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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대한제국기 대한부인회잠업강습소의 조직과 활동
Organization and Activities of the ‘Daehan Women's Association-Sericulture Training Office’ in the period of Daehan Empire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시간강사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9-S1A5B5A07-2019S1A5B5A07091435
선정년도 2019 년
연구기간 1 년 (2019년 09월 01일 ~ 2020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남미혜
연구수행기관 이화여자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는 1905년 7월에 조직된 여성단체 대한부인회가 운영하였던 잠업강습소의 조직과 활동에 대해 고찰함으로써 잠업강습소가 근대여성 기술교육기관으로서 기능을 했으며, 여성의 사회진출에 기여했음을 규명하려는 것이다.
    대한부인회에 관한 현재 학계의 개별 연구 성과는 별로 없으며, 대한제국기를 다룬 연구 논저에서 부분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웹사이트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검색을 하면 1946년에 조직된 애국 여성운동단체 대한부인회에 대한 내용만이 검색될 뿐, 대한제국 말기에 설립되었던 대한부인회에 관한 정보는 전무하다. 이러한 실정이므로 대한부인회에서 운영했던 잠업강습소의 실체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 없다.
    기존의 연구 논저들에서 부분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대한부인회에 대한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다. 일제의 한국식민지 여성정책의 중심이 여성인력 확보에 있었으므로, 이 목적 달성을 위해 일제가 李址鎔의 부인 李鈺卿으로 하여금 대한부인회를 조직하게 하여 잠업강습소를 운영하게 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옥경은 여러 친일적 행적을 통하여 반민족적 여성운동을 수행한 부정적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대한부인회잠업강습소는 황실의 적극적인 후원과 지원금으로 설립되었다. 고종의 내탕금 1,000圓, 엄비의 하사금 1,000圓을 주 재원으로 하고, 양잠진흥정책을 펴려고 계획했던 고종의 측근 李容翊의 기부금도 설립지원금에 포함되어 있었다.
    고종은 면업·직포·양잠 등과 같은 재래산업을 개편하여 기술을 근대화시킴으로써 자본주의 열강의 침투에 대응하고, 국가의 富를 확충한다는 계획 하에 여러 산업진흥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고종 21년(1884)에는 蠶桑公司를 설립하여 새로운 기계의 도입, 기술 진흥으로 양잠기술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광무 4년(1900)에는 농상공부 산하에 蠶業課를 신설하고 잠업과시험장을 설치하였다. 광무 8년(1904) 7월에는 궁내부 관제를 개정하여 양잠·植桑·제사·직조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尙衣司 직조과를 설치하였다. 따라서 1905년 7월 설립된 대한부인회잠업강습소가 이러한 대한제국의 일련의 잠업진흥 정책들과의 연결선상에서 생각해볼 여지는 없는지 再考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한부인회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기 위해서는 부인회에서 운영했던 잠업강습소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잠업강습소는 원래 여성을 대상으로 한 교육기관이었지만, 초기에는 여성 지원자가 거의 없어서 남학생을 모집하여 운영하였다. 대한부인회잠업강습소는 1906년 9월 1일 1회 졸업생을 배출한 이래, 1910년 2월 일제에 의해 관립여자잠업강습소로 개편되기 전 해인 1909년 10월까지 수십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본 연구자는 최근에 잠업강습소 1회 졸업생인 崔炳斗가 남긴 양잠관련 문서를 발굴하면서 대한부인회잠업강습소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간의 연구들에서는 잠업강습소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들을 교육했는지, 남녀 학생 비율은 어떠했는지, 학제는 어떠했으며, 졸업생들의 진로는 어떠했는지에 대한 내용들이 다뤄지지 않았다. 대한부인회의 성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잠업강습소의 실체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본 연구에서는 대한제국기에 발행된 근대 신문들과 최병두의 자료를 토대로 하여 대한부인회잠업강습소의 실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 기대효과
  • 본 연구로 인한 기대효과와 활용방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여성사 및 인접 분야 연구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대한부인회잠업강습소에 대한 학계의 연구 성과가 거의 없었으므로, 본 연구는 대한제국기 여성 기술교육, 여성의 사회진출이라는 면에서 여성사학계에 새로운 연구를 촉발시키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또한 그동안 별로 주목되지 않았던 대한제국기의 잠업교육, 잠업기술, 蠶書 등 양잠업에 대해서도 고찰함으로써 이 시기 농업사, 경제사, 교육사 연구에도 기여할 수 있다.
    둘째, 대한부인회잠업강습소 1회 졸업생 崔炳斗의 이력서와 그가 남긴 양잠관련 자료를 새롭게 발굴·분석함으로써 관련분야 연구를 활성화시키고, 연구의 공백을 메우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최병두는 잠업강습소 학생이던 丙午年(1906) 5월에 『養蠶法日記』·『養蠶法』을 저술하였다. 최병두 문서는 학계에 처음 공개되는 새로운 자료이며, 잠업강습소의 실체를 규명하는데 가치가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새로운 1차 사료의 발굴을 통해 관련 분야 연구가 보다 심층적으로 진행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셋째, 본 연구 성과는 한국사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Naver사전이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대한부인회를 검색하면 1946년에 조직된 애국 여성운동단체 대한부인회에 대한 내용만이 검색될 뿐, 대한제국기에 설립된 대한부인회에 관한 정보는 전무하다. 본 연구를 통해 대한부인회잠업강습소의 설립 배경, 교육내용, 학제, 기술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 등 대한부인회에 대한 실체가 확인될 것이다. 연구 결과는 한국사 기초자료로 제공될 수 있을 것이며, 대학 강의 및 연구자들의 연구 자료로도 활용될 수 있다.
  • 연구요약
  • 1905년 7월에 조직된 여성단체 대한부인회가 운영했던 잠업강습소에 대해 살펴보려는 본 연구는 『황성신문』·『대한일보』·『대한매일신보』등 각종 신문, 官報, 私撰 史書, 잠업강습소 졸업생이 남긴 양잠관련 고문서, 양잠기술의 내용을 담고 있는 蠶書, 조선총독부 보고서 등 대한제국기 자료를 주 텍스트로 하여 문헌 연구의 방법으로 진행할 것이다.
    대한부인회는 고종과 황실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설립된 여성단체로 주 활동은 잠업강습소의 운영이었다. 대한부인회 설립기금에는 고종의 내탕금과 엄귀비의 하사금, 그리고 대한부인회 임원을 구성하고 있는 고관대작들의 기부금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관대작 중에는 고종의 최측근 인사로 용산에 양잠시험소를 설치하고 양잠진흥정책을 펴려했던 李用翊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한부인회잠업강습소는 궁내부 桑園의 뽕나무를 이용하여 양잠을 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잠업강습소 운영에 고종의 내탕금이 지원되었으며 궁내부 桑園을 이용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산업진흥정책을 펴려했던 고종의 의지가 잠업강습소 설립에 반영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대한부인회의 성격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기 위해서는 부인회에서 운영했던 잠업강습소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대한부인회잠업강습소는 여성을 대상으로 설립된 교육기관이었지만, 설립 초기에는 여성지원자가 없어서 대부분 남성으로 충원하여 운영하였다. 잠업강습소는 해를 거듭할수록 발전하여 1909년에는 여성지원자가 51명이나 되어 시험을 거쳐 여성 20명을 선발, 교육하였다.
    대한부인회잠업강습소는 1906년 1회 26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그 중 25명이 농상공부 기수로 임용되어 활동하였다. 기수로 임용되지 않은 1명은 여성으로 추정된다. 잠업강습소 1-4회까지의 졸업생 명단이 이 시기 발행된 신문에서 부분적으로 확인된다. 잠업강습소 졸업생들은 양잠 교사로 활동하거나 사립양잠학교를 설립하기도 했으며, 농상공부 기수로 임용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또한 졸업생들이 연합하여 잠업동지연구소를 설립하여 활동한 것으로 확인된다.
    대한부인회잠업강습소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는 근대 여성교육과 여성의 사회진출과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매우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잠업강습소 1-4회까지의 졸업생 명단을 수집하여 남녀 성별 비율, 졸업 후 진로 등에 대해 면밀히 검토해 볼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잠업강습소의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과 역할이 드러날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본 연구자가 최근에 새롭게 발굴한 대한부인회잠업강습소 1회 졸업생 최병두가 저술한 『養蠶法日記』·『養蠶法』을 활용하여 잠업강습소의 실체를 밝혀볼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이 시기 연구의 공백을 메우는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는 1905년 7월에 설립된 여성단체 대한부인회가 운영하였던 잠업강습소의 조직과 활동에 대해 검토하고자 하였다.
    대한부인회는 고종과 황실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설립된 여성단체로 주 활동은 잠업강습소 운영이었다. 1905년 한·일 양국 부인들의 사교모임이 활발해지면서 주한 일본공사관 관리의 부인이 한일부인회를 조직하자는 주장을 하게 되고, 이에 이옥경이 합세하여 대한부인회가 조직되었다. 회장에 친일적인 성향의 이옥경이 선출되고, 임원에 다수의 통감부 관리 부인들이 임명되었다.
    대한부인회에서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잠업강습소를 설치·운영하고자 계획하고 궁내부소속 용산에 있는 양잠장을 하사받았다. 대한부인회잠업강습소는 원래 여성을 대상으로 한 교육기관이었지만, 초기에는 여성 지원자가 거의 없었으므로 남학생을 모집하여 운영하였다. 여성 입학지원자가 점차 증가하게 되자 1909년부터는 여성만을 선발해서 교육을 하였다. 잠업강습소에서는 구두시험과 작문·산술 시험을 거쳐 생도를 선발하였으며, 4~6개월 동안 양잠에 관한 이론과 실습을 교육하였다. 양잠의 특성상 수업은 실습이 중심이 되었으며 잠실의 소독, 도구의 세척, 뽕따기 등에 이르기 까지 모두 생도가 담당하게 하였다. 또한 생도를 조별로 편성하여 조장을 선출하였으며, 조장이 강습소의 명령 및 교수의 지도 사항을 전달하게 하였다.
    대한부인회잠업강습소는 설립 초기부터 기숙사제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1909년부터 생도들은 매월 6원씩 부식비를 지급받았다. 잠업강습소는 1906년부터 1909년까지 4년 동안 총 9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그 중 남학생이 57명, 여학생이 40명이었다.
    잠업강습소에서는 양잠 교육 외에도 잠종과 뽕나무 묘목을 배포하거나, 생도 및 지방 양잠가들에게 잠종·양잠 도구 구입을 중개하였다. 또한 1907년 경성박람회에 양잠 관련물을 출품하기도 하였다. 잠업강습소 학생들은 졸업 후 농상공부 技手로 임용되거나, 관립·사립 양잠전습소 교사로 진출하였다. 여성졸업생들은 궁궐에 양잠 보조 교사로 채용되기도 하고, 단기 교사로 채용되기도 하였다. 일부 경제력이 있는 졸업생 가운데는 양잠학교를 설립한 사람도 있었다.
    1910년 2월 일제가 대한부인회잠업강습소를 관립여자잠업강습소로 개편, 운영하게 되면서 대한부인회잠업강습소는 폐지되었다. 대한부인회잠업강습소가 비록 일제의 유도 하에 설립되어 운영되었지만, 여성 양잠인 양성과 여성의 사회진출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 부분은 인정해야할 것이다.
  • 영문
  • This study aimed to examine the activities of the Daehan Women's Association-Sericulture Training Office; a women's organization created in July 1905.
    The Daehan Women's Association is a women's organization established under the active support of King Gojong and the imperial family, and its main activity was the operation of the Sericulture Training Office. In 1905, as the women's social gatherings between Joseon and Japan became active, the wife of a Japanese legation official in Joseon insisted on organizing the Joseon-Japan Women's Association, and Lee Ok-kyung joined forces to create the Daehan Women's Association. Lee Ok-kyung, who was pro-Japanese, was elected as the chairman, and a number of wives of the Tonggambu(統監府) officials were appointed as the executives.
    The Daehan Women's Association planned to set up and operate a Training Office for women and was granted the Sericultural Experiment Station in Yongsan, which belonged to the Gungnaebu(宮內府). The Daehan Women's Association-Sericulture Training Office was originally an educational institution for women, but there were few female applicants in the beginning, so it recruited and operated male students. As the number of female applicants for admission gradually increased, only women were selected and educated from 1909. The Daehan Women's Association-Sericulture Training Office selected students after oral and written and arithmetic tests, and trained them in theory and practice for four to six months. Due to the nature of the Sericulture industry, classes were centered on practice, and students were in charge of disinfection of Jamsil(蠶室), cleaning tools, and picking mulberries. In addition, the students were divided into groups to elect the head of the group, and the head of the group was ordered to deliver the instructions of the institute and instructions of the professor.
    Since the beginning of the establishment, the Sericulture Training Office has been operated under the dormitory system. Since 1909, students have been paid six won per month for food expenses. The Daehan Women's Association-Sericulture Training Office produced a total of 97 graduates in the four-year period from 1906 to 1909. Among them, 57 were male and 40 were female.
    In addition to the Sericulture training, the Sericulture Training Office also distributed silkworm eggs and mulberry seedlings, or mediated the purchase of silkworm eggs and Sericulture tools to students and local sericulture farmers. It also featured silkworm-related items at the 1907 Gyeongseong(京城) Exposition. After graduation, the students of the Sericulture Training Office were appointed as engineers of the Ministry of Agriculture, or became teachers of the Government Administration and Private Sericulture Training Office. Female graduates were employed as assistants in Sericulture at the palace or as short-term private tutor. Some of the graduates with economic power established the Sericulture School.
    In February 1910, when the imperial Japan reorganized and operated the Daehan Women's Association-Sericulture Training Office as a governmental women's Sericulture Training Office, the Sericulture Training Office was abolished. Although the Daehan Women's Association-Sericulture Training Office was created and operated under the guidance of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it should be acknowledged that it played a positive role in fostering women's Sericulture and women's social advancement.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1905년 7월에 설립된 여성단체 대한부인회가 운영했던 잠업강습소의 설립배경과 활동에 대해 고찰함으로써 여성교육과 사회진출과의 관련성을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대한부인회잠업강습소와 관련된 자료를 광범위하게 수집·정리, 분석하여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잠업강습소의 여러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하였다.
    대한부인회는 고종과 황실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설립된 여성단체로 주 활동은 잠업강습소 운영이었다. 1905년 봄부터 한·일 양국 부인들의 사교모임이 점점 활발해지면서 주한 일본공사관 일등서기관 萩原守一부인이 한·일부인회를 설립하자는 주장을 하고, 이에 이옥경이 합세하여 1905년 7월경에 대한부인회가 설립되었다. 즉 일본 부인들의 유도 하에 대한부인회가 설립되었으며, 회장에 친일적인 성향의 이옥경이 선출되고 임원에 다수의 통감부 관리 부인들이 임명되었다.
    대한부인회에서는 잠업강습소를 설치·운영하고자 계획하고 황실의 지원을 받아 궁내부 소속 용산소재 組織科를 특지로 인허 받았다. 1906년 4월부터 생도를 모집하여 본격적으로 잠업강습소 운영을 시작하였다. 잠업강습소는 원래 여성을 대상으로 한 교육기관이었지만, 초기에는 여성 지원자가 거의 없어서 남학생을 모집하여 운영하였다. 대한부인회잠업강습소는 1906년 9월 1회 졸업생을 배출한 이래, 1910년 2월 일제에 의해 관립여자잠업강습소로 개편되기 전인 1909년 10월까지 총 9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 중 남학생이 57명, 여학생이 40명이었다.
    잠업강습소 운영 첫해인 1906년에는 여성지원자가 거의 없어서 특별한 시험 없이 한문해독능력 정도만 파악하고 생도를 선발하였다. 1907년부터는 구두시험과 작문·산술시험을 거쳐 생도를 선발하였고, 4~6개월 동안 양잠에 관한 이론과 실습교육을 하였다. 여성 입학지원자가 점차 증가하게 되자 1909년부터는 잠업강습소 원래의 취지대로 여성만을 선발하여 교육하였다. 잠업강습소 수업은 양잠의 특성상 실습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蠶室과 蠶具의 세척·소독에서 摘桑 등에 이르기 까지 모두 생도가 실습하게 하였다. 또한 학습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모든 생도를 조별로 편성하여 조장을 선출하였으며, 조장이 강습소의 명령 및 교수의 지도 사항을 전달하고 組內의 질서를 유지하게 하였다. 양잠업은 누에에게 하루에 여러 차례 뽕잎을 주어야 하므로 잠실 곁에 머물며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하는 산업이다. 따라서 잠업강습소는 설립 초기부터 기숙사제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1909년부터 생도들은 매월 6원씩 부식비를 지급받았다.
    대한부인회잠업강습소는 양잠 교육 외에도 잠종이나 상묘를 배포하거나, 생도 및 지방 양잠가들에게 蠶種·蠶具 구입을 중개하였다. 또한 1907년 경성에서 개최된 박람회에 양잠 관련물을 출품하기도 하였다. 순정황후의 친잠행사를 주도했으며, 경성에 거주하는 황족과 대관들의 양잠지도도 하였다. 잠업강습소를 졸업한 학생들은, 농상공부 기수로 임용되거나 관립·사립 잠업전습소 교사로 진출하였다. 여성졸업생들은 궐내 친잠에 侍婦로 채용되기도 하고, 단기 교사로 채용되기도 하였다. 일부 경제력이 있는 남성졸업생 가운데는 양잠학교를 설립한 사람도 있었다.
    양잠은 여성이 주체가 되어서 수행하는 일이었으므로 일제가 식민지 조선의 잠업 확대에 여성들을 앞세웠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대한부인회가 일제의 사주에 의하여 설립되고, 주요 활동이었던 양잠교육이 일본의 技師와 교사들에 의해 전담되어 일제의 식민지 산업 확장에 기여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여성을 위한 양잠교육기관이 전무하였던 당시에 여성교육기관으로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여성의 주체적인 역량이 미성숙한 당시에 여성의식을 성장시키고 여성들에게 사회활동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는 1905년 7월에 설립된 여성단체 대한부인회가 운영했던 잠업강습소의 활동에 대해 고찰함으로써 여성교육과 사회진출과의 상관관계를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동안의 연구에서 대한부인회의 잠업강습소 운영과 활동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본 연구는 대한제국기 여성의 직업교육, 기술교육, 그리고 여성의 사회진출이라는 면에서 여성사학계에 새로운 연구를 촉발시키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본 연구는 그간 다루어지지 않았던 잠업강습소의 입학 규정, 교육 기간, 교육 내용, 교육 이외의 활동 모습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한국사 기초자료와 대학 강의 및 연구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 부분적으로 활용한 대한부인회잠업강습소 1회 졸업생 崔炳斗가 남긴 『養蠶法日記』·『養蠶法』(1906, 필사본)은 학계에 처음 공개되는 새로운 자료이다. 자료를 면밀히 검토한 결과 두 자료는 일부 중복되는 내용들이 있으나 내용은 서로 다르며,『養蠶法日記』는 자료 뒤쪽 부분이 잘려져 나가 불완전하였다.『養蠶法日記』앞부분은 양잠에 관한 일반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養蠶法』과 비슷한 내용이 필사로 적혀 있다. 두 자료는 당시 잠업강습소에서 교재로 사용했던 책을 생도였던 최병두가 필사한 노트 성격의 자료인 듯하다.『養蠶法日記』뒷부분에는 책 제목 그대로 누에 사육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1906년 5월 28일부터 시작하여 6월, 7월의 날씨·바람의 방향·바람의 세기·외부온도·잠실의 온도·습도·給桑量·급상 횟수·蠶箔量 등 누에 사육현황이 표의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잠업강습소의 누에 사육현황을 보여주는 필사본 자료라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으나, 숫자만 표기된 건조한 형태의 자료라는 점에서 아쉽다. 잠업강습소의 누에 사육현황에 대해서는 강습소 技師였던 岩田次郞이 『한국중앙농회보』에 게재한 내용이 도움이 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잠업강습소의 양잠기술에 대한 부분은 다루지 않았다. 최병두가 남긴 자료와 강습소 技師 岩田次郞의 잠업강습소 보고서를 자세히 검토한다면, 잠업강습소에서 교육했던 양잠기술의 수준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추후의 연구과제로 삼고자 한다.
    본 연구자는 위 연구를 통해서 대한부인회잠업강습소의 활동과 그것이 당시 여성에게 가지는 의미에 대해 정리해 보고자 하였다. 대한부인회잠업강습소는 당시 여성 잠업인 양성을 위한 최고 수준의 교육기관이었다. 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딸로 구전으로 이어지던 양잠교육에서 벗어나 이론과 실습을 병행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음으로써 여성들은 양잠이라는 산업과 직업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였을 것이다. 대궐 및 각지에 파견되어 양잠을 지도한 잠업강습소 출신 여교사들은 자신들이 객관적으로 자격을 인정받은 양잠전문가라는 자부심도 가졌을 것이다.
    대한부인회잠업강습소가 비록 일제의 유도 하에 설립되어 운영되었지만, 여성 양잠인 양성과 여성의 사회진출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 부분은 부인하기 어렵다. 위의 연구를 토대로 하여 본 연구자는 향후 일제시기 잠업전습소, 양잠산업, 양잠과 여성의 사회진출과의 관련성 등을 검토하여 이 시기 한국사 연구의 공백부분을 메우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 색인어
  • 양잠, 대한부인회, 대한부인회잠업강습소, 양잠교육, 여성교육, 이옥경,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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