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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당 박영의 『대학』 해석과 그 의미 -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Songdang Park Young’s Interpretation of Dae-hak and Signific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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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명 시간강사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9-S1A5B5A07-2019S1A5B5A07093309
선정년도 2019 년
연구기간 1 년 (2019년 09월 01일 ~ 2020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황지원
연구수행기관 계명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이 연구는 송당(松堂) 박영(朴英, 1471~1540)의 『대학』에 대한 이해와 그 특성을 살펴보고, 나아가 조선성리학사에 있어서 그의 『대학』 해석이 가지는 의미를 구명하기 위한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연구 목적의 효용성을 높이기 위해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과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등 16세기의 대표적인 『대학』 해석과 비교 분석함으로써 박영의 도학체계가 지닌 본질적 의미와 특징을 구체화하고자 한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주희는 유학 경전 중에서도 『대학』에 가장 큰 애착을 가지고 있었으며, 40대 중반 처음으로 『대학장구』의 초고를 완성한 이래, 1200년 사망 직전까지 끊임없는 수정의 과정을 거쳤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대학장구』의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60세 전후인 1189년 최종 완성한 것이 아니라, 사망 직전까지 최종 판본을 완성해 갔던 것이다.
    주희가 이처럼 『대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대학장구』의 내용을 수정한 것은 『대학』이 그가 체계화한 주자학의 이론적 토대와 틀을 제공하는 핵심 경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주희의 『대학장구』는 『고본 대학』을 새로운 모습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대학장구』는 정호와 정이를 이어 경전의 내용을 수정하고 보충한 대표적인 선례가 되었다.
    주희가 『대학』을 강조한 이후 중국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대학』과 『대학장구』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였으며, 이것은 특히 사회적 실천이념으로서 도학을 지향한 사림 학자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들은 자신의 학문적 목표를 위기지학의 수행에 맞추고 『소학』을 중심으로 실천유학의 길을 걸었으며, 나아가 『소학』과 상호유기적인 관계로 『대학』을 파악하였고, 이를 통해 실천의 완성을 지향하였다. 그리하여 16세기에 이르면 『대학』을 여러 경전의 강령(綱領)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흐름을 주도한 대표적 인물이 바로 박영과 이언적, 그리고 이황 등이다.
    이들은 공부에 있어 『소학』이 처음을 이루는 것이라면, 『대학』은 끝을 이루는 것으로 보았고, 『소학』이 나무의 뿌리를 배양하는 것이라면 『대학』은 뿌리로부터 나무의 가지에 도달하는 전 과정이라고 이해하였다. 특히 『대학』의 규모가 매우 커서 모든 경서의 내용이 다 포함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대학』을 모든 경전의 강령으로 인식하는 이러한 태도는 후대까지 지속되었으며, 이후 조선성리학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되어 대부분의 학자들이 나름대로 『대학』에 대한 입장을 기준으로 자신의 성리학적 특성을 전개해 나감으로써 300여 가지가 넘는 저술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대학』은 조선성리학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경전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대학』 해석의 기본 관점을 제시한 16세기의 연구성과들을 비교 분석하여 각각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본 연구에서 주로 다루고자 하는 텍스트는 박영의 「대학경일장연의(大學經一章演義)」와 이언적의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그리고 이황의 『대학석의大學釋義』 등인데, 이 중에서 이언적과 이황의 저술에 대해서는 이미 개별적인 연구가 다수 진행되었으나 박영의 「대학경일장연의」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후대 퇴계학파와 율곡학파로 나뉘어 치열하게 사상적 정통성을 다투는 과정에서 박영이 주목받지 못한 데에서도 기인하지만 무엇보다 박영의 『대학』 해석이 가진 본질적 특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기존의 학파별 『대학』 해석의 한계를 넘어서 도학적 관점에서 『대학』을 이해하고자 한 박영의 사상 체계를 탐구함으로써 그 특징과 성리학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 기대효과
  • 본 연구를 통해 기대되는 학문적·사회적 기여효과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대학』 해석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지금까지 『대학』 해석과 관련한 수많은 연구들이 진행되어 왔으며, 현재도 매년 다양한 논문이 발표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개별 인물이나 학파별 『대학』 해석에 주목하고 있으며, 이 또한 대부분 퇴계학이나 율곡학에 국한되어 있다. 본 연구는 지금까지 별로 주목되지 않았던 박영의 『대학』 해석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이며, 『대학』을 퇴계학이나 율곡학과는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는 방식을 제공할 것이다.

    ② 조선유학사에 『대학』이 핵심 경전으로 정착되는 과정과 문제의식을 보다 분명하게 해명할 수 있다.
    『대학』이 15세기 사림들에 의해 유학의 핵심 경전으로 수용된 데에는 이들이 사회적 실천이념으로서 도학을 지향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의 학문적 목표를 위기지학의 수행에 맞추고 『소학』을 중심으로 실천유학의 길을 걸었으며, 나아가 『소학』과 상호유기적인 관계로 『대학』을 파악하였고, 이를 통해 실천의 완성을 지향하였다. 그리하여 16세기에 이르면 『대학』을 여러 경전의 강령(綱領)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흐름을 주도한 대표적 인물이 바로 박영과 이언적, 그리고 이황 등이다. 본 연구는 박영을 중심으로 이언적과 이황의 『대학』 이해를 비교 분석함으로써 『대학』이 핵심 경전으로 정착되는 과정과 문제의식을 보다 분명하게 해명할 수 있을 것이다.

    ③ 리학이 아닌 도학을 중심으로 조선의 성리학사를 조명함으로써 조선성리학의 특징을 명확히 드러낼 수 있다.
    지금까지 조선성리학에 대한 연구는 주로 성리 이론이 심화되는 과정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대학』 관련 연구 역시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성리학의 뿌리가 사림의 도학정신에 있는 것이라면 단순히 이론체계의 심화과정으로만 전체 성리학사를 이해하는 것은 정작 본질은 잃어버리고 지엽적인 것에만 천착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본 연구는 도학적 관점에서 『대학』을 해석하고자 한 박영의 사상체계를 통하여 중국성리학과 차별화된 조선성리학의 특성을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 연구요약
  • 송당(松堂) 박영(朴英, 1471~1540)은 원래 전형적인 무반 가문의 후예이자 왕실의 후손으로, 정확하게는 양녕대군의 외손으로 한양에서 줄곧 거주하였다. 가문의 배경과 타고난 신체적 재능으로 21세 때(1492년)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연산군이 즉위하자 이듬해인 1496년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무반이었음에도 방향을 바꾸어 도학에 뜻을 두고 혼자 독학하였으나 별다른 진전이 없다가 1500년 정붕(鄭鵬, 1467~1512)을 만나 『대학』을 배우면서 비로소 정통 도학을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늦은 나이에 입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적 성취가 높아 정붕 문하의 독보적인 존재로서 도학의 계승자가 되었다.
    박영이 평생을 통해 도학의 지침서로 활용한 경전은 『대학』이었다. 『대학』에 대한 강조는 당시 도학을 표방하는 학자들의 공통적인 경향이기도 했으며, 김굉필(金宏弼, 1454~1504)에서 정붕으로 이어지는 학맥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박영의 저작이 주로 『대학』과 관련한 것이고, 그 중에서도 「대학경일장연의(大學經一章演義)」가 가장 방대한 것으로 보아 그 역시 평생을 『대학』에 침잠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스승인 정붕과의 ‘청산대학’ 일화는 『대학』에 대한 박영의 기본 관점이기도 한데, 이런 점 때문에 이황이나 이이를 비롯한 후대의 학자들에게 선학(禪學)의 혐의가 있다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이 일화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중요한 요지는 바로 박영이 정붕으로부터 전수한 학문의 핵심이 『대학』이라는 점이고, 또한 이 ‘대학의 도(道)란 멀리 있는 공허한 것이 아니라 인간 생활 속에 내재되어 있는 실천적 도리일 뿐’이라는 점에서 세속의 가치를 벗어난 초월적 경계에 대한 깨달음을 강조하는 불교의 돈오(頓悟)와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이것은 박영의 『대학』 이해가 삼강령(三綱領)이 아닌 팔조목(八條目)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즉 박영은 두 개의 「大學圖」를 그려 『대학』의 중심 개념을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삼강령(三綱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팔조목(八條目)을 지(知)와 행(行)으로 나누어 설명하거나, 정심(正心)을 중심으로 하여 마음공부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이황을 비롯한 후대 학자들의 『대학』 이해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여기에서 삼강령은 유학의 이상에 대한 원리적 언급이라면 팔조목은 구체적인 실천적 항목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영은 특히 ‘정심(正心)’을 중심으로 『대학』을 이해했는데, 이러한 방식은 매우 독창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마음공부를 통한 직접적인 깨달음과 현실 속에서의 실천을 중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박영은 이처럼 학문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자득(自得)’과 ‘체인(體認)’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백록동규해(白鹿洞規解)」에서 “학문하는 방법은 자득한 것이 있은 뒤에야 함양(涵養)할 수 있으니, 만약 배우되 자득한 것이 없으면 무엇을 조존(操存)하고 함양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백록동규해」가 백성들의 교화를 목적으로 지은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우선 마음으로부터 위기지학의 근본을 세우고 실천을 통해 완전히 체득한 다음에야 그것을 원리로서 보존하고 확장할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대학경일장연의」에서도 마찬가지로 확인된다. 그는 리(理)와 사(事)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마음 밖에 따로 리가 있지 않고, 리를 벗어나서 따로 존재하는 일(事)이란 없다."라고 하였는데, 이와 같은 설명 방식은 마치 명나라 왕수인(王守仁, 1472~1528)의 심학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순전히 마음으로 자득할 것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나온 언급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며, 자기성찰과 실천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태도에서 우리는 특정한 이론 구조에 얽매이지 않는 박영의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사유체계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주자학이 교조화되고, 양명학적 사유를 철저히 이단으로 배척하는 후대의 학자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황은 박영의 학문에 대해 그 도학자로서의 면모는 높이 평가하면서도 학문적 순일성과 엄밀성에 대해서는 정밀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비판한다. 특히 자득(自得)과 체인(體認)을 강조하는 박영의 학문방법론이 지나치게 소략하고 또한 공부의 순서가 뒤바뀌어 있어서 자칫 유학의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의 공부방법과 배치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이 역시 박영의 이런 언급에 대해 ‘만약 배우는 사람들에게 먼저 자득하기를 구한 뒤에 그것을 존양(存養)하도록 한다면 이단의 학문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 드물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박영이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평가하였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이 연구는 송당(松堂) 박영(朴英, 1471~1540)의 『대학』에 대한 이해와 그 특성을 살펴보고, 나아가 조선성리학사에 있어서 그의 『대학』 해석이 가지는 의미를 구명하기 위한 것이다. 박영이 평생을 통해 도학의 지침서로 활용한 경전은 『대학』이었다. 『대학』에 대한 강조는 당시 도학을 표방하는 학자들의 공통적인 경향이기도 했으며, 김굉필(金宏弼, 1454~1504)에서 정붕으로 이어지는 도통의 전승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박영은 ‘대학의 도(道)’란 멀리 있는 공허한 것이 아니라 인간 생활 속에 내재되어 있는 실천적 도리일 뿐이라고 보았으며, 이런 점에서 세속의 가치를 벗어난 초월적 경계에 대한 깨달음을 강조하는 불교의 돈오(頓悟)와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이것은 박영의 『대학』 이해가 삼강령(三綱領)이 아닌 팔조목(八條目)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특히 ‘정심(正心)’을 중심으로 『대학』을 이해했는데, 이러한 방식은 매우 독창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마음공부를 통한 직접적인 깨달음과 현실 속에서의 실천을 중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유학의 이상에 대한 원리적 언급으로서 삼강령을 강조한 후대 학자들의 『대학』 이해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박영이 「대학경일장연의(大學經一章演義)」에서 제기한 “마음 밖에 따로 리가 있지 않고, 리를 벗어나서 따로 존재하는 일(事)이란 없다.”는 주장 또한 무엇보다도 ‘자득(自得)’과 ‘체인(體認)’을 강조한 것이며, 도학의 토대 위에서 그의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사유체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 주자학이 교조화되면서 박영의 이러한 사유는 후대의 학자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 영문
  •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understanding and characteristics of Daxue of Songdang Park Young (朴英, 1471~1540), and further to investigate the meaning of his interpretation of Daxue in the history of Joseon Neo-Confuciansim. The scripture that Park Young used as a guidebook for Dohak(道學) throughout his life was Daxue. The emphasis on Daxue was also a common trend among scholars advocating Dohak(道學) at the time, and it coincides with the tradition of continuity from Kim Gweng-pil (金宏弼, 1454-1504) to Jeong Bung.
    Park Young saw that ‘the way of Daxue’ is not a void, but a practical doctrine inherent in human life. And In this respect, there is an essential difference from the Buddhist Don-oh(頓悟), which emphasizes the realization of the transcendent boundary beyond secular values. This is also evident in the fact that Park Young's understanding of Daxue is centered on the Eight Articles(八條目), not the Three Doctrines(三綱領). In particular, he understood Daxue with the focus on ‘Correcting thought(正心)’, this method can be said to be very original, above all, he can confirm that he places importance on direct realization through mind study and practice in reality, there is a considerable difference from the understanding of Daxue of later scholars who emphasized the Three Doctrines as a principle reference to the ideal of Confucianism.
    Park Young's insistence that “there is not separately principle(Li, 理)out of the mind, and there is no other thing depart from principle(Li, 理)” that he raised in Daehak-GyeongilJangyeonyi(「大學經一章演義」), is to emphasize ‘Self-getting(自得)’ and ‘Realizing the state(體認)’, and is to reveal his open and active thinking system on the basis of Dohak. However, as Zhuzixue became dogmatic afterwards, Park Young's thoughts were bound to be criticized by later scholar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이 연구는 송당(松堂) 박영(朴英, 1471~1540)의 『대학』에 대한 이해와 그 특성을 살펴보고, 나아가 조선성리학사에 있어서 그의 『대학』 해석이 가지는 의미를 구명하기 위한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연구 목적의 효용성을 높이기 위해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과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등 16세기의 대표적인 『대학』 해석과 비교 분석함으로써 박영의 도학체계가 지닌 본질적 의미와 특징을 구체화하고자 한다.
    조선성리학에 있어서 『대학』에 대한 관심은 사회적 실천이념으로서 도학을 지향한 사림 학자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들은 자신의 학문적 목표를 위기지학의 수행에 맞추고 『소학』을 중심으로 실천유학의 길을 걸었으며, 나아가 『소학』과 상호유기적인 관계로 『대학』을 파악하였고, 이를 통해 실천의 완성을 지향하였다. 박영 역시 평생을 통해 도학의 지침서로 『대학』을 활용하였으며, 이는 김굉필(金宏弼, 1454~1504)에서 정붕(鄭鵬, 1467~1512)으로 이어지는 학맥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특히 박영이 정붕으로부터 전수한 ‘대학의 도(道)’란 멀리 있는 공허한 것이 아니라 인간 생활 속에 내재되어 있는 실천적 도리일 뿐이라는 점에서 세속의 가치를 벗어난 초월적 경계에 대한 깨달음을 강조하는 불교의 돈오(頓悟)와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이것은 박영의 『대학』 이해가 삼강령(三綱領)이 아닌 팔조목(八條目)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즉 박영은 두 개의 「大學圖」를 그려 『대학』의 중심 개념을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삼강령(三綱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팔조목(八條目)을 지(知)와 행(行)으로 나누어 설명하거나, 정심(正心)을 중심으로 하여 마음공부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이황을 비롯한 후대 학자들의 『대학』 이해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여기에서 삼강령은 유학의 이상에 대한 원리적 언급이라면 팔조목은 구체적인 실천적 항목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영은 특히 ‘정심(正心)’을 중심으로 『대학』을 이해했는데, 이러한 방식은 매우 독창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마음공부를 통한 직접적인 깨달음과 현실 속에서의 실천을 중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박영은 「대학경일장연의(大學經一章演義)」에서 리(理)와 사(事)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마음 밖에 따로 리가 있지 않고, 리를 벗어나서 따로 존재하는 일(事)이란 없다.”라고 하였는데, 이와 같은 설명 방식은 언뜻 양명학을 연상시키지만 시기적으로 박영이 양명학을 수용했을 가능성은 없으므로 이 주장은 순전히 마음으로 자득할 것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나온 언급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며, 도학적 관점에서 자기성찰과 실천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태도에서 우리는 특정한 이론 구조에 얽매이지 않는 박영의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사유체계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주자학이 교조화되고, 양명학적 사유를 철저히 이단으로 배척하는 후대의 학자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를 통해 기대되는 학문적·사회적 기대효과와 활용방안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대학』 해석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지금까지 『대학』 해석과 관련한 수많은 연구들이 진행되어 왔으며, 현재도 매년 다양한 논문이 발표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개별 인물이나 학파별 『대학』 해석에 주목하고 있으며, 이 또한 대부분 퇴계학이나 율곡학에 국한되어 있다. 본 연구는 지금까지 별로 주목되지 않았던 박영의 『대학』 해석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이며, 『대학』을 퇴계학이나 율곡학과는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는 방식을 제공할 것이다.

    ② 조선유학사에 『대학』이 핵심 경전으로 정착되는 과정과 문제의식을 보다 분명하게 해명할 수 있다.
    『대학』이 15세기 사림들에 의해 유학의 핵심 경전으로 수용된 데에는 이들이 사회적 실천이념으로서 도학을 지향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의 학문적 목표를 위기지학의 수행에 맞추고 『소학』을 중심으로 실천유학의 길을 걸었으며, 나아가 『소학』과 상호유기적인 관계로 『대학』을 파악하였고, 이를 통해 실천의 완성을 지향하였다. 그리하여 16세기에 이르면 『대학』을 여러 경전의 강령(綱領)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흐름을 주도한 대표적 인물이 바로 박영과 이언적, 그리고 이황 등이다. 본 연구는 박영을 중심으로 이언적과 이황의 『대학』 이해를 비교 분석함으로써 『대학』이 핵심 경전으로 정착되는 과정과 문제의식을 보다 분명하게 해명할 수 있을 것이다.

    ③ 리학이 아닌 도학을 중심으로 조선의 성리학사를 조명함으로써 조선성리학의 특징을 명확히 드러낼 수 있다.
    지금까지 조선성리학에 대한 연구는 주로 성리 이론이 심화되는 과정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대학』 관련 연구 역시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성리학의 뿌리가 사림의 도학정신에 있는 것이라면 단순히 이론체계의 심화과정으로만 전체 성리학사를 이해하는 것은 정작 본질은 잃어버리고 지엽적인 것에만 천착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본 연구는 도학적 관점에서 『대학』을 해석하고자 한 박영의 사상체계를 통하여 중국성리학과 차별화된 조선성리학의 특성을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 색인어
  • 『대학』, 박영, 이언적, 이황, 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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