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경성의 비평가 임화를 재검토할 필요성를 본 연구과제의 문맥 속에서 확정할 수 있었다. 그는「방황하는 문학정신」(1938. 12)에서 한 해 동안의 문학을 ‘혼돈’과 ‘출로 없음’으로 진단했다. 임화는 5개월 뒤, 자신의 그런 진단에 대한 하나의 비평적/신학적 처방전 ...
식민지 경성의 비평가 임화를 재검토할 필요성를 본 연구과제의 문맥 속에서 확정할 수 있었다. 그는「방황하는 문학정신」(1938. 12)에서 한 해 동안의 문학을 ‘혼돈’과 ‘출로 없음’으로 진단했다. 임화는 5개월 뒤, 자신의 그런 진단에 대한 하나의 비평적/신학적 처방전을 「현대정신과 ‘카토리시즘’」(1939. 5)에서 제시한다. 전시체제라는 이윤공정 속으로 합성되고 있던 삶·생명과 마주한 임화가 ‘근대의 결함’을 지적하는 입장과 논리는 다음과 같다. “자연과 인간이 신(神)을 매개로 교섭하던 시대의 수미일관성과 ‘따이나미즘’을 이해할 수 있다면 직접으로 인간과 자연이 교섭한 근대의 결함이 이 적절한 매개자(媒介者)의 결여 때문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도 있다.”(임화, 『문학의 논리』, 학예사, 1940, 757~758쪽) 임화가 말하는 ‘신’은 ‘적절한 매개자’로서, 인간과 세계의 교섭에 있어 수미일관성과 역동성을 선사하는 존재였다. 임화의 그 신은 근대의 자질과 속성을 노출시키던 통치상태의 혼돈과 방황을 끝낼 수 있는 ‘힘’으로서, 식민지 조선의 ‘사회’와 대립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임화의 그런 정치종교적 사고는 이른바 『지적협력회의: 근대의 초극』(1942) 좌담의 멤버이자 그 좌담집에 「근대초극의 신학적 근거」라는 논문을 수록했던 일본의 카톨릭 정치신학자 요시미치 요시히코와, 무교회주의자 난바라 시게루의 「프로테스탄티즘과 카톨리시즘」(『국가와 종교』, 1942)이 논구하고 있는 신학과 사회의 관계론과 상호 비교될 수 있는 것이지만, 지금 현재로서는 거기까지 논의를 밀고나갈 수는 없을 듯하다. 그래서 한계를 설정한 상태에서 비교하고 검토하게 되는 것은 식민지/제국의 신학적 문학으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론이다.
임화의 카톨리시즘과 식민지 사회의 관계에 대한 사고는 「현대문학의 정신적 기축」(1938. 3)에서 언급되는 도스토예프스키론—“우리는 보들레르 다음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름을 생각한다./ 보들레르는 인간의 혼 가운데 파진 자기 분열과정을 완성하였으며, 도스토예프스키는 실로 가중된 비극을 계시한 사람이다./ 작가는 회한의 정열을 노래할 수는 있다. 그러나 비판의 오열도, 죽음의 공포도 이젠 노래할 수 없는 심리, 심연이란 실로 죽기 벌써 전에 죽어버린 인간들이 알 수 없는 선풍(旋風) 속을 방황하는 세계다./ 이것은 아마 절망한 인간의 의식계가 아니라 산 망령의 의식계다./ 이러한 두려운 상태를 그려낼 수 있는 힘이 아직도 작가에게 부여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의 기적이 아닐 수가 없다. 실로 기적에 대한 경탄의 염 없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을 수는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문학의 논리』, 127쪽)—과 연결되는바, 그것은 김남천이 수용했던 ‘발자크 vs. 도스토예프스키’라는 구도와 비교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비교는, 교토학파 우파의 역사철학(신학의 형태를 띤 역사철학, 곧 역사신학)에 대한 문학적 비판·개입·절단으로 구상되었던 좌담 『근대의 초극』의 기획자 고바야시 히데오의 ‘역사상수(歷史常數) 비판’과, 그 비판의 문학적 근간으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론과 다시 비교될 수 있으며, 이는 당대의 통치체제의 재생산과 결속된 이데올로기적 상관물로서의 역사철학에 대한 비판으로서 제국과 식민지의 도스토예프스키론이 갖는 차이와 교착을 확인하는 작업이 될 것이지만, 지금으로서는 논의의 범위를 한정하지 않을 수 없다. 대신, 미리 앞질러 고바야시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생활』(1939)에서 한 대목을 번역·인용하여 표지석처럼 세워 놓기로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민중의 관념은 정교의 관념과 온전히 같은 것이었다. ‘러시아의 민중은 모두 정교를 신봉했다, 러시아의 민중에겐 그 이상의 무엇도 없다, 무엇도 필요 없다, 정교가 전부다’라고 말하는 협애한 전제 속에서 그는 ‘정교가 전부다’를 손에 들고, 똑바로 ‘전제(專制)는 전부다’로 걸었다. ‘러시아의 그리스도’는 칼을 들었다. 그를 닦달했던 것은 확실히, 이를테면 그 자신의 ‘마(魔)’였지만 또한 그것은 ‘러시아’라는 것이기도 했다.”(『고바야시 히데오 전작품』 11권, 신쵸샤 6차 전집판, 2003, 293쪽)
본 연구과제의 문맥 속에서 작성될 도스토예프스키론을 통해, 우선 문학, 정치, 신학, 역사철학이 경계를 넘어 합류하고 있는 텍스트들이 근대적 통치합리성의 작동을 정지시키는 힘으로 발현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당시의 다층적인 사고실험과 글쓰기의 상태를 분과별로 구획하는 일반적인 분류법을 멈추고 그 이면의 상호관계를 보여줄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