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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움가르텐 미학과 베르트하임 성경 논쟁 - 서양 근대 미학의 신학적-지성사적 배경
Baumgarten’s Aesthetics and the Wertheim Bible Debate - Theological-Historical Background of the Western Modern Aesthetics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신진연구자지원사업& #40;인문사회& #41;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9-S1A5A8-2019S1A5A8034202
선정년도 2019 년
연구기간 1 년 (2019년 05월 01일 ~ 2020년 04월 30일)
연구책임자 안윤기
연구수행기관 장로회신학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는 바움가르텐(Alexander Gottlieb Baumgarten) 미학의 기원을 18세기 초반의 유럽 지성사적 맥락 속에서 찾아보되, 특히 종교적 배경, 그러니까 경건주의(Pietismus) 신학과의 관련성을 주목하려 한다. 바움가르텐은 근대 미학의 개척자이기 이전에 이미 신학을 전공한 종교인이었고, 그가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할레는 루터파 개신교의 부흥 운동인 경건주의 정신으로 충만했던 공간이었다. 특히 18세기 초반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경건주의는 프랑스에서 새로 유입된 계몽주의 사상과 일대 격돌을 벌이게 되는데, 1723년 크리스챤 볼프(Christian Wolff)의 할레 대학 교수직을 박탈하고 추방시킨 것이 이 충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이었다. 또한 1735년 새로 번역되어 출간된 ‘베르트하임 성경’(Wertheimer Bibel)을 두고도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는데, 경건주의자들이 보기에 이 성경은 너무 ‘볼프의 계몽주의 정신’으로 번역되어서 제대로 된 성경이 아니라고 정죄한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런 비판의 기치를 높이 든 주동 인물이 당시 할레 대학 신학과장인 요아힘 랑에(Joachim Lange)였고, 그는 동료 교수들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진 모든 정치적 수단과 베를린 궁정의 인맥을 다 동원해서 베르트하임 성경 퇴치 운동에 발 벗고 나섰으며, 바로 이 무렵 바움가르텐은 그의 첫 작품인 『시론』(Meditationes philosophicae de nonnullis ad poema pertinentibus, 1735)을 작성하여 할레 대학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시론』은 바움가르텐 미학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데, 이로 보건대 그 작품에서 베르트하임 성경 번역을 비판하려는 할레 대학 신학과 전체의 기획 의도, 더 나아가서 점차 독일에서 세력을 넓히려던 계몽주의의 예봉을 꺽으려 하는 저자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근대 미학은 그 성립과정에서 경건주의 신학을 옹호하려는 종교적 의도가 있었다거나, 혹은 ‘옹호’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경건주의 신학과 뭔가 코드가 통하는 면모가 있다는 과감한 해석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근대 미학 성립의 배경 분석을 통해 궁극적으로 학제간 융합, 그러니까 종교와 예술, 미학의 상호 소통을 통한 통합적 이해를 추구한다. 물론 미학과 예술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독자적 삶의 영역이고, 물질문명과 과학기술 연구가 첨단을 달리는 오늘날 일종의 ‘해독제’와 같이 더 많이 요구되는 분야임에 틀림없지만, 종교라는 다른 영역과의 통섭을 통해 감성과 예술이 가진 잠재력은 더욱 풍성히 드러날 것으로 기대된다.
  • 기대효과
  • 본 연구를 통해 일차적으로 기대되는 학문적 기여는 지금까지 국내 학계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던 한 분야에 대한 지식 확충이다. 근대 미학의 아버지로서 바움가르텐의 이름은 도처에서 거론되어도 그의 사상을 주제로 파고드는 연구물은 지금까지 그리 많지 않았고, 2000년대 이후 바움가르텐을 다룬 연구물이 몇 편 나왔다 해도 그 내용은 대개 개론적 소개 수준을 벗어나지 않았다. 바움가르텐의 문헌을 본격적으로 분석할 본 연구는 지금까지 그 중요성에 비해 연구가 현저히 부족했던 한 분야를 보충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또한 바움가르텐의 미학을 연구하되, 그것을 18세기 초반 문학적-신학적 논쟁의 맥락에서 조명하는 것도 나름대로의 고유한 가치와 의미를 지닐 것이다. 우선 그것이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며, 또한 다른 영역과의 소통 가운데 각 영역을 발전시키는 것이 이 시대의 요구이기 때문이다. 예술의 정체성을 묻는 것은 언제나 뜨거운 감자였다. 인간의 삶이 그렇게 항상 이성적으로만 돌아가지는 않고, 또 예술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기쁨이 크기 때문이다. 그 가치가 소중하기에 많은 미학 전공자들은 예술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절대적 가치로 놓고 고수하려 한다. 그러나 본 연구는 그러한 고정관념에 도전하며, 도리어 종교와의 대화에서 예술과 미학 연구가 더 큰 활력을 얻게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줄 것이다.
    연구의 결과물은 ① 바움가르텐 미학의 경건주의적 배경을 심도 있게 다룬 연구논문과 ② 18세기 초반의 지성사 및 각종 문학적-신학적 논쟁을 상세히 기술한 한 편의 단행본으로 나올 것이다. 본질적으로 본 연구는 과거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고전 문헌을 분석하는 역사적 연구인지라 그것이 끼칠 현대적 영향과 함의를 미리 예단하기는 어려우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는 명언처럼 본 연구를 통해 학계와 예술계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미학과 예술의 기원을 다시 생각하고 그 정체성을 새로이 고민해 보는데 적지 않은 이바지를 할 것이다.
  • 연구요약
  • 본 연구에서는 바움가르텐 미학의 성립 배경을 18세기 초엽 독일 지역의 지성사 및 논쟁의 맥락 속에서 살펴 보되, 특히 경건주의와의 연관성에 주목하려 한다. 연구의 단초로 1735년 ‘베르트하임 성경 논란’을 검토할 것이다. 베르트하임 성경이란 독일의 신학자 요한 로렌츠 슈미트가 성경을 새로 번역하여 베르트하임에서 출간한 책인데 기존의 번역본과 상당히 달랐다. 번역의 차이가 났던 것은 번역 원칙이 기존의 것과 달랐기 때문인데, 슈미트는 명확한 번역을 추구했다. 슈미트가 그런 번역을 시도했던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당시 계몽주의 풍조의 영향으로 무신론자가 독일에도 많이 등장했으며, 그들은 성경의 약점을 들어서 교회를 공격했는데, 예컨대 성경의 많은 구절이 앞뒤가 안 맞는다든지, 특정 본문의 논리 전개나 신학적 설명에 공백이 있으며, 기적이나 예언, 귀신 이야기 같은 비과학적 이야기가 성경에 많이 담겨 있다는 것 등이 빌미를 제공했던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원어에 기초해 명료하게 다시 번역하면 그런 오해와 비판이 사라질 것이라고 슈미트는 기대했다.
    그런데 자신의 번역본이 독일 교회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슈미트의 기대는 완전히 오산이었다. 교회는 신도들의 신앙 장려를 위해 어느 정도의 애매성과 모호성이 있는 성경 본문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대표적 사례가 ‘구약의 메시야 예언’이라고 전통적으로 해석되어온 구절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암시가 이미 수천 년 전 문헌 곳곳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초자연적인 종교 교리를 믿도록 신도를 설복시키는 데에 매우 유리한 단서들이었다. 그런데 베르트하임 성경에서는 그런 구절들을 아주 무미건조한 기술로 바꿔버렸기 때문에 특히 경건주의 진영에서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다. 성경의 신비한 힘을 ‘거세’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슈미트의 죄목이다. 경건주의자들이 볼 때 슈미트는 성경의 ‘예언적 성격’을 제거하여 기독교를 파괴시키려는 중한 죄를 저질렀다. 그런데 혹자는 이 성경의 예언적 성격을 ‘시적 성격’으로 바꾸어서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성경은 근본적으로 시적 성격을 가진 예술 작품과 같아서 그저 기계적으로 딱딱하게 읽고 이성적으로 논할 수 없는 문헌인데, 슈미트는 볼프 이성주의에 경도된 나머지 성경 번역을 엉터리로 해버렸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프랑스 시인 니콜라 브왈로의 유명한 문장을 글에서 인용하곤 했다. 브왈로는 일찍이 롱기누스의 『숭고론』을 프랑스어로 번역했는데, 그 책의 서언 말미에서 브왈로는 롱기누스가 창세기에 기록된 신의 말씀(“빛이 있으라”)을 숭고한 언어의 대표적 사례로 칭송한 사실을 들어서, “기독교를 믿지 않았던 이방인조차도 성경 언어의 숭고함, 그러니까 성경 문헌의 예술적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다”고 결론내린 바 있다. 그런데 엄연히 기독교인임을 자처한 슈미트가 성경에서 시적 성격을 말살하는 큰 잘못을 범했다는 것이다. 본 연구는 바로 이 점에서 바움가르텐 미학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베르트하임 성경 논란이 극에 달했던 1735년 가을 바움가르텐은 할레 대학 신학과 학생으로서 『시론』을 학위 논문으로 제출한다. 근대 미학의 효시가 되는 이 논문이 당시 엄청난 논쟁거리였던 베르트하임 성경 번역 문제와 전혀 무관하리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당시 할레 대학 신학과는 볼프주의 축출 전쟁의 선봉에 선 요아힘 랑에가 주도했으며, 바움가르텐의 형은 교수로서 서명에 동참했다. 바움가르텐의 친구인 임마누엘 퓌라는 브왈로의 불어역 롱기누스 『숭고론』을 1736년에 독일어로 번역한 사람이며, 더욱이 번역본 서문에서 밝히기를, ‘자신이 『숭고론』에 관심 갖게 된 것은 성경 언어의 예술성 때문’이라 했다. 이와 비슷한 신학적 동기를 바움가르텐의 미학 작업에서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 본 연구의 근본 취지이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에서는 바움가르텐 미학의 성립 배경을 18세기 초엽 독일 지역의 지성사 및 논쟁의 맥락 속에서 살펴보되, 특히 경건주의와의 연관성에 주목하였다. 연구의 단초로 1735년 ‘베르트하임 성경 논란’을 살펴보았다. 베르트하임 성경이란 독일의 신학자 요한 로렌츠 슈미트가 성경을 새로 번역하여 베르트하임에서 출간한 책인데, 합리적이고 명확한 번역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많은 논란을 유발시켰다. 교회는 신도들의 신앙 장려를 위해 어느 정도의 애매성과 모호성이 있는 성경 본문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르트하임 성경에서는 그런 구절들이 아주 무미건조하게 바꿔버렸기 때문에 성경의 신비한 힘을 ‘거세’한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슈미트의 죄목이다. 경건주의자들이 볼 때 슈미트는 성경의 ‘예언적 성격’을 제거하여 기독교를 파괴시키려는 중한 죄를 저질렀다. 그런데 혹자는 성경의 예언적 성격을 ‘시적 성격’으로 바꾸어서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성경은 근본적으로 시적 성격을 가진 예술 작품과 같아서 합리적으로 논할 수 없는 문헌인데, 슈미트는 볼프 이성주의에 경도된 나머지 엉터리 성경 번역을 했다는 것이다.

    본 연구는 바로 이 점에서 바움가르텐 미학의 단초를 발견하려 했다. 베르트하임 성경 논란이 극에 달했던 1735년 가을 바움가르텐은 할레 대학 신학과 학생으로서 『시론』을 학위 논문으로 제출한다. 근대 미학의 효시가 되는 이 논문이 당시 엄청난 논쟁거리였던 베르트하임 성경 번역 문제와 전혀 무관하리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당시 할레 대학 신학과는 볼프주의 축출 전쟁의 선봉에 선 요아힘 랑에가 주도했으며, 바움가르텐의 형은 교수로서 서명에 동참했다. 바움가르텐의 친구인 임마누엘 퓌라도 위협받는 성경 언어의 예술성 때문에는 브왈로의 불어역 롱기누스 『숭고론』을 1736년에 독일어로 번역했다. 이와 비슷한 신학적 동기가 바움가르텐의 미학 작업에서도 찾아진다는 것이 본 연구의 근본 취지이다.

    바움가르텐은 『시론』에서 감성적 지식과 미적 사유를 위한 새로운 학문으로 ‘미학’(aesthetica)이 있어야 할 것을 주장한다. 그것은 상위 인식 능력을 다루는 볼프의 논리학에 추가되어야 하며, 이것과 평행선을 그리며 제각기 발전해야 할 것이다. 논리학이 이성을 수단으로 하여 명석하고 판명한 지식을 추구한다면, 향후 수립되어야 할 미학은 감성을 수단으로 하여 명석하기는 해도 판명하지는 않은, 그러니까 혼돈성을 지닌 지식(cognitio clara, non distincta, sed confusa)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115).

    이와 같은 바움가르텐의 이야기를 얼핏 들어보면 그가 새로이 개척하려는 미학이 참 겸손한 학문일 것 같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다. 미학의 등장으로 인해 논리학은 점차 코너에 몰리게 되었다. 새로운 학문이 도입되어야 할 이유로 바움가르텐은 두 가지를 들고 있는데, 하나는 우리 인간에게 보다 적절한 지식은 추상적인 것보다는 개별적 사실들에 관한 것이 더 많고, 또 다른 하나는 시와 예술의 가능성이 이성의 영역에서는 봉쇄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에게 명석 판명한 지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연역적인 지식은 수학 같이 지극히 좁고 특수한 분야에서만 예외적으로 가능한 것이고, 실상 우리가 가진 대다수의 지식은 귀납을 통해 보편에 점진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 풍요로움을 포착하는 것이 예술의 작업이고, 예술을 통해 인간이 발견하는 ‘미’는 협소한 논리적 지식이 줄 수 없는 기쁨을 인간에게 준다.

    여기서 초점은 ‘이성 능력의 제한’에 있다. 그리고 왜 인간에게 그런 태생적 한계가 주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을 바움가르텐은 성경에 기록된 인간의 타락에서 찾는다. 그러니까 감성학으로서의 ‘에스테티카’를 주장한 배경에도 바움가르텐의 경건주의 신학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시와 예술의 가능성을 확보하는 작업에도 역시 바움가르텐의 경건주의적 배경이 깊은 관련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 영문
  • In this study, the beginning of modern aesthetics was examined in the context of intellectual history and debate in Germany in the early 18th century, and particularly focused on the connection with the christian pietism. As a starting point, the “Werthheim Bible Controversy”(1735) was discussed. It was a new translation by a lutheran theologian, Johann Lorenz Schmidt, and it caused a lot of controversy for its rational and clear translation, because the church wanted a biblical text with some ambiguity and vagueness in order to encourage believers’ faith. However, in the Wertheim Bible, the verses were translated so dryly that the mysterious power of the Bible was “castrated”. Schmidt was charged to commit a serious sin of destroying Christianity by removing the “prophetic character” of the Bible. And someone understood the prophetic nature of the Bible as a “poetic character”. Bible should be regarded as a piece of fine art with a poetic character, which cannot be reasonably discussed.

    From this historical background, the beginning of modern aesthetics can be understood. In the fall of 1735, when the Wertheim Bible controversy reached its peak, Baumgarten, as a student of theology at Halle University, submitted the Reflections on Poetry as his thesis. It is hard to imagine that this dissertation, which announced the beginning of modern aesthetics, had nothing to do with the issue of the Wertheim Bible, which was a subject of great debate. At that time, the Department of Theology at Halle University was led by Joachim Lange, who was at the forefront of the war to oust Wolffianism, and Baumgarten’s elder brother joined the signature as a professor. Baumgarten’s friend, Immanuel Pyra, translated Boileau’s French translation of Longinus’ The Sublime into German in 1736 because of the threatened artistry of the biblical language. And similar theological motives are found also in Baumgarten’s aesthetic work.

    In Reflections on Poetry, Baumgarten argues that a new study for emotional knowledge and aesthetic thinking is asked, which is named “aesthetica”. It should be added to Wolf’s logic, and will have to develop in parallel with it. If logic is pursuing “clear and distinct knowledge” by means of reason, aesthetics should pursue “clear, but not distinct knowledge” by means of sensitivity, that is, knowledge with confusion (cognitio clara, non distincta, sed confusa, § 115).

    With the advent of aesthetics, logic gradually came to the corner. Baumgarten has two reasons for the introduction of a new discipline. One is that knowledge more appropriate for us humans is more about individual facts than abstract ones, and the other is that the possibility of poetry and art is considered to be blocked in the realm of reason. In other words, clear and distinct knowledge is for us humans, exceptionally possible only in extremely narrow and special fields such as mathematics, and in fact, most of our knowledge is confused and only a gradual approach to the universal truth through induction. The ability of reason is limited, and Baumgarten finds an explanation of such inherent limitation in the fall of man recorded in the Bible. Therefore, Baumgarten’s pietistic theology was in the background of his asserting to establish a new discipline, “aesthetica”.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에서는 바움가르텐 미학의 성립 배경을 18세기 초엽 독일 지역의 지성사 및 논쟁의 맥락 속에서 살펴 보되, 특히 경건주의와의 연관성에 주목하였다. 연구의 단초로 1735년 ‘베르트하임 성경 논란’을 살펴보았다. 베르트하임 성경이란 독일의 신학자 요한 로렌츠 슈미트가 성경을 새로 번역하여 베르트하임에서 출간한 책인데 기존의 번역본과 상당히 달랐다. 번역의 차이가 났던 것은 번역 원칙이 기존의 것과 달랐기 때문인데, 슈미트는 합리적이고 명확한 번역을 추구했다. 슈미트가 그런 번역을 시도했던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당시 계몽주의 풍조의 영향으로 무신론자가 독일에도 많이 등장했으며, 그들은 성경의 약점을 들어서 교회를 공격했는데, 성경을 명료하게 다시 번역하면 그런 오해와 비판이 사라질 것이라고 슈미트는 기대했다. 그런데 슈미트의 기대는 완전히 오산이었다. 교회는 신도들의 신앙 장려를 위해 어느 정도의 애매성과 모호성이 있는 성경 본문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베르트하임 성경에서는 그런 구절들을 아주 무미건조한 기술로 바꿔버렸기 때문에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다. 성경의 신비한 힘을 ‘거세’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슈미트의 죄목이다. 경건주의자들이 볼 때 슈미트는 성경의 ‘예언적 성격’을 제거하여 기독교를 파괴시키려는 중한 죄를 저질렀다. 그런데 혹자는 이 성경의 예언적 성격을 ‘시적 성격’으로 바꾸어서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성경은 근본적으로 시적 성격을 가진 예술 작품과 같아서 그저 기계적으로 딱딱하게 읽고 이성적으로 논할 수 없는 문헌인데, 슈미트는 볼프 이성주의에 경도된 나머지 성경 번역을 엉터리로 해버렸다는 것이다. 본 연구는 바로 이 점에서 바움가르텐 미학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베르트하임 성경 논란이 극에 달했던 1735년 가을 바움가르텐은 할레 대학 신학과 학생으로서 『시론』을 학위 논문으로 제출한다. 근대 미학의 효시가 되는 이 논문이 당시 엄청난 논쟁거리였던 베르트하임 성경 번역 문제와 전혀 무관하리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당시 할레 대학 신학과는 볼프주의 축출 전쟁의 선봉에 선 요아힘 랑에가 주도했으며, 바움가르텐의 형은 교수로서 서명에 동참했다. 바움가르텐의 친구인 임마누엘 퓌라는 브왈로의 불어역 롱기누스 『숭고론』을 1736년에 독일어로 번역한 사람이며, 더욱이 번역본 서문에서 밝히기를, ‘자신이 『숭고론』에 관심 갖게 된 것은 성경 언어의 예술성 때문’이라 했다. 이와 비슷한 신학적 동기가 바움가르텐의 미학 작업에서도 찾아진다는 것이 본 연구의 근본 취지이다.
    바움가르텐은 『시론』에서 감성적 지식과 미적 사유를 위한 새로운 학문으로 ‘미학’(aesthetica)이 있어야 할 것을 주장한다(§116). 그것은 상위 인식 능력을 다루는 볼프의 논리학에 추가되어야 하며, 이것과 평행선을 그리며 제각기 발전해야 할 것이다. 논리학이 이성을 수단으로 하여 명석하고 판명한 지식을 추구한다면, 향후 수립되어야 할 미학은 감성을 수단으로 하여 명석하기는 해도 판명하지는 않은, 그러니까 혼돈성을 지닌 지식(cognitio clara, non distincta, sed confusa)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115).
    이와 같은 바움가르텐의 이야기를 얼핏 들어보면 그가 새로이 개척하려는 미학이 참 겸손한 학문일 것 같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다. 미학의 등장으로 인해 논리학은 점차 코너에 몰리게 된 것이다. 새로운 학문이 도입되어야 할 이유로 바움가르텐은 두 가지를 들고 있는데, 하나는 우리 인간에게 보다 적절한 지식은 추상적인 것보다는 개별적 사실들에 관한 것이 더 많고, 또 다른 하나는 시와 예술의 가능성이 이성의 영역에서는 봉쇄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에게 명석 판명한 지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연역적인 지식은 수학 같이 지극히 좁고 특수한 분야에서만 예외적으로 가능한 것이고, 실상 우리가 가진 대다수의 지식은 귀납을 통해 보편에 점진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 풍요로움을 포착하는 것이 예술의 작업이다. 예술을 통해 인간이 발견하는 ‘미’는 협소한 논리적 지식이 줄 수 없는 기쁨을 인간에게 준다. 미적 체험이 가져다 주는 풍요로움과 생명력은 감성적 인식에 속한 것이다.
    여기서 초점은 ‘이성 능력의 제한’에 있다. 그리고 왜 인간에게 그런 태생적 한계가 주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을 바움가르텐은 성경에 기록된 인간의 타락에서 찾는다. 그러니까 감성학으로서의 ‘에스테티카’를 주장한 배경에도 바움가르텐의 경건주의 신학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시와 예술의 가능성을 확보하는 작업에도 역시 바움가르텐의 경건주의적 배경이 깊은 관련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를 통해 일차적으로 기대되는 학문적 기여는 지금까지 국내 학계에서 잘 다루지 않았던 한 분야에 대한 지식 확충이다. 근대 미학의 아버지로서 바움가르텐의 이름은 도처에서 거명되어도 그의 사상을 깊이 파고드는 연구물은 지금까지 그리 많지 않았고, 2000년대 이후 바움가르텐을 다룬 연구물이 몇 편 나왔다 할지라도 그 내용은 단순한 소개이거나 칸트 미학으로 가는 징검다리 정도로 바움가르텐을 다루었을 뿐이었다. 바움가르텐의 일차문헌을 본격적으로 분석하는 본 연구는 지금까지 그 중요성에 비해 연구가 현저히 부족했던 한 분야를 보충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바움가르텐의 미학을 연구하되, 그것을 18세기 초반의 문학적-신학적 논쟁의 맥락에서 조명하는 것도 나름대로의 고유한 가치와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런 식의 접근은 우리가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고도 심도 있게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며, 또한 다른 영역과의 소통 가운데 각 영역을 발전시키자는 우리 시대의 트렌드와도 잘 부합한다. 예술의 정체성을 묻는 것은 언제나 뜨거운 감자였다. 인간의 삶이 항상 이성적으로만 돌아가지는 않고, 또 예술이 우리 삶에 가져다 줄 수 있는 기쁨이 크기 때문이다. 그 가치가 소중하기에 많은 미학 전공자들은 예술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절대적 가치로 놓고 고수하려 한다. 그러나 본 연구는 그러한 고정관념에 도전하며, 도리어 종교와의 대화에서 미학 연구가 더 큰 활력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줄 것이다.
    연구의 결과물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1) 바움가르텐 미학의 경건주의적 배경을 심도 있게 다룬 연구논문
    (2) 18세기 초반의 지성사 및 각종 문학적-신학적 논쟁을 상세히 기술한 단행본

    본질적으로 본 연구는 과거 역사를 재구성하고, 고전 문헌을 분석하는 문헌적-역사적 연구이기에, 그것이 끼칠 현대적 영향과 함의를 확실히 예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는 명언처럼 본 연구를 통해 학계와 예술계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미학과 예술의 기원을 다시 생각하고 그 정체성을 새로이 고민해 보는데 적지 않은 이바지를 할 것으로 기대한다.
  • 색인어
  • 바움가르텐, 미학, 감성, 예술, 경건주의
  • 연구성과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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