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에서는 당대 書僧의 서예와 이들의 서예를 읊고 있는 시가를 연구대상으로 하였다. 이들 당대 서승을 현전하는 시와 서예작품을 기준으로 분류해보면 대체로 『全唐詩』에 시도 있고 현재까지 서예작품도 전해지고 있으면서 후대 시인과 평자들의 시가와 평론이 전해지는 ...
본 연구에서는 당대 書僧의 서예와 이들의 서예를 읊고 있는 시가를 연구대상으로 하였다. 이들 당대 서승을 현전하는 시와 서예작품을 기준으로 분류해보면 대체로 『全唐詩』에 시도 있고 현재까지 서예작품도 전해지고 있으면서 후대 시인과 평자들의 시가와 평론이 전해지는 서승, 『全唐詩』에 시는 남기고 있지 않으나 본인의 서예작품은 전하는 서승, 그리고 『全唐詩』에 시가도 서예작품도 전하지 않지만 『全唐詩』에 실린 타인의 시가 또는 다른 문헌 기록상에 이름이 전해지는 서승 등 몇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당대의 서승 모두를 한 편의 짧은 논문에서 모두 다룰 수 없기 때문에, 당대 서승과 서승의 서예에 대한 연구의 일환으로, 1차년도 연구에서는 먼저 회소의 서예 작품과 회소 초서를 읊고 있는 역대 시가를 추출 정리하여 분석해보았다. 회소는 일단 생졸 연대도 논란이 있었으므로 먼저 회소의 생애와 회소 초서에 대해 대략적으로 다루어본 후, 당대 회소 초서가와 당 이후의 역대 회소초서가에 대해서 탐색하였다. 필자가 추출한 당대의 회소초서가는 王邕의 「회소 상인의 초서가(懷素上人草書歌)」를 비롯하여 총 13수, 당 이후 회소 초서를 읊고 있는 시로는 五代 楊凝式의 「회소의 주광첩 뒤에 제하다(題懷素酒狂帖後)」를 비롯하여 각 조대의 총 15수를 분석 대상으로 하였다. 이를 토대로 회소초서가의 특징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역대 회소초서가의 특징을 시제, 형식, 내용, 표현 기법 등 4가지 방면으로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대체로 당대에 지어진 회소초서가는 구체적으로 회소의 어떤 작품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을 명확히 밝힌 경우가 거의 없는데 반해, 당 이후 회소초서가는 詩題에 구체적인 회소의 초서 작품명이 명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둘째, 당대의 회소초서가는 거의 대다수가 칠언 고시 또는 칠언 위주의 가행체 형식으로 칠언시가 95%이상을 점하고 있다. 이는 자유분방하고 종횡으로 거리낌 없이 연결되는 광초의 특성을 십분 살리면서 광초의 풍미를 가장 잘 읊어낼 수 있는 시가 형식으로 장단이 자유롭고 형식이 자유로운 가행체와 잡언체를 주로 채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칠언시가 다수를 점하고 있는 이유도 광초의 풍격과 형식을 비유적인 표현을 빌려 묘사하기에는 오언의 짧은 리듬보다는 좀 더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칠언시를 시인들이 상대적으로 더 선호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송대 이후 회소 초서를 읊은 시들에서는 여전히 칠언시가 다수를 점하긴 하지만, 가행체가나 고시가 다수를 점한다는 등의 별다른 특징은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칠언절구나 오칠언 율시가 반 이상을 차지하였는데, 이는 청대에 유행했던 ‘論書絶句’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셋째, 회소초서가 대부분은 기본적으로 회소 초서를 찬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회소초서가의 내용을 살펴보면 회소의 인품과 성격, 행동 등에 대한 묘사가 먼저 기술되는 경우가 많고, 그 다음으로 초서를 휘호할 때의 자태, 자유분방하고 광일한 초서의 형태와 풍격 등을 비유적으로 묘사하였다. 즉 회소의 초서를 감상하고 시를 지을 경우에는 회소 초서의 특이함과 우수함을 부각시키는 긍정적인 평가가 일반적이었다. 넷째, 회소초서가에 나타난 표현 기법상의 특징으로는 직유와 은유 등 비유적인 표현을 특히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비유가 시적 언어에서 중요한 한 부분임에는 분명하지만, 회소초서가에서는 비유적 수사기교가 유난히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는 초서의 필획을 직설적으로 묘사하는 것보다 여러 비유 대상을 활용하는 것이 더 구체적으로 대상을 형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예시는 초당부터 꾸준히 창작되었지만, 유명 서승과 이들의 서예를 읊은 문인사대부들의 시와 시승이 지은 서예시는 주로 중만당 이후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당대에는 문화적 소양을 갖춘 승려도 많이 배출되어 유명한 詩僧과 글씨를 잘 썼던 書僧과 그림을 잘 그렸던 畵僧 역시 상당히 많이 출현하였으나 이들 시승, 서승, 화승도 중만당에 들어서야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일반 문인사대부들과 승려와의 교류도 많아져 유명 서승과 이들의 서예를 읊은 문인사대부들의 시 역시 당대에 등장하기는 하지만, 중당 시기부터 보편화되었던 듯하다. 또 皎然과 貫休 같은 시승이나 화승이 회소나 변광 같은 서승의 서예를 읊은 경우도 거의 대다수 중만당 시기에 창작되었다.
2차년도에서는 당대 서승과 서승의 서예를 개괄적으로 소개한 후에, 당대 서승의 서예를 읊은 서예시를 추출하여 분석해보았다. 아울러 당 이후에 당대 서승의 서예를 노래한 시가를 선별하여 분석함으로써 당대 서승에 대한 후대의 평가에 대해서도 알아보았고, 이를 통해 당대 서승의 서예와 서예시의 특징 및 의의에 대해 궁구해보았다.
당대에 서승으로 명성을 남기고 있는 승려를 주요 서론 전문 서적에 수록된 법명만을 열거해보면 먼저 淸代 倪濤(1669-1752)의 『六藝之一錄』 권333 「唐釋氏」에는 懷素, 辯才, 懷仁 등 41명의 서승을 순서대로 나열하고 있고, 또 清代 孫岳頒(1639-1708)의 『御定佩文齋書畵譜』 권30에는 당대 서승으로 辯才, 懷仁, 智辯 등 모두 86명의 서승을 열거하고 있는데, 이 두 전적에서 서로 중복되지 않는 당대 서승이 45명이나 된다. 이에 더하여 근래에 발간된 『佛法與書法』에서는 역대의 서승을 소개하면서 이중 당대의 서승으로 慧齡, 明璿, 智威, 道暹 등 모두 108명을 열거하고 있다. 이들 108명 중에는 『御定佩文齋書畵譜』와 『六藝之一錄』 두 전적에 수록되지 않은 서승 22명이 더 보충되어 있다. 앞에서 이미 거론한 전적 이외에 기타 현대에 간행된 문헌에도 이들 전적에 수록되지 않은 당대 사경승과 서승 역시 상당히 많은데, 송대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간행된 여러 서론 專著에서는 이들 서승의 서예와 이들의 서예와 관련한 평론 등을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
2차년도에는 우선 이러한 당대 서승들의 서예에 대해 각 서승이 뛰어났던 주요 서체별 기준으로 분류해보았다. 역대 전적에 수록된 당대 서승의 서예를 서체별로 분류해 보았을 때, 正書와 草書에 뛰어났던 서승이 각각 29명과 23명으로 가장 많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에다가 두 가지 서체 모두에 뛰어났던 서승 중 초서에 뛰어났던 서승이 7명 정도 있으므로 이들을 초서승에 합하면 초서에 뛰어났던 서승이 30명 이상 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정서에 뛰어났던 서승보다 그 수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볼 때 당대 유명 서승이 주로 구사했던 빼어난 서체는 정서와 초서였다고 하겠다. 아마도 정서는 불경 사경 작업에 필수적으로 채택되었던 서체였기에 정서에 뛰어났던 서승이 많았으며, 시기적으로 주로 초중기에 많이 분포하고 있으면서 당대 전체적으로 고루 분포하고 있다. 이에 반해 초서에 뛰어났던 서승은 거의 대다수가 당대 중후기에 출현하였다. 초서승으로 처음 등장하는 유명 서승이 懷素인데, 회소가 대략 開元 25년(737년)에 태어나 貞元 15년(799년)에 사망한 것이 정설로 정착되었고, 초서에 뛰어났던 초서승은 모두 회소 이후에 활동했던 서승만이 수록되어 있으므로, 초서승 대부분은 당대 후기에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당대 후기에는 초서가 서승의 가장 주요한 서체였음을 알 수 있다. 정서와 초서에 비하여 八分書, 隸書, 篆書, 梵書에 빼어났던 서승은 그 수가 많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비록 당대에는 정서와 초서에 뛰어났던 서승이 가장 많았지만, 주로 정서로 필사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寫經僧의 서예를 시로 노래한 경우는 전무하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이들 수많은 서승 중에서『全唐詩』 등 각 전적에 서예 관련 시가를 남기고 있는 당대 서승의 서예와 서예시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당대 초중기에는 문인이 서승의 서예를 읊은 시가 대부분이었으나, 당대 중후기에는 시승이 서승의 서예를 읊은 시도 많이 보인다. 이는 중만당으로 갈수록 시적 교양을 갖춘 시승의 수가 많아졌고, 서승의 서예가 문인뿐만 아니라 시승에게도 관심을 많이 받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대 서승의 서예시 중에서 초서 이외의 서체를 읊은 경우는 黃滔의 「동림사 관휴스님이 전서와 예서로 쓴 시(東林寺貫休上人篆隸題詩)」(권706-30)와 齊己의 「서천 담역대사의 소전 글씨에 감사하며(謝西川曇域大師玉箸篆書)」(권846-70) 등 篆隷에 관한 시 두 수밖에 없고, 서승의 서예시는 대다수가 초서와 관련한 시였다. 이로 볼 때 서승의 서예를 읊은 서예시는 초서를 읊은 시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懷素, 高閑, 辯光 등 당대에 가장 유명했던 서승 대부분이 초서에 뛰어났던 초서승이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승려와 초서가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된 것은 아마도 隋代의 유명한 초서승인 智永의 영향과 그에 대한 추앙, 그리고 張旭에서 비롯된 당대 초서가 특히 발전하게 된 시대적 추이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아울러 서승의 서예시, 특히 초서를 읊은 서예시는 형식적으로 歌行體가 가장 많은 수를 점하고 있어, 초서를 읊은 서예시는 가행체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자유분방함을 특징으로 하는 초서의 특징을 역시 장단의 구사가 자유롭고 길이와 편폭의 제한이 없어 자유분방하였던 가행체 형식이 가장 잘 드러내주었기 때문에, 시인들은 초서승의 초서를 노래하면서 시가 형식으로는 가행체 시를 의도적으로 선택하였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가행체 시가가 초서를 노래하려는 시인의 의도와 가장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본 연구자는 이러한 가설을 바탕으로 「唐代 草書와 歌行體 草書歌의 상관성」이란 논문을 구상 집필하여 학술대회에서 발표하였고 이 결과물을 등재학술지에 게재하였다. 아울러 회소 이외에 당대 시인들이 초서가를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서승으로 高閑, 辯光, 貫休 등이 있는데, 이들 서승의 서예와 서예시에 대한 연구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