘러싼 조선후기의 정치사·외교사의 흐름에 주된 관심이 기울여지는 가운데 그들에 대한 조선왕조의 대응 내지 정책이 주목받았을 뿐, 정작 귀화인들의 구체적인 삶과 의식세계에 관해서는 깊이 천착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또한 최근 한국 사회가 몸소 체험하고 있듯이, 이주 외국인 문제가 이민자에 대한 국가 정책 내지 외교 현안의 범주를 넘어 사회 내부의 정체성에 관한 근본적 고민을 환기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17세기 중반 한인들의 귀화가 조선후기 사회 내부에 초래한 정치·사상적 여파에 관해서는 아직 보충할 여지가 남아있는 듯하다.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 아래, 본 연구는 명청교체를 전후한 시기 한반도와 중국 대륙 사이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인구 이동과 그것이 촉발한 조선왕조의 정치사상적 변화 양상에 관심을 기울이며, 17세기 조선으로 귀화한 뒤 19세기 후반까지도 멸망한 명나라의 백성, 즉 ‘황조(皇朝)의 유민(遺民)’으로 자처했던 한족 귀화인들의 삶과 정체성을 탐색하고자 하였다. 각 연차별 주제 및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1차년도(2017.7~2018.6) 17세기 황조유민의 귀화 과정 : 17세기 귀화 한인들의 유형별 분류(東征將士, 遼民, 隨龍八姓, 漂漢)
    (2) 2차년도(2018.7~2019.6) 18세기 황조유민에 대한 정책 : 18세기 숙종~정조 연간 조선중화주의의 확립과 명군에 대한 추숭사업, 수룡팔성 후손들에 대한 우대정책의 시행
    (3) 3차년도(2019.7~2020.6) 19세기 황조유민에 대한 기억 : 19세기 조선 지식인들의 유민전 편찬 및 제남 왕씨 집안의 대통묘 건립과 皇朝遺民錄 등 편찬사업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1) 조선후기 이민자들에 대한 실증적 연구 : 조선시대에도 향화인이라 통칭되던 외국 출신 이민자들이 존재했다. 특히 명청교체를 전후한 17세기 중반 대규모의 명나라 출신 한인들이 귀화하여 황조유민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이들은 조선의 정치·외교·사상의 분야에서 적지않은 충격을 야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간 학계의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본 연구는 조선왕조의 역사를 일국사의 제한된 관점에서만 해석해 온 기존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조선 사회의 대표적 이민자 집단이었던 귀화 한인들에 대한 탐구를 통해 조선후기 역사의 감추어진 부분을 재발견하려는 시도로서 의미를 지닌다. 또한 정치·외교 및 문화교류의 분야에 치중되었던 한·중 관계사의 기존 영역을 벗어나, 양국의 경계에 걸쳐 있는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새롭게 규명했다는 점에서도 연구사적 의의를 지닌다.
    (2) 조선시대사를 바라보는 동아시아적 시야의 확충 : 그간 조선과 명·청 간의 교류와 접촉은 주로 개별 국가를 역사의 주체로 상정하는 ‘관계사’의 시각 아래 검토되어 왔다. 그러나 17세기 명청교체를 전후하여 발생한 대규모 한인 이민자들의 문제는 국가 간 외교 현안을 초월하여 사회 내적인 다양한 문제들을 촉발시켰다는 점에서, 단지 정책사 또는 이주사의 시각을 넘어 새롭게 인식될 필요가 있다. 귀화 한인들의 존재가 조선후기 사회의 제기한 내부적 충격에 주목하는 본 연구는 중화주의적 세계관을 견지하던 당시 조선인들의 정체성 문제를 해명하는데 최종적 목표를 두고 있다. 명나라 멸망 이후 중화의 적통이 조선으로 계승되었다고 자부하던 조선의 중화주의자들에게 ‘원래’ 중화였던 명나라 유민들의 출현은 복잡한 고민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귀화 한인들은 중화주의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황조유민’이라는 관념적 지위를 얻을 수 있었지만, 사회적 차별이 실재하는 한 결국 조선의 사대부와는 구별되는 상이한 집단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3) 조선후기 중화주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 : 궁극적으로 ‘조선(인)이란 무엇인가?’내지 ‘중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되었던 귀화 한인에 관한 고민을 통해 조선후기 사회에 내재된 동아시아적 혼종성의 일면을 발견하고, 그간 일국사적 관점에서 이해되어 온 중화주의적 정체성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는 사대주의’라는 통념에 고착되어 있던 조선후기 중화주의가 구체적으로 작동했던 논리와 성격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 색인어
  • 황조유민(皇朝遺民),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 임진왜란(壬辰倭亂), 명청교체(明淸交替), 귀화(歸化), 유민정책(遺民政策), 왕이문(王以文), 왕덕구(王德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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