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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와 근대적 국가주의 연구
The 1977 Iri Station Explosion and modern nationalism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9-S1A5A2A01-2019S1A5A2A01046008
선정년도 2019 년
연구기간 1 년 (2019년 07월 01일 ~ 2020년 06월 30일)
연구책임자 원도연 [ NRF 인문사회 연구책임 2회 수행 / 공동연구 2회 수행 / 학술논문 25편 게재 / 총 피인용 165회 ]
연구수행기관 원광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1977년 11월 11일 일어난 이리역 폭발사고는 지금까지 한국 철도사상 최악의 사고로 기록되고 있다. 이 사고로 공식 기록으로만 사망자 59명 등 1,076명이 다치고, 9,973명이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건물 피해액만 51억원에 달했다. 이리역 폭발사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재난이었다. 이리역 폭발사고가 일어난 1977년 이리시의 인구는 12만명이었고, 1년 예산은 41억원이었다. 사고는 이 작은 도시가 감당할 만한 수준을 넘었다.
    이리역 폭발사고는 국가적 재난으로 선포되었고 당시 박정희 정부는 이 사고를 매우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수습해나갔다. 이리의 재난을 맞아 전국민들이 구호품과 의연금을 보냈고 사고 후 거의 1년여 동안 이루어진 복구과정은 국가적 이벤트가 되다시피 했다. 실제로 이 사고 이후 이리시는 도시 전체가 완전히 새롭게 변모했는데, 도시를 가로지르는 간선도로와 신역사, 아파트와 산업단지 등 오랜 지역발전의 과제를 성취했다. 당시 이리시는 도시발전을 30여년 앞당겼다는 자축과 환영의 목소리를 내면서, 사고 발생의 주범이었던 신무일을 조기에 석방하자는 시민운동까지 일어나기도 했다.
    이리역 폭발사고는 사고의 원인과 피해상황이 비교적 명료하게 밝혀져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역 폭발사고는 지난 40여년 동안 익산시민들에게 매우 혼란스러운 사건으로 남겨져 있다. 이 폭발사고가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은 매우 깊고 광범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고는 정확하게 기록되고 관리되지 못했다.
    즉 사건의 총론은 있으나 각론은 매우 단편적이고 수동적이며 편파적으로 남겨져 있다. 사고의 기록은 많으나 거의 비슷비슷한 개인의 기억들이 자가복제되어 확산되었고, 남겨진 기록들은 철저하게 국가와 도시의 관점으로 작성되었다. 즉 피해자는 있으나 익명으로 남았고, 도시는 변화했으나 시민들은 철저하게 대상화된 사건으로 남았다.
    이리역 폭발사고에 대해 가장 정밀한 기록은 사고 이듬해 전라북도에서 펴낸 이리역 폭발사고 백서 󰡔총화의 기적 - 이리재해복구백서󰡕이다. 이 백서는 탄탄하게 구성되었지만 철저하게 국가의 재난관리라는 관점에서 씌여졌다. 심지어 이 사고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사망 피해자들의 명단조차 정리되지 않았다.
    이렇게 국가가 직접 나서서 관리하고 대통령이 앞장서서 피해복구에 열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당시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과 이리시민들은 그 흔적들을 거의 찾을 수가 없다. 특히 당시 철인동이라고 불렸던 이리역 앞 빈민가이자 사창가였던 지역은 지금 익산시의 어떤 역사와 공식기록에도 남아있지 않다.
    이처럼 사람들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고 사고 이후 극적인 도시변화가 이루어진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리역 폭발사고는 그 본질과 내용들이 거의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리역 폭발사고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는 ‘속도’였다. 신속하게 사고의 원인과 경위를 밝히고 더 신속하게 도시를 복구하는 것이 당시 박정희 정부의 목표였다.
    사고가 발생한 1977년은 박정희 유신독재가 최절정에 도달했던 시기였다. 정치적 반대세력은 강한 압박을 받고 있었고, 정권 내부의 균열은 아직 도드라지지 않고 있었던 그야말로 폭풍전야와 같은 시기였다. 이 어둡고 침잠한 시기에 이리역 폭발사고는 발생했고, 박정희 정부는 가장 자신다운 방식으로 이 사고를 수습했다.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는 그 사고와 수습의 과정에서 박정희 독재로 대표되는 국가주의 혹은 권위주의적 정부가 어떻게 국가적 재난에 대응했으며 어떻게 지역사회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지배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리역 폭발사고의 본질은 화약사고였다. 화약사고는 엄연히 그 최종적인 관리책임이 국가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그 사고의 책임과 수습의 과정을 철저하게 이데올로기적으로 통제하고 권위주의 정부를 강화하는 기제로 활용했다.
    본 연구의 핵심목표는 이리역 폭발사고를 통해 근대적 국가주의가 어떻게 지역사회를 실질적으로 변화시키고 동화시켰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권위주의적 국가의 폭력적 통제에만 기반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지역사회를 지배했던 유지들의 이데올로기적 동원과 자발적 민중동원이 동시에 나타났다. 즉 그람시의 헤게모니적 지배가 가장 강력하게 발현된 하나의 정교한 사실극과도 같았다.
  • 기대효과
  • 2017년 이리역폭발사고 40주년은 이리역 폭발사고에 대한 시민적 관심을 다시금 불러 일으켰다. 무엇보다 40년이 지나면서 이 폭발사고로 인해 희생당한 희생자들의 숫자와 이름도 명확하지 않으며, 이 사고가 유신정권의 막바지에 벌어지면서 국가적으로 관리되어 익산시와 익산시민의 관점에서 이 폭발사고를 정리하는 어떤 시도도 없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일깨워졌다.
    41년이 지난 지금도 이리역 폭발사고는 익산시민에게 깊은 상처로 남겨졌지만, 이 사건이 갖는 정치사회적 의미와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 등은 다양한 관점에서 조사되거나 연구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무엇보다 이리역 폭발사고를 둘러싼 유언비어는 사고 직후부터 41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도 사고 당시 이리시민 중 사망자의 숫자에 대해서는 지금껏 정확한 내용과 명단이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또 이리역 폭발사고 이후 본격화된 새이리 건설 사업은 익산의 백년대계를 결정짓는 중요한 도시계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익산시민들은 그 결정과 건설의 과정에서 배제되다시피 했다. 사고 이후 복구과정은 오늘날 익산 구도심의 기본적인 도시계획을 완전히 새롭게 수립하는 것이었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익산의 도시성격을 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안의 중요성에 비해 그 의미와 과정은 명확하게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
    이렇듯 이리역 폭발사고와 익산의 현대사는 결코 뗄 수 없는 수많은 연결점들을 갖고 있다. 지금 익산의 도시구성과 가로, 주요한 건물과 장소들, 그리고 사람들의 장소에 대한 기억 속에서 이리역 폭발사고와 관련되지 않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리역 폭발사고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또 익산시민들은 잠재적으로 이리역 폭발사고를 깊이 들여다보고 그 상처에 공감하는데 소극적이다. 이리역 폭발사고는 익산시민들에게 사람에 대한 기억과 추모보다는 도시에 대한 기억이 더 크게 남겨진 특이한 사건이다. 극단적으로는 사람보다는 도시가, 이리시보다는 전라북도가, 도시의 파괴보다는 도시의 계획이 더 중요하게 기록된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익산시민들의 이리역 폭발사고에 대한 인식은 어떤 점에서는 공정하지 못하다.
    본 연구는 이리역 폭발사고를 익산시와 시민의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하여 그 의미를 정리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리역 폭발사고의 피해 당사자와 관련자들을 찾아 당시의 사건을 재구성하는 구술사와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일에 집중하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사고의 발생과 원인보다는 사고 후의 과정이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억울한 희생은 없었는지 지금이라도 우리는 확인해야 한다. 또 밝혀진 사망자들의 사연도 살려내야 한다.
    또 한편 이리역 폭발사고는 40여년이 지나면서 비극적 재난이라는 사실을 넘어 도시의 근대역사로 기념되고 있다. 그러나 시민들의 불완전한 기억과 의심스러운 기록들을 어떤 형태로든 정리할 때 사건은 도시의 역사와 문화로 새롭게 정리될 수 있다. 따라서 이 비극적인 사고를 좀 더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고 사고의 총체적인 면모와 삭제된 이야기들을 살려낼 필요는 있다. 이리역 폭발사고의 본질은 독재권력에 의한 국가폭력이 일상화, 제도화된 시기를 대변하는 사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연구는 2018년 익산시에서 주관한 <이리역 폭발사고 시민백서> 사업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고, 일종의 그 후속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시민백서 사업은 처음 2년간의 연속사업으로 제안되었으나, 익산시의 사정상 1년으로 종료되었고 연구자로서는 이 사업을 보다 학문적으로 체계화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1차적으로 이 연구를 통해 산출할 수 있는 자료들은 이리역 폭발사고의 진상과 내용을 기록한 자료들의 데이터베이스다. 여기에는 국가기록원의 문서, 신문기사 등인데, 단순하게 자료를 모으는데 그치지 않고 이 자료들을 훗날 온라인 아카이브에 탑재할 수 있도록 메타데이터로 구축하고자 한다.
    두 번째는 영상자료들이다. 영상자료는 이리역 폭발사고 당시의 기록을 담은 다양한 기록들인데 대표적으로 대한뉴스와 방송사들의 당시 사고 후 영상기록들이다. 이 기록들을 수집하여 데이터화하고 훗날의 지역연구에 사용될 수 있게 하고자 한다.
    세 번째는 구술자료들이다. 이제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고령 경험자들의 구술과 당시 사고를 직접 경험했던 이들의 구술을 기록하고 이를 훗날 지역사 연구자들과 시민들에게 남기고자 한다.
  • 연구요약
  • 가. 연구내용
    이리역 폭발사고에 대한 연구는 크게 세 가지 내용으로 구성된다. 첫째는 이리역 폭발사고를 당시의 이리시민과 피해자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것이다. 둘째는 이 사고를 통해 도시가 실제로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객관적 자료를 통해 추적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방의 소도시에서 권위주의적 정부의 국가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도시를 계몽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통제했는지 그 기제를 분석할 것이다.
    1) 이리역 폭발사고의 재구성
    이리역 폭발사고의 평면적 사실은 기존의 공식기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호남의 관문이자 교통의 중심지였던 당시 이리시는 철인동이라는 특수한 지역을 이리역 앞에 두고 있었고, 이곳은 이리역 폭발사고의 최대 희생지역이 되었다. 본 연구는 당시 실제로 철인동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고 어떻게 이 사고에 대응했는가, 그리고 근본적으로 철인동이 어떤 지역이었는가를 사회사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이리역 폭발사고의 재구성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 중의 하나는 당시 사건의 사망자 수와 명단을 정확하게 밝히는 것이다. 사망자에 대한 기록과 함께 밝혀져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은 사고의 최대 피해지역이었던 철인동(철도 옆 창인동으로 행정동이 아닌 별칭으로 불린 특수지역)에 대한 것이다. 철인동의 지역적 특성은 이리역 폭발사고의 직후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이리역 폭발사고의 진실을 밝히는데 큰 어려움을 준다. 이리역 폭발사고는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이곳 한 도시공동체를 가장 폭력적인 방식으로 해체했다.
    2) 권위주의 시대, 지방도시의 재난과 재건 : 새이리건설
    새이리 건설은 이리역 폭발사고 이후 재난의 수습과 복구 과정에서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새이리 건설은 이 사건 이전부터 이리시의 미래 발전비전으로 제안되었고, 이리역 폭발사고는 필연적으로 이 사업과 연결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새이리 건설은 재난을 당한 도시의 복구를 넘어 도시발전이라는 관점으로 진전되지 못했다. 복구는 박정희 대통령의 은사이자 정부의 결단으로 미화되었다. 새이리 건설계획이 종합적으로 발표된 것은 사고가 발생한 지 13일만인 11월 24일이었다. 이리시의 시설복구에 109억 1천1백만원, 이리역 주변정화사업에 20억 8천9백만원을 투입하고 제2공단 건설과 재개발지구 개발사업은 관계기관이 시도와 협의 조정하여 별도로 추진한다는 것이 발표의 요지였다.
    새이리건설은 이렇게 재난을 당한 한 도시의 경관과 내용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지만, 결과적으로 완성되지 못한채 서둘러 마무리되었다.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가장 크게 의문을 갖고 있는 것은 1977년 11월 11일 이리역 폭발사고 이후 불과 10여일만에 이리시의 도시 전체를 변화시키는 도시계획이 어떻게 기획되었으며 누가 이 사업을 주도했는가 하는 점이다. 권위주의 정부 아래서 지방도시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 그 주체는 누구이며 시민들은 어떻게 통제되었는가, 만약 참여했다면 그 대표성은 어떻게 드러나고 작동했는가 등의 문제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3) 박정희 시대의 국가주의와 지방도시의 변화
    이리역 폭발사고는 예기치 못한 재난이었다. 사고 자체는 매우 우연적이었지만 사고가 수습되고 복구되는 과정은 철저하게 그 시대의 정치와 사회를 반영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리역 폭발사고가 사고 직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익산의 주체적인 역사로 기록되지 못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여기서는 먼저 이리역 폭발사고가 일어난 1977년이 어떤 시대였는지를 살펴보고 다음으로 사고가 수습되는 과정에서 드러난 사회사적 특징을 ① 1977년과 전체주의적 정권의 재난대응 ② 전체주의적 독재정권과 계몽의 시대라는 관점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나. 연구방법
    본 연구에서 수행할 핵심적인 연구방법은 문헌연구와 구술사연구가 될 것이다. 당시의 공식기록과 신문자료 등 자료수집과 분석을 통한 문헌연구가 1차적 작업이 될 것이고 여기에 당시의 사진자료와 영상자료를 분석하는 작업 등을 동시에 진행할 것이다. 또 아직 당시의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희생자 유족과 철인동에 거주하며 당시 사건을 직접 경험했던 시민들의 인터뷰를 분석할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이리역 폭발사고의 전체 과정과 이후 도시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1차 자료의 수집과 정리를 시작할 것이다. 익산시청을 비롯한 당시 관련 기관들의 자료를 찾아 정리하고, 국가기록원 등이 소장하고 있는 공식 기록물들을 최대한 찾아 당시 사고에 대한 1차 기록을 정리하고자 한다. 이러한 1차 기록과 함께 당시의 신문기사와 관련 회고담, 관련자들의 증언을 청취하고 관련 자료를 DB화 하는 작업도 진행할 것이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2017년 이리역폭발사고 40주년은 이리역 폭발사고에 대한 시민적 관심을 다시금 불러 일으켰다. 무엇보다 40년이 지나면서 이 폭발사고로 인해 희생당한 희생자들의 숫자와 이름도 명확하지 않으며, 이 사고가 유신정권의 막바지에 벌어지면서 국가적으로 관리되어 익산시와 익산시민의 관점에서 이 폭발사고를 정리하는 어떤 시도도 없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일깨워졌다.
    41년이 지난 지금도 이리역 폭발사고는 익산시민에게 깊은 상처로 남겨졌지만, 이 사건이 갖는 정치사회적 의미와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 등은 다양한 관점에서 조사되거나 연구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무엇보다 이리역 폭발사고를 둘러싼 유언비어는 사고 직후부터 41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도 사고 당시 이리시민 중 사망자의 숫자에 대해서는 지금껏 정확한 내용과 명단이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또 이리역 폭발사고 이후 본격화된 새이리 건설 사업은 익산의 백년대계를 결정짓는 중요한 도시계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익산시민들은 그 결정과 건설의 과정에서 배제되다시피 했다. 사고 이후 복구과정은 오늘날 익산 구도심의 기본적인 도시계획을 완전히 새롭게 수립하는 것이었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익산의 도시성격을 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안의 중요성에 비해 그 의미와 과정은 명확하게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
    이렇듯 이리역 폭발사고와 익산의 현대사는 결코 뗄 수 없는 수많은 연결점들을 갖고 있다. 지금 익산의 도시구성과 가로, 주요한 건물과 장소들, 그리고 사람들의 장소에 대한 기억 속에서 이리역 폭발사고와 관련되지 않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리역 폭발사고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또 익산시민들은 잠재적으로 이리역 폭발사고를 깊이 들여다보고 그 상처에 공감하는데 소극적이다. 이리역 폭발사고는 익산시민들에게 사람에 대한 기억과 추모보다는 도시에 대한 기억이 더 크게 남겨진 특이한 사건이다. 극단적으로는 사람보다는 도시가, 이리시보다는 전라북도가, 도시의 파괴보다는 도시의 계획이 더 중요하게 기록된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익산시민들의 이리역 폭발사고에 대한 인식은 어떤 점에서는 공정하지 못하다.
    본 연구는 이리역 폭발사고를 익산시와 시민의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하여 그 의미를 정리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리역 폭발사고의 피해 당사자와 관련자들을 찾아 당시의 사건을 재구성하는 구술사와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일에 집중하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사고의 발생과 원인보다는 사고 후의 과정이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억울한 희생은 없었는지 지금이라도 우리는 확인해야 한다. 또 밝혀진 사망자들의 사연도 살려내야 한다.
  • 영문
  • The 40th anniversary of the Iri Station explosion in 2017 has rekindled civic interest in the Iri Station explosion. Above all, it was a fresh reminder that the number and name of the victims of the blast were unclear over the course of 40 years, and that as the accident took place at the end of the Yushin regime, there was no attempt to clean up the explosion from the perspective of Iksan City and Iksan citizens.
    Forty-one years later, the explosion at Iri Station left a deep scar on Iksan citizens, but the political and social implications of the incident and its impact on the community are reaching today without being investigated or studied from various perspectives. Above all, the rumors surrounding the explosion at Iri Station have not been completely resolved from the moment of the accident until now 41 years later. Above all, the exact number of deaths among Iri citizens at the time of the accident has yet to be determined.
    In addition, despite the fact that the Saei-ri construction project, which began in earnest after the explosion at Iri Station, was an important urban plan that determined Iksan's centennial period, Iksan citizens were almost excluded from the decision and construction process. After the accident, the restoration process was a complete re-establishment of the basic urban planning of Iksan Old Town today, and decided on the urban character of Iksan that continues to this day. Nevertheless, its meaning and process are not clearly clear compared to the importance of the issue.
    As such, the Iri Station explosion and Iksan's modern history have numerous connections that can never be separated. There is little that is not related to the Iri Station explosion now in the memory of Iksan's urban composition and streets, major buildings and places, and people's places.
    Nevertheless, we do not have a deep understanding of the Iri Station explosion. Iksan citizens are also potentially passive in taking a deep look at the Iri Station explosion and sympathizing with the wounds. The Iri Station explosion is an unusual event in which the citizens of Iksan have more memories of the city than of people and memorials. Extremely unusual cases are recorded in cities, in North Jeolla Province, rather than in people, and in cities rather than in Iri city, and in cities, plans for cities are more important than the destruction of cities. In this regard, Iksan citizens' perception of the explosion at Iri Station is not fair in some respects.
    This study will contribute to organizing the meaning of Iri Station explosion accident by newly illuminating it from the perspective of Iksan City and citizens. Above all, I would like to focus on finding the victims and related parties of the Iri Station explosion and collecting the oral history and related data that reconstructing the case at that time. What matters is the post-accident process rather than the occurrence and cause of an accident. We should now check if there was any unjust sacrifice that no one remembered. It also needs to revive the stories of the dead.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1977년 11월 11일 일어난 이리역 폭발사고는 지금까지 한국 철도사상 최악의 사고로 기록되고 있다. 이 사고로 공식 기록으로만 사망자 59명 등 1,076명이 다치고, 9,973명이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건물 피해액만 51억원에 달했다. 이리역 폭발사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재난이었다. 이리역 폭발사고는 사고의 원인과 피해상황이 비교적 명료하게 밝혀져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역 폭발사고는 지난 40여년 동안 익산시민들에게 매우 혼란스러운 사건으로 남겨져 있다. 이 폭발사고가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은 매우 깊고 광범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고는 정확하게 기록되고 관리되지 못했다.
    즉 사건의 총론은 있으나 각론은 매우 단편적이고 수동적이며 편파적으로 남겨져 있다. 사고의 기록은 많으나 거의 비슷비슷한 개인의 기억들이 자가복제되어 확산되었고, 남겨진 기록들은 철저하게 국가와 도시의 관점으로 작성되었다. 즉 피해자는 있으나 익명으로 남았고, 도시는 변화했으나 시민들은 철저하게 대상화된 사건으로 남았다.
    이처럼 사람들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고 사고 이후 극적인 도시변화가 이루어진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리역 폭발사고는 그 본질과 내용들이 거의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리역 폭발사고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는 ‘속도’였다. 신속하게 사고의 원인과 경위를 밝히고 더 신속하게 도시를 복구하는 것이 당시 박정희 정부의 목표였다.
    사고가 발생한 1977년은 박정희 유신독재가 최절정에 도달했던 시기였다. 정치적 반대세력은 강한 압박을 받고 있었고, 정권 내부의 균열은 아직 도드라지지 않고 있었던 그야말로 폭풍전야와 같은 시기였다. 이 어둡고 침잠한 시기에 이리역 폭발사고는 발생했고, 박정희 정부는 가장 자신다운 방식으로 이 사고를 수습했다.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는 그 사고와 수습의 과정에서 박정희 독재로 대표되는 국가주의 혹은 권위주의적 정부가 어떻게 국가적 재난에 대응했으며 어떻게 지역사회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지배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리역 폭발사고의 본질은 화약사고였다. 화약사고는 엄연히 그 최종적인 관리책임이 국가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그 사고의 책임과 수습의 과정을 철저하게 이데올로기적으로 통제하고 권위주의 정부를 강화하는 기제로 활용했다.
    본 연구의 핵심목표는 이리역 폭발사고를 통해 근대적 국가주의가 어떻게 지역사회를 실질적으로 변화시키고 동화시켰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권위주의적 국가의 폭력적 통제에만 기반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지역사회를 지배했던 유지들의 이데올로기적 동원과 자발적 민중동원이 동시에 나타났다. 즉 그람시의 헤게모니적 지배가 가장 강력하게 발현된 하나의 정교한 사실극과도 같았다.
    41년이 지난 지금도 이리역 폭발사고는 익산시민에게 깊은 상처로 남겨졌지만, 이 사건이 갖는 정치사회적 의미와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 등은 다양한 관점에서 조사되거나 연구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무엇보다 이리역 폭발사고를 둘러싼 유언비어는 사고 직후부터 41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도 사고 당시 이리시민 중 사망자의 숫자에 대해서는 지금껏 정확한 내용과 명단이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또 이리역 폭발사고 이후 본격화된 새이리 건설 사업은 익산의 백년대계를 결정짓는 중요한 도시계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익산시민들은 그 결정과 건설의 과정에서 배제되다시피 했다. 사고 이후 복구과정은 오늘날 익산 구도심의 기본적인 도시계획을 완전히 새롭게 수립하는 것이었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익산의 도시성격을 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안의 중요성에 비해 그 의미와 과정은 명확하게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리역 폭발사고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또 익산시민들은 잠재적으로 이리역 폭발사고를 깊이 들여다보고 그 상처에 공감하는데 소극적이다. 이리역 폭발사고는 익산시민들에게 사람에 대한 기억과 추모보다는 도시에 대한 기억이 더 크게 남겨진 특이한 사건이다. 극단적으로는 사람보다는 도시가, 이리시보다는 전라북도가, 도시의 파괴보다는 도시의 계획이 더 중요하게 기록된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익산시민들의 이리역 폭발사고에 대한 인식은 어떤 점에서는 공정하지 못하다.
    한편 이리역 폭발사고는 40여년이 지나면서 비극적 재난이라는 사실을 넘어 도시의 근대역사로 기념되고 있다. 그러나 시민들의 불완전한 기억과 의심스러운 기록들을 어떤 형태로든 정리할 때 사건은 도시의 역사와 문화로 새롭게 정리될 수 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1) 이리역 폭발사고의 재구성
    이리역 폭발사고의 평면적 사실은 기존의 공식기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호남의 관문이자 교통의 중심지였던 당시 이리시는 철인동이라는 특수한 지역을 이리역 앞에 두고 있었고, 이곳은 이리역 폭발사고의 최대 희생지역이 되었다. 본 연구는 당시 실제로 철인동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고 어떻게 이 사고에 대응했는가, 그리고 근본적으로 철인동이 어떤 지역이었는가를 사회사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이리역 폭발사고의 재구성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 중의 하나는 당시 사건의 사망자 수와 명단을 정확하게 밝히는 것이다. 사망자에 대한 기록과 함께 밝혀져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은 사고의 최대 피해지역이었던 철인동(철도 옆 창인동으로 행정동이 아닌 별칭으로 불린 특수지역)에 대한 것이다. 철인동의 지역적 특성은 이리역 폭발사고의 직후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이리역 폭발사고의 진실을 밝히는데 큰 어려움을 준다. 이리역 폭발사고는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이곳 한 도시공동체를 가장 폭력적인 방식으로 해체했다.
    2) 권위주의 시대, 지방도시의 재난과 재건 : 새이리건설
    새이리 건설은 이리역 폭발사고 이후 재난의 수습과 복구 과정에서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새이리 건설은 이 사건 이전부터 이리시의 미래 발전비전으로 제안되었고, 이리역 폭발사고는 필연적으로 이 사업과 연결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새이리 건설은 재난을 당한 도시의 복구를 넘어 도시발전이라는 관점으로 진전되지 못했다. 복구는 박정희 대통령의 은사이자 정부의 결단으로 미화되었다. 새이리 건설계획이 종합적으로 발표된 것은 사고가 발생한 지 13일만인 11월 24일이었다. 이리시의 시설복구에 109억 1천1백만원, 이리역 주변정화사업에 20억 8천9백만원을 투입하고 제2공단 건설과 재개발지구 개발사업은 관계기관이 시도와 협의 조정하여 별도로 추진한다는 것이 발표의 요지였다.
    새이리건설은 이렇게 재난을 당한 한 도시의 경관과 내용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지만, 결과적으로 완성되지 못한채 서둘러 마무리되었다.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가장 크게 의문을 갖고 있는 것은 1977년 11월 11일 이리역 폭발사고 이후 불과 10여일만에 이리시의 도시 전체를 변화시키는 도시계획이 어떻게 기획되었으며 누가 이 사업을 주도했는가 하는 점이다. 권위주의 정부 아래서 지방도시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 그 주체는 누구이며 시민들은 어떻게 통제되었는가, 만약 참여했다면 그 대표성은 어떻게 드러나고 작동했는가 등의 문제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3) 박정희 시대의 국가주의와 지방도시의 변화
    이리역 폭발사고는 예기치 못한 재난이었다. 사고 자체는 매우 우연적이었지만 사고가 수습되고 복구되는 과정은 철저하게 그 시대의 정치와 사회를 반영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리역 폭발사고가 사고 직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익산의 주체적인 역사로 기록되지 못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여기서는 먼저 이리역 폭발사고가 일어난 1977년이 어떤 시대였는지를 살펴보고 다음으로 사고가 수습되는 과정에서 드러난 사회사적 특징을 ① 1977년과 전체주의적 정권의 재난대응 ② 전체주의적 독재정권과 계몽의 시대라는 관점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나. 연구방법
    본 연구에서 수행할 핵심적인 연구방법은 문헌연구와 구술사연구가 될 것이다. 당시의 공식기록과 신문자료 등 자료수집과 분석을 통한 문헌연구가 1차적 작업이 될 것이고 여기에 당시의 사진자료와 영상자료를 분석하는 작업 등을 동시에 진행할 것이다. 또 아직 당시의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희생자 유족과 철인동에 거주하며 당시 사건을 직접 경험했던 시민들의 인터뷰를 분석할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이리역 폭발사고의 전체 과정과 이후 도시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1차 자료의 수집과 정리를 시작할 것이다. 익산시청을 비롯한 당시 관련 기관들의 자료를 찾아 정리하고, 국가기록원 등이 소장하고 있는 공식 기록물들을 최대한 찾아 당시 사고에 대한 1차 기록을 정리하고자 한다. 이러한 1차 기록과 함께 당시의 신문기사와 관련 회고담, 관련자들의 증언을 청취하고 관련 자료를 DB화 하는 작업도 진행할 것이다.
  • 색인어
  • 1977년 이리역폭발사고, 새이리건설, 철인동, 피해보상, 도시재건, 근대적 국가주의, 지방도시, 지역발전, 창인동, 그라운드 제로, 이리역폭발사고추모비, 마살매와 설래방죽의 그 자리, 모현아파트, 중앙동과 삼남극장, 소라산과 배산에 펼쳐진 8개월간의 천막생활, 이리시청과 사고수습대책본부, 대통령과 사람들, 총화의 기적, 우리는 외롭지 않다. 철도유족, 한화그룹, 박정희대통령 이리폭발사고 현장시찰, 최규하국무총리 이리공업단지 브리핑청취, 박정희대통령 이리폭발사고 이재민천막촌 시찰, 황인성 전라북도지사 이리폭발사고 이재민천막촌 재건 소라새마을 입주식 참석, 이리재해지구 주택건설사업 기공식, 이리재해지구, 이리폭발사고의연금, 이재민천막촌재건소라새마을, 박정희대통령 큰영애 이리역사 준공식 참석, 박정희대통령 호남선복선 대전.이리개통식, 1978년 이리역사 준공, 이리시 피해지구에 대한 지방세 과세면제 관한 조례, 이리역폭발사고에 따른 납부금 환수대책, 이리사고에 대한 지방세 감면, 이리역 주변정비사업 계획 일부변경, 이리 모현동 재해대책 주택건설, 이리 시민 위안 대공연, 「裡里」반년. 30년 앞당긴 새도시 건설, 신무일
  • 연구성과물 목록
1. 논문
KCI등재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와 근대적 국가주의 연구
한국지역사회학회 | 지역사회연구 pp.1~24 지역개발
출처연구과제 :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와 근대적 국가주의 연구
2. 보고서
연구결과물
(결과보고)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와 근대적 국가주의 연구
원도연 | 2020-12-08 | 사회사/역사사회학
출처연구과제 :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와 근대적 국가주의 연구
PDF(1)
3. 낱장자료
원자료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와 근대적 국가주의 연구]의 낱장자료
원도연 | 원광대학교 | 지역공동체
출처연구과제 :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와 근대적 국가주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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