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채침의 『홍범황극내편』이 조선후기의 지식인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연구되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조선후기 상수역학의 전개와 발전양상을 고찰하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주천의 『신증황극내편(新增皇極內篇)』과 이원구의 「홍범황극내편석의(洪範皇極內篇釋義)」를 중점적 ...
본 연구는 채침의 『홍범황극내편』이 조선후기의 지식인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연구되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조선후기 상수역학의 전개와 발전양상을 고찰하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주천의 『신증황극내편(新增皇極內篇)』과 이원구의 「홍범황극내편석의(洪範皇極內篇釋義)」를 중점적으로 연구한다.
이주천(李柱天, 1662~1711)의 『신증황극내편』은 조선학계에서는 채침의 『홍범황극내편』에 대한 연구가 희소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매우 귀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신증황극내편』은 채침의 『홍범황극내편』에 결락된 수왈(數曰)’부분을 직접 보완해 넣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채침의 『홍범항극내편』에는 81개의 수 이름에 대한 강령을 제시하는 사(辭)만 있고, 세부해설인 ‘수왈(數曰)’의 내용이 첫 번째 수 이름인 원(原)을 제외하고는 이하 80개가 모두 빠져있다. 『주역』에 견주어 말하자면 괘와, 괘명, 괘사는 있는데, 괘사에 대한 「단전」「상전」과 같은 「전(傳)」이 결락되어 있다고 하겠다. 조선전기 이순은 『홍범황극내편보해』를 지어 ‘수왈(數曰)’의 결락을 보완할 수 있는 해설을 붙인 바 있다. 그러나 이순은 직접 ‘수왈(數曰)’이라는 글자를 써서 해설하지는 않았다. 이에 비해 이주천의 『신증황극내편』은 ‘보망수왈(補亡數曰)’이라 하여, 결락된 ‘수왈’을 보완하는 내용을 직접 지어 넣은 것을 볼 수 있다. 이주천이 ‘수왈’을 「대상전」의 형식으로 구성한 것에서 리와 수를 함께 다루고자 하는 그의 학문적 특성을 볼 수 있다. 그는 채침의 『홍범황극내편』이 우임금이 미처 전하지 못한 ‘리’를 천명하고, 기자가 다 밝히지 못한 ‘수’를 다 밝힌 것으로, 천지조화를 드러내고, 『주역』의 ‘상’에 짝한다고 평가한다. 이로부터 이주천은 역의 이치는 ‘리’와 ‘상’ 그리고 ‘수’가 갖추어짐으로써 완비된다고 보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이원구(李元龜, 1758~1828)의 「홍범황극내편석의(洪範皇極內篇釋義)」는 이원구 자신의 철학을 강화하기 위해 채침의 홍범황극내편의 체계를 활용한 저작이다. 건(乾)과 양(陽)을 상징하는 숫자 9, 곤(坤)과 음(陰)을 상징하는 숫자 6이 결국 천지음양의 도리를 상징적으로 대표한다. 이로부터 기타 이론이 변주된다. 건(乾)을 상징하는 9는 ‘도(道)’ ‘인륜’으로 전개되고, 곤을 상징하는 6은 ‘사(事)’‘산업’으로 전개 된다. 9・6은 우주만물의 본질을 하나로 꿰뚫는 키워드로서, 사람의 마음도 9・6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유가 모든 경전의 가르침은 9・6의 시중(時中)이라는 것이 이원구의 주장이며, 성인의 심법의 요체 역시 9・6의 시중(時中)에 놓여 있다. 「홍범황극내편석의」는 이와 같은 그의 철학의 연장선에서 채침 『홍범황극내편』의 뜻을 풀어낸 것으로 사실 『홍범황극내편』을 해설했다기 보다는, 『홍범황극내편』의 체계를 이원구 자신의 철학을 강화하기 위해 활용한 결과물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는 『홍범황극내편』81수의 체계를 9・6의 우주론으로 풀어낸다. 9・6은 우주론의 핵심개념일 뿐 아니라, 마음의 구성틀이기도 하다. 9・6은 내 마음과 우주가 하나가 되도록 노력해 가는 수양론의 근거이기도 하다. 이원구는 『홍범황극내편』의 81수를 성(誠)과 경(敬), 중(中)과 황극(皇極)의 수양론으로 설명한다. 그의 중심 주장의 하나는 상수(象數)와 의리(義理)가 철저하게 하나라는 것이다. 이원구의 「홍범황극내편석의」는 『홍범황극내편』에 대한 단순한 해설서나 연구서가 아니라, 「홍범황극내편」의 체계를 독창적으로 활용하여 자신의 철학이론을 뒷받침한 저작이라는데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박세채의 『범학전편』은 <보주>와 <보해>를 갖추고 있어서, 체계적 저술로 알려져 왔으나, 실상 그 <보주>는 박세채의 것이 아니며, <보해>는 조선전기 이순의 『홍범황극내편보해』를 수록하면서 그 의미를 상세하게 풀어낸 것이다.
조선시대의 상수역학은 그것이 역학이라는 한정된 테두리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정치, 문화 전반의 영역에 긴밀하게 연계된 것이었다. 정조가 「책문」에서 『홍범황극내편』을 ‘이치와 수학’의 두뇌라 부르고, 도학과 수학의 관계를 묻듯이, 『홍범황극내편』은 그 시대에 살아있는 학문으로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