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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 대한민국 국가건설과정에서의 국민대회 연구
A study on National Meetings in process of Nation Bulding of Republic of Korea under a state of liberation.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시간강사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8S1A5B5A07074360
선정년도 2018 년
연구기간 1 년 (2018년 09월 01일 ~ 2019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이영식
연구수행기관 총신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일제의 폭압이 무너지고 광복을 맞은 대한민국이 다시 직면해야 했던 것은, 완전한 독립이 아닌 3.8선이 가로막힌 분단된 조국이었고, 좌익과 우익의 첨예한 대립 가운데 인민공화국이냐 민주공화국이냐의 갈림길에 있었다. 결국 광복 5년 만에 참혹한 6.25 동란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민주공화국 국가건설을 위한 “건국투쟁”이 있게 되었다. 박명수 교수는 해방정국의 상황을 ‘건국투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박명수, 건국투쟁 , 2015).
    이와 맞물려서 일반 국민들은 해방의 기쁨과 함께 혼돈스러운 정국 가운데서 미래로 나아가야 할 방향설정이 필요했다. 따라서 그 당시 지도자들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그들의 미래에 대한 혜안과 고뇌와 결단과 지도력이 국가의 장래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으며, 이를 통하여 혼란스런 정국 가운데 국민들이 시대적 국가 상황을 인식하고 일치된 방향성을 갖게 되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협력이 어느 때보다 너무도 절실하고 소중한 시국이었다. 이러한 해방정국의 국가건설 과정에서, 더구나 오늘날과 달리 교통통신의 열악한 당시의 환경에서, 국가의 발전을 위한 “민족의 총의(總意)”가 발현되었던 국민대회가 이뤄지고 있었다.(동아일보 1946년 4월 29일; 동아일보 1947년 1월 22일)
    미래지향적인 방향설정이 있었고, 소통의 장이었으며, 일치된 실천이 역동적으로 일어난 현장이 바로 국민대회였다고 사료된다. 오늘날 한반도에 70년이 되도록 남북한이 분단된 상태가 지속되고 있고, 인민공화국인 북한과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이 서로 대치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또한 양상은 다르지만, 오늘날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국제적 상황은 여전히 민감하게 전개되고 있는 실정이다. 본 연구자는 이러한 상황들을 무겁게 인식하며, 격동의 시대에 전개되었던 국민대회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더 나아가 관심을 갖고 자료 및 문헌들을 조사하면서 기초적인 작업들을 진행할 수 있었다. 따라서 본 연구는 해방 직후 당시 긴박했던 정국의 대한민국 국가건설과정에서 혼란스러운 국민들의 방향을 제시하고, 국민운동의 분수령적인 역할을 했으며, 민족의 진로라는 거대한 물줄기를 이끌었다고 여겨지는 국민대회를 구체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따라서 본 연구를 통해서, 첫째, 해방 이후 다수의 국민대회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신탁통치 국민대회, 3.1독립기념 국민대회, 독립전취 국민대회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둘째, 해방 정국 국가건설과정에서의 국민대회의 역사적 의의를 조명하고자 한다. 그 당시 좌익과 우익의 대결 구도 아래서, 혼돈 가운데 있던 일반국민들에게 국민대회는 어떤 의미였고, 국가장래에 있어서 어떻게 국민들의 의사를 총합하고 이끌어 갔으며, 정국변화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대한민국 국가건설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셋째, 당시 국민대회가 준비되고 개최되었던 역사적 배경, 서울에서의 발흥 및 수도권과 지방으로의 확대 그리고 그 경과를 조명하고자 한다.
    넷째, 열악한 상황 아래서 국가건설을 위한 선진들의 시대적 업적을 조명함으로써 오늘날 우리 시대에 민주공화국의 계승과 발전을 위하여 조금이나마 일조하기를 원한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라, 오늘을 있게 한 원류이기도 하다. 국민대회와 그에 따르는 정국의 변화를 통해서 나타나는 역사적 사실들을 성찰하고 오늘과 미래를 열어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아울러 연구를 하면서 해방정국의 역사 가운데 왜곡되고 있던 부분이 있으면 바로잡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러나 조사한 바로는 국민대회에 대한 선행연구는 국내 학계에서 거의 희박한 상태이다. “국민대회”라는 주제로 연구한 논문이나 저서는 발견할 수가 없다. 본 연구에서 다루고자 하는 소 주제인 “반탁국민대회”, “3.1독립기념 국민대회”, “독립전취대회”에 대한 논문도 없다. 단지 박명수 교수의 “1946년 3.1절: 해방 후 첫 번째 역사논쟁”라는 논문이 있을 뿐이다.(박명수, “1946년 3.1절: 해방 후 첫 번째 역사논쟁”).
    따라서 본 연구를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다는 인식하에 시작하고자 한다. 당시 일간신문들의 보도내용들과 관련인물들이 기록한 1차 자료, 『미군정정보일지』 및 외국문헌, 그리고 국민대회라는 직접적인 주제가 아니라도 해방정국을 서술하는 저서들을 참고하여 연구하려고 한다.
  • 기대효과
  • 연구를 통해 기대되는 효과를 몇 가지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동안 학계에서, 해방정국 격동의 시대에 왕성하게 펼쳐져 왔던 국민대회에 대한 연구논문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본 연구를 통한 국민대회와 관련된 생생한 역사적인 자료발굴, 정리, 평가가 한국현대사와 관련된 학문적인 분야에 미력한 공헌이나마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본 연구를 통해 당시 보도된 일간신문의 생생한 자료와 그 외 기록된 중요한 1차 자료들을 축적하게 될 것이고 이후 관련연구에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둘째, 본 연구가 등장함으로써 앞으로의 후속 연구에도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예를 들어서 본 연구에서는 중요 국민대회를 살펴보았지만, 이후에 “신탁통치 반대 국민대회”, “신탁통치 반대 국민대회와 기독교”, “해방정국 독립전취대회와 기독교”라는 주제로 좀 더 범위를 좁혀서 더욱 세밀한 연구가 진행되게 될 것이다.
    셋째, 이 연구를 통해서 해방정국의 국민대회의 역사적 의의가 조명될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해방이 되었지만, 완전독립이 되지 않고 오히려 3.8선으로 남북에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모스크바 삼상회의를 통한 신탁통치설과 미소공위의 결렬은 독립을 염원했던 한민족에게 좌절을 안겨주었다. 그런 가운데 좌익과 우익의 날선 대립은 치열해지고 있던 상황에서 국민대회는 국민들의 방향을 설정해주었고, 민주공화국 국가건설에 귀중한 역할을 했다. 이것은 몇 사람의 민족지도자의 힘이 아닌, 서울과 지방에서의 보통국민들의 참여와 “민족적 총의”에 의한 진전이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하겠다. 이를 통하여 현재의 한국정치 및 국가발전에 적용될 수 있는 중요한 통찰이 있으리라 기대한다.
    넷째, 본 연구를 통해서 부각되는 국민대회라는 담론은 그것이 과거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국민주권시대의 대중정치 및 국가발전을 위한 국민총의를 이끌어 내고 합의하는 민주적이고 정치학적 과정의 의미에서 궤를 같이 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다섯째, 당시 국민대회의 서울 및 수도권 지역만이 아니라, 전국의 주요도시에서 전개되는 활약과 그 규모들을 보게 될 것이며 또한 좌우익의 갈등과 당시 북한과 남한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미소공위를 전개했던 미국과 소련의 정치적 관계와 한국지도자들과의 역학관계도 미약하나마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섯째, 본 연구는 자료를 통해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전개할 것이며, 이를 통해서 해방정국의 왜곡된 부분이 있다고 한다면 바로 잡아가는 계기가 되리라고 본다.
    일곱째, 본 연구자는 학교에서 전공 강의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일반 한국근현대사의 내용을 함께 다루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본 연구의 결과물은 1차적으로 본인의 강의자료로 사용될 것이고, 따라서 수강 학생들에게 본 연구의 결과물을 소개하고 접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따라서 젊은이들이 해방정국의 상황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국가적 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결과물이 학술지 등에 게재되거나 출판되면, 더 많은 분들이 후속 연구를 위해 참고하리라 여겨진다.
  • 연구요약
  • 연구의 목표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오늘날까지 남북한이 분단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본 연구자는 이러한 상황들을 무겁게 인식하며, 격동의 시대에 전개되었던 국민대회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더 나아가 관심을 갖고 자료 및 문헌들을 조사하면서 기초적인 작업들을 진행할 수 있었다. 따라서 본 연구는 해방 직후 당시 긴박했던 정국의 대한민국 국가건설과정에서 혼란스러운 국민들의 방향을 제시하고, 국민운동의 분수령적인 역할을 했으며, 민족의 진로라는 거대한 물줄기를 이끌었다고 여겨지는 국민대회를 구체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따라서 본 연구를 통해서, 첫째, 해방 이후 다수의 국민대회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신탁통치 국민대회, 3.1독립기념 국민대회, 독립전취 국민대회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둘째, 해방 정국 국가건설과정에서의 국민대회의 역사적 의의를 조명하고자 한다. 그 당시 좌익과 우익의 대결 구도 아래서, 혼돈 가운데 있던 일반국민들에게 국민대회는 어떤 의미였고, 국가장래에 있어서 어떻게 국민들의 의사를 총합하고 이끌어 갔으며, 정국변화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대한민국 국가건설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셋째, 당시 국민대회가 준비되고 개최되었던 역사적 배경, 서울에서의 발흥 및 수도권과 지방으로의 확대 그리고 그 경과를 조명하고자 한다.
    넷째, 열악한 상황 아래서 국가건설을 위한 선진들의 시대적 업적을 조명함으로써 오늘날 우리 시대에 민주공화국의 계승과 발전을 위하여 조금이나마 일조하기를 원한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라, 오늘을 있게 한 원류이기도 하다. 국민대회와 그에 따르는 정국의 변화를 통해서 나타나는 역사적 사실들을 성찰하고 오늘과 미래를 열어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아울러 연구를 하면서 해방정국의 역사 가운데 왜곡되고 있던 부분이 있으면 바로잡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러나 조사한 바로는 국민대회에 대한 선행연구는 국내 학계에서 거의 희박한 상태이다. “국민대회”라는 주제로 연구한 논문이나 저서는 발견할 수가 없다. 본 연구에서 다루고자 하는 소 주제인 “반탁국민대회”, “3.1독립기념 국민대회”, “독립전취대회”에 대한 논문도 없다. 단지 박명수 교수의 “1946년 3.1절: 해방 후 첫 번째 역사논쟁”라는 논문이 있을 뿐이다. 박명수, “1946년 3.1절: 해방 후 첫 번째 역사논쟁” 한국정치외교사논총 38(1)(2016).
    따라서 본 연구를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다는 인식하에 시작하고자 한다. 당시 일간신문들의 보도내용들과 관련인물들이 기록한 1차 자료, 『미군정정보일지』 및 외국문헌, 그리고 국민대회라는 직접적인 주제가 아니라도 해방정국을 서술하는 저서들을 참고하여 연구하려고 한다.
    국민대회는 국가건설에 있어서 역사적 의의가 지대하지만, 특이하게도 이 주제로 연구된 논문이나 저술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따라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것과도 같다. 이것은 이 연구를 편하게 진행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의 빈약함이 국민대회의 역사적 중요성을 삭감하는 것은 아니다. 해방정국의 “국민대회”라는 주제의 선행연구는 희박하다. 다른 선행자료들 가운데서도, ‘국민대회’라는 관점에서 연구된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이나마 본 연구의 주제와 관련된 자료들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연구 내용및 방법은 언급하면,
    먼저 해방정국의 국민대회준비위원회의 취지와 진전의 여부를 검토하고 그 외 당시 다양하게 개최되었던 국민대회의 모습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둘째로, 신탁통치 반대 국민대회로서,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론의 배경, 좌우익의 갈등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서울에서의 반탁국민대회의 개최, 그리고 지방에서의 주요 반탁국민대회의 양상과 전개를 살펴보게 된다. 아울러 이때 정국의 변화를 조명하게 된다. 셋째, 3.1독립기념일 국민대회이다. 여기서도 좌우익의 3.1절 행사의 준비와 개최를 보게 된다. 우익의 서울운동장 국민대회, 좌익의 남산공원의 대회 그리고 이어지는 대회와 정국의 현황을 보고자 한다. 넷째, 독립전취대회로서 그 배경과 1946년 5월 12일 서울운동장에서의 국민대회 개최, 그리고 수도권과 지방으로의 확산, 여러 모양의 국민대회를 조명하고 그 정국구도의 영향력도 검토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연구과정을 거쳐, 해방정국의 국민대회의 배경, 발흥, 전개와 경과 및 그 의의를 살펴보고, 당시 정국의 변화에 그리고 민주공화국 국가건설 과정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조심스럽게 밝혀보려 한다. 이를 통한 통찰과 교훈을 통하여 오늘날 남북한 분단의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하고 대응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여겨진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연구요약> “해방정국 대한민국 국가건설 과정에서의 국민대회 연구”


    광복을 맞이한 대한민국이 직면해야 했던 것은 완전한 독립이 아닌 38선으로 가로막힌 분단된 조국이었다. 그리고 좌익과 우익의 첨예한 대립 가운데 우리의 조국은 인민공화국이냐 민주공화국이냐의 갈림길에 있었다. 대한민국의 민주공화국 국가건설을 위한 “건국투쟁”이 있게 되었다. 일반 국민들은 해방의 기쁨과 함께 혼돈스러운 정국 가운데서 미래로 나아가야 할 방향설정이 필요했다. 따라서 그 당시 지도자들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그들의 미래에 대한 혜안과 고뇌와 결단과 지도력이 국가의 장래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으며, 이를 통하여 국민들이 시대적 국가 상황을 인식하고 일치된 방향성을 갖게 되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협력이 어느 때보다 너무도 절실하고 소중한 시국이었다. 그 중심에 “민족의 총의(總意)”가 발현되었던 국민대회가 이뤄지고 있었다. 국민대회는 미래지향적인 방향설정이 있었고, 소통의 장이었으며, 일치된 실천이 역동적으로 일어난 역사적 현장이었다.
    오늘날 한반도에 75년이 되도록 남북한이 분단된 상태가 지속되고 있고, 인민공화국인 북한과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이 서로 대치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또한 양상은 다르지만, 오늘날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국제적 상황은 여전히 민감하게 전개되고 있고, 남한에서의 국론도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다. 본 연구자는 이러한 상황들을 무겁게 인식하며, 격동의 시대에 전개되었던 국민대회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본 연구는 해방정국의 대한민국 국가건설과정에서 혼란스러운 국민들의 방향을 제시하고, 국민운동의 분수령적인 역할을 했으며, 민족의 진로라는 거대한 물줄기를 이끌었다고 여겨지는 국민대회를 조명하고자 했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라, 오늘을 있게 한 원류이기도 하다. 국민대회와 그에 따르는 정국의 변화를 통해서 나타나는 역사적 사실들을 성찰하고 통찰을 얻어서 오늘과 미래를 열어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해방정국에서 국민대회는 여러 주제와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수많은 국민대회가 주로 서울에서 발화되어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모든 국민대회를 다루지 않고 ‘국민대회준비위원회’와 주요 국민대회 즉, ‘반탁국민대회’, ‘3.1절기념국민대회’, ‘독립전취국민대회’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했다.


    여운형은 안재홍 등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CPKI, 건준) 조직에 착수하였다. 1945년 8월 16일 전국에 걸친 정치 및 경제범이 석방되었고, 17일에 건준의 1차 조직이 이뤄졌다. 여기에 점차 “공산주의자들이” 가담하여 “건준의 활동이 과격한 색채를 띄게 되었다.” 안재홍과 우익세력들은 인민공화국이 출범하기 전에 건준을 탈퇴하였고, 이후 건준은 좌익이 주도하게 되었다.
    송진우 계열은 임시정부의 ‘애국지사들의 환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실천했던 일이 9월 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한 것이었고, 9월 7일 ‘국민대회준비회’를 결성한 것이었다. 송진우는 국민대회를 통해서, “민중의 의사를 존중하여 민중의 총의와 신임을 토대로 정권 인수요건을 갖추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것은 “민족주의자와 일부 보수세력, 그리고 갈팡질팡하는 수많은 민중에게 행방의 지침을 주기 위한 실천이었다.” 국민대회준비회는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소위 ‘인민공화국’에 대항체제를 갖추었던 것이다. 건준이 했던 역할을 이제는 국민대회가 하고자 했다. 국민대회준비회의 활동은 해방정국 국민총의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고, 이후에 있게 되는 많은 국민대회의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개국의 외상들이 모여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협정을 했다. 28일 저녁에 발표된 그 핵심내용은 조선에 민주적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미, 영, 소, 중의 4개국에 의한 최고 5년의 신탁통치를 실시하겠다는 것이었다. 한민족은 또 한 번의 절망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국내 좌우 정당들, 종교단체 및 언론들이 반탁국민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김구는 반탁운동을 ‘새로운 독립운동’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민족적 반탁운동을 지도 추진하기 위해서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29일부터 3일간 서울 거리는 모든 상가가 철시한 상태였고, 종로·광화문을 비롯한 시내 곳곳에서는 신탁통치 반대의 깃발을 들고 질서 정연하게 만세를 부르면서 행진하는 데모가 끊이지 않았다.” 신탁통치반대 시민시위행렬은 31일 오후 2시 종로에서 시작하여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의 지도아래, 태극기를 각각 들고 대대적인 행진을 했다. 그리고 백설이 쌓인 서울운동장으로 수만의 군중들이 밀려들어 신탁통치반대를 외쳤다. 그러나 좌익과 공산당측은 돌연 찬탁으로 돌아섰다. 미군정의 공무원, 종교단체, 학교교원, 여성단체, 학생단, 회사 및 요리업 종업원과 기생까지도 신탁통치에 대한 국민적 총의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반탁국민대회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신탁통치반대 국민대회를 통해서 미군정과 미국국무장관의 신탁통치에 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러한 신탁통치 반대국민대회 및 시위행렬은 국민총의를 결집하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고, 장차 국민주권의 대한민국 건국에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해방이 되고 첫 번째 맞이하는 3.1독립운동 기념일은 감격과 함께 민족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익 민족진영은 3.1독립운동의 독립정신과 그 정통성을 중요시하며 계승하는 계기로 삼았다. 그러나 좌익계열은 3.1독립운동의 역사적 의의보다는 이후의 농민·노동자의 투쟁과 기념행사를 통하여 자신들의 정치적인 입지 회복에 방점을 두었다. 우익의 민주의원 측과 좌익의 민전 측은 서로 다른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준비했다.
    민주의원은 1946년 3월 1일 종로보신각 앞에서 이승만의 사회로 “10만 명”이 참여하는 가운데 기념행사를 거행했다. 이어서 서울운동장에서 10만 명 이상이 모여 국민대회를 개최했다.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 주최하는 3.1운동기념행사는 탑동공원에서 시작하였고, 남산공원에서 시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는 “5천 정도” 혹은 “1만 5천정도”의 숫자가 모였다. 국민의 민심은 민전이 아니라, 우익의 민주의원으로 결집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미독립기념대회는 그 다음해도 이어졌다. 국민대회는 조국의 자주 및 완전독립에 대한 염원이 그 중심에 대하처럼 흐르고 있었다.


    반탁국민대회나,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와 마찬가지로 독립전취대회(獨立戰取大會: 독립을 싸워서 쟁취한다는 의미)도 조국의 독립이라는 맥락에서 같은 의미와 목적과 방향을 갖는다. 신탁통치라는 문제와 함께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은 독립전취대회의 요인이 되었다.
    임시정부 협의과정에 미군정은 반탁운동과 관계없이 참여할 수 있다고 했고, 소련의 스티코프는 반탁운동 측을 배제하고자 했다. 이승만과 우익 민족진영의 정당단체 및 사회단체는 “참가하여 반탁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소련 측은 거부하였고,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었다. 이것은 다시 한 번 한민족에게 크나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자주독립을 적극적으로 전취해야 한다는 열망은 더욱 간절하게 표출되었다.
    1946년 5월 12일 독립전취국민대회가 시작되었다. 당일 오후 1시 서울 운동장에서 개최되는 200여 애국단체공동주최의 국민대회는 이승만·김구·김규식을 명예의장으로, 오하영이 회장으로 60개 우익단체 회원들과 국민들이 모여 대대적인 국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입추의 여지없이 “10만 이상”이 모여 대회를 마친 후에는 애국가를 부르며 가두행진을 벌였다. 다시 한 번 3천만의 “국민의 총의”를 결집하는 대회였다. 이를 계기로 독립전취국민대회는 대구, 청주, 영동, 순천, 수원, 부산, 울산, 인천 등을 포함하여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독립전취국민대회는 반탁운동의 연장이었고, 신탁통치가 아닌 한민족의 자주적 완전독립을 국내외적으로 선언하고 외쳤던 실천운동이었다.


    지금까지 해방정국 대한민국 국가건설과정에서의 국민대회를 살펴보았다. 8.15의 해방정국은 두 가지 중대한 국가적인 이슈와 과제가 있었다. 첫째, ‘완전독립’이고 둘째, (자유)민주공화국의 건설이었다. 이 당시 이승만을 비롯한 우익 진영과 대다수의 대중들은 이 문제들을 선택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로 받아들였다. 그 문제는 국가 장래가 걸려있던 문제여서 절실하였고, 그야말로 “건국투쟁”을 통해서 쟁취해야만 했고 실천에 옮겼다. 우리는 선진들의 희생과 분투로 이뤄진 대한민국에서 자유를 누리고 그 터 위에서 민족의 저력과 유산을 물려받아 과학기술 및 경제발전과 문화창달을 이뤄올 수 있었다. 이제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 후진들이 그것을 보존하고 계승발전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감당해야할 책무이며 현재와 국가 장래를 위한 사명이기도 하다.
    여기서 앞서 논의과정에서 확인했던 중에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좀 더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8.15 이후의 정국은 해방의 완성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완전독립”과 건강한 대한민국 국가 건설을 위한 치열한 투쟁의 과정이었다. 둘째, 해방정국의 이념의 문제는 장래 한반도가 (자유)민주공화국이냐 인민공화국이냐의 중차대한 기로에 직면하게 했다. 이 중대한 시기에 열악한 교통 및 통신의 현실에서 국민의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장(場)이 필요했다.
    셋째, 국민대회를 통해서 해방정국의 혼란과 소용돌이의 국면에서, 국내와 국제정세 그리고 국가장래에 대한 바른 인식과 혜안이 갖추어진 리더가 앞장서서 국민 인식을 변화시키며,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했다. 뿐만 아니라 ‘국민의 총의’을 이끌어내어 민족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틀어주었던 자유민주적인 장(場)이 바로 국민대회였다.
    넷째, 국민대회는 완전독립을 위하면서도 소련의 공산주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더 나아가 자유민주주의를 이 땅 위에 토대를 놓는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 다섯째, 혼란과 격동의 해방정국에서 아쉽지만 남한만이라도 민주공화국의 국가형태를 세울 수 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은 오늘날 처해있는 한국적 상황에 크나큰 통찰을 주고 있다고 하겠다
  • 영문
  • A English Summary of A Thesis


    After liberation, what the Republic of Korea had to face was a divided nation blocked by the 38th parallel, not complete independence. And in the sharp confrontation between the left and the right, our country was at a crossroads between the people’s republic or the democratic one.
    There has been “struggles for nation building” for the democratic republic of korea. The general public with the joy of liberation also needed a direction to move forward from chaotic political situations. Thus, the role of leaders at the time was more important than ever.
    The impact of their wisdom, vision, anguish, determination and leadership on the nation’s future was enormous, and through that, the people recognized the national situation of the times and to have a united direction.
    The cooperation of one people and one was more urgent and precious than ever. At the center was great national meetings where “national consensus” was manifested. The National Meetings were the places of a forward-looking direction and of communication, and historical sites where united practices were dynamically.
    Today, it is undeniable that the two Koreas have been divided on the Korean Peninsula for 75 years, and that the People’s Republic of North Korea and the Democratic Republic of Korea confront each other. In addition, although the aspects are different, the international situation centering on the Korean Peninsula is still sensitively going on today, and the national affairs in South Korea are sharply opposed. and the national opinion was sharply divided into two parts.
    This researcher recognized these situations heavily and felt the necessity of studying the national rally that took place during the turbulent times.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illuminate the national rallies presenting the direction of the confused people in the process of national construction of the Republic of Korea, playing a watershed role of the national movement, and being believed to have led the great stream of nation's pathway.
    History is not just a history of past, it is also the spring that made today happen. I hope to have a opportunity to open today and the future by reflecting on the historical facts and gaining insight through the national meetings and the consequent changes of the political situation.
    In political circumstance of the liberation, the national meetings was held in various themes and forms. And a number of national rallies have been ignited mainly in Seoul and spread to the provinces. However, this study did not cover all these national rallies, but tried to focus on the Preparatory Committee for the Korean National Congress and the main national rallies, such as the Anti-Trusteeship National meeting, A mass Meeting of A commemoration of the Independence Movement(Sam il day) and A National Meeting for Achieving Independence by Fight.


    Lyuh Woon-hyung started organizing the Committee for the Preparation of Korean Independence(CPKI, Gunjun) with Ahn Chai-hong. On August 16, 1945, political and economic criminals across the country were released, and on August 17, Gunjun’s primary organization was formed. Now the “communists” joined in here gradually, “the activities of Gunjun became a violent color.” Ahn Chai-hong and his right-wing forces left Gunjun before the People’s Republic was launched, and Gun-jun was later led by the left.
    Song Jin-woo and his fellow workers were waiting for the return of the Patriots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And then what they practiced was to organize a welcome preparation committee for Provisional Government and Allied Force and the Preparatory Committee for the Korean National Congress on September 7. Through the National Congress, Song Jin-woo wanted to “respect people’s intentions and to establish the requirements for regime acquisition based on their consensus and confidence.” And it was “practice to give guidance of direction to the nationalist and some conservative forces, and the countless number of wavering people.”
    the Preparatory Committee for the Korean National Congress(PCKNG) formed a counter system against Lyuh Woon-Hyong’s Gunjun and the so-called People’s Republic. Now, PCKNC wanted to play the role that Gunjun played. The activity of PCKNC enlightened the importance of the national assembly will of the liberation regime, and provided the direction for many subsequent national conventions.



    From December 16, 1945, foreign ministers from the U.S., Britain, and the Soviet Union. gathered in Moscow to enter into an agreement to resolve the Korean problem. The key statement, announced on the evening of the 28th, was to establish a democratic ad hoc government in Chosun and enforce up to five years of trusteeship by four of the United States, the United Kingdom, the Soviet Union and China. The Koreans felt another despair. In response, domestic left and right political parties, religious groups and the media began to launch national anti-trusteeship movement. Kim Gu defined that movement as a “new independence movement.” In addition,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Society for General Mobilization against Trusteeship was formed to lead and promote the national anti-trusteeship movement.
    “All shopping district on the streets of Seoul were closed for three days from the 29th, and there were endless demonstrations marching crying hurrah in an orderly manner with flags against the trusteeship in Jongro, Gwanghwamun and other parts of the city.” “The demonstration parade against trusteeship began at 2 p.m. on December 31 at Jongno, and continued to march in a large scale shaking the national flag of Korea(Taegeukgi) under the leadership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Society for General Mobilization against Trusteeship. And tens of thousands of people flocked to the snow-covered Seoul stadium and shouted against the trusteeship.”
    But the left and the Communist Party suddenly turned to trusteeship. Government officials, religious groups, school teachers, women's groups, student groups, company and culinary workers and even gisaeng voluntarily participated in the national consensus on trusteeship. The National Anti-trusteeship rally expanded nationwide.
    At the National Meeting against Trusteeship, the perception of trusteeship by the US military and the Secretary of State began to change. These anti-trust conventions and demonstrations provided an important opportunity to assemble national consensus and became an important cornerstone for the nation’s founding of national sovereignty in the future.


    The anniversary of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which was first celebrated after liberation, was significant in national history with inspiration. In the process of preparing, the right-wing national camp took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as an opportunity to succeed it, placing importance on the spirit of independence and its legitimacy.
    However, the leftists focused more on restoring their political position through the subsequent struggles and celebrations of farmers and laborers than on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The Korean Democratic Representative Council’ of the right-wing and ‘Democratic People‘s Front’ of left-wing organized different preparatory committees and prepared the ceremony.
    On March 1, 1946, ‘The Korean Democratic Representative Council’ held a ceremony in front of Jongno Boshingak by Syngman Rhee’s presider with “100,000 people” participating. Subsequently more than 100,000 people gathered at Seoul Stadium to hold the national meeting.
    The March 1 Movement commemoration event hosted by the Democratic People’s Front (Minjeon) started at Tapdong Park and held a civil rally at Namsan Park. There were numbers of “about 5,000” or “about 15,000”. It can be seen that the people’s hearts were being united not in ‘Democratic People‘s Front’, but in ‘The Korean Democratic Representative Council’.
    The Independence Commemoration rally continued the following year. In the center of The National Meeting, the desire for free and complete independence of the country was being flowed like a large river.


    Like the National Anti-Trusteeship Congress and the National Rally for Kimi Declaration of Independence Commemoration, A National Meeting for Achieving Independence by Fight had the same meaning, purpose and direction in the context of independence of the fatherland. The issue of trusteeship and the breakdown of the U.S.-Soviet Joint Committee became the important factor of the National Meeting for Achieving Independence by Fight(NMAIF). In the consultation process for the interim government, the U.S. military government said it could participate regardless of the movement, while the Soviet Union’s Terenti Fomitch Stykov wanted to exclude the anti-trusteeship movement side.
    Syngman Rhee and parties and social organizations in the right-wing national camp expressed their intention to “participate and oppose.” But the representative of the Soviet refused, and The Joint American-Soviet Commission broke down. This once again brought great disappointment to the Korean people. However, the desire to actively take over independence by struggle was expressed more earnestly.
    On May 12, 1946, the National Meeting for Achieving Independence by Fight began. At 1 p.m. on the same day, the national meeting, co-hosted by some 200 patriotic groups, was held at the Seoul Stadium, with Rhee Syng-man, Kim Gu and Kim Kyu-sik as the chairman of honor and Oh Ha-young as chairman. And 60 right-wing groups and the people participated in the large-scale national congress. There is no standing room in the stadium, “more than 100,000 people” gathered and after the end of holding the great rally marched on the streets, singing the national anthem. It was once again the large meeting that brought together 30 million “national consensus.”
    As a result, the National Meeting for Achieving Independence by Fight(NMAIF) spread throughout the country, including Daegu, Cheongju, Yeongdong, Suncheon, Suwon, Busan, Ulsan, and Incheon. the NMAIF was an extension of the Anti-Trusteeship movement and was a practice movement that declared and shouted the independence and complete independence of the Koreans in home and abroad, not the trusteeship.


    So far, we have looked at the national meetings in the national construction process of the Republic of Korea under the political situation after the liberation. The liberation regime of 8.15 had two major national issues and tasks.
    First, it was “complete independence”. and Second, the construction of a (free) democratic republic. At that time, Syngman Rhee, the right-wing groups and the the majority of the public accepted those issues as matters of survival, not problems of choice. The problems were desperate because the nation’s future was at stake, and those had to be won and to be put into practice through a “struggle for construction of country.”
    We have been able to enjoy freedom in the Republic of Korea, established by the sacrifices and struggles of the advanced people, and inherited the strength and heritage of forefathers on the ground, so that we could achieve scientific technology and economic development, and cultural creation. Now, we younger generations who live in this age must preserve it and continue to develop it. It is not a matter of choice, but the responsibility that we must bear and our mission for the present and the future of the country.
    Here are some important facts that we confirmed from the previous discussion.
    First, the post-Aug 15 political situation was a process of fierce struggle for the “complete independence” of the nation and the construction of a healthy Korean state, rather than the completion of liberation.
    Second, the ideological issue of political situation of the liberation has faced a critical path in the future of whether the Korean Peninsula is a free democratic republic or a people’s republic. During this critical period, a field was needed to broaden the horizon of the public’s perception and communicate in the reality of poor transportation and communication.
    Third, through the national meetings, in the context of the chaos and vortex of the liberation political situation, the leader with a good understanding of the domestic and international situation and the future of nation changed the public perception and suggested a desirable direction. the National Rally was also the liberal democratic field that led ‘the nation’s consensus’ and turned a huge stream of national history.
    Fourth, the National Congress actively opposed the Soviet Union's communist ideology, sought for full independence and further played a crucial role in laying the foundation for liberal democracy on this land.
    Fifth, in the confusion and turbulence under the context of the liberation, although it was bad, the historical fact that only South Korea was able to establish a national form of a (free)democratic republic gives a great insight into the present Korean situation today.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국문초록
    광복을 맞이한 대한민국이 직면해야 했던 것은 완전한 독립이 아닌 38선으로 가로막힌 분단된 조국이었다. 그리고 좌익과 우익의 첨예한 대립 가운데 우리의 조국은 인민공화국이냐 민주공화국이냐의 갈림길에 있었다. 대한민국의 민주공화국 국가건설을 위한 “건국투쟁”이 있게 되었다. 일반 국민들은 해방의 기쁨과 함께 혼돈스러운 정국 가운데서 미래로 나아가야 할 방향설정이 필요했다. 따라서 그 당시 지도자들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그들의 미래에 대한 혜안과 고뇌와 결단과 지도력이 국가의 장래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으며, 이를 통하여 국민들이 시대적 국가 상황을 인식하고 일치된 방향성을 갖게 되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협력이 어느 때보다 너무도 절실하고 소중한 시국이었다. 그 중심에 “민족의 총의(總意)”가 발현되었던 국민대회가 이뤄지고 있었다. 국민대회는 미래지향적인 방향설정이 있었고, 소통의 장이었으며, 일치된 실천이 역동적으로 일어난 역사적 현장이었다.
    해방정국에서 국민대회는 여러 주제와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수많은 국민대회가 주로 서울에서 발화되어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모든 국민대회를 다루지 않고 ‘국민대회준비위원회’와 주요 국민대회 즉, ‘반탁국민대회’, ‘3.1절기념국민대회’, ‘독립전취국민대회’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했다.
    국민대회를 통해서 해방정국의 혼란과 소용돌이의 국면에서, 국내와 국제정세 그리고 국가장래에 대한 바른 인식과 혜안이 갖추어진 리더가 앞장서서 국민 인식을 변화시키며,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했다. 뿐만 아니라 ‘국민의 총의’을 이끌어내어 민족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틀어주었던 자유민주적인 장(場)이 바로 국민대회였다.
    우리는 선진들의 희생과 분투로 이뤄진 대한민국에서 자유를 누리고 그 터 위에서 민족의 저력과 유산을 물려받아 과학기술 및 경제발전과 문화창달을 이뤄올 수 있었다. 이제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 후진들이 그것을 보존하고 계승 발전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감당해야할 책무이며 현재와 국가 장래를 위한 사명이기도 하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해방정국의 혼란과 소용돌이의 국면에서, 국내와 국제정세 그리고 국가장래에 대한 바른 인식과 혜안이 갖추어진 리더가 앞장서서 국민 인식을 변화시키며,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고, 뿐만 아니라 ‘국민의 총의’을 이끌어내어 민족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틀어주었던 자유민주주의 장(場)이 바로 국민대회였다. 국민대회는 대한민국 국가건설 과정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바른 인식과 함께, 선진들이 이루었던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의 가치와 역사적 유산을 계승,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그동안 학계에서, 해방정국 격동의 시대에 왕성하게 펼쳐져 왔던 국민대회에 대한 연구논문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 국민대회와 관련된 생생한 역사적인 자료를 나름대로 정리, 평가를 해보았다. 한국현대사와 관련된 학문적인 분야에 미력하나마 기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본 연구를 통해 당시 보도된 일간신문의 생생한 자료와 미군정 자료뿐만 아니라, 그 외 기록된 중요한 1차 자료들을 통해, 이후 관련연구에 도움이 되리라고 여겨진다. 또한 본 연구가 등장함으로써 앞으로의 후속 연구에도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제 연구결과물에 대한 활용 방안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본 연구자는 학교에서 전공 강의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일반 한국근현대사의 내용을 함께 다루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본 연구의 결과물은 1차적으로 본인의 강의자료로 사용될 것이고, 따라서 수강 학생들에게 본 연구의 결과물을 소개하고 접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따라서 젊은이들이 해방정국의 상황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국가적 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결과물이 학술지 등에 게재되거나 출판되면, 더 많은 분들이 후속 연구를 위해 참고하리라 여겨진다.
    둘째, 본 연구의 결과물은 국내 저명한 학술지 등에 반드시 게재하고자 한다. 또한 학회나 단체에서 기회가 주어진다면, 발표를 통해서 본 논문이 널리 활용되도록 할 것이다. 이를 통해서 후속연구와 학계의 학문발전에 조금이나마 일조하길 원한다. 아울러 다수가 모이는 교회나 혹은 스터디 그룹에서도 본 연구의 결과물을 제시하여 토론을 통해서 인식의 지평이 넓혀질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 색인어
  • 색인 3.1독립운동, 3.1절기념국민대회, 국민대회, 국민대회준비위원회, 국민적 총의, 기미독립선언기념국민대회, 김구, 김규식,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대한민국, 독립전취국민대회, 모스크바 삼상회의, 미군정, 미소공동위원회, 민주공화국, 민주주의민족전선, 반탁국민대회, 송진우, 스티코프, 시위, 신탁통치,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안재홍, 여운형, 오세창, 오하영, 완전한 독립, 우익, 의사소통의 장, 이승만, 인민공화국, 임시정부, 자유민주주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좌익, 하지, 해방, 해방정국, 환영준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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