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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성’과 ‘지역성’의 시야에서 바라본 韓·日 陽明學의 원류와 창신 - ‘陽明學 批判 文獻과 四書 註釋 양상의 비교’를 중심으로 -
Yanhming-Studies of Korea/Japan looked at from history consciousness and local interest - Analysis of tendency of criticisms over Yangming studies and research on characteristics displaying from anti-Yangming studies (through investigating and extracting anti-Yangming study documents of Joseon/Japan Dynasty)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공동연구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8S1A5A2A03037158
선정년도 2018 년
연구기간 3 년 6 개월 (2018년 07월 01일 ~ 2021년 12월 31일)
연구책임자 김용재
연구수행기관 성신여자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공동연구원 현황 김호(고려대학교)
김민재(안동대학교)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우리 연구는 동아시아의 근대화 과정에서 작동되었던 思想的・哲理的 思考의 흐름을 ‘陽明學’에 초점을 맞춰 규명하는 데에 연구목표를 설정하였다. ‘양명학’이라는 학문사조는 당시 한국과 일본에서도 주목받지 못했던 사상이었으나, 韓日 양국의 ‘근대화’를 가져오는 데에는 사뭇 다른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시대가 변화하고 세상이 변모하는 격동기에,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개혁할 수 있는 것은 분명 ‘가치관’・‘세계관’을 정립시켜줄 수 있는 ‘철학’일 것이다. 다만, 우리 연구는 ‘역사성’과 ‘지역성’이라는 범주에 제한하여 ‘양명 철학’이 동아시아 근대화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역할과 영향력을 살펴봄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한편 역사성에 국한한 哲理的․思辨的 연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17~18세기 이후를 상정하였다. 왜냐하면 이 시기는 중국에서도 이미 賣官賣職・士農工商의 신분질서 붕괴・여성의 再嫁 등, 사회적으로는 자본주의 萌芽가 싹트기 시작하고 민간에서는 자유분방한 가치관과 자유의지가 요동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일본 역시 下剋上으로 정의되던 전국을 도쿠가와[德川]막부가 통일하면서 관동지방에 에도[江戶]막부를 설치하고 幕蕃의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이룬다. 이때 蕃 내부에는 사무라이[武士]계급과 피지배층인 농민・조닌[町人] 계급으로 양분되었고, 士農工商의 엄격한 신분질서도 확립되어 간다. 이것은 중국과 다르고 조선과도 다른 양상이다. 다만, 전쟁에서의 승리만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던 무사계급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변모시켜야만 한다는 기이한 현상이 도래하게 되었는데, 이 시점에서 일본 儒學의 본모습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역사성’과 ‘지역성’을 감안해 본다면, 분명 한국과 일본은 사상계가 요동을 치면서 세계관・가치관・역사관 등이 다양하게 공존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사뭇 의미있는 시점이라 할 것이다. 과연 이 시기에 哲理的 배경으로 작용하였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리 연구진은 韓·日 양국 간에 공통적으로 존재했던 학문사조를 ‘양명학’으로 상정하고, 이들의 역할과 영향을 ‘文獻’과 ‘經典 註釋’의 經學觀이라는 프리즘을 통하여 규명해낼 것이다.
    ❏ 한국과 일본의 근대화는 그 과정과 내용上에 있어서 명확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이에 관하여 그간 우리네 연구는 주로 역사적 맥락만을 중심으로 연구되어 왔다. 그러나 역사적 연구 근저에 깔려있는 裏面에 관한 접근은 애석하게도 아직까지 시도된 바가 없다. 따라서 역사적 맥락이 아닌, 당시 한국과 일본 지식인들의 의식구조에 대한 哲理的 구조를 탐색을 살펴보고자 함이 바로 우리 연구의 출발점이자 핵심이다.
    ❏ 주지하시다시피, 조선에서의 양명학은 사문난적이었기 때문에 양명학에 전념하였던 儒者는 없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조선에서의 양명학이 가졌던 위상과 가치를 찾아보기란 여간 至難한 작업이 아니다. 따라서 조선에서 양명학을 비판하였던 사람들의 문헌자료를 찾아, 그 비판양상을 逆추적해 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이 부분은 연구계획서에 상세히 서술됨) ❏ 한편, 일본 역시 근대화 과정에서 양명학과 무관하지 않다. 이노우에 데쓰지로[井上哲次郞]에 의하면, 일본 에도[江戶]시대의 儒學은 곧 불교사상에 대한 현세적 생활윤리로서 작용하였으며, 이는 일본유학 연구의 기점이 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실제 에도시대 때 주자학이 관학으로 채택되었다하더라도 조선에서와 같이 막부에 강력한 영향력을 과시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볼 때, 체제확립을 위하여 주자학이 도구적 역할을 자임한 성격이 강하다. 또 사무라이(武士) 계급은 싸움과 전쟁을 최고 목표로 삼았던 기존의 모습으로부터 탈피하여, 인격적 수양을 필요로하는 관료의 모습으로 바뀌어 간다. 이 시기, 기존 주자학을 공부하였던 사람들은 주로 漢學에 능통하였기에 정치나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일에 종사하며 일정정도 그 역할을 보여주었지만, 무사계급의 인격도야를 위해서는 哲理的 학문이 요청되었는데, 이 때 드러난 것이 바로 주자학에 대한 懷疑이며, 이를 본격적으로 밝히고자 했던 중심에 ‘나카에 도쥬’ 등의 양명학자가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저마다 立論의 근거로 經典에 대한 독창적인 註釋을 내세웠다. 그리고 이들이 내세웠던 자유로운 경학관은 시대가 변모되는 사회흐름을 받아들이며 경직된 규범과 폐쇄된 체제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것을 수용하고자 하는 자유분방한 의지의 발현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본 연구진은 이러한 자유분방한 경학관과 의지를 양명학의 ‘良知’에 접목시켜 찾아보고자 함에 본질적인 문제의식이 부여되어 있다.
  • 기대효과
  • ❏韓國儒學 연구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방법 모형을 제시할 수 있다. : 한국유학을 연구하였던 선행연구들은 거의 대부분이 2차 연구결과물(저서/논문)을 앞선 연구자가 제시한 ‘원전자료’에 대한 검증없이, 또는 새로운 원문을 찾아내지 않고, 새로운 가설과 추론을 세우는가 하면, 혹은 반론을 제시하며 사상누각의 결과물들을 축적해오고 있었다. 이러한 연구자세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철저하리만큼 原典文獻 속으로 파고들어가야만 한다. 본 연구는 바로 이러한 연구방법과 자세에 신선함을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기실 이러한 연구자세는 신선함이라기보다는 마땅히 이렇게 연구해야만 하는 당위적 연구방법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구성과로 도출되는 결과물(저서/논문/자료집 등)은 한국양명학에 관한 원전과 문헌, 그리고 문화유적(圖錄)들을 총망라하고 있기 때문에, 이 분야를 연구하거나 혹은 관심을 갖고 있는 연구자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자료 해설집 역할을 제공해줄 것이다.
    ❏연구가 교육으로 환원되고 후학들로부터 연구 관심분야의 外延이 넓어진다. : 우리 연구결과는 각종 전공수업이나 대학원 강의에서 적극 활용되는 등, 연구가 곧 교육으로 환원될 수 있는 소중한 기능을 발휘할 것이다. 본 결과물은 1차 원문과 문헌유적 자료에 대한 해설이 添記되어 있는 만큼, 일회성 연구결과물 배출에 그치지 않고 한국유학 및 향후 학문 후속 세대들을 위한 기초 교육자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본 연구는 한국유학사 또는 한국철학사상 강좌를 교육하는 각종 강좌에 유효적절하게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존의 한국유학사나 한국철학사상에서는 주자학 중심의 사적 고찰이나 사상적 특징을 강의하는 것이 主내용으로 구성되어 왔거나, 기껏해야 주자학 중심의 心性論 理氣論 강의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본 연구결과를 통하여 한국유학 사상사에 있어 ‘양명학’에 대한 주자학자의 입장과 反論 논리가 문헌자료를 통하여 명확히 조명됨으로써, 연구자들은 주자학자의 양명학 비판 논리와 인지도 차원을 좀 더 세세하게 파악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 결과물은 양명학(韓日) 연구의 토대를 마련해 줄 수 있는 기초자료임에 분명하며, 그간 폐쇄적이며 획일적인 특징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닫힌 한국사상계의 문을 개방시켜 줌과 동시에, 한국철학계의 다양성과 한국적 특징을 간직한 또다른 유학사상을 연구하는 데에 기여할 것이다.
  • 연구요약
  • ❏ 임진왜란 당시, 지원軍이었던 明나라 군사들은 <전습록>이라는 서적을 가지고 왔었는데, 조선의 지배층과 지식인들은 <전습록>이라는 서적에 마치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이는 否認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전습록>이 조선에 유입되면서 아직 간행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지식인들은 이를 斯文亂賊으로 치부하거나 또는 道․佛만도 못하는 異端이라 비판하며, 아예 禁書로 지목하였다. <전습록>이 간행된 바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양명학 속에 담겨있는 思考와 哲理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또한 아이러니한 사실은 비판대상이었던 <전습록>이 조선에서는 아직 간행되지도 않은 상황이었는데도, 이를 비판하는 곤지기・이단변정・학부통변과 같은 양명학 비판서적이 먼저 간행되었다는 사실과, 동시에 이들 서적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점이다.
    ❏ 그렇다면 조선 관료들은 왜 그토록 양명학을 비판하였을까? 경전을 넘어서는 자유분방한 마음[心]의 이치를 강조해서였을까? 다양한 추측이 가능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을 것이다. 양명학의 사유구조에 의하면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한 자리에서 밥을 먹고, 여자도 인간인 이상 어느 때이나 改嫁할 수 있으며, 士農工商의 신분질서가 이미 와해되고 賣官賣職의 풍토가 일어나면서 평등의식이 자라나기 시작하였고, 이에 민간인들 사이에서도 자유로운 문학관과 가치관 그리고 세계관이 등장하며 기득권이 누렸던 모든 것이 해체되는 것을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연구진은 양명학비판 문헌 속에서 그 비판논리와 특성을 규명해내고자한다. 일본양명학 연구 역시 마찬가지이다. 집주에 反하는 부분을 찾아내어 그 논리와 특성을 규명하고 근대화 과정의 특징을 찾아낸다.
    ❏<연도별 연구추진 전략> ❶ 1차년도 (2018.07~2019.06): 1차년도에는 주로 한국양명학에 관한 연구를 수행한다. 조선의 관료와 재야의 선비들 모두 양명학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 역설적으로 보자면 조선에 양명학이 존재했었음의 傍證이다. 따라서 양명학 비판문헌을 조사하여 그 목록을 만들고, 그 문헌들을 선별・발췌・분석해봄으로써 양명학 비판과정에서의 특성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주자학과 양명학이 실학으로 연계되는 역학관계를 살펴봄으로써, 주자학・양명학・실학이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서 작동되었던 함수관계를 찾아볼 것이다. ❷ 2차년도 (2019.07~2020.06): 2차년도에는 주로 일본양명학 계보를 찾아보고, 일본에 양명학이 전래되는 시기와 수용과정에서의 특징들을 조사・연구한다. 일본 역시 17~18세기에 이르러 사회적으로 중요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는데, 이와 관련하여 일본 양명학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시코쿠(島)의 마쯔야마를 탐방할 계획이다. 일본양명학과 관련한 각종 문헌들을 전수조사하고 자료들을 수집하여 목록을 만들 것이며, 양명학과 관련한 인물 및 유적지・사진자료 등을 완성시킬 계획이다. 2차년도에 우리 연구진은 일본 양명학자들이 동일한 經文에 대하여 왜 다른 註釋 양상을 보였는지, 그 내용과 이유를 밝혀보는 데에 천착할 계획이다. 임진~정유재란 때, 조선으로부터 일본에『양명문록』이 유입되면서 일본에서는 다양한 경전 주석이 등장하게 된다. ‘藤原惺窩(후지와라 세이카)’의『大學要略』은 양명정신을 찾아볼 수 있는 중요한 근거자료이므로 이에 대한 집중연구가 진행될 계획이다. 2차년도 연구대상 인물로는 총 9人을 선별하였는데, 이들의 모든 경전주석에 대해서도 연구를 진행한다. ❸ 3차년도 (2020.07~2021.06): 3차년도는 1차~2차년도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우리 연구진의 아젠다를 최종적으로 종합・정리하는 단계이다. 조선과 일본에 전래되었던 양명학은 과연 근대화 과정에서 어떤 영향과 역할을 자임하였고, 역사성과 지역성의 측면에서 바라볼 때 어떠한 지평을 열어주었는지에 대한 探討를 통하여, 근대 자유주의 및 자본주의 물결에서 정치・교육・문학(서민문학) 등의 방면에 어떤 양상으로의 창신과 변용을 가져다주었는지가 우리 결과물의 최종 목표가 될 것이다.
    ❏<중점 추진전략과 연구방법> 우리 연구는 철저하리만큼 ‘문헌’ 자료에 대한 분석을 第一의 연구방법으로 설정하였다. 한국과 일본의 양명학 원류를 ‘역사성’과 ‘지역성’의 범주 안에서 살펴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文獻에 대한 분석을 도외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에서의 양명학 비판 인물 18人 우선 선별함) 이러한 文獻 연구방법은 일본양명학을 연구하는데 있어서도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일본은 朱子의 集註에 대한 주석 양상을 다르게 보였다는 특징을 규명해나갈 것이다. (일본양명학으로 거론되는 대표 9人을 우선 선별함)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 연구요약

    ① 1차년도 (2018.07~2019.06)
    ❏ 당초 「연구계획서」상에 밝혀놓은바, 조선에서 양명학을 극렬 비판했던 유자 18인 중, 5명을 선별하고, 이들의 『양명학 비판 문헌 목록집』을 만들고, 간단한 「해제」를 작성하였다.
    ❏ 그리고 그 문헌 내용을 ‘국역’하고, 비판 논리를 분석하여 학술대회에서 발표 → 검증 단계를 거쳐, 학술지에 투고·게재하였다. 1차년도에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주요 인물은 ‘김세필’, ‘박상’, ‘이황’, ‘유희춘’, ‘유성룡’이었으며, 연구성과로 게재된 논문은 총 4편이었다.
    ❏ 이들 인물의 양명학 비판 내용과 특징은 분량이 방대하여 첨부하는 《붙임 파일: 「결과보고서」p.11~14》로 대신한다.
    ❏ 한편, 일본 양명학의 실존과 실체를 밝히기 위하여 당초 「연구계획서」대로 일본 양명학의 유적지를 탐방하였으며, 관련 『도록 및 해설집』을 제작 중에 있다.
    ❏ ’이노우에 데츠치로‘와 그의 제자 ‘다카세 다케지로’가 분석한 일본 양명학의 계보가 타당한지를 고증하였으며, 근대 일본 양명학의 계보는 사토 잇사이[佐藤一斎] →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 →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로 국한 시키게 되었다.
    ❏ 한편, 일본에서 양명학을 건학이념으로 하여 개교한 ‘니쇼각사대학(二松學舍)’을 방문, ‘미시마 추슈[三島中洲]’의 양명학 정신이 일본을 근대화로 접어드는 데에 어떠한 역할을 해냈는지도 조사하였다.

    ② 2차년도 (2019.07~2020.06)
    ❏ 역시 당초 「연구계획서」상의 순서에 따라, 조선에서 양명학을 극렬 비판했던 유자 18인 중, 6명을 선별하고, 이들의 『양명학 비판 문헌 목록집』을 만들고, 간단한 「해제」를 작성하였다.
    ❏ 그리고 그 문헌 내용을 ‘국역’하고, 비판 논리를 분석하여 학술대회에서 발표 → 검증 단계를 거쳐, 학술지에 투고·게재하였다. 2차년도에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주요 인물은 ‘윤근수’, ‘홍여하’, ‘박세채’, ‘이민서’, ‘서종태’, ‘송징은’이었으며, 연구성과로 게재된 논문은 총 4편이었다.
    ❏ 이들 인물의 양명학 비판 내용과 특징은 분량이 방대하여 첨부하는 《붙임 파일: 「결과보고서」p.18~21》로 대신한다.
    ❏ 한편, 일본 양명학의 대표 인물로 알려진 ‘오시오 츄사이’와 관련된 유적지를 탐방하고, 그의 양명학적 성향을 문헌에 전거를 두고 밝혀냈다. 그의 일본 개혁은 결국, 양명학에서 주창했던 ‘치양지’에 기반한 것이었으며, ‘오시오 츄사이’의 저작 『洗心洞箚記』「自述」편에 나타난 5대 학설 : 태허, 치양지, 기질지성의 변화, 생사를 하나로 하는 정신, 허위를 제거하는 실천정신임을 분석했다.
    ❏ 이후, 우리 연구진은 일본 양명학의 계보를 만들고 이들이 양명학을 선양하는 과정을 찾아내기 위해 일본의 왕수인으로 칭송되는 ‘나카에 토쥬’의 고향 ‘이도가와초’를 방문하여 그의 양명학 수학 과정을 탐방했다. 다만, 《나카에 토쥬 기념관》측에서 3차년도에 우리 연구진과 공동으로 「韓·日 양명학의 원류와 창신」이라는 주제로 국제학술대회 개최를 기획하였으나, 코로나로 인하여 무산되었다.

    ③ 3~4차년도 (2020.07~2021.12)
    ❏ 역시 당초 「연구계획서」상의 순서에 따라, 조선에서 양명학을 극렬 비판했던 유자 18인 중, 6명을 선별하고, 이들의 『양명학 비판 문헌 목록집』을 만들고, 간단한 「해제」를 작성하였다.
    ❏ 그리고 그 문헌 내용을 ‘국역’하고, 비판 논리를 분석하여 학술대회에서 발표 → 검증 단계를 거쳐, 학술지에 투고·게재하였다. 3~4차년도에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주요 인물은 ‘이만부’, ‘이익’, ‘한원진’, ‘안정복’, ‘정약용’, ‘이정직’이었으며, 연구성과로 게재된 논문은 총 5편이었다.
    ❏ 이들 인물의 양명학 비판 내용과 특징은 분량이 방대하여 첨부하는 《붙임 파일: 「결과보고서」p.25~28》로 대신한다.
    ❏ 한편, 일본 양명학자들이 출현하게 되는 배경과, 이들로부터 메이지유신이 성공하기까지의 과정에서 나타난 양명학의 역할과 위상을 탐색하였다. 무엇보다 일본 메이지 유신의 일등 공신이자 삼걸 중의 하나인 ‘사이고 다카모리’의 양명학 정신과, 일본 현지 지성인들이 ‘사이고’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천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사이고’의 征韓論이 결부되어 있고, 일본에서는 좌·우익의 정치 성향과 결부시킨 평가가 잔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 예컨대 일본 메이지 유신의 일등 공신이자 三傑의 하나인 ‘사이고 다카모리’의 양명학 정신을 연구함에 있어, 일본 현지에서조차 ‘사이고’에 대한 평가가 좌·우익으로 나뉘어 있는바, 우리 연구는 좀 더 객관성을 잃지 않고 균형감각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이에 최남선이 『소년』지에 남긴 「王學 提唱」이라는 표제어의 장문과, 박은식이 장지연에게 보낸 편지 (「與韋庵書」) 속에 담긴 내용들에 대해서도 탐색해보았다. (뿐만 아니라, 박은식이 히가시 케이지(東敬治)에게 보낸 글(「再與日本哲學士陽明學會主幹東敬治書」에서도 양명학의 현실적 실효성과 가치를 탐색하였다.
    ❏ 끝으로, 일본 양명학자가 출현하는 배경과 원인 역시 『대학』 해석에 대한 異見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간파, ‘나카에 토쥬’로부터 ‘사토 잇사이’에 이르기까지 『대학』에 관한 경학관을 중점적으로 연구하였다. 근대기 일본에서는 공맹의 『四書』나 주자의 『四書集註』보다, 왕수인의 『전습록』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아냈고, 실재 우리나라 퇴계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후지와라 세이카’조차 주자학보다 양명학을 더 선양하였음을 밝혀냈다.
    ❏ 이후, ‘미와 싯사이’는 ‘나카에 토쥬’와 ‘구마자와 반잔’ 이후 퇴색되었던 경학을 중흥시키면서도, 주자학의 『대학장구』보다 『전습록』을 강학하며, 『표주전습록』등의 저서를 남기기도 하였다. 특히 우리나라 문묘(성균관 및 향교)에서는 『사서집주』와 『근사록』 등만을 수학하였으나, 일본에서는 『전습록』이 커리큘럼에 있는 등, 현실 사회의 개혁성을 수반하는 데에 있어 양명학이 사상적 근원 역할을 자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 연구성과
    ❏ 우리 연구진은 본 연구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을 통하여 이미 총 13편 - 1차년도: 4편 / 2차년도: 4편 / 3차년도: 5편 - 의 연구논문을 학술지에 게재하였으며, 향후 『연구총서(1)(2)』 2권을 발간할 예정이다. (「결과보고서」: p.32~34 참조)
    ❏ 한편, 본 연구과제를 수행하는 도중, 연구자들 개별적으로 「논문 : 9편」과 『저·역서 : 3권』의 파생된 연구성과를 창출하였다. (「결과보고서」: p.33~34 참조)
  • 영문
  • ■ Research summary
    ① In the first year(2018.07~2019.06)
    ❏ Originally revealed in the Research Plan, five out of 18 Confucian scholars who severely criticized Yang-Ming Studies in Joseon were selected, and 『A list of their Yang-Ming Studies critical literature』 was made, and a simple "summary" was written.
    ❏ In addition, the contents of the literature were 'translated' and the critical logic was analyzed, and after the presentation → verification stage at the academic conference, they were posted and published in the academic journal. In the first year, the main subjects of the study were Kim Se-pil, Park Sang, Lee Hwang, Yoo Hee-chun, and Yoo Seong-ryong, and a total of four papers were published as research results.
    ❏ The contents and characteristics of the criticism of Yang-Ming Studies of these characters are vast, and the "Attachment File: Results Report" p.11~14"
    ❏ On the other hand, in order to reveal the existence and substance of Japanese Yang-Ming Studies, we visited the historical sites of Japanese Yang-Ming Studies according to the original “Research Plan”, and is producing a related 『A book of explanations』.
    ❏ The genealogy of Japanese quantum science analyzed by Inoue Tetsuchiro and his student Takase Takejiro proved its validity, and the genealogy of modern Japanese quantum science was limited to Sato Isai[佐藤一斎] → Sakuma Shozan[佐久間象山] → Yoshida Shoin [吉田松陰] → Saigo Takamori[西郷隆盛].
    ❏ Meanwhile, we visited Nishogaksa University(二松學舍), which was opened in Japan with the idea of building Yang-Ming Studies, and investigated how the spirit of Yang-Ming Studies in Mishima Chushu[三島中洲] played a role in modernizing Japan.

    ② In the Second year(2019.07~2020.06)
    ❏ In accordance with the original order of the “Research Plan”, six out of the 18 Confucian scholars who severely criticized Yang-Ming Studies in Joseon were selected, and 『A list of their Yang-Ming Studies critical literature』 was made, and a simple "summary" was written.
    ❏ And the contents of the literature were 'translated' and the critical logic was analyzed, and after the presentation → verification stage at the academic conference, we were posted and published in the academic journal. The main subjects of the study in the Second year were Yoon Geun-soo, Hong Yeo-ha, Park Se-chae, Lee Min-seo, Seo Jong-tae, and Song Jing-eun, and a total of four papers were published as research results.
    ❏ The contents and characteristics of these characters' criticisms of Yang-Ming Studies are replaced by "Attachment File: Results Report" p.18~21", which is attached in a large amount.
    ❏ On the other hand, we visited historical sites related to "Oshio Chusai" which is known as the representative figure of Japanese Yang-Ming Studies, and revealed his biological tendency based on the literature. In the end, his reform in Japan was based on the "Chiyangji(致良知)" advocated by Yang-Ming Studies. The five major theories shown in the works 『洗心洞箚記』「自述」 of Oshio Chusai analyzed: the Taehe[太虛], Chiyangji[致良知], Change in temperament, The spirit of life and death as one, and The spirit of practice to remove falsehood.
    ❏ Later, our researchers visited "Ido-gawa-cho," the hometown of "Nakae Toju," which is praised as a Japanese royal monk, to create a genealogy of Japanese Yang-Ming Studies and find out the process of promoting Yang-Ming Studies. And in the third year, the Nakae Toju Memorial Hall planned to hold an international academic conference under the theme of "The Origin and Creation of Yang-Ming Studies in Korea and Japan," But it was canceled due to COVID-19.

    ③ In the Third-Forth year(2020.07~2021.12)
    ❏ In accordance with the original order of the Research Plan, six out of the 18 Confucian scholars who severely criticized Yang-Ming Studies in Joseon were selected, and a list of their Yang-Ming Studies critical literature was made, and a simple "summary" was written.
    ❏ In addition, the contents of the literature were 'translated' and the critical logic was analyzed, and after the presentation → verification stage at the academic conference, we were posted and published in the academic, journal. In the third and fourth years, the main subjects of the study were "Lee Man-bu", "Lee Eik", "Han Won-jin", "An Jung-bok", "Jeong Yak-yong" and "Lee Jeong-jik" and a total of five papers were published as research results.
    ❏ The contents and characteristics of these characters' criticisms of Yang-Ming Studies are replaced by "Attachment File: Results Report" p.25~28", which is attached in a large amount.
    ❏ On the other hand, we explored the background of the emergence of Japanese Yang-Ming scholars, and the role and status of Yang-Ming Studies in the process of successful Meiji Restoration. Above all, we should think about the spirit of Yang-Ming Studies of "Saigo Takamori," one of the top contributors to the Meiji Restoration in Japan, and the perspective of local Japanese intellectuals looking at "Saigo." The reason is that the Korean theory of "Saigo" is linked, and in Japan, there is an evaluation that is linked to the political tendency of the left and right sides.
    ❏ For example, in studying the spirit of Yang-Ming Studies of "Saigo Takamori," one of the top contributors to the Meiji Restoration in Japan, the evaluation of "Saigo" is divided into left and right, so our study tried to maintain a sense of balance without losing more objectivity. Accordingly, Accordingly, Choi Nam-seon's long title of 「王學提唱」 in 『Boys(少年)』 and Park Eun-sik's letter to Jang Ji-yeon 「與韋庵書」 were explored (not only that, Park Eun-sik's writing to Higashi Keiji 「再與日本哲學士陽明學會主幹東敬治書」 also explored the practical value of Yang-Ming Studies.
    ❏ Finally, the background and cause of the appearance of Japanese ambivalence scholars also originated from the interpretation of 『大學』 and the study focused on the view of 『大學』 from "Nakae Toju" to "Sato Issai" In modern Japan, it was found that he was more interested in Wang Su-in's 『Jeonseuprok[傳習錄]』 than Confucius and Mencius's 『Four Books(四書)』 or Zhu-zi(朱子)'s, and even Fujiwara Seika, who was actually influenced by Toe-gye(退溪) in Korea, showed that Yang-Ming Studies was better than the doctrines of Zhu-zi.
    ❏ then, Miwa Sitsai has revived learning from the classics(經學), which had faded after "Nakae Toju" and "Kumazawa Banzan," while lecturing on 『Jeonseuprok[傳習錄]』 rather than zhu-zi’s 『大學』, and left books such as 『Pyoju Jeonseuprok』. In particular, in Korean a Confucian shrine(Sungkyunkwan and Hyanggyo), only 『Sishujizhu(四書集注』 and 『Jinsiliu(近思錄)』 were studied, but in Japan, 『Jeonseuprok[傳習錄]』 was in the curriculum, and Yang-Ming Studies seems to have played a role as an ideological source in accompanying the reform of real society.


    ■ research achievement
    ❏ Through the process of conducting this research project, our researchers have already published a total of 13 research papers in the journal, 1st year: 4th / 2nd year: 4th / 3rd year: 5th, and will publish 2 books of 『Research General Books (1), (2)』 in the future. (Refer to "Result Report" p.32-34)
    ❏ And while carrying out this research project, researchers individually created derived research results in "Research paper: 9" and "Written and Transcript: 3 Books." (Refer to "Result Report" p.33-34)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1. 연구목적
    ❏ 우리 연구는 동아시아의 근대화 과정에서 작동되었던 사상적·철리적 사고의 흐름을 ‘陽明學’이라는 학문영역에 초점을 두고 규명하는 데에 있다. ‘양명학’이라는 학문 사조는 당시 한국과 일본에서도 주목받지 못했던 사상이었으나, 韓·日 양국의 ‘근대화’를 가져오는 데에는 사뭇 다른 영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 따라서 우리 연구의 문제의식은 첫째 : 조선에 과연 양명학이 존재하였는가? 만약 존재하였다면 이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우리 연구진은 이에 대한 해답으로 조선에서 양명학을 비판했던 인물들을 발굴하고, 이들의 문헌에서 양명학 비판 내용을 일일이 찾아내기로 하였다. 이처럼 양명학을 비판했던 내용이 존재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양명학이 조선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둘째 : 그렇다면 조선의 유자들이 양명학을 비판했던 논리는 무엇이었는가? 단순히 정치적 비판이었는지, 아니면 억불숭유 정책 일환으로서 “陽明學은 禪學이다”라는 프레임에서 시행된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진정 학술적으로 치밀한 분석이 수반되어 비판되었는지를 분석해내는 데에 있었다. 셋째 : 근대화 시기, 조선의 학계는 어떠했으며, 또 일본에서의 사상계 흐름은 어떠했는지를 찾아보는 데에 있다. 이 과정에서 양국의 지성인이나 관료의 성향을 분석하고, 일본이 근대화를 빨리 수용하였다는 전제 하에 그들에게 양명학이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는지를 탬색해보도자 하는 것이었다. 넷째 : 이러한 일본의 양명학자들이 자유로우면서도 시의에 적절한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이었는지, 그 원인과 배경을 경학관으로부터 접근해보자는 것이었다. 똑같은 󰡔朱子集註󰡕를 대하더라도 주석의 양상이 어떠한 차이점을 보이냐에 따라 그 반향은 상당히 다르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전해석이 현실 사회에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양명학의 프리즘을 통해 찾아보고자 하였다. 결국, 한국(조선)과 일본의 사회와 사상계에 있어, 양명학이 한국과 일본의 역사와 지역적 한계를 뚫고 어떤 역할과 기능을 했었는지에 대한 종합적 결론을 도출해내는 데에 귀결점이 있다.

    2. 연구추진 내용 및 성과
    ❏ 우리 연구진은 〈제1 클러스터〉와 〈제2 클러스터〉로 팀을 나누어 연구를 추진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두 팀이 양분되어 연구를 수행한 것은 아니다. 다만, 연구진의 전문성을 확보하고, 연구성과 효율의 극대화를 위한 방법이었다.
    ❏ 우선, 〈제1 클러스터〉는 조선의 유자 중, 양명학을 극렬 비판했던 인물 18인을 상정하고, 이들의 비판 문헌 목록과 해제집을 제작하였으며, 그 비판 문헌을 국역하고 세미나 과정을 거쳐 “조선에서 양명학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비판되었는지, 그 비판 논리를 철저하게 문헌에 근거하여 분석”하였다.
    ❏ 분석한 결과는 「논문」 형식으로 만들어, 관련 학회의 학술대회를 통해 발표·검증 단계를 거쳤으며, 이후 한국연구재단 등재 학술지에 총 8편의 논문을 게재하였다. 특히, 이 과정에서 우리는 ‘연구보조원’의 연구력 진작을 도모하고 후속세대의 학문 역량 강화를 위해, 이들에게 ‘제1저자’의 권위를 부여하였으며, ‘공동연구원’과 ‘연구책임자’가 수정·보완의 임무를 맡아 교신저자로 활동했다.
    ❏〈제2 클러스터〉는 주로 ‘일본 양명학’을 연구하는 데에 주력했다. 우선, 일본 근대화의 상징이라 할 도쿄와 오사카, 그리고 일본 유학의 본산이라 할 교토를 방문하여 일본 양명학이 근대화 과정에서 어떤 역할과 위상을 가졌는지, 이에 대한 유적 조사를 단행하였다. 또한, 일본의 왕수인으로 불리는 ‘나카에 토쥬’의 유적지와 기념괌을 방문하여 일본 지성인들이 양명학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였으며, 양명학을 정치에 이용한 배경과 과정, 그리고 양명학과 일본 근대화의 함수관계를 분석하였다.
    ❏ 이 결과로, 우리 연구진은 일본 양명학과 관련한 유적 탐방 기록을 『도록(해설집)』으로 제작 중에 있으며, 일본 양명학의 대표 인물들의 사상에 관한 연구논문 총 5편을 이미 발표·게재하였다. 따라서 본 연구과제를 통하여 旣 발표한 연구논문은 총 13편이며, 추후 이를 종합하여 『韓·日 陽明學』에 관한 연구총서 2권을 곧 출간할 계획이다.
    ❏ 아울러, 우리 연구진은 본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연구성과 또한 상당하다. 우리 연구진 전원은 총 9편의 연구논문과 3편의 저·역서를 출간하였다. (상세한 내용은 「결과보고서」p.32~34를 참조)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1. 연구결과 활용계획
    ① 한국유학 연구에서의 가장 근본적인 접근 방안을 제언 : 그간 우리나라의 한국유학 연구자들은 1차 자료인 『文獻』 연구보다, 선행연구자들의 논문과 저서에 기초하여 가설과 추론을 덧붙이는 형식이 많았다. 이는 역설적으로 앞선 연구의 논거가 부실하거나 근거가 미약할 경우, 후속 연구결과마저 무너지고 마는 도미노 현상을 초래하게 되었다.
    ❏ 우리의 이번 연구는 무엇보다 조선 유자들의 立論 근거였던 문헌의 내용을 底本으로 하여 그들의 철학이 무엇이고, 양명학을 비판했던 논리와 특징은 어떠했는가를 확인하는 방법이었다. 따라서 우리 연구는 우선 ‘결과’보다 ‘과정’과 ‘접근방법’에서의 치밀했음을 자부한다. 따라서 한국유학이나 이 방면의 문헌 연구를 희망하는 후속세대들에게 좀 더 치밀한 연구자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자임한다.
    ❏ 특히, 우리 연구진은 조선의 유자들이 양명학을 비판했던 문헌을 그의 문집 속에서 일일이 찾아내어 ‘국역’하고, 연구 자료의 뒷부분에 ‘이미지(원문)’를 제공해 놓음으로써, 고전번역을 통한 한국사상을 이해하는 데에 일조할 것으로 본다. 또한, 우리 연구진의 연구성과 및 파생된 연구결과들 – 「논문」·『저서』·『자료집』 – 은 한국양명학과 일본양명학에 관한 자료를 거의 총망라해놓았기 때문에, 이 분야를 연구하거나 혹은 관심있는 연구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료집(해설집)』의 역할을 제공할 것이다.
    ② ‘연구’가 ‘교육’으로 환원 : 우리의 연구는 이미 연차별 연구결과를 〈학부 전공〉과 〈대학원 석·박사과정〉 수업에 바로 적용함으로써, ‘연구’가 곧 ‘교육’으로 선순환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③ 우리 연구결과물은 1차 문헌(원전)에 관한 「해제」·「국역」·「도록」·「유적에 대한 해설」 등이 첨기되어 있는 만큼, ‘한·일 양명학’에 관한 연구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不斷하게 교육으로 환원될 수 있을 것이다. ❏ 뿐만이 아니다. 우리 연구결과는 한국유학사 또는 한국철학 강좌를 교육하는 각종 강좌에 유효 적절히 활용·가능하다. 그 이유는 기존의 한국유학사와 한국철학사를 다룬 저서가 주로 주자학 중심의 사적 고찰이나 사상적 특징을 主내용으로 구성되어 왔기 때문에, 기껏해야 주자학 중심의 ‘性理說’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 연구결과물을 통하여 한국유학 사상사에서 엄연히 양명학의 존재 가치가 입증됐고, 또 조선 주자학자들이 양명학을 배척했던 입장과 그 비판 논리에 맞선 양명학 관점에서의 반론 등을 공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④ 한국 양명학의 대중화 : 우리 연구결과는 대학의 학부 전공이나 대학원 수업에만 머무르지 않고, 전국의 향교와 서원에 홍보하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연구책임자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원하고 성균관이 주관하는 유교 아카데미 사업에 관여하고 있는바, 전국의 향교와 서원의 유림들 및 유림지도자들에게 한국유학의 특징 중 하나로 한국양명학의 존재의미·가치·특징 그리고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양상 등을 주제로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 본 연구결과를 이렇게 활용하는 것은 단순히 한국 양명학에 관한 저변 확대에만 머무르지 않으며, 우리나라의 유학 사상 전체를 새롭게 조망해보는 기회의 장으로 만들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유교철학과 전통 유교문화의 대중화를 넘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세대 간 소통 및 학문적 공감대를 형성하는데에 기여하고 있다.
    2. 기대효과
    ①『한국양명학 연구총서』 발간 : 우리의 최종 연구결과물은 곧 『韓·日 陽明學 硏究 叢書(1)(2)』로 발간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는 한국과 일본의 양명학 연구 토대를 마련해줄 기초자료가 되어줄 것으로 전망된다. 그간 한국유학에 있어 주자학 중심의 획일적·폐쇄적 학풍을 지양하고, 닫혀 있던 한국유학 학계의 문을 개방시켜 줌과 동시에, 다양한 한국유학 사상계의 특징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한다.
    ②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융합한 후속 연구 기대 : 일반적으로 주자학이나 양명학 등 유학에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이상향은 인욕을 줄이고 天理를 보존하여 내성외왕을 목표로 하는 수기치인을 이상향으로 삼았다. 그러나 본 연구를 통하여 양명학에서의 욕망에 대한 긍정과 근대화 과정에서의 경제논리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인문과 사회과학의 융복합 후속 연구를 게대할 수 있다.
    ③ 일제강점기 때 ‘강화도 보부상’과 ‘양명학 정신’의 함수관계 연구 : 일제강점기 시절, 대부분의 조선인은 일본에 채무를 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양명학의 본산이라 할 강화(보부상)에겐 채무보다 남다른 경제관을 갖고 있었다. 이들의 경제철학과 양명학의 함수관계에 대해서도 후속연구를 기대한다.
  • 색인어
  • 『四書』, 『傳習錄』, 『大學章句』, 주자학, 양명학, 성즉리, 심즉리, 격물치지, 치양지, 양지, 한국양명학, 정제두, 선학(禪學), 일본양명학, 나카에 토쥬(中江藤樹), 근대화, 양명학비판 문헌, 김세필, 박상, 이황, 유성룡, 유희춘, 윤근수, 홍여하, 박세채, 이민서, 서종채, 송치은, 이만부, 이익, 안정복, 이정직,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나카에 도쥬(中江藤樹), 구마자와 반잔(熊澤蕃山), 사이코 다카모리(西郷隆盛), 미와 싯사이(三輪執齋) 사토 잇사이(佐藤一齋), 오시오 츄사이(大塩中齋), 이노우에 데쓰지로(井上哲次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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