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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徽州 鄕村에서 公議의 형성과 社會秩序
Forming public discussions and social order in Huizhou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18-S1A5A2A01-2018S1A5A2A01039485
선정년도 2018 년
연구기간 1 년 (2018년 07월 01일 ~ 2019년 06월 30일)
연구책임자 홍성구
연구수행기관 경북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선행 연구에서 명청시대 향촌조직의 운영에 있어서 종족조직의 기능과 역할이 선명하게 부각되기는 하였지만, 이는 중국의 향촌 사회가 봉건적인 종족조직의 지배를 받으면서 중국사회의 봉건적 성격이 장기간 지속되었다는 논리로 귀결되는 데에 그쳤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중국사 연구에 남아있는 유럽중심적, 근대중심적 시각의 잔재이다. 이에 본 연구는 명말청초 약 80여년에 걸친 休寧縣 藤溪 王氏 종족이 생산한 里役 부담에 관한 合同 문서를 핵심 자료 삼아 명청교체라는 정치적 격변과 상품화폐경제의 진전이라는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처하는 전략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향촌사회 내부의 자발적·능동적 ‘公議’ 도출의 과정을 분석하여 사회질서를 회복하고 유지하는 자율적이고 역동적인 17세기 중국 향촌 사회의 모습을 복원하여, 국가와 사회의 관계를 이항대립적 시각이 아닌 상호작용 및 융합의 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는지를 검증함으러써 중국사의 내적 흐름 속에서 ‘근대’로 향하는 중국 향촌사회의 역사상을 발견하고자 한다.
  • 기대효과
  • 그 동안 동아시아 ‘근세’ 혹은 ‘근대’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은 ‘유럽의 충격’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동아시아 ‘근대’라는 역사상에 대체할 새로운 동아시아 ‘근대’를 추구해왔다. 하지만 적지 않은 대안이 모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 중심적인 역사상을 대체할만한 만족스런 동아시아 ‘근대’상을 구축하는 데 성공하였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에 대한 반성과 대안으로 최근에는 동아시아와 유럽의 역사 경험을 대등하게 비교하여 동아시아의 역사 현상을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동아시아의 언어로 재구성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동아시아의 ‘근대’를 모색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본 연구는 그러한 흐름을 이어 중국 향촌사회에서 봉건사회가 장기간 지속되었다는 전제에 내포되어 있는 유럽중심사관, 근대중심사관을 탈피하고, 중국 향촌사회 내부에는 중국 나름의 ‘자치’를 지향하는 자율적이고 역동적인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새로운 동아시아 ‘근대’의 역사상을 발견하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 연구요약
  • 본 연구는 향촌 사회 내부에서 자율성과 역동성이 확대되어간다는 측면에서 16세기를 중국 사회 변화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연구는 핵심 자료인 󰡔元至正2年(1342)至乾隆28年(1763)王氏文約契謄錄簿󰡕(이하 󰡔王氏文約簿󰡕)를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향촌’이라는 공간에서 활동하는 종족조직이 어떻게 ‘향촌’의 질서를 구축하는가를 논리화·구조화하여 제시하고자 한다.
    본 연구의 기초 자료인 󰡔王氏文約簿󰡕에는 당시 藤溪 王氏의 사회·경제 활동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자료로서 다양한 문서들이 대량으로 수록되어 있다. 본 연구는 이중에서도 里役 부담에 관한 合同 문서를 분석함으로써 藤溪村에는 기능하고 있던 里甲·鄕約·保甲 등 향촌조직의 존재 양상, 里役 부담의 원리와 변화, 그리고 향촌조직과 藤溪 王氏 종족조직의 관계를 파악하려고 한다.
    󰡔王氏文約簿󰡕에는 長房, 二房, 三房, 四房, 五房 등 藤溪 王氏의 종족조직과 이에 속한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藤溪 王氏 종족조직에 대한 이해는 藤溪村에서 사회질서가 구축되는 메카니즘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上海圖書館에 소장된 󰡔藤溪王氏摘支世譜󰡕와 南京大學 歷史係 資料室에 소장된 󰡔新安王氏統宗世譜󰡕를 분석할 것이다. 족보 자료를 통해 藤溪 王氏의 종족조직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면, 藤溪 王氏의 里役合同에 등장하는 房의 구성과 상호간의 관계, 각 房의 번영과 몰락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해 ‘향촌’이라는 공간과 그 속에서 활동하는 藤溪 王氏의 종족조직이 어떠한 구조와 원리 속에서 향촌의 사회질서를 구축하고 유지하였는가, 藤溪 王氏 종족조직의 역할과 의미는 무엇인가를 파악함으로써 17세기 휘주의 향촌사회가 국가와는 다른 ‘향촌’이라는 독자적 공간에서 종족조직과 이를 이끄는 지역 엘리트의 활동을 통해 자율적,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사회였음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의 핵심 사료인 󰡔元至正2年(1342)至乾隆28年(1763)王氏文約契謄錄簿󰡕의 주인공은 王正芳戶이다. 王正芳戶가 요역을 부담하는 원칙은 戶 내부의 각 분파가 번갈아 교대로 분담하는 것이었고 명말까지 이것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혈연에 기초한 호혜성(reciprocity)의 원칙이 지켜진 것이다. 분담의 원칙은 가족 수와 재산에 따라 나누는 것이었다. 이것은 각 가족의 경제력에 따른 형평성(fairness)을 중시한 것이다. 하지만 각 가족이 분담액을 감당하지 못하고 번갈아 교대로 분담하는 원칙이 지켜지지 못하면서 호혜성과 공평성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王正芳戶가 가진 경제력의 한계, 상업 활동으로 인한 가족의 외지 이주 등으로 인한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이러한 현실에 대처하여 王正芳戶 내부에서 나타난 새로운 대응 방식은 소수의 몇 사람이 요역 부담을 전담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필요한 자금은 공동으로 모아 마련하고 여기에 기여한 사람은 요역을 면제받았다. 여기에서 王正芳戶은 요역 분담 문제를 여전히 王正芳戶 내부의 논의로 해결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국가는 누가 어떠한 방식으로 요역을 부담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요역을 누가 어떻게 분담할 것인지는 戶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명말청초 休寧縣의 王正芳戶의 사례를 통해 당시 서민의 일상생활 속에 이러한 자율적인 공간이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공간이야말로 일반 서민이 일상적인 문제들에 부딪치고 이를 해결하면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서민의 천하였다.
  • 영문
  • The core materials of this study is the Document file of Wang’s Family from 1342 to 1763(󰡔元至正二年(1342)至乾隆二十八年(1763)王氏文約契謄錄簿󰡕). The main character of this document file is the Wang Zheng-fang Household(王正芳戶). It was a principle for each segment within the household to share their corvee from the government in turn alternately. Efforts to maintain this principle continued until the end of the Ming Dynasty. This means that reciprocity between segments was accepted within the household. Sharing quota of corvee was according to the number of adult male and property of each segment. This emphasizes fairness according to the economic power of each segment.
    However, as the principle of sharing each quota in turn alternately was no longer upheld, there began to be cracks in fairness and reciprocity. 
    This was an inevitable phenomenon caused by the economic limitations of the household and their member's migration to other region of the neighborhood through commercial activities. In response to this reality, the new response of the household was that only a few people were responsible for the burden of the corvee. The funds needed for this were pooled within the household together, paid to those who were burdened, and those who contributed to the fund raising were exempted from the corvee. It is important here that the problem of the corvee sharing still had been solved by discussion within the household. This implies that the government did not pay much attention to who or how to responsible for the corvee. Therefore, who and how to share the corvee was an area in which the household could decide for itself.
    From the case of the Wang Zheng-fang household, it was seen that such an autonomous spaces were found in the everyday lives of the common people at that time. These spaces are their own world of the common people who faced and solved everyday problems and lived their everyday live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의 핵심 사료는 󰡔元至正2年(1342)至乾隆28年(1763)王氏文約契謄錄簿󰡕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休寧縣 27都 5圖 4甲의 里長戶인 王正芳戶의 承役 원칙은 輪流帮貼이었고 명말까지 이것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혈연에 기초한 호혜성(reciprocity)의 원칙이 관철된 것이다. 帮貼의 원칙은 照丁糧派貼이었다. 이것은 各 戶丁의 경제력에 따른 형평(fairness)성이 강조된 것이다. 하지만 貼役銀을 제대로 제공하지 못하고 輪流의 원칙이 지켜지지 못하면서 공평성과 호혜성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下戶인 王正芳戶의 경제력의 한계, 상업 활동에 따른 戶丁의 외지이주 등으로 인한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이러한 현실에 대처하여 王正芳戶 내부에서 나타난 새로운 대응 방식은 津貼代充, 捐資免役, 生息代充 등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호혜성과 공평성에 기초한 종족 공동체의 안정성이 깨지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天啓四年(1624)부터 康熙四十六年(1707)까지 약 80여년에 걸친 王正芳戶의 承役 방식의 변화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承役 방식을 둘러싼 다양한 대응이 거의 대부분 王正芳戶 내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欒成顯의 연구에 따르면, 국가에서 편심한 黃冊의 田地에 관한 정보는 믿을 만하지만 人丁에 관한 정보는 믿기 어렵다. 田地에 관한 정보가 실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국가가 토지매매와 소유권 이전이 빈번했던 상황에서도 稅糧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이다. 이에 비해 人丁에 대한 정보가 부실했다는 것은 국가의 시각에서 볼 때 세량을 누가 어떻게 부담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만큼 관심이 적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어떠한 방식으로 세량을 납부하고 徭役을 부담할 것인지는 戶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 된다.
    명말청초 休寧縣의 王正芳戶의 사례를 통해 당시 서민의 일상생활 속에 이러한 자율적인 공간이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공간이야말로 일반 서민이 일상적인 문제들에 부딪치고 이를 해결하면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서민의 천하였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구두 발표 2회 :
    ① 2018.10.21. “徽學與中國傳統文化”國際學術硏討會 중국 황산시
    ② 2019.2.13. 귀주문서강독회, 서울 명지대학교
    활용방안 :
    연구책임자는 20여년 전부터 명청시대 휘주의 향촌조직과 종족의 관계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진행해오면서 국문, 일문, 중문으로 다수의 관련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연구들의 일관된 관심은 명청시대 중국의 일반 민인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했던 ① ‘향촌’이라는 공간과 ② 향촌민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던 사회관계이다. 그동안의 연구 결과 중국 남부 지역 ‘향촌’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회관계는 ‘종족’임이 분명하고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력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이처럼 ‘종족’이 강고하게 살아남은 것은 중국 사회에 아직도 ‘봉건사회’의 잔재를 남아있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종족의 유효성은 개인에게 가해지는 국가와 사회의 압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 있다. 그런 점에서 중국 일반 민인들의 일상생활의 중요한 특징은, 중국의 오랜 속담처럼, ‘국가의 정책에 대한 민인들의 대책’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정책이 있으면 대책이 있다’는 주제로 그동안의 연구를 정리하여 학술서를 집필할 계획이다.
  • 색인어
  • 왕정방호, 호혜성, 형평성, 공의, 민인, 일상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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