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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채(朴世采)의 이이(李珥) 문집 편찬과 그 특징
The Compilation and Characteristics of Yi I(李珥)’s Anthologies by Park Se-chae(朴世采)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신진연구자지원사업& #40;인문사회& #41;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9-S1A5A8-2019S1A5A8034501
선정년도 2019 년
연구기간 1 년 (2019년 05월 01일 ~ 2020년 04월 30일)
연구책임자 오세현
연구수행기관 경상국립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고는 기존 연구들이 그동안 이이에 관한 연구들이 기반했던 가장 중요한 사료인 『율곡전서』의 자료적 성격을 재고하고 향후 이에 관한 연구가 주의해야 한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기존 연구들은 모두 이이의 문집이 편찬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주목하면서 각각의 논지를 전개했지만, 정작 현존하는 이이 문집의 다양한 판본을 조사하고, 이를 바탕으로 현존하는 판본들의 제반 양상과 다양한 판본들에 수록되어 있는 구체적인 내용 분석에 대해서는 아직 본격적인 접근을 시도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전국의 각 국·공립 도서관들과 대학 도서관들이 소장 자료를 전산화 하고 그 결과물을 토대로 하여 전국적인 고문헌 소장 현황을 알려주는 ‘한국고전적종합목록시스템’의 등장은 이이 문집의 전국적 소장 상황을 더욱 세밀하게 파악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었다. 더불어 전국의 대학 도서관들과 문화재청이 주도하여 진행했던 고문헌 전산화 사업 결과 1990년대 후반까지 확인할 수 없었던 여러 종류의 이이 문집 판본들이 추가적으로 확인되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이이 문집에 관한 연구의 향후 다양한 길이 모색될 필요가 있다. 본고에서는 특히 이이의 문집이 편찬되는 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顯宗代와 肅宗代에 집중하고자 한다. 그리고 현종대와 숙종대에 이이 문집의 편찬 과정에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朴世采(1631-1695)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이의 문집이 편찬되었던 과정 속에서 박세채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이의 문집은 1611년(光海君 3) 海州에서 原集初刊本이 간행되었고, 이후 70여년이 지난 뒤에 박세채가 原集을 간행할 당시에 누락되었던 글들을 바탕으로 해주, 江陵, 坡州 등 저자의 후손 집안에 소장되어 있던 遺稿들을 모았고, 그 중에서 중요도가 높다고 판단되는 자료를 편찬했는데, 그것이 바로 續集이다. 이 속집을 편찬한 박세채는 이후에도 이이의 문집을 추가적으로 편찬하는 일에 전념했다. 박세채는 庚申換局이 있던 1680년 『율곡연보』를 편찬했고, 그 다음해에는 『栗谷別集』과 『栗谷外集』을 편찬했다. 『율곡별집』은 기존 연구에서 지적했듯이 「二程全書」의 체제를 모방하여 저자의 제자들이 작성한 語錄 및 여러 문헌에서 저자 관계 기록을 수집하여 편찬한 것이고, 『율곡외집』은 박세채가 속집을 편찬하며 비교적 중요도가 낮다고 생각했던 글들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그리고 박세채는 이처럼 추가적으로 편찬되었던 이이의 문집들을 모두 순차적으로 간행하는 일을 주도했다. 이이의 문집 초간본이 간행된 이후 추가적으로 다양한 문집이 편찬되고 간행되는 일이 이이의 嫡傳으로 알려진 金長生의 수제자 宋時烈이 아니라 송시열과 학문적으로 일정 부분 논쟁적인 관계에 있었던 박세채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은 매우 주목되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 연구들은 이이의 문집이 편찬되는 과정에서 율곡학파의 3대 수장에 해당하는 송시열의 역할과 송시열의 논지를 계승하여 全書를 편찬했던 이재에 방점을 두었고 상대적으로 박세채의 역할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박세채가 송시열과 일정 부분 다른 학문적 성격을 보였던 지점이 존재하는 것과 더불어 이이의 문집을 보충하는 속집・별집과 함께 외집이라는 다양한 종류의 문집을 편찬하는 작업을 주관했다는 점은 당시 조선후기 사회에서 박세채의 막대한 정치적・학문적 위상을 말해준다. 이에 본고에서는 박세채가 주도했던 이이 문집 편찬을 통해 당시 조선후기 사회에서 박세채의 정치적·학문적 위상을 조명하고 이를 토대로 도통론의 계보에 존재하지 않은 인물들이 실제로 확보하고 있던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 기대효과
  • 박세채에 관한 기존 연구들은 그의 다양한 학문적・정치적 스펙트럼에 주목했다. 특히 당대에 학문적・정치적으로 경쟁관계에 있었던 송시열과 비교하면서 박세채의 특징적인 면모를 밝히고자 노력했다. 본고에서 박세채의 이이 문집 편찬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동안 조선후기 붕당의 대립이 치열해지던 시기에 살던 인물들을 연구하면서 붕당이라는 정치적 대립의 현장에 관여한 인물들이 이분법적으로 구분되는 것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되었다. 그러한 이분법적 구분에서 중요하게 작용했던 키워드는 학통의 계보에 기초한 道統論이었다. 그러나 도통론은 그 성립 시기에 주의해야 하는데, 현재 학계에서 공인되고 있는 각 붕당의 도통론은 대부분 붕당정치 이후에 정립된 것이다. 그 이유는 붕당의 극단적인 대립 과정 속에서 각 정파의 학문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에서 자파의 학문적 宗祖를 추앙하고, 그 결과로 도통론의 계보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본고가 이이의 문집을 편찬한 박세채에 주목한 이유가 바로 송시열처럼 도통론의 핵심에 있지 않았던 인물이 서인과 노론의 종조인 이이의 문집을 편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도통론이 당대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해주지 못하는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효과적 방법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후대의 시각이 아니라 당대의 시각에서 도통과 학통이 정립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대 사회에서 도통과 학통이 정립되는 과정에 참여하는 인물들이 현재의 도통론 계보와는 항상 일치하지 않음을 보여줄 것이다. 이것은 조선후기 역사가 이분법적으로 구분되는 붕당정치의 극단적 대립 구도처럼 단순하게 전개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며 또한 향후 조선후기 연구에서 정치구도가 일방적으로 모든 사대부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사상사 연구의 외연을 확장할 수 있도록 기여하리라 생각한다.
  • 연구요약
  • 본고에서는 이이 문집의 전국적인 소장 상황을 상세하게 정리하고, 현존하는 다양한 이이 문집의 판본들을 상호 비교하여 구체적인 계통을 분류하고자 한다. 박세채가 주관하여 편찬했던 이이의 문집인 속집과 외집・별집 및 연보의 판본을 조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편찬된 시기의 순서로는 속집이 1675년에 편찬되었고, 그 다음으로는 연보가 1680년에 편찬되었다. 그리고 별집과 외집이 1681년에 편찬되었다. 간행된 순서로는 속집과 외집이 1682년 全州에서 간행되었고, 별집이 1686년 평양에서 간행되었다. 연보는 당시에 별도로 간행되지 못하고, 후대에 전서가 간행될 당시에 송시열이 편차한 연보를 새로 수정하고 편찬하는데 참고자료로 활용되었다. 기존에는 속집이 영본으로만 전하는 것으로 파악되었었지만, 한국고전적종합목록시스템을 통해 조사한 결과 완질본이 국내에 유일하게 충남 모덕사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박세채가 속집을 간행하며 비교적 중요도가 낮다고 여긴 글들을 모아 간행한 외집은 규장각과 고려대학교 도서관,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零本이 소장되어 있다. 어록에 해당하는 별집은 현재 완질본이 규장각과 장서각, 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에 대하여 송시열이 訂誤의 글을 작성할 만큼 당대에도 논란이 상당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송시열이 삭제와 편집을 통해 이이의 진면모를 드러내고 이이의 학문적 권위를 높이고자 했던 반면 박세채는 관련 문헌들을 폭넓게 수집하고자 했던 것에 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점은 단순히 박세채가 이이와 관련된 문헌들을 가능한 많이 수집하고 이를 문집 보충본에 수록하고자 했던 것으로 단정지을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기존 연구에서는 이 문제를 당시 서인 내부의 정치적・학문적 대립이었던 노소분기와 관련하여 설명했다. 하지만 본고에서는 그러한 노소분기의 정치적・학문적 대립이 반영되어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박세채 본인의 측면에서 더욱 깊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당시에 이이의 문집을 편찬할 수 있는 학문적・경제적・사회적 위상의 측면에서 주도권을 갖고 있었던 것은 송시열이 아니라 박세채 였기 때문이다. 道統論의 계보에서 송시열은 박세채에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의 막강한 위상을 갖지만, 그러한 도통론이 당대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현존하는 이이의 문집 중에서 박세채가 직접 관여하고 주관하여 편찬하고 간행했던 속집, 외집, 별집의 판본들을 조사하고 정리하며 이 판본들이 50-60 여년 후에 송시열의 뜻을 계승하여 간행되는 全書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비교를 수행하면서 그 변화의 원인을 박세채에 주목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박세채는 어린 시절부터 이이의 학문과 인품을 존경했고, 이이의 문집 초간본이 간행된 이후 그 초간본의 부족함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다양한 분야에서 선현들의 학문적 성과를 정리하는 일에 매진했던 박세채는 이이의 학문을 선양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이의 문집 초간본을 보완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런데 사실의 측면에서 다양한 자료의 수집과 축적을 목표로 했던 박세채의 활동이 송시열에게는 전혀 다르게 인식되었다. 그것은 사실 보다는 학문적 계통의 정비와 내적 단결을 위해 당위의 측면을 강조했던 송시열의 지향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 영문
  • Park Se-chae has admired Yi-i's academics and character since childhood. After the first copy of Yi-i's writings was published, he had a problem with the lack of the first book. He devoted himself to organizing the academic achievements of the senior confucian scholar in various fields, and worked on supplementing the first draft of Yi-i's writings with the aim of advancing the study of Yi-i. In terms of facts, Park Se-chae's activities aimed at collecting and accumulating various data were perceived completely differently by Song Si-yeol. It originated from the difference in the intention of Song Si-yeol, who emphasized the aspect of the reason for the maintenance of the academic system and internal unity rather than the fact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박세채는 어린 시절부터 이이의 학문과 인품을 존경했고, 이이의 문집 초간본이 간행된 이후 그 초간본의 부족함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다양한 분야에서 선현들의 학문적 성과를 정리하는 일에 매진했던 박세채는 이이의 학문을 선양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이의 문집 초간본을 보완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런데 사실의 측면에서 다양한 자료의 수집과 축적을 목표로 했던 박세채의 활동이 송시열에게는 전혀 다르게 인식되었다. 그것은 사실 보다는 학문적 계통의 정비와 내적 단결을 위해 당위의 측면을 강조했던 송시열의 지향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는 향후 한국사 연구와 관련한 학회에서 발행하는 학술지에 투고할 계획이다. 현재 한국사 관련 학회는 매우 다양한 단체들이 활동 중에 있다. 그 중에서 한국사의 사상사 및 문화사와 관련한 분야에서 적극적이며 활발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는 학회 및 학술지를 주목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한국사 연구에서 지속적으로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하거나 학계의 연구 활동에 긍정적인 동기 부여를 제공할 수 있는 연구자들의 활동이 집중되어 있는 확회에서의 평가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특히 본 연구에서 주목하고 있는 지점이 기존 조선시대 연구 분야에서 학계의 통설이라는 위상을 확보하고 있던 문제에 대해서도 그 논지가 과연 정당한 토대 위에 서 있는 가를 재고하려는 취지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본 연구에서 가장 중심이 되고 있는 박세채라는 인물이 조선후기 사상사의 도통론이라는 측면에서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향후 박세채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세채는 어린 시절부터 이이의 학문과 인품을 존경했고, 이이의 문집 초간본이 간행된 이후 그 초간본의 부족함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다양한 분야에서 선현들의 학문적 성과를 정리하는 일에 매진했던 박세채는 이이의 학문을 선양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이의 문집 초간본을 보완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런데 사실의 측면에서 다양한 자료의 수집과 축적을 목표로 했던 박세채의 활동이 송시열에게는 전혀 다르게 인식되었다. 그것은 사실 보다는 학문적 계통의 정비와 내적 단결을 위해 당위의 측면을 강조했던 송시열의 지향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박세채가 편찬한 『율곡별집』에 대한 송시열과 제자들의 비판은 별집의 판목을 없애려는 움직임으로도 진행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1689년 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이 죽고, 6년 후 박세채가 죽은 이후에도 송시열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지속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박세채의 이이 문집 편찬 목적과 의도가 송시열과 그의 제자들에게 용납되지 못했기 때문에 등장했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이 당시 서인 내부의 전체적인 의견이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이 일정 부분 정치적 목적에 기반하여 당위적 측면에서 진행되었던 반변 박세채는 사실의 측면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박세채 당시 이이 문집 편찬의 실상에 다가가는 시작이 될 것이다.
    박세채에 관한 기존 연구들은 그의 다양한 학문적・정치적 스펙트럼에 주목했다. 특히 당대에 학문적・정치적으로 경쟁관계에 있었던 송시열과 비교하면서 박세채의 특징적인 면모를 밝히고자 노력했다.
    본 연구에서 박세채의 이이 문집 편찬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동안 조선후기 붕당의 대립이 치열해지던 시기에 살던 인물들을 연구하면서 붕당이라는 정치적 대립의 현장에 관여한 인물들이 이분법적으로 구분되는 것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되었다. 그러한 이분법적 구분에서 중요하게 작용했던 키워드는 학통의 계보에 기초한 도통론(道統論)이었다. 그러나 도통론은 그 성립 시기에 주의해야 하는데, 현재 학계에서 공인되고 있는 각 붕당의 도통론은 대부분 붕당정치 이후에 정립된 것이다. 그 이유는 붕당의 극단적인 대립 과정 속에서 각 정파의 학문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에서 자파의 학문적 종조(宗祖)를 추앙하고, 그 결과로 도통론의 계보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본 연구가 이이의 문집을 편찬한 박세채에 주목한 이유가 바로 송시열처럼 도통론의 핵심에 있지 않았던 인물이 서인과 노론의 종조인 이이의 문집을 편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도통론이 당대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해주지 못하는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효과적 방법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본 연구에서는 후대의 시각이 아니라 당대의 시각에서 도통과 학통이 정립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대 사회에서 도통과 학통이 정립되는 과정에 참여하는 인물들이 현재의 도통론 계보와는 항상 일치하지 않음을 보여줄 것이다.
    이것은 조선후기 역사가 이분법적으로 구분되는 붕당정치의 극단적 대립 구도처럼 단순하게 전개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며 또한 향후 조선후기 연구에서 정치구도가 일방적으로 모든 사대부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사상사 연구의 외연을 확장할 수 있도록 기여하리라 생각한다.
  • 색인어
  • 박세채, 송시열, 율곡별집, 위학방도, 태극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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