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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경상남도물산공진회(慶尙南道物産共進會)> 연구
A study on ‘Gyeongsangnam-do Mulsan Gongjinhoe’ in 1914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시간강사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8S1A5B5A07073282
선정년도 2018 년
연구기간 1 년 (2018년 09월 01일 ~ 2019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김유경
연구수행기관 부산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의 목적은 1914년 부산에서 개최된 <경상남도물산공진회(慶尙南道物産共進會)>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서구에서는 박람회가 국가적 제전으로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이에 영향을 받은 일본도 내국권업박람회(內國勸業博覽會)를 시작으로 ‘박람회 시대’를 이어갔다. 그리고 조선에서도 1906년 한일박람회(韓日博覽會)를 부산에서 개최한 이래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수차례의 박람회와 공진회가 개최되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개최된 박람회나 공진회에 관한 연구는 시정(始政) 5년을 기념하여 조선총독부가 1915년에 주최한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와 시정 20년을 기념하여 1929년에 주최한 <조선박람회(朝鮮博覽會)>에 집중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특히 <조선물산공진회>의 경우는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지배 이전과 이후의 변화를 대조적으로 강조하고 식민통치의 미화에 목표를 두면서 시정사업을 선전하기 위해 개최한 것으로, 관련 자료가 풍부하고 그 역사적 상징성으로 인해 가장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되어 있다. 그러나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이전 이미 지방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물산공진회가 개최되었는데 대구의 <경상북도물산공진회(慶尙北道物産共進會, 1913)>, 진남포의 <서조선물산공진회(西朝鮮物産共進會, 1913)>, 부산의 <경상남도물산공진회(慶尙南道物産共進會, 1914)>, 전주의 <전라북도물산공진회(全羅北道物産共進會, 1914)> 등이 그것이다.
    ‘공진회’라는 검색어로 기초학문자료센타(KRM)에서 제공하는 선행연구를 조사해 보면,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에 관한 연구이거나 1920년대 이후 각 지역의 지역사나 상업사 측면에서의 연구정도가 보고된 바 있으며 1910년대 지방에서 열린 박람회나 공진회를 대상으로 한 연구는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최근 한국연구재단의 토대기초사업을 통해 일제강점기 《부산일보》 기사의 DB작업이 완료되었고, 추출된 목록을 통해 공진회에 대한 단편적인 기사 내용을 확인할 수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본 연구의 고찰대상인 <경상남도물산공진회>에 대한 기사 내용은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부산일보》 기사DB는 1914년 12월부터 원문기사를 제공하고 있어 같은 해 11월에 개최된 <경상남도물산공진회>에 대한 신문기사가 없기 때문이다. 이후 1910년대 지방 물산공진회에 대해 정리한 석사학위논문이 제출되기는 하였으나 개략적인 소개에 머물고 있어 일제강점기에 지역에서 개최된 물산공진회에 대한 연구가 더욱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조선에서 개최된 박람회나 공진회는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 지배전략의 하나이기 때문에 경성에서 개최된 <조선물산박람회>뿐만 아니라 경성 외 지역에서 개최된 박람회나 공진회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이에 본 연구에서 지역에서 개최된 물산공진회에 대한 연구의 하나로 1914년 부산에서 개최된 <경상남도물산공진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부산에서 개최된 공진회부터 고찰하고자 하는 이유는 ‘부산’이라는 곳의 역사적 특수성과 함께 확인 가능한 신문 및 관련 기록 자료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또한 1914년 <경상남도물산공진회>는 부산부(釜山府)에서 민간협찬회의 후원을 받아 개최하였는데 공진회 개회 다음해인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는 『第1回慶尙南道物産共進會事務報告』를 생산하였고, 이 기록물이 현존하기에 신문기사와 더불어 공진회 관련 세부사항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므로 본 연구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지방에서 개최된 물산공진회에 대한 연구의 하나로 1914년 부산에서 개최된 <경상남도물산공진회>에 대하여 그 결과보고서인 『第1回慶尙南道物産共進會事務報告』와 부산에서 발간된 일본어신문인 《조선시보》 기사를 통해 1914년 <경상남도물산공진회>의 실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 기대효과
  • 1910년대는 일반적으로 ‘무단통치기’라고 불리며 정치적, 사회적으로는 암흑기로 서술되고 있다. 정치 영역에서 ‘압살’이라는 정책을 취한 조선총독부는 문화 영역에서는 ‘순치’의 노선을 채택하고 이를 강력히 추진하였는데 이에 따라 백일장, 운동회, 영화 관람 등 각종 문화 행사가 넘쳐났다. 그 일환으로 중앙은 물론이고 지역에서도 여러 종류의 품평회, 공진회, 박람회가 활발히 개최되었다. 그 중 본 연구에서는 1914년 부산에서 개최된 <경상남도물산공진회>의 실태에 대해 『第1回慶尙南道物産共進會事務報告』와 《조선시보》 기사를 통해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하고자 한다.
    본 연구를 통해 1914년 <경상남도물산공진회>에 대한 종합적인 정보가 제공되면 다음과 같은 연구 성과 및 연계 연구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한다.
    먼저, 일제 강점기 상업, 경제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한 기초 자료가 된다.
    1914년 부산에서 개최된 경상남도물산공진회 후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1915년 경성에서 조선공진회가 개최되었으므로 두 공진회의 전시 전략이나 출품 현황, 공진회에 표상된 조선과 일본의 물산 정책, 지방 주도의 공진회와 총독부 주도 공진회의 차이, 공진회 이후 지방 및 경성의 분위기 등 다방면에 걸쳐 비교 연구가 가능하다. 또한 공진회 축하 광고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서 공진회에 투영된 당시의 상업적, 경제적 흐름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다.

    다음으로 일제강점기 해양, 수산업 연구를 위한 자료가 될 수 있다.
    경상남도물산공진회를 계기로 해양도시 부산을 재조명할 수 있는 다양한 해양, 수산 관련 기사가 시리즈로 편성되어 있어 그 내용을 정리하여 제공하면 이 시기에 부족한 해양, 수산 관련 자료로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 특히 1923년 부산에서 개최된 조선수산공진회(朝鮮水産共進會), 1928년 부산에서 개최된 조선수산용품전람회(朝鮮水産用品展覽會)와의 비교 연구가 가능할 것이며 각 공진회 및 전람회에 대한 기초 자료로도 활용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일제시기 지역사 연구를 위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부산은 조선왕조시대부터 왜관이 형성되어 한, 일 외교의 거점이 되었던 곳이며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에는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연결하는 연락선이 개설되는 등 일제 강점기 연구에 있어서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지역이다. 그러므로 부산에서 개최된 <경상남도물산공진회>에 대한 고찰을 통해 기존의 경성 중심 연구에 가려진 부산의 위상이나 부산 지역 관련 정보에 대해 재조명할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 연구요약
  • 본 연구 과제는 1914년 부산에서 개최된 <경상남도물산공진회>에 대하여 연구하는 것으로, 공진회 보고서인 『第1回慶尙南道物産共進會事務報告』과 일제강점기에 부산에서 발행된 일본어인 《조선시보》를 자료로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먼저, 『第1回慶尙南道物産共進會事務報告』를 통하여 <경상남도물산공진회>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하고자 한다.
    1914년 <경상남도물산공진회>는 1915년 조선물산박람회가 조선총독부 주최로 개최된 것과 달리 민간협찬회의 지원을 받아 부산부(釜山府)에서 개최한 것이다. 그러나 공진회 다음해인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는 『第1回慶尙南道物産共進會事務報告』를 발간하였는데 17장, 표지 및 사진을 포함하여 총 464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 자료를 통해 <경상남도물산공진회>에 대한 규칙 및 규정, 업무분장, 출품계획, 심사방침, 제(諸)의례, 광고, 관람자 주의사항 및 관람인원, 수위(守衛) 및 간수(看守) 채용, 각종 집회 및 여흥, 기념품, 수지(收支)결산을 비롯하여 <경상남도물산공진회>에 도움을 준 협찬회, 부군(府郡)협찬회, 부군(府郡)협찬회연합회, 부산부(釜山府)협찬회, 부산부(釜山府)협찬회 간부 등을 상세하게 기록으로 남겨 공과(功課)를 분명하게 남겨 두었다. 목차 내용만 보아도 조선총독부가 <경상남도물산공진회>를 단순히 지역에서 개최된 작은 행사로 가볍게 여기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第1回慶尙南道物産共進會事務報告』는 <경상남도물산공진회>와 관련된 내용을 정리하여 기록한 것이므로 신문 기사로는 알 수 없는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정보를 찾을 수 있는 최적의 자료라고 할 것이다.
    다음으로 <경상남도물산공진회>에 대한 연구 수행을 위한 기록 자료로 일제강점기에 부산에서 발간된 일본어 신문인 《조선시보》를 활용하고자 한다. 《조선시보》의 경우 아직 기사 목록화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아 연구에 활용하기에 어려움은 있으나 1914년 11월부터 신문원문이 남아 있기에 같은 해 11월 1일부터 20일까지 개최된 <경상남도물산공진회>에 대한 기사 내용을 확인가능하다. 주요 자료인 사무보고와는 달리 신문 기사는 <경상남도물산공진회>와 관련된 다양한 기사 내용과 연속 기사, 부산의 모습, 그리고 부산을 중심으로 한 양산, 대구 등 지역 관련 소식까지 담고 있어 1914년 당시의 부산 지역을 이해할 수 있는 적지 않은 정보를 찾아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 그 내용을 조금 소개하면 ‘공진회출품물심사보고’(共進會出品物審査報告) 및 ‘공진회 출품물별견기’(共進會の出品物瞥見記)라는 보고서 형식의 기사를 비롯하여 ‘조선의 수산업’(朝鮮の水産業)이라는 기획 기사를 기재하고 있다. 그리고 공진회에 대한 흥미 유발을 위해 다양한 공연 행사를 실시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소싸움으로 1914년 11월 5일부터 6일까지 이틀에 걸쳐 ‘조선 투우의 유래’(朝鮮鬪牛の由來)라는 기사를 싣기도 하였다. 이처럼 《조선시보》에는 경상남도물산공진회 자체에 대한 사실 기사 및 기획 기사, 인터뷰, 관련 행사, 공진회 축하 광고 등 다양한 자료가 있으므로 이들을 모두 추출하여 내용을 확인하면 1914년 부산에서 개최된 <경상남도물산공진회>에 대한 부가적인 정보까지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지방에서 개최된 공진회에 관한 연구가 미진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관련 기록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설령 자료가 있더라도 근대 초기의 일본어로 표기되어 있고 한문 표현이 많아 난해하기 때문에 연구 자료로 활용하기에 쉽지 않다는 점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구자의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경상남도물산공진회>에 대해 『第1回慶尙南道物産共進會事務報告』를 통해서는 구체적이며 객관적인 내용을 알리고, 《조선시보》를 통해서는 이와 관련된 기획 기사 및 관련 기사들을 추출하고 정리하여 1914년 <경상남도물산공진회>에 대한 체계적이며 종합적인 정보를 제공하고자 한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 과제는 1914년 부산에서 개최된 <경상남도물산공진회>에 대하여 연구하였으며, 공진회 결과를 총독부에 보고한 형식으로 정리한 『第1回慶尙南道物産共進會事務報告』와 당시 부산에서 발행한 신문 중 연구 대상 관련 기사가 남아 있는 《조선시보》를 자료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먼저, 『第1回慶尙南道物産共進會事務報告』를 통하여 <경상남도물산공진회>에 대한 확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14년 <경상남도물산공진회>는 1915년 조선물산박람회가 조선총독부 주최로 개최된 것과 달리 민간협찬회의 지원을 받아 부산부(釜山府)에서 개최한 것이다. 그러나 공진회 다음해인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는 『第1回慶尙南道物産共進會事務報告』를 발간하였는데 17장, 표지 및 사진을 포함하여 총 464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 자료를 통해 <경상남도물산공진회>에 대한 규칙 및 규정, 업무분장, 출품계획, 심사방침, 제(諸)의례, 광고, 관람자 주의사항 및 관람인원, 수위(守衛) 및 간수(看守) 채용, 각종 집회 및 여흥, 기념품, 수지(收支)결산을 비롯하여 <경상남도물산공진회>에 도움을 준 협찬회, 부군(府郡)협찬회, 부군(府郡)협찬회연합회, 부산부(釜山府)협찬회, 부산부(釜山府)협찬회 간부 등을 상세하게 기록으로 남겨 공과(功課)를 분명하게 남겨 두었다. 목차 내용만 보아도 조선총독부가 <경상남도물산공진회>를 단순히 지역에서 개최된 작은 행사로 가볍게 여기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아마도 이 행사를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준비하기 위한 하나의 준비단계로 여겼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며, <경상남도물산공진회>에 대한 연구가 1910년대 조선에서 개최된 물산공진회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로 확대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한편 목차 내용만 개략하여도 <경상남도물산공진회>의 개최 의의나 의도에 대해 짐작할 수 있는데 그 공진회의 보고서에 기재된 인물에 대한 정보나 각 분야별 제출 품목과 심사 내용을 확인해 보면 당시 산업이나 경제, 사회 분야에서 주력했거나 주목했던 것이 무엇인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즉 『第1回慶尙南道物産共進會事務報告』는 <경상남도물산공진회>와 관련된 내용을 정리하여 기록한 것이므로 신문 기사로는 알 수 없는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정보를 찾을 수 있는 최적의 자료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경상남도물산공진회>에 대한 연구 수행을 위한 기록 자료로 일제강점기에 부산에서 발간된 일본어 신문인 《조선시보》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선시보》의 경우 아직 기사 목록화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아 연구에 활용하기에 어려움은 있으나 1914년 11월부터 신문원문이 남아 있기에 같은 해 11월 1일부터 20일까지 개최된 <경상남도물산공진회>에 대한 기사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종이인 신문자료가 오래되어 글자가 불명확하거나 부분 훼손된 지면도 있어 다소 어려움은 있었다. 그러나 신문 기사를 통해 <경상남도물산공진회>와 관련된 다양한 기사 내용과 연속 기사, 부산의 모습, 그리고 부산을 중심으로 한 양산, 대구 등 지역 관련 소식까지 담고 있어 1914년 당시의 부산 지역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추출할 수 있었다. 그 관련 내용을 조금 소개하면 ‘공진회출품물심사보고’(共進會出品物審査報告) 및 ‘공진회 출품물별견기’(共進會の出品物瞥見記)라는 보고서 형식의 기사를 비롯하여 ‘조선의 수산업’(朝鮮の水産業)이라는 기획 기사를 기재하였고, 공진회에 대한 흥미 유발을 위해 다양한 공연 행사를 실시하였으며, 관련 행사 중의 하나로 큰 기사 비중으로 차지하는 것이 소싸움에 관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1914년 11월 5일부터 6일까지 이틀에 걸쳐 ‘조선 투우의 유래’(朝鮮鬪牛の由來)라는 기사를 싣기도 하였다.
    지방에서 개최된 공진회에 관한 연구가 미진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관련 기록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설령 자료가 있더라도 근대 초기의 일본어로 표기되어 있고 한문 표현이 많아 난해하기 때문에 연구 자료로 활용하기에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나 본 연구를 통해 제공하는
    『第1回慶尙南道物産共進會事務報告』와 《조선시보》관련 기사소개를 통해 구체적이며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 영문
  • This study was conducted at the Gyeongsangnam-do Mulsan Gongjinhoe held in Busan in 1914. The results of the Gongjinhoe were compiled in the form of a report to the Governor-General, and Chosunsibo, a newspaper published in Busan at the time, which contained articles related to the study.
    First, the following is the confirmation of the Gyeongsangnam-do Mulsan Gongjinhoe through 1st Report of Gyeongsangnam-do Mulsan Gongjinhoe.
    In 1914, Gyeongsangnam-do Mulsan Gongjinhoe was held by the Busan government with the support of a private association, as opposed to the one hosted by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in 1915. In connection with this, in 1915, the year after the Gongjinhoe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published a report titled 1st Report of Gyeongsangnam-do Mulsan Gongjinhoe and it is made up of 464 pages, including 17 chapters of cover and photos.
    Through this data, the rules and regulations for the Gyeongsangnam-do Mulsan Gongjinhoe the work division, the exhibition plan, the judging policy, the entire rituals related to the event, advertisements, the spectators' attention and the number of visitors, the recruitment of guards and guards, various meetings and entertainments, souvenirs, In addition to accounting for income and expenditures, executives of various sponsorships that contributed to the Gyeongsangnam-do Mulsan Gongjinhoe held a detailed record of their contributions.
    The contents of the table of contents suggest that the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did not take the Gyeongsangnam-do Mulsan Gongjinhoe lightly as a small event held in the region. This is probably because this event was considered as one of the preparatory stages for the preparation of the Chosun Gongjinhoe in 1915. And the research on Gyeongsangnam-do Mulsan Gongjinhoe will show that it can be expanded to a comprehensive study on the Mulsan Gongjinhoe held in the 1910s Japanese colonial period.
    Meanwhile, just looking at the contents of the table of contents, one can guess the intention of holding the Gyeongsangnam-do Mulsan Gongjinhoe. In addition, if you check the information on the figures listed in the report and the items submitted by each sector and the details of the screening, you can estimate what the industry, economy, and society paid attention to at that time.
    That is, 1st Report of Gyeongsangnam-do Mulsan Gongjinhoe is a summary of the contents related to Gyeongsangnam-do Mulsan Gongjinhoe, so it could be confirmed that it is the best resource for finding objective and factual information that is not known in newspaper articles.
    Next, as a record data for conducting the research on Gyeongsangnam-do Mulsan Gongjinhoe, we conducted a survey on the newspaper Chosunsibo published in Busa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lthough Chosunsibo is not used much for research because no database work has been done on the list of articles yet, it was fortunate that the original newspaper from Nov. 1 to 20 of 1914 was still available to confirm the contents of articles related to the Gyeongsangnam-do Mulsan Gongjinhoe.
    It was difficult to understand the contents because the newspaper material was old and the writing was unclear or damaged. However, through newspaper articles, various articles related to the Gyeongsangnam-do Mulsan Gongjinhoe, and related articles such as Yangsan and Daegu centered in Busan were available to extract data that could understand the Busan area of the time in 1914.
    In the related articles, you can find articles in the form of reports such as ‘Review of the entries for the contest’(共進會出品物審査報告) and ‘Comment on exhibit’(共進會の出品物瞥見記). In addition, he wrote a planning article called ‘The Fisheries of Chosun’(朝鮮の水産業), and held various performances and events to attract interest to Gyeongsangnam-do Mulsan Gongjinhoe. One of the major events was the bullfight, which ran a two-day article titled "The Origin of Joseon Bullfighting" from November 5-6, 1914.
    The biggest reason for the lack of research on rigional Gongjinhoe is that, among other things, there is not much relevant records left. Even if there is data, it is not easy to use as research data because it is written in Japanese in the early days of the modern era and is difficult to use because there are many Chinese expressions. However, specific, systematic and comprehensive information can be provided through the introduction of articles related to 1st Report of Gyeongsangnam-do Mulsan Gongjinhoe" and ‘Chosunsibo’ provided through this study.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과제는 1914년 부산에서 개최된 <경상남도물산공진회>에 관한 연구이다.
    먼저 『第1回慶尙南道物産共進會事務報告』로 <경상남도물산공진회>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하였다. 1914년 <경상남도물산공진회>는 민간협찬회의 지원을 받아 부산부에서 개최한 것으로 다음해인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는『第1回慶尙南道物産共進會事務報告』를 발간하였다. 이 자료를 통해 <경상남도물산공진회>에 대한 규칙 및 규정, 업무분장, 출품계획, 심사방침, 제의례, 광고, 관람자 주의사항 및 관람인원, 수위 및 간수 채용, 각종 집회 및 여흥, 기념품, 수지결산을 비롯하여 준 협찬회, 부군협찬회, 부군협찬회연합회, 부산부협찬회, 부산부협찬회 간부 등을 상세하게 기록으로 남겨 공과(功課)를 분명하게 남겨 두었다.
    다음으로《조선시보》를 활용하여 1914년 11월 1일부터 20일까지 개최된 <경상남도물산공진회>에 대한 기사 내용을 확인하였다. 관련하여 ‘공진회출품물심사보고’(共進會出品物審査報告) 및 ‘공진회 출품물별견기’(共進會の出品物瞥見記)라는 보고서 형식의 기사 및 ‘조선의 수산업’(朝鮮の水産業)이라는 기획 기사를 찾을 수 있었고 공진회에 대한 흥미 유발을 위해 다양한 공연 행사를 실시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소싸움으로 1914년 11월 5일부터 6일까지 이틀에 걸쳐 ‘조선 투우의 유래’(朝鮮鬪牛の由來)라는 기사를 싣기도 하였다. 이처럼 《조선시보》에는 경상남도물산공진회에 대한 기사 및 기획 기사, 인터뷰, 관련 행사, 공진회 축하 광고 등 다양한 자료가 있으므로 <경상남도물산공진회>에 대한 부가적인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지방에서 개최된 공진회에 관한 연구가 미진한 가장 큰 이유는 관련 기록 자료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설령 자료가 있어도 근대 초기 일본어로 표기되어 있고 한문 표현이 많아 난해하기 때문에 연구 자료로 활용하기 쉽지 않다는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 연구 과제를 통해 『第1回慶尙南道物産共進會事務報告』에서는 구체적이며 객관적인 내용을 알고, 《조선시보》에서는 관련 기획기사 및 단편 기사들을 정리하여 1914년 <경상남도물산공진회>에 대한 체계적이며 종합적인 정보를 제공하고자 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1910년대는 일반적으로 ‘무단통치기’라고 불리며 정치적, 사회적으로는 암흑기로 서술되고 있다. 정치 영역에서 ‘압살’이라는 정책을 취한 조선총독부는 문화 영역에서는 ‘순치’의 노선을 채택하고 이를 강력히 추진하였는데 이에 따라 백일장, 운동회, 영화 관람 등 각종 문화 행사가 넘쳐났다. 그 일환으로 중앙은 물론이고 지역에서도 여러 종류의 품평회, 공진회, 박람회가 활발히 개최되었다. 그 중 본 연구에서는 1914년 부산에서 개최된 <경상남도물산공진회>의 실태에 대해 『第1回慶尙南道物産共進會事務報告』와 《조선시보》 기사를 통해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하고자 한다.
    먼저, 일제 강점기 상업, 경제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한 기초 자료가 된다. 1914년 부산에서 개최된 경상남도물산공진회 후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1915년 경성에서 조선공진회가 개최되었으므로 두 공진회의 전시 전략이나 출품 현황, 공진회에 표상된 조선과 일본의 물산 정책, 지방 주도의 공진회와 총독부 주도 공진회의 차이, 공진회 이후 지방 및 경성의 분위기 등 다방면에 걸쳐 비교 연구가 가능하다. 또한 공진회 축하 광고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서 공진회에 투영된 당시의 상업적, 경제적 흐름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다.
    다음으로 일제강점기 해양, 수산업 연구를 위한 자료가 될 수 있다. 경상남도물산공진회를 계기로 해양도시 부산을 재조명할 수 있는 다양한 해양, 수산 관련 기사가 시리즈로 편성되어 있어 그 내용을 정리하여 제공하면 이 시기에 부족한 해양, 수산 관련 자료로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 특히 1923년 부산에서 개최된 조선수산공진회(朝鮮水産共進會), 1928년 부산에서 개최된 조선수산용품전람회(朝鮮水産用品展覽會)와의 비교 연구가 가능할 것이며 각 공진회 및 전람회에 대한 기초 자료로도 활용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일제시기 지역사 연구를 위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부산은 조선왕조시대부터 왜관이 형성되어 한, 일 외교의 거점이 되었던 곳이며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에는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연결하는 연락선이 개설되는 등 일제 강점기 연구에 있어서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지역이다. 그러므로 부산에서 개최된 <경상남도물산공진회>에 대한 고찰을 통해 기존의 경성 중심 연구에 가려진 부산의 위상이나 부산 지역 관련 정보에 대해 재조명할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 색인어
  • 일제강점기, 경상남도물산공진회, 『제1회경상남도물산공진회사무 보고』, 조선시보, 부산연구, 지역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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