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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석(金台錫, 1874-1951) 연구: 서예・전각 활동과 호남서화단에 미친 영향
Study on Kim Tae-seok: The Calligraphy and Seal Engraving of Kim Tae-seok and His Influence on Honam Artists Society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학문후속세대양성_학술연구교수& #40;인문사회& #41;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7S1A5B5A02024514
선정년도 2017 년
연구기간 3 년 (2017년 07월 01일 ~ 2020년 06월 30일)
연구책임자 유지복
연구수행기관 전주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이 연구는 근대기 한국 서단을 이끌었던 김태석(金台錫, 1874-1951)의 서예와 전각을 분석함으로써 서예・전각가로서의 예술적 지향과 근대기 작가로서의 위상을 밝히는데 주 목적이 있다. 아울러 1930년대 초반 김태석의 호남 체류 시기를 조명하여 호남지역에서의 인적 교유 및 호남서화단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는데도 그 목적이 있다.
    김태석은 대한민국 제1호 국새의 글씨를 전서로 쓰고, 중화민국의 임시 초대 대총통이었던 위안스카이의 직함 인장 및 중화민국의 국새를 새긴 것으로 잘 알려진 서예가이자 전각가이다. 대한제국기에는 화재로 소실된 『보소당인존』의 모각 사업에 정학교ㆍ강진희 등 당대 전각계를 대표하는 인사들과 함께 참여한 바 있고, 해방 직후에는 전국적 규모의 대동한묵회를 조직하여 서예의 부흥에 앞장서는 등 해방전후기 서단에서 지도자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서예ㆍ전각가로서 위상이 남다름에도 불구하고 근대 미술계에 그의 업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생애의 대부분을 중ㆍ일에서의 외유로 보낸 특이한 이력으로 인해 국내에서의 활동시기가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김태석에 관한 연구는 크게 4가지 관점에서 연구될 필요성이 있다. 첫째, 근대기 한국미술사 연구에 있어 서예사 연구는 회화사 연구에 비해 상대적인 비중이 매우 적다. 특히 전각에 관한 연구는 서예사 연구영역에서 조차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기존의 전각 연구는 양식적인 분석을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어 온 측면이 강하므로 서예사 영역은 물론 다른 미술사의 인접 영역과도 연계되지 못하는 한계를 노정해왔다. 그러나 전각 연구의 주 대상 자료인 인보는 양식적인 특징을 추출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겨진 인문은 작가의 교유관계 및 활동상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주 자료원이 되기도 한다. 특히 김태석의 인보는 이런 성격이 강하다. 서예사 연구 영역에 있어 전각 장르에 대한 연구역량의 강화가 더없이 요구되는 이때 서예사 연구 지평을 넓히는 차원에서도 근대기 전각계를 대표하는 김태석 인보에 대한 종합적 연구가 요구된다.
    둘째, 근대기 한국서예사 연구에 있어 김태석은 오세창과 더불어 서예ㆍ전각계에서 쌍벽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아 왔다. 그러나 김정희 사후 이상적으로부터 오경석, 오세창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금석ㆍ서예사의 본류로 평가받아 이들에 관한 연구가 집중된 반면, 이상적의 영향이 추사의 말년제자였던 김석준을 거쳐 김태석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흐름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된 바가 없다. 따라서 김태석 연구를 통해 이상적으로부터 김석준, 김태석으로 분화되는 서단의 또 다른 줄기에 대한 성격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셋째,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153점의 김태석 유품에 관한 종합적 검토가 필요하다. 이들 가운데 30종의 인보와 10여 종의 서첩은 김태석이 직접 수집하여 간직하거나 직접 제작한 것이 대다수이다. 인보 자료를 통해서는 김태석 전각의 연원과 전각활동을 통한 인적 교유상을 파악할 수 있고, 서첩 자료를 통해서는 김태석이 지향했던 서예관과 그의 서예의 연원 및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이들 유품에 대해 연원ㆍ특징ㆍ관계망 등의 주제별 분석을 통해 김태석의 서예와 전각에 대한 종합적인 해석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넷째, 1930년대 초반에 김태석이 전주에 일시 체류할 당시 제작한 『남유인보』에는 호남 여러 지역의 유력인사와 서화가들의 호와 성명인이 대거 수록되어 있다. 이들은 당시 김태석과 교유했던 인사들로 확실시되는데, 인보를 분석하여 이들 간의 교유상을 파악하고 전주를 위시한 호남지역에서의 김태석의 활동상과 근대기 호남서화단에 미친 영향관계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이 연구에서는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김태석 유품 및 지금까지 알려진 김태석 관련 자료를 최대한 활용하여 그의 생애를 구체적으로 복원시키는 작업과 함께 그의 서예ㆍ전각의 특징 및 국내외와 호남서화단에서의 활동상을 종합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김태석이 해방 전후기 한국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무엇인지 규명해보고자 한다.
  • 기대효과
  • 이 연구는 근대기를 대표하는 서예가이자 전각가인 김태석을 미술사적인 방법론에 입각하여 생애, 예술세계, 후대의 영향관계를 분석하는 작가론적 성격을 띤 연구이다. 한국미술사학 연구에 있어 서예사 연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다른 연구 영역에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빈약하기 짝이 없다. 전각학은 서예사 연구 영역의 한 갈래로 이 역시 한국미술사에서 서예사가 차지하는 비중만큼이나 서예사 연구에서 그 성과가 매우 미미하다. 이러한 실정을 감안할 때 이 연구는 한국미술사에서 근대기 한국서예사 연구의 주요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연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 연구는 지금까지 거의 공개되지 않았던 서예ㆍ전각 자료를 포괄적으로 검토한다는 점에서 다음과 같은 연구효과가 기대된다.
    첫째, 한국미술사 연구 영역에 있어 전각 양식에 대한 연구역량을 강화하는데 일조할 것이다. 이 연구에서는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김태석 유품 153종 가운데 30종의 인보와 10여종의 서첩을 포괄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인보집에는 대한제국기 왕실의 인장을 비롯하여 한ㆍ중ㆍ일 명사들의 인장, 정학교ㆍ강진희ㆍ오세창 등 근대기를 대표하는 전각가의 인장, 국내 유명 서화가들의 인장들이 대거 수록되어 있다. 이들 인보집의 분석과 연구 결과를 통해 아직 학술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던 전각학에 대한 학계의 관심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둘째, 연구과정에서 다양한 인보가 연구의 주요 대상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인보에 관한 연구는 각풍의 해석에 그친 경우가 많은데 이 연구에서는 각풍의 변화 및 계승 양상은 물론 인영에 새겨진 인물들을 면밀히 검토하여 수록 인물들의 인적관계망과 교유양상 및 예술적 영향관계까지 종합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이러한 연구방식은 양식 분석에 그친 경우가 대부분인 기존의 전각연구에 새로운 연구 유형을 제시함으로써 전각 연구방법론의 확장에 기여할 것이다.
    셋째, 김정희 사후 우리나라 금석ㆍ서예사에 관한 연구는 김정희의 제자 이상적으로부터 오경석ㆍ오세창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본류로 규정하여 이에 관한 연구가 집중되어 왔다. 근대기 민족서화계에서 오경석ㆍ오세창 부자의 위상이 워낙 남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적 성격이 다양하게 표출되었던 당시의 서단에서 이상적으로부터 김석준을 거쳐 김태석으로 이어지는 흐름 또한 이상적으로부터 오세창으로 이어진 흐름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연구에서는 김정희 사후 이상적을 통해 분화되는 근대기 서단의 양대 줄기 중 김태석으로 이어지는 흐름에 관한 성격과 서예사적 의의가 규명될 것이다.
    넷째, 김태석이 1930년대 초반에 제작한 『남유인보』에는 호남 여러 지역의 유력인사와 서화가들의 인장이 대거 수록되어 있다. 이 인보의 연구 분석을 통해 수록된 인물들과 김태석 간에 다양하게 얽힌 인적 관계망이 드러날 것이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 부분적으로만 알려졌던 호남지역에서의 김태석의 활동상과 서화단에 미친 영향관계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고 근대기 작가로서의 김태석의 위상이 밝혀질 것이다.
    다섯째, 우리나라에서 전각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되고 인보가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엽의 근대기이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전각의 명가로는 정학교, 유한익, 강진희, 오세창, 김태석을 꼽을 수 있고, 이 시기의 초기적 형태를 대표할 만한 인보집으로 이상적, 오경석, 이용문 등이 개인적으로 수집한 인보집을 들 수 있다. 이 연구의 결과는 근대기 전각가에 대한 작가론적 연구와 근대기 초기 인보 연구에 대한 학계의 관심을 견인할 것이고, 연구에서 제시한 방법론은 이와 관련된 후속 연구에 효과적으로 활용될 것이다.
  • 연구요약
  • 이 연구는 근대기 한국 서단을 이끌었던 김태석(金台錫)을 종합적으로 조명하는 연구이다. 이 연구는 ‘김태석의 생애와 서예’, ‘김태석의 전각과 인적 교유’, ‘김태석의 호남서화단에서의 활동과 그 영향’이란 3개의 주제를 설정해 단계적인 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1년차 연구는 김태석의 생애를 살피는 작업의 일환으로 사승 및 교유관계를 분석하고 국내외에서의 활동상을 파악할 것이다. 또한 김태석의 서예 관련 자료를 검토하여 그의 서예의 연원과 지향점 및 서풍의 특징을 분석할 것이다. 김태석의 생애에서 아직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시기가 있다. 청에 출장간 뒤 중국에서 지낸 20년간의 기간, 귀국한 뒤 국내에서 지낸 10년의 기간과 해방 이후의 국내 활동기간, 일본에서 지낸 두 차례의 외유 기간이다. 이에 대해서는 『청유인보』에 등장하는 인물 분석, 일본 외무성 기록 및 통감부 문서 등을 검토하여 중국 인사들과의 교유와 활동상을 살펴보고, 김태석이 사적으로 주고받은 『척독』의 번역, 근대기 고신문 자료 분석하여 국내에서의 교유와 활동상을 검토하고, 『승사인보』ㆍ『동유인보』에 수록된 인물을 분석하여 일본에서의 교유와 활동상을 살펴볼 것이다. 김태석의 서예에 관해서는 김태석이 소장했던 중국 법첩을 통해 그가 지향하고자했던 서풍을 파악할 수 있고, 고전을 탁본한 서첩은 오경석으로부터 전해진 금석학의 계승 양상 및 김태석 전서의 연원을 살펴볼 수 있고, 청의 서법 이론서는 김태석의 서예관을 살펴볼 수 있다. 1년차 연구에서는 이들 서첩을 검토하여 김태석의 서예관 및 서예 연원과 각 서풍의 지향을 분석할 것이고, 현재까지 조사된 김태석의 서예작품 35점을 분석하여 서풍의 특징과 후대의 영향관계를 규명할 것이다.
    2년차 연구는 김태석이 소장하거나 수집했던 인보와 김태석이 직접 제작한 인보를 분석하여 그의 전각의 연원과 특징을 파악하고, 전각활동의 양상 및 그의 전각풍이 후대에 계승되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김태석 유품 중 이상적의 인영이 다수 수록된 인보는 이상적으로부터 김석준을 거쳐 김태석으로 이어지는 계승 양상을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고, 정학교의 인장이 다수 찍힌 인보와 강진희의 인보는 『보소당인존』 모각 사업 당시 김태석이 이들과 함께 참여했던 점을 고려할 때 각풍의 관련성을 검토하기에 좋은 자료이다. 김태석이 수집한 오세창의 인보 역시 김태석이 반드시 참고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들 인보에 대한 김태석과의 관련성을 검토할 것이다. 김태석의 전각의 특징과 전각활동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인보는 『청유인보』, 『승사인보』, 『남유인보』, 『동유인보』이다. 이들 인보는 김태석의 30대로부터 50대를 거쳐 70대 만년에 이르기까지의 각풍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2년차 연구에서는 이들 인보에 수록된 인영을 분석해 김태석 전각의 변화 양상을 살펴볼 것이다. 아울러 김태석의 전각풍이 최규상, 정해창, 민택기, 윤희채, 김재인, 백홍기 등으로 이어진다는 김청강의 초기 연구를 검증하기 위해 이들의 인영을 조사・수집하고 김태석과 비교하여 각풍의 계승과 변모 양상을 살펴볼 것이다.
    3년차 연구는 『남유인보』를 분석해 1930년대 초반 호남지역에서의 김태석의 인적 교유와 활동상을 검토하고, 김태석의 서예와 전각이 호남서화단에 미친 영향을 규명할 것이다. 『남유인보』는 당대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서화가들과 지역의 유지 및 부호들의 인영이 다수 실려 있어 근대기 서화가로서의 활동양상 및 존재방식을 폭넓게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김태석이 호남지역에서 활동할 때 함께 동행했던 인사들이 근대기 고신문 자료와 『남유인보』에 동일하게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이 연구에서는 이들의 행적을 비교 검토하여 김태석이 호남서화단에서 펼쳤던 활동상을 살펴볼 것이다. 또한 김태석과의 교유상이 확실시되는 서화가를 중심으로 그들의 서예작품 및 인보, 서화작품에 찍힌 인영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김태석의 서예와 전각이 호남서화단에 미친 영향을 규명할 것이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이 연구의 목적은 근대기에 書藝와 篆刻으로 吳世昌과 쌍벽을 이루었던 김태석의 생애와 그의 예술 활동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김태석은 중인 가문에서 태어나 평창군수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이는 궁내부 관료로 있던 시절에 高宗과 英親王의 인장을 새기고, 경운궁 화재사건으로 인한 왕실 인장 摹刻 사업에 참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다. 김태석은 秋史 金正喜의 말년제자이자 당시의 대표적 위항시인이었던 金奭準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로부터 전수받은 詩·書論은 추사 김정희와 李尙迪의 학맥을 계승한 것이었다. 김태석은 당대 최고의 서화가이자 전각가인 丁學敎·姜璡熙와 교유하며 전각에 대한 안목을 넓혔다. 이는 스승 김석준의 가교 역할, 왕실 인장 모각 사업에 함께 참여한 인연, 김태석 집안과 선대부터 이어져온 世交의 영향이었다.
    김태석은 1908년에 미술시찰위원으로 일본과 청에 파견되어 20년 가까운 세월을 중국에서 지냈다. 특히 새로 탄생한 중화민국의 印鑄局 관원으로 근무하는 동안 중화민국국새와 임시초대총통 袁世凱의 직함인을 새기며 그의 역량을 한껏 발휘했다. 한편, 김태석은 1922년 북경에서 둔전병제를 통한 무장독립운동의 실현을 목적으로 설립한 興華實業銀行의 운영에 적극 가담하였다. 북경에서의 독립운동 행적은 예술가로서의 그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라 믿는다.
    그는 중국에서 돌아와 1930년대 초반에 전주를 비롯한 호남일대를 순회하며 서예와 전각 전람회를 통해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짧은 활동 기간에도 崔圭祥·李光烈 등을 중심으로 김태석의 서예와 전각을 추종하는 그룹이 형성될 만큼 뚜렷한 영향이 나타났다. 김태석은 해방 직전 일본에서 영구 귀국한 이후 전국적 규모의 서예 조직 大東翰墨會를 결성하였다. 이를 통해 좌우익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당시 전람회 방식을 통해 단합을 모색하는 등 서단의 지도자적 역할을 하였다. 1948년 임정 수립 30주년 되던 해에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요청으로 대한민국 제1호 국새 제작 사업을 주도한 것이 그의 생애 마지막 업적이 되었다.
  • 영문
  •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life and artistic activities of Kim Tae-seok, who, along with Oh Se-chang (吳世昌), was recognized as master of modern calligraphy and engravings.
    Kim Tae-seok’s family was of middle class, and he became magistrate of Pyeongchang County because he engraved the seals of Emperor Gojong and King Yeongchin while he was an official of the Ministry of the Royal Household and he participated in reproducing the royal seals after a fire at Gyeongungung Palace. Kim Tae-seok was the disciple of Kim Seok-jun (金奭準), who was a leading commoner poet of the time and a late student of Kim Jeong-hui (金正喜). The theories on poetry and calligraphy Kim Tae-seok learned from Kim Seok-jun succeeds the academic line of Kim Jeong-hui and Yi Sang-jeok (李尙迪). Kim Tae-seok acquired broad knowledge of engraving through his association with Jeong Hak-gyo (丁學敎) and Kang Jin-hui (姜璡熙), the best calligraphers and painters as well as engravers of the time. These relationships were influenced by the bridging role played by Kim Tae-seok’s teacher Kim Seok-jun, connections Kim Tae-seok cultivated during his participation in the project to engrave royal seals, and the long-standing friendship of Kim Tae-seok's family and ancestors.
    Kim Tae-seok was dispatched to Japan and Qing China as art examiner in 1908, and he spent nearly 20 years in China. In particular, he displayed his abilities to the fullest when he engraved the National Seal of the Republic of China and the seal of title of its first de facto president Yuan Shikai (袁世凱) while working as an official in the Bureau of Seals of the newly created Republic of China. Meanwhile, Kim Tae-seok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operation of Heunghwa Industrial Bank (興華實業銀行), which was established in Beijing in 1922 with the aim of realizing an armed independence movement through the farmer-soldier system (屯田兵制). The record of his participation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Beijing will serve to elevate his status as an artist.
    After returning from China, he toured Jeonju and other Jeolla provinces in the early 1930s and used calligraphy and engraving exhibitions to vigorously display his skills. The impact of his calligraphy and engraving was great enough, despite the short period in which he was active, to create a group of followers led by Choi Kyu-sang (崔圭祥) and Lee Kwang-ryul (李光烈). Kim Tae-seok formed a nationwide calligraphy organization named Daedong-hanmukhoe (大東翰墨會) after permanently returning to Korea from Japan just before Korea’s liberation. Through this organization, he played a leading role in the calligraphy world by searching for a way to unite the leftists and the rightists through exhibitions at a time when the two sides were sharply divided. In 1948, thirty years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Kim Tae-seok led the project on making the first national seal of the Republic of Korea at the request of Rhee Syng-man, its first president. This became the last achievement of Kim Tae-seok’s life.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이 연구의 목적은 근대기에 書藝와 篆刻으로 吳世昌과 쌍벽을 이루었던 김태석의 생애와 그의 예술 활동을 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 연구는 선행연구에서 다루지 못했던 김태석 생애의 단절된 시기를 복원하는 한편, 국내외에서 펼쳤던 예술 활동을 시기별로 파악하는데 주력하였다.
    김태석은 전문기술직을 세습한 중인 가문에서 태어나 정3품인 평창군수에까지 올랐다. 이는 궁내부 관료로 있던 30대 초반에 高宗과 英親王의 인장을 새기고, 1904년 경운궁 화재사건으로 왕실 인장을 摹刻하는 사업에 참여한 공로가 컸던 영향 때문으로 추정된다. 김태석은 秋史 金正喜의 말년제자이자 당시의 대표적 위항시인이었던 金奭準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로부터 전수받은 詩·書에 대한 이론은 추사 김정희와 藕船 李尙迪의 가르침을 계승한 성격을 띠었다. 김태석은 당대 최고의 서화가이자 전각가인 丁學敎와 姜璡熙와 선·후배로 교유하며 전각에 대한 안목을 넓혔다. 왕실 인장 모각 사업에 함께 참여한 것도 인연이 되었지만, 그 전부터 스승 김석준이 이들과의 만남에 가교 역할을 하였고, 김태석 집안과 선대부터 이어져온 世交의 영향도 한 몫을 하였다.
    김태석은 1908년 35세 때 미술시찰위원으로 일본과 청에 파견되어 20년 가까운 세월을 북경에서 지냈다. 그는 그곳에서 서예와 전각을 통해 예술계를 비롯한 유력인사들과 활발히 교류했다. 새로 탄생한 중화민국의 印鑄局 관원으로 근무하는 동안 중화민국국새와 임시초대총통 袁世凱의 직함인을 새기며 그의 역량을 한껏 발휘했다. 한편, 김태석은 1922년 북경에서 둔전병제를 통한 무장독립운동의 실현을 목적으로 조직했던 興華實業銀行의 설립과 운영에 적극 가담하여 日警의 요시찰 대상으로 지속적인 감시를 받기도 하였다. 김태석의 북경에서의 독립운동 행적은 그간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연구는 김태석이 근대기 예술가로서 재평가 받아야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중국에서 돌아와 10년 정도 국내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1930년대 초반에는 전주를 비롯한 호남일대를 순회하며 서예와 전각 전람회를 통해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짧은 활동 기간에도 崔圭祥·李光烈 등을 중심으로 김태석의 서예와 전각을 추종하는 그룹이 형성될 만큼 뚜렷한 영향이 나타났다. 김태석은 해방 직전 일본에서 영구 귀국한 이후 전국적 규모의 서예 조직 大東翰墨會를 결성하였다. 이를 통해 좌우익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당시 전람회 방식을 통해 단합을 모색하는 등 서단의 지도자적 역할을 하였다. 1948년 임정 수립 30주년 되던 해에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요청으로 대한민국 제1호 국새 제작 사업을 주도한 것이 그의 생애 마지막 업적이 되었다.
    이 연구에서는 아직 논의를 심화시키지 못한 부분이 있다. 1930년대 호남지역에서의 활동상과 1944년에 영구 귀국하기 전 6년간의 일본에서의 활동상에 관한 부분이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제작한 《남유인보》와 《동유인보》의 세밀한 검토에 의해 보완할 예정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이 연구는 근대기를 대표하는 서예가이자 전각가인 김태석을 미술사적인 방법론에 입각하여 생애·예술세계·후대의 영향관계를 분석하는 작가론적 성격을 띤 연구이다. 한국미술사학 연구에 있어 서예사 연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다른 연구 영역에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빈약하기 짝이 없다. 전각과 인보는 서예사 연구 영역의 한 갈래로 이 역시 한국미술사에서 서예사가 차지하는 비중만큼이나 서예사 연구에서 그 성과가 매우 미미하다. 이러한 실정을 감안할 때 이 연구는 한국미술사에서 근대기 한국서예사 연구의 주요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연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 연구는 지금까지 거의 공개되지 않았던 서예·전각 자료를 포괄적으로 검토한다는 점에서 다음과 같은 연구효과가 기대된다.
    첫째, 한국미술사 연구 영역에 있어 전각과 인보에 대한 연구역량을 강화하는데 일조할 것이다. 이 연구에서는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김태석 유품 153종 가운데 30종의 인보와 10여종의 서첩을 포괄적으로 검토하였다. 인보집에는 대한제국기 왕실의 인장을 비롯하여 한·중·일 명사들의 인장, 정학교·강진희·오세창 등 근대기를 대표하는 전각가의 인장, 국내 유명 서화가들의 인장들이 대거 수록되어 있다. 이들 인보집에 대한 분석과 연구 결과는 학술지를 통해 발표될 것이며, 소장 기관과 연구 결과를 공유하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아직 학술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던 전각과 인보에 대한 학계의 관심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둘째, 연구과정에서 다양한 인보가 연구의 주요 대상자료로 활용되었다. 지금까지의 인보에 관한 연구는 각풍의 해석에 그친 경우가 많은데 이 연구에서는 각풍의 변화 및 계승 양상은 물론 인영에 새겨진 인물들을 면밀히 검토하여 수록 인물들의 인적관계망과 교유양상 및 예술적 영향관계까지 종합적으로 검토하였다. 이러한 연구방식은 양식 분석에 그친 경우가 대부분인 기존의 전각연구에 새로운 연구 유형을 제시함으로써 전각 연구방법론의 확장에 기여할 것이다.
    셋째, 김태석이 1930년대 초반에 제작한 《남유인보》에는 호남 지역의 유력인사와 서화가들의 인장이 대거 수록되어 있다. 이 인보의 연구 분석을 통해 수록된 인물들과 김태석 간에 다양하게 얽힌 인적 관계망이 드러날 것이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 부분적으로만 알려졌던 호남지역에서의 김태석의 활동상과 호남서화단에 미친 영향관계가 보다 분명하게 밝혀질 것이다.
    넷째, 김정희 사후 우리나라 금석·서예사에 관한 연구는 김정희의 제자 이상적으로부터 오경석·오세창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본류로 규정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한 연구가 집중되어 왔다. 근대기 사학 및 서화계에서 오경석·오세창 부자의 위상이 워낙 남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적 성격이 다양하게 표출되었던 당시 서단에서 이상적으로부터 김석준을 거쳐 김태석으로 이어지는 흐름 또한 오세창으로 이어진 흐름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연구는 김정희 사후 이상적을 통해 분화되는 근대기 서단의 여러 줄기 중 김태석으로 이어지는 흐름에 초점을 둔 연구이다. 따라서 이 연구는 근대 서예에 있어 김태석이 차지하는 위상과 서예사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정립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다섯째, 우리나라에서 전각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되고 인보가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엽의 근대기이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전각의 명가로는 정학교·유한익·강진희·오세창·김태석을 꼽을 수 있고, 이 시기의 초기적 형태를 대표할 만한 인보집으로 이상적·오경석·이용문 등이 개인적으로 수집한 인보집을 들 수 있다. 이 연구의 결과는 근대기 전각가에 대한 작가론적 연구와 근대기 초기 인보 연구에 대한 학계의 관심을 견인할 것이고, 연구에서 제시한 방법론은 이와 관련된 후속 연구에 효과적으로 활용될 것이다.
  • 색인어
  • 김태석, 전각, 인보, 흥화실업은행, 대동한묵회, 대한민국국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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