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는 유럽 국가들 가운데 마녀사냥이 가장 많았던 국가 중 하나이다. 특별히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중반은 스코틀랜드의 마녀사냥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는 제임스 6세가 왕권강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던 시기였고, 종교개혁으로 인해 교회의 혼란 ...
스코틀랜드는 유럽 국가들 가운데 마녀사냥이 가장 많았던 국가 중 하나이다. 특별히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중반은 스코틀랜드의 마녀사냥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는 제임스 6세가 왕권강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던 시기였고, 종교개혁으로 인해 교회의 혼란이 지속되던 시기였다. 정확한 통계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1560년부터 잉글랜드와의 통합이 이루어진 1707년까지 스코틀랜드에서 마녀로 몰려 처형된 이들의 수는 3천여 명에서 4천여 명에 이른다. 그러면 스코틀랜드에서 마녀사냥의 배경은 무엇이며, 이는 어떠한 의미에서 연구의 필요성을 지니는가? 제임스 6세의 마녀재판과 왕권강화의 문제는 1590-91년 노스버릭(North Berwick) 마녀사냥에 대한 분석과 이후 제임스의 다른 저술 분석을 병행할 때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 1590-91년 노스버릭 마녀재판은 국왕이 마녀술의 주된 목표였다는 점과, 국왕이 재판의 전과정에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마녀사냥과 정치적 목적 사이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특히 이 사건의 경우, 재판기록과는 별도로 재판 직후에 국왕이 『스코틀랜드 소식』(Newes from Scotland)이라는 보고서를 잉글랜드에서 출판하도록 했는데, 그 시점과 내용 그리고 출판 장소는 철저하게 정치적 목적을 위해 고려된 것이었다. 그리고 제임스 6세는 자신의 경험과 개인적 연구를 토대로 1597년에 『악마론』(Daemonologie)이라는 팸플릿을 출판하였는데 이는 왕권과 마녀술에 대한 그의 이해가 그대로 반영되었다. 또한 제임스는 왕권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담은 다른 두 권의 책도 연달아 출판하였는데 1598년과 1599년에 나온 『자유군주정의 진정한 법』(The Trew Law of Free Monarchies)과 『왕의 재능』(Basilikon Doron)이 그것이다. 즉, 이 세 권은 같은 시기에 출판되었고, 왕권에 대한 강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제임스의 마녀술에 대한 인식은 매우 정치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제임스 6세 시대의 마녀사냥을 왕권강화라는 측면에서만 이해한다면 이는 균형 잡힌 이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근세 사회의 중요한 사회변화는 종교개혁으로 인한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 이후 스코틀랜드 개혁교회는 마녀술에 대해 매우 엄격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왜 하필이면 1590년대 마녀재판이 성행했는가에 대해서는 답변하기 어렵다. 당시 제임스 6세는 가톨릭 귀족들의 위협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장로교회의 도움을 얻고자 했다. 따라서 종교개혁 이후 스코틀랜드에서 장로회 제도가 1589년부터 1592년 사이보다 더 잘 작동된 적은 없었다. 국왕 제임스의 입장에서 볼 때, 북부 고지대의 가톨릭 귀족들의 위협과 노스버릭 마녀사건은 제임스를 정치적 그리고 심리적 불안으로 내몰았고, 따라서 국왕에게는 이들에게 적대적인 장로교 지도자들과 장로교 귀족들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마녀사냥에서 왕권과 교회의 제휴는 앞서 언급한 Newes from Scotland의 출판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Newes from Scotland의 저자로 알려진 제임스 카마이클(James Carmichael) 목사는 이 문서에서 마녀술에 대한 왕과 교회의 입장을 잘 대변하고 있다. 즉, 종교개혁 이후 이어져 내려온 국왕과 교회의 갈등은 1590년대에 이르러 가톨릭과 마녀술이라는 공동의 적이 만들어짐과 동시에 봉합되었고 두 세력은 동지가 되었던 것이다. 이 연구는 기존의 연구들이 파악하지 못한 제임스의 왕권관련 저술과의 연계 속에서 그의 마녀정책을 이해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연구의 필요성과 창의성 그리고 필요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연구는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가 가장 왕성한 시점과 마녀사냥의 성행시점이 동일하다는 사실에서 이 둘 사이의 관계를 분석한다. 따라서 본 연구는 교회의 마녀술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넘어서서 정치와의 관계 속에서 다루고자 한다는 점에서 기존 연구와 큰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
기대효과
이 연구는 순수한 역사적 연구이기 때문에 실용적인 기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를 통해 약간의 학문적, 교육적 그리고 사회적 기여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국내연구의 자극- 최근 영미 역사학계에서는 영국사의 주변부라고 여겨지는 스 ...
이 연구는 순수한 역사적 연구이기 때문에 실용적인 기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를 통해 약간의 학문적, 교육적 그리고 사회적 기여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국내연구의 자극- 최근 영미 역사학계에서는 영국사의 주변부라고 여겨지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 대한 관심이 점증되고 있다. 특히 16세기, 17세기 영국의 역사는 잉글랜드 뿐 아니라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관계를 통해서 연구해야 한다는 ‘새로운 영국사’(New British History)가 큰 호응을 받고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시각을 초월하여 스코틀랜드 역사를 유럽대륙과의 연결 속에서 살펴본다는 점에서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마녀사냥에 대해서는 국내에 개설서가 소개되어 있지만 구체적 사례 연구는 그의 전무한 입장이다. 따라서 이 연구는 국내 학자들의 관심을 유발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기여가 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교육 및 연구 자료의 축적- 한국의 대학에서 서양사를 가르치는 역사가로서 서양 사회에 대한 연구자료의 절대적인 부족에 좌절감을 느끼곤 한다. 마녀사냥이라는 주제는 특별히 그러한 경향이 강하다. 유럽의 마녀사냥에 대한 개설서는 있지만 깊이 있는 교육자료로 활용하기는 턱없이 부족하다. 본 연구과정에서는 동시대 자료들이 분석될 것이며, 이들 자료에 대한 기본적인 해설과 소개는 대학원생들의 교육과 연구에 매우 유익한 자료가 될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의 새로운 소비자 창출- 오늘날 역사학은 문학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역사는 문학이 아니라 학문이 되어버렸고, 대중을 위해 역사를 쓰던 역사가는 소수의 학자들을 위해 학술적인 역사를 쓰는 역사학자가 되어버렸다. 역사가는 이제 대중의 관심에 부응하는 주제를 찾고 대중을 위해 역사를 써야할 필요가 있다. 마녀사냥이라는 주제는 매우 대중친화적인 주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라도 구체적인 사례연구로 들어가지 아니하면 생생한 현장감을 살리기 어렵다. 이러한 점에서 이 연구는 큰 장점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 연구는 학자들 뿐 아니라 대중에게도 큰 호응을 받을 것으로 여겨진다.
연구요약
연구내용 본 연구는 2년에 걸쳐 이루어지며 연차별 연구의 제목과 목차는 다음과 같다.
1년차 연구제목: 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의 왕권강화와 마녀사냥 1장- 서론 2장- 1590-91년 노스버릭(North Berwick) 마녀재판과 제임스 6세 3장- Newes from Scotland(1591)와 ...
연구내용 본 연구는 2년에 걸쳐 이루어지며 연차별 연구의 제목과 목차는 다음과 같다.
1년차 연구제목: 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의 왕권강화와 마녀사냥 1장- 서론 2장- 1590-91년 노스버릭(North Berwick) 마녀재판과 제임스 6세 3장- Newes from Scotland(1591)와 왕권 4장- Daemonologie(1597)와 이후 저술에 나타난 제임스의 마녀술 이해 5장- 결론
2년차 연구제목: 16세기 후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흥기와 마녀사냥 1장- 서론 2장- 장로교회의 마녀술 이해 3장- 당회와 노회의 마녀재판기능 4장- 왕권과 교회의 제휴 5장- 결론
연구방법 1년차 연구에서는 제임스 6세가 관여한 노스버릭 마녀재판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다. 당시 마녀로 지목되어 화형 된 이들의 재판에서 제임스의 역할이 어디까지였는지를 표를 통해 제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Newes from Scotland 및 제임스 6세의 저술인 Daemonologie, The Trew Law of Free Monarchies, Basilikon Doron 등의 원사료를 분석하고, 이를 통해 제임스의 왕권강화정책과 마녀사냥 간의 관계를 파악하고자 한다. 2년차 연구에서는 16세기 후반 제임스 6세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각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마녀사냥에 있어 제휴를 꾀하였던 과정을 알아볼 것이다. 이를 위해 중앙당국의 재판기록 및 지역 교회의 재판기록 등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국문
스코틀랜드에서 마녀사냥은 정치적이고 신앙적인 행위였다. 마녀사냥은 근대국가 형성기에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왕권에 대항하는 귀족들은 마녀술로 몰리는 경우가 있었고, 그 때마다 국왕은 신의 보호를 받는 존재로 선전되었다. 노스 버릭 마녀사냥은 ...
스코틀랜드에서 마녀사냥은 정치적이고 신앙적인 행위였다. 마녀사냥은 근대국가 형성기에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왕권에 대항하는 귀족들은 마녀술로 몰리는 경우가 있었고, 그 때마다 국왕은 신의 보호를 받는 존재로 선전되었다. 노스 버릭 마녀사냥은 국왕이 수사와 재판 그리고 결과보고에 직접 관여하였고, 철저히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한 구체적 본보기이다. 어느 국가보다도 왕권이 미약한 스코틀랜드 국왕으로서는 이러한 왕권강화수단이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교회는 마녀사냥을 종교개혁가들이 설정한 경건사회 만들기의 주요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마녀는 하나님의 대적인 악마와 계약을 맺은 그의 하수인이었고, 종교개혁을 통해 경건한 사회를 만들려는 교회의 꿈을 무산시키려는 자들이었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가들은 “마녀를 살려두지 말지니라”라는 구약성서의 명령에 따라 가혹하게 처벌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마녀술 이해는 16세기 말과 17세기 전반의 개혁가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스코틀랜드만의 독특한 교회정부는 마녀사냥을 매우 용이하게 만들었다. 16세기 말에 정착된 장로회조직, 특히 당회와 노회는 종교재판소로서의 기능을 감당하였다. 이들 법정은 마녀술의 고발을 들었고, 혐의자들 심문하였고, 필요하다면 고문도 자행하였다. 근대 스코틀랜드에서 마녀사냥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부와 종교개혁의 완전한 정착을 추구한 교회의 합작품이었다.
영문
Witch hunting in Scotland was a political and religious practice. The witch hunt was used as a means to strengthen the kingship during the formation of the modern state. The nobles who were against the kingship were often driven to witchcraft, and eac ...
Witch hunting in Scotland was a political and religious practice. The witch hunt was used as a means to strengthen the kingship during the formation of the modern state. The nobles who were against the kingship were often driven to witchcraft, and each time the king was promoted as being protected by the gods. The North Berwick Witch Hunt is a concrete example that the King directly involved in the investigation, trial, and reporting of results, and used it as a means to thoroughly strengthen the kingship. It seems that such a means of strengthening kingship was inevitable for the Scotttish king, whose kingship was weaker than any other country. The kirk used the witch hunt as the main means of creating a godly society set by the Reformers. They believed that the witches were the servants of the Devil, that they entered a pact with God's adversary, and that they wants to break the church's dream of creating a godly society through the Reformation. The Scottish Reformers sought severe punishment under the Old Testament mandate, "You must not keep the witch alive." This understanding of witchcraft was passed on by reformers in the late 16th and early 17th centuries. The unique church government in Scotland made witch hunting very easy. Presbyterian organizations, especially sessions and presbyteries, settled at the end of the 16th century served as inquisitors. These courts heard charges of witchcraft, interrogated the suspects, and performed torture if necessary. In modern Scotland, witch hunts were a collaboration between the government to strengthen the throne and the church to pursue the complete settlement of the Reformation.
연구결과보고서
초록
근대 스코틀랜드는 주요 마녀사냥 국가였다. 특별히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중반은 스코틀랜드의 마녀사냥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1560년부터 잉글랜드와의 통합이 이루어진 1707년까지 스코틀랜드에서 마녀재판은 3~ 4천여 건에 이른다. 인구가 ...
근대 스코틀랜드는 주요 마녀사냥 국가였다. 특별히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중반은 스코틀랜드의 마녀사냥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1560년부터 잉글랜드와의 통합이 이루어진 1707년까지 스코틀랜드에서 마녀재판은 3~ 4천여 건에 이른다. 인구가 몇배나 많았던 이웃 잉글랜드와 비교하면 마녀재판의 수는 놀랄만하다. 이 연구는 근대 스코틀랜드에서 마녀사냥이 많았던 이유를 분석하는 것이다. 스코틀랜드에서 마녀사냥에 기여한 가장 큰 두 요소는 왕권과 교회이다. 스코틀랜드는 근대 유럽국가에서 국왕권이 가장 미약했던 국가이다.제임스 6세는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마녀사냥을 정적 제거의 기회로 삼았다. 1590-1년에 일어난 노스버릭 마녀사냥은 그의 정적 보스웰 백작을 제거하는 기회로 이용되었고, 마녀사냥의 보고서는 왕의 종교적 이미지를 고양하는데 프로파간다로 이용되었다. Newes from Scotland는 대표적인 문헌이다. 이 문헌에서 강조된 것은 악마와 마녀의 목표가 왕을 제거하는 것이었지만 국왕이 신의 보호아래 있기 때문에 안전하게 보호받았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이후 교회 역시 마녀사냥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의 마녀술인식과 교회조직상의 특징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이후 존 녹스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스코틀랜드를 경건한 사회로 만들고자 했는데 그들에게 경건한 사회는 구약성서에서 열거된 죄악이 제거된 사회였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은 마녀술이었다. 그들은 "마녀를 살려두지 말라"는 구약성서의 구절을 그대로 적용하고자 하였다. 또한 16세기 유럽에서 널리 퍼진 마녀개념도 크게 교회의 마녀인식에 기여하였다. 그것은 마녀들이 하나님의 대적인 악마와 계약(demonic pact)을 맺은 악마의 하수인이라는 개념이었다. 마녀는 사탄과의 계약을 통해 그를 섬기는 대신 그로부터 신비한 능력을 부여받는다. 마녀는 계약의 표시로 신체의 은밀한 곳에 악마의 징표를 받게 되는 데 있는 자이다. 마녀는 집단적으로 악마를 숭배하기 위해 사바트(sabbath)라는 집회에 참여한다. 이 집회에서 마녀들은 여러 가지 비도덕적이고 외설적인 행동을 벌이는데, 나체로 춤을 추고, 다른 마녀들과 악마와 함께 난교를 벌이고, 악마를 위해 아기를 희생시키고, 식인 행위 등을 행한다는 것이다. 또한 마녀들의 모임에서는 기독교의 예배 의식을 조롱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개념은 특히 스코틀랜드 교회지도자들에게서 잘 수용된 듯하다. 스코틀랜드는 사회 전반에 언약문화가 퍼져 있던 국가였다. 종교개혁 이후 스코틀랜드 교회는 국가적으로 장로회 교회를 지키기 위한 언약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이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을 모방한 것이었다. 이러한 언약문화에 익숙한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악마와의 계약라는 개념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가올 수 있는 개념이었다. 마지막으로 전국적인 장로회 조직도 마녀사냥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전국적인 장로회 조직이 구성된 것은 1581년 총회에서이다. 1581년 총회는 전국의 약 1천 개 교회를 600여 개의 교구(parish)로 나누었고, 이를 다시 50여 개의 노회로 묶었다. 이에 따라 각 노회에는 12개 내외의 교구가 배정되었다. 이로서 각 교구에는 당회가 만들어졌고, 지역별로는 노회가 조직되었다. 이들 조직은 완전한 종교법정의 기능을 소유하고 있었다. 특히 당회는 교구민들의 규율을 관리하는 최전선과 같은 역할을 감당하였다. 당회는 교구민들로 마녀술의 고발을 받았고, 초동 수사를 감당하였다. 또한 당회는 노회에 고발을 넘기기도 하였다. 즉 당회와 노회는 마녀술 재판에서 초동수사를 하였고, 이 기록을 마녀재판 법정에 넘기는 역할을 한 것이다. 마녀법정은 대부분 지역의 소귀족들로 구성되었으나 당회와 노회의 초동 수사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마녀재판에서 교회의 역할은 매우 컸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스코틀랜드 마녀재판은 정치적 이유로 종교적 이유로 크게 발생하였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이 연구는 순수한 역사적 연구이기 때문에 실용적 활용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를 통해 약간의 학문적, 교육적 그리고 사회적 기여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1. 학문적 연구- 이 연구는 왜 장로교회가 정착된 스코틀랜드에서 마녀사냥이 심했 ...
이 연구는 순수한 역사적 연구이기 때문에 실용적 활용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를 통해 약간의 학문적, 교육적 그리고 사회적 기여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1. 학문적 연구- 이 연구는 왜 장로교회가 정착된 스코틀랜드에서 마녀사냥이 심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연구의 결과는 장로교회의 성경인식, 교회조직, 그리고 언약문화 등이 마녀사냥의 중대한 요소임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연구는 16~17세기 스코틀랜드의 역사와 종교개혁사 그리고 마녀사냥에 대한 이해의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마녀사냥과 관련하여 개설적인 지식은 많이 소개되었지만 국체적인 연구는 사실상 전무한 형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연구는 이후 연구자와 이후 세대 연구자들의 마녀사냥 관련 연구에 중요한 기초의 역할을 할 것이다. 2. 교육적 자료의 생성- 본 연구의 진행과정에서 흥미로운 문헌들이 많이 해석되었다. 특히 16세기 스코틀랜드 영어는 대학원생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문헌들이지만 우리말 번역이 이루어져 대학원생들의 교육에 큰 도움이 되리라 기대힌다. 특히 『스코틀랜드 소식』(Newes from Scotland, 1591) 의 번역은 학생들에게 생생한 마녀자료의 기록을 소개한다는 점에서 교육적으로 중대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자료이다. 실제 일부 자료는 현제의 수업에 활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3. 역사의 새로운 소비자 창출- 오늘날 역사학은 문학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역사는 문학이 아니라 학문이 되어버렸고, 대중을 위해 역사를 쓰던 역사가는 소수의 학자들을 위해 학술적인 역사를 쓰는 역사학자가 되어버렸다. 문학으로서의 역사가 회복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주제는 대중들에게 역사의 관심을 되살리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겨진다. 구체적인 사례연구는 독자들에게 생생한 현장감을 제공하고 있어 큰 호응을 받을 것으로 여겨진다.
색인어
마녀술, 제임스 6세, 노스버릭, 보스웰백작, <<스코틀랜드 소식>>, 악마와의 계약, 언약문화, 장로회 조직, 당회, 노회, 총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