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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상 시문학 연구
A Study on the Poetry by Lee Il-sang(李一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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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명 시간강사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8S1A5B5A07073298
선정년도 2018 년
연구기간 1 년 (2018년 09월 01일 ~ 2019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이현지
연구수행기관 동국대학교 WISE& #40;와이즈& #41;캠퍼스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조선조에서 문장을 잘하는 집안으로 반드시 연안 이씨를 으뜸으로 꼽는다. 李廷龜와 그의 아들 李明漢과 李昭漢이 문명이 높아 三蘇에 비견되었거니와 이명한과 이소한의 아들 一相, 嘉相, 萬相, 有相, 殷相, 弘相, 端相, 翊相 등이 모두 걸출하여 이들의 시선집『李氏聯珠集』이 세간에 회자되었다. 八相 중 17살에 문과에 급제하는 바람에 복이 분에 넘쳐 과도한 재앙이 닥쳐올까 걱정하게 한 李一相(1612-1666)의 문재는 문형의 자리에 오른 것으로 증명이 된다. 부자가 대제학이 된 것만 해도 드문 일인데, 이일상이 대제학이 됨으로써 삼대가 문풍을 주도했다.
    당대 문단의 제일인자로 평가받은 이일상은 『靑湖遺稿』에 222제 265수를 남기고 있으나 문재와 명성에 비해 학계의 관심은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이일상에 대해서는『李氏聯珠集』에 나타난 이정구 가계의 문학경향에 대한 논의와 이정구 가계의 문학 전승이라는 관점에서 李海朝 문학의 영향 관계를 논한 연구에서 언급되었을 뿐 그의 문학에 대한 연구는 아직 이뤄진 바 없다. 본 연구는 이일상 문학의 특징과 의의를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일상은 병자호란에 조모, 모친, 아내를 다 잃고 척화신으로서 유배되었을 때 상실감과 절망감으로 목숨을 가볍게 여기기도 했다. “겉에 가지와 잎이 달렸지만 속은 벌레가 먹어 생기를 다 잃은 고목과 같은 상태”로 심양에서 억류 생활을 하는 연속된 불행 속에서 그가 의지한 것은 ‘시’이다. 병자호란 후, 인질로 심양에 억류된 고관대신의 자제들 중 개인적 정감을 시로 표현한 이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이일상이 남긴 시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이일상의 시문학을 연구하는 다른 이유는 문단의 제일인자이자 ‘駱東禊’의 주축이기 때문이다. 낙동계는 한성 동부에 거주하는 문인들의 모임이다. 이명한을 중심으로 결성되었지만, 결성된 지 2년 만에 죽은 이명한을 대신해 이일상이 부친의 역할을 대행하게 된다. 낙동계 구성원들과의 교유는 후대로 이어지는데, 영조조 ‘東村派’와 맥이 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일상을 중심으로 한 낙동계 구성원들의 교유시를 통해 조선후기 인적 네트워크를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일상의 시문학을 연구하는 또 다른 이유는 조부 이정구, 부친 이명한과 같은 길로 연행하면서 이일상이 선조의 연행시 구절을 차용해 동질감 혹은 이질감을 표현하는가 하면 차운시라는 형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행시 40수 중 삼사들과의 차운시가 26수이다. 본 연구는17세기 연행록 연구가 미진한 상황에서17세기 연행록의 특징과 의의를 도출하는 데 기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 기대효과
  • 그동안 연구대상으로 논의되지 못한 이일상 시의 특징과 의의를 구명하는 본 연구는 17세기 문학 교육과 문학 연구에 있어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첫째 병자호란 이후 고관대신의 자제들이 인질로 심양에 억류되었지만 이일상 외에 시문을 남긴 이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처지에서 이일상이 인질 생활의 개인적 정감을 표현한 시는 국난의 상황과 특성, 그 영향 등에 관한 교육에 자료적 가치가 크다.
    둘째 병자호란으로 이일상은 조모, 모친, 아내를 다 잃었고, 자국에서도 타국에서도 억류 생활을 해야 했으며, 척화신의 입장이지만 연행의 임무도 완수해야 했다. 이 같은 상실, 좌절, 울분으로 감당하기 힘든 고통 속에서 그를 지탱해 준 것은 바로 ‘시’이다. 이일상은 불가해한 삶에서 고뇌로 얻은 시를 과거에서 현재로 시간의 흐름에 띄워 보냈다. 이러한 이일상의 한시가 학생들에게 가닿을 수 있다면, 학생들은 그의 시를 읽고 삶을 해독하는 단서 하나를 얻을 것이다. 또한 공감하고 위로받을 것이다.
    셋째 이일상은 조선 후기 인적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다. 이일상이 주축이 된 ‘駱東禊’ 구성원들의 교유가 당대에 그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낙동계는 그 구성원의 후손이 핵심 구성원인 영조조의 ‘東村派’와 맥이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본 연구는 영조조 동촌파의 연원을 밝힌다는 의의가 있다.
    마지막으로 17세기 연행록 연구가 미진한 상황에서 본 연구는 17세기 연행록의 특징과 의의를 도출하는 데 기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본 연구는 방법적인 측면에서 차운시의 비교를 통해 연행 체험의 내용, 문학적 형상화 방식의 특징을 부각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러한 방법론은 후속 연행록 연구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 연구요약
  • 본 연구는 이일상 시문학의 특징과 의의를 구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은 목적 하에 『청호유고』에 실려 있는 시 222제 265수를 대상으로 특징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일상이 유배와 억류 생활을 통해 내면화된 정서를 어떤 방법으로 형상화하는지, 이일상이 주축이 된 낙동계의 교유 양상과 이 모임이 후대에 어떻게 이어지는지, 가문의 연행록 전통 속에서 이일상 연행시의 특징은 무엇인지 아울러 살피고자 한다. 궁극적으로 이일상 시문학의 의의를 구명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청호유고』를 대상으로 한다. 구체적인 연구 내용과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병자호란 후, 고관대신의 장자이기 때문에 인질로 심양에 억류된 이일상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 절박하고 솔직한 심정을 시로 기록했다. 이일상의 시는 이경석, 한형길, 박서, 이경상, 유경창과 심양 관소에서 내면을 토로한『瀋館唱和錄』에도 수록되어 있다. 「<瀋舘唱和錄>의 체제와 내용」에서 이일상의 작품이 1수 소개된 바 있지만, 『청호유고』에는 이때 지은 시 21제 41수가 실려 있다.
    낯선 공간에서 인질로서 느낀 개인적 정감의 내용과 그 표출 방식은 어떠한지, 자국에 대한 인식과 청에 대한 인식은 어떠한지, 심양에서 이일상과 같이 창화했던 문인들의 시와 비교를 통해서 파악할 것이다. 이일상은 인질로 심양에 가기 전에 유배의 고통을 겪었다. 유배 체험과 인질 체험은 장소가 다를 뿐 어느 한 곳에 억류되어 있는 것은 동일한데 어떤 차이점이 나타나는지도 비교해 볼 것이다.
    (2) 이일상은 ‘駱東禊’의 중심인물이다. 낙동계는 한성 동부 駱山 아래 거주하는 문인 그룹으로, 1643년(인조21) 부친 이명한이 주축이 되어 만든 것이다. 낙동계를 결성한 지 2년 뒤인 1645년(인조23) 이명한이 죽자, 그의 아들 이일상이 부친의 역할을 대행하게 된다. 낙동계가 민간에서 금속활자를 주조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시 사대부들의 인적 네트워크를 보여 준다는 점이다. 대를 이어서 지속된 낙동계는 영조대 東村을 중심으로 교유했던 ‘東村派’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청호유고』를 통해 낙동계의 구성원의 교유 양상와 교유시를 살펴보려고 한다. 본 연구는 이일상을 중심으로 한 낙동계의 실체를 구명하고, 그 핵심 구성원들의 교유 양상과 이 모임에서 창작된 시에 대해 분석할 것이다. 그리고 낙동계가 후손들에게 계승되는 양상을 살펴볼 것이다.
    (3) 이일상은 1654년(효종5) 청의 왕후 책봉 진하 사행의 부사로, 진하사 인평대군, 서장관 심세정 등과 사행했다. 이때 지은 시가 40수 있다. 이일상의 연행체험은 시로만 표현되어 있는데, 차운시가 두드러진다. 연행시 40수 중 삼사들과의 차운시가 26수이다. 이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낙동계의 일원으로서 연행을 가기 이전부터 친밀한 교류가 있었던 이일상과 인평대군은 연행길에서 함께 고생하며 차운시를 통해 소통했다. 이들에게 시는 소통의 수단이자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방법이다. 연행길을 가지만 마음은 서울로 돌아가는 상황에서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도록 이끈 것이 ‘시’라고 생각될 정도로 연행에서 차운시는 이일상에게 큰 의미를 차지한다. 조부 이정구, 부친 이명한에 이어 연행하면서 이일상은 조부나 부친의 연행시에 차운하지는 않았지만 선조와 동일한 장소에서 시를 짓고 선조의 시구를 활용하는 면모를 보인다.
    본 연구는 이일상 연행시의 특징적인 면을 살펴볼 것이다. 먼저 명청교체기 이일상의 외교 활동을 살핀 다음 차운시를 비교 분석하여 공감대와 시각의 차이 등을 확인하고, 선조 연행시의 활용 양상을 살펴보면 척화신으로서 이일상의 대청 의식, 연행 체험의 내용, 문학적 형상화 방식의 특징과 의미가 구체적으로 부각될 것으로 본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는 이일상 시문학의 특징과 의의를 구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같은 목적으로『靑湖遺稿』에 실려 있는 시 222제 265수를 대상으로 특징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일상이 유배와 억류 생활을 통해 내면화된 정서를 어떤 방법으로 형상화하는지, 이일상이 주축이 된 낙동계의 교유 양상과 이 모임이 후대에 어떻게 이어지는지, 가문의 연행록 전통 속에서 이일상 연행시의 특징은 무엇인지 아울러 살피려고 한다. 궁극적으로 이일상 시문학의 의의를 구명할 것이다. 본 연구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청호유고』를 대상으로 한다.
    (1) 1642년(인조20) 이조판서인 부친 이정구의 장자로서 인질로 심양에 억류되었을 때 이일상은 세자시강원 관리들과 시를 짓는 것으로 마음을 달랬다. 특히 박서와 수창을 많이 했는데 이들의 수창시에 세자시강원 관리들이 함께 창화해서 시축을 이루었다.
    이때 이일상이 유독 가을에 많은 시를 지었다는 것이 주목된다. 가을에 다작을 한 까닭은 함께 지내던 이경상이나 이경석 등이 귀국해 이별한 일과도 관련이 있지만 자신의 운명을 상징하는 계절과도 연관이 있다. 이일상은 자신과 함께 한 사람들의 처지를 가을 ‘마지막 잎새’에 비유하곤 한다. 곧 떨어질 운명에 처한 ‘마지막 잎새’처럼 억류된 자신의 미래에 절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일상은 자신의 처지를 억울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라에 보답할 계책 없어 부끄럽고 자신이 살아남은 것은 임금의 은혜이기 때문에 괴로움은 말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한다. 심양 생활에서의 어려움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함께 수창한 이들과의 향기로운 자리 덕분이다. “이들과 함께 할 때 서울에 있는 것 같고 일신의 위험을 잊었다.” 심양에서 함께한 사람들과의 수창이 이일상에게 어떤 의미인지 보여 주는 대목이다.

    (2) 수창은 駱山 모임에서 이뤄졌을 뿐만 아니라 연행 길에서도 이뤄졌다. 인평대군은 이일상에게 “몇 년이나 낙산 모임에서 술을 함께 했었던가” 라고 하며 이일상과의 친분이 東村에 있는 낙산의 모임에서부터 이어져 오고 있음을 드러냈고, 이일상은 귀국 후 동촌에서의 시회를 기대하곤 했다.
    낙산 아래 거주하며 낙동계를 맺은 집안이 1645년(인조23) 인평대군이 사은사로 떠나기 전 시회를 열었듯이, 1654년(효종5) 이일상이 인평대군과 함께 연행에서 돌아왔을 때도 시회를 열었다.
    이일상과 인평대군을 비롯한 낙동계 구성원들은 남용익, 서필원, 이경석, 이행진, 조익, 조여호, 홍주원, 홍처량 등의 집안과 관련있다. 동촌에 세거하며 교유를 이어가는 이들의 관계는 혼맥으로 이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후대로 이어지는데, 영조조 ‘東村派’와 맥이 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낙동계의 일원으로서 친밀한 교류가 있었던 이일상과 인평대군은 1654년(효종5) 청의 새 왕후 책봉 진하사와 부사로 파견되어 연행길에서 함께 고생하며 차운시를 통해 소통했다. 이일상은 이때 지은 연행시를 ‘北征詩’로 표현했다. 두보가 안사의 난 때 지은 ‘북정시’에서 나라에 대한 충심과 가족에 대한 정을 노래했듯이, 이일상의 연행시 또한 이러한 정조가 주를 이룬다.
    연행시에 나타난 이일상의 작시 경향은 인평대군과 차이를 보인다. 인평대군이 형가처럼 칼을 차는 행위로서 복수심을 드러낸다면, 이일상은 눈물을 흘리는 무력감을 나타낸다. 이일상과 인평대군이 각기 가지는 무력감과 복수심의 차이는 신분과 입장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일상과 인평대군이 무력감과 복수심을 드러내는 것은 작시법에서도 보인다. 이일상이 폐허 풍경을 묘사해 자신의 감정을 절제한다면 인평대군은 자신의 감회를 서술한다. 한편 이일상의 연행 시는 인평대군과 창화한 시와 창화하지 않은 시에서 차이가 나는데, 인평대군과 창화한 시에서 감정을 절제했다면 창화시가 아닌 시에는 자신의 울분의 감정을 그대로 표출한 경우가 많다.
  • 영문
  •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lucidate the characteristics and significance of poetry and literature. For this purpose, I would like to analyze the characteristics of 265 poetry 222 in『靑湖遺稿』. How Lee Il-sang embodies the internalized emotion through exile and detention life, the pattern of communion of the Nakdong system led by Lee Il-sang, and how this group continues in the future, I will try to find out what it is. Ultimately, I will follow up the meaning of poetry and literature. This study is based on the collection of the National Library of Korea.
    (1) When he was detained in Shenyang as the eldest son of his father, Lee Jung-gu, in 1642 Lee Il-sangwas happy to write a poem. Lee Il-sang often compares the situation of people with him to the “last leaves” of autumn. He is desperate for his future detained like the “last leaf” destined to fall soon. The most difficult thing in Shenyang's life was thanks to the fragrant positions with those who sang together.
    (2) The members of the Nakdong family, including Lee Il-sang and Inpyeong-daegun, are related to the families of Nam Yong-ik, Seo Pil-won, Lee Kyung-seok, Haeng-jin, Jo-ik, Jo Yeo-ho, Hong Joo-won, and Hong Cheon-rya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ose who live in Dongchon and continue their social relations not only leads to confusion but also to later generations.
    (3)Lee Il-sang and Inpyeong-gun, who had intimate exchanges as members of the Nakdong system, were dispatched as Cheong Ha-ja and Busa, the new queen of Cheongjong, in 1654. Lee Il-sang expressed the ensemble he wrote at this time as '北征詩'. Just as Dubo sang his loyalty to the country and his affection for his family in '北征詩' which was built during the time of his annihilation, this ritual is also dominated by two-day performance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이일상 시문학의 특징과 의의를 구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같은 목적으로『靑湖遺稿』에 실려 있는 시 222제 265수를 대상으로 특징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일상이 유배와 억류 생활을 통해 내면화된 정서를 어떤 방법으로 형상화하는지, 이일상이 주축이 된 낙동계의 교유 양상과 이 모임이 후대에 어떻게 이어지는지, 가문의 연행록 전통 속에서 이일상 연행시의 특징은 무엇인지 아울러 살피려고 한다. 궁극적으로 이일상 시문학의 의의를 구명할 것이다. 본 연구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청호유고』를 대상으로 한다.
    (1) 1642년(인조20) 이조판서인 부친 이정구의 장자로서 인질로 심양에 억류되었을 때 이일상은 세자시강원 관리들과 시를 짓는 것으로 마음을 달랬다. 특히 박서와 수창을 많이 했는데 이들의 수창시에 세자시강원 관리들이 함께 창화해서 시축을 이루었다.
    이때 이일상이 유독 가을에 많은 시를 지었다는 것이 주목된다. 가을에 다작을 한 까닭은 함께 지내던 이경상이나 이경석 등이 귀국해 이별한 일과도 관련이 있지만 자신의 운명을 상징하는 계절과도 연관이 있다. 이일상은 자신과 함께 한 사람들의 처지를 가을 ‘마지막 잎새’에 비유하곤 한다. 곧 떨어질 운명에 처한 ‘마지막 잎새’처럼 억류된 자신의 미래에 절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일상은 자신의 처지를 억울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라에 보답할 계책 없어 부끄럽고 자신이 살아남은 것은 임금의 은혜이기 때문에 괴로움은 말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한다. 심양 생활에서의 어려움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함께 수창한 이들과의 향기로운 자리 덕분이다. “이들과 함께 할 때 서울에 있는 것 같고 일신의 위험을 잊었다.” 심양에서 함께한 사람들과의 수창이 이일상에게 어떤 의미인지 보여 주는 대목이다.

    (2) 수창은 駱山 모임에서 이뤄졌을 뿐만 아니라 연행 길에서도 이뤄졌다. 인평대군은 이일상에게 “몇 년이나 낙산 모임에서 술을 함께 했었던가” 라고 하며 이일상과의 친분이 東村에 있는 낙산의 모임에서부터 이어져 오고 있음을 드러냈고, 이일상은 귀국 후 동촌에서의 시회를 기대하곤 했다.
    낙산 아래 거주하며 낙동계를 맺은 집안이 1645년(인조23) 인평대군이 사은사로 떠나기 전 시회를 열었듯이, 1654년(효종5) 이일상이 인평대군과 함께 연행에서 돌아왔을 때도 시회를 열었다.
    이일상과 인평대군을 비롯한 낙동계 구성원들은 남용익, 서필원, 이경석, 이행진, 조익, 조여호, 홍주원, 홍처량 등의 집안과 관련있다. 동촌에 세거하며 교유를 이어가는 이들의 관계는 혼맥으로 이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후대로 이어지는데, 영조조 ‘東村派’와 맥이 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낙동계의 일원으로서 친밀한 교류가 있었던 이일상과 인평대군은 1654년(효종5) 청의 새 왕후 책봉 진하사와 부사로 파견되어 연행길에서 함께 고생하며 차운시를 통해 소통했다. 이일상은 이때 지은 연행시를 ‘北征詩’로 표현했다. 두보가 안사의 난 때 지은 ‘북정시’에서 나라에 대한 충심과 가족에 대한 정을 노래했듯이, 이일상의 연행시 또한 이러한 정조가 주를 이룬다.
    연행시에 나타난 이일상의 작시 경향은 인평대군과 차이를 보인다. 인평대군이 형가처럼 칼을 차는 행위로서 복수심을 드러낸다면, 이일상은 눈물을 흘리는 무력감을 나타낸다. 이일상과 인평대군이 각기 가지는 무력감과 복수심의 차이는 신분과 입장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일상과 인평대군이 무력감과 복수심을 드러내는 것은 작시법에서도 보인다. 이일상이 폐허 풍경을 묘사해 자신의 감정을 절제한다면 인평대군은 자신의 감회를 서술한다. 한편 이일상의 연행 시는 인평대군과 창화한 시와 창화하지 않은 시에서 차이가 나는데, 인평대군과 창화한 시에서 감정을 절제했다면 창화시가 아닌 시에는 자신의 울분의 감정을 그대로 표출한 경우가 많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그동안 연구대상으로 논의되지 못한 이일상 시의 특징과 의의를 구명하는 본 연구는 17세기 문학 교육과 문학 연구에 있어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첫째 병자호란 이후 고관대신의 자제들이 인질로 심양에 억류되었지만 이일상 외에 시문을 남긴 이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처지에서 이일상이 인질 생활의 개인적 정감을 표현한 시는 국난의 상황과 특성, 그 영향 등에 관한 교육에 자료적 가치가 크다.
    둘째 병자호란으로 이일상은 조모, 모친, 아내를 다 잃었고, 자국에서도 타국에서도 억류 생활을 해야 했으며, 척화신의 입장이지만 연행의 임무도 완수해야 했다. 이 같은 상실, 좌절, 울분으로 감당하기 힘든 고통 속에서 그를 지탱해 준 것은 바로 ‘시’이다. 이일상은 불가해한 삶에서 고뇌로 얻은 시를 과거에서 현재로 시간의 흐름에 띄워 보냈다. 이러한 이일상의 한시가 학생들에게 가닿을 수 있다면, 학생들은 그의 시를 읽고 삶을 해독하는 단서 하나를 얻을 것이다. 또한 공감하고 위로받을 것이다.
    셋째 이일상은 조선 후기 인적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다. 이일상이 주축이 된 ‘駱東禊’ 구성원들의 교유가 당대에 그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낙동계는 그 구성원의 후손이 핵심 구성원인 영조조의 ‘東村派’와 맥이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본 연구는 영조조 동촌파의 연원을 밝힌다는 의의가 있다.
    마지막으로 17세기 연행록 연구가 미진한 상황에서 본 연구는 17세기 연행록의 특징과 의의를 도출하는 데 기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본 연구는 방법적인 측면에서 차운시의 비교를 통해 연행 체험의 내용, 문학적 형상화 방식의 특징을 부각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러한 방법론은 후속 연행록 연구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 색인어
  • 이일상, 심양, 낙동계, 시회, 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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