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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세기 영국에서의 프랑스어발달사
A History of French language in 11-15th centuries England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시간강사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9-S1A5B5A07-2019S1A5B5A07091492
선정년도 2019 년
연구기간 1 년 (2019년 09월 01일 ~ 2020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김영모
연구수행기관 충남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 과제의 목표는 그동안 국내 학계의 프랑스어학 연구에서 소외되어 온 11-15세기 중세 영국에서의 프랑스어발달사를 언어내적 상황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사적 측면에서 세밀하게 고찰 분석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프랑스어학 연구가 통사, 음성, 의미, 화용론 등에 집중되어 왔다면 본 과제는 영국에서 사용된 앙글로-프랑스어발달사를 중심으로 중세프랑스어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앙글로-프랑스어 발달사에 대한 본 연구는 프랑스어문학은 물론 영어학과 서양의 중세사학, 행정, 법학의 연구에서 유용한 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본 연구과제의 구체적인 목표는 다음과 같다.

    1. 본 연구는 중세 영국에서 사용된 앙글로-프랑스어의 연구 동향을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의 국내외의 프랑스어발달사 및 중세프랑스어 연구에서 앙글로-프랑스어는 어떻게 분류되어 다뤄져왔는가? 언어사 및 프랑스어학에서 앙글로-프랑스어의 위상 등이 연구될 것이다.
    2. 중세는 봉건사회였다. 13세기 전반부터 프랑스 각 도시와 지방의 봉건영주들은 지역 방언으로 헌장을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중세 내내 프랑스 왕들은 토착어(방언)와 라틴어로 헌장을 작성하였다. 프랑스 왕들이 선택한 토착어인 프랑시앵어는 프랑스 국어의 원천이 되었으나 중세 말까지도 프랑스는 여전히 여러 지역 방언으로 분화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 프랑스의 정치와 언어상황이 연구될 것이다.
    3. 1066년 기욤 공작이 영국을 정복함으로써 노르망디 프랑스어가 영국으로 이식되어 4세기 동안 영국 사회를 지배하였다. 노르망디 공작인 기욤이 영국을 정복한 이후 어떻게 영국에 앙글로-프랑스어가 이식되어 전개되었는지를 정치, 사회문화적 배경을 중심으로 고찰할 것이다. 앙글로-프랑스어는 앵글로-색슨어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앙글로-프랑스어의 철자와 어휘는 프랑스 왕실의 언어였던 프랑시앵어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앙글로-프랑스어는 영국 전 지역에서 통용되었으며 현전하는 문헌이나 작품은 무엇인가? 이 시기 영국에서 씌어진 앙글로-프랑스어 이외의 앵글로-색슨어 작품은 무엇이고 두 문학의 차이와 특징은 무엇인가? 앙글로-프랑스어가 15세기 중반 이후 영국에서 제2 외국어로 전락한 이유는 무엇인가? 등을 분석할 것이다.
    4. 11세기 후반 영국에 이식된 앙글로-프랑스어는 왕의 언어로 영국 왕실과 행정, 법률분야에서 라틴어와 함께 문어로 통용되었다. 라틴어는 영국왕실의 행정어로 헌장 등의 공식문서에서 사용되었고 일상적인 법과 재판에서는 앙글로-프랑스어가 사용되었다. 반면에 13세기부터 영국왕실에서 앙글로-프랑스어가 행정어로 사용되면서부터 <대헌장Magna Carta>의 앙글로-프랑스어 번역본이 만들어졌다. 이처럼 이 시기 영국에서는 앙글로-프랑스어가 행정어로 사용되었는데 당시 프랑스의 언어상황은 어떠했는가? 특히 이 시기 영국의 법정에서도 라틴어 대신 앙글로-프랑스어의 사용이 지배적이었는데 이처럼 앙글로-프랑스어가 영국 사회에 널리 통용된 사회, 지리적 배경은 무엇인가? 등을 면밀하게 고찰할 것이다.
    5. 앙글로-프랑스어는 영국에서 기욤의 노르만 왕조 이후 15세기 초 랭커스터 왕조의 헨리4세까지 왕의 언어로 영속하였다. 특히 앙글로-프랑스어는 영국왕실의Common Law, Year Books와 같은 법규가 작성된 왕의 언어였다. 이처럼 영국에서 오랫동안 앙글로-프랑스어가 영속할 수 있었던 배경이 단순하게 앙글로-프랑스어가 왕의 언어이자 법률어였기 때문인가? 또한 13세기부터 영국에서 앙글로-프랑스어의 체계적인 학습이 이루어지는데 왜 이시기에 영국에서 이러한 학습이 이루어지고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1337-1453)은 두 왕국의 언어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등이 연구될 것이다.
    6. 랭커스터 왕조의 헨리 4세는 최초로 모국어를 사용한 왕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헨리 4세 치하에서도 앙글로-프랑스어는 여전히 왕실의 행정어였다. 앙글로-프랑스어는 15세기 후반에 가서야 행정 및 법률 영역에서 영어로 대체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영국에서 영국의 민족주의가 일어난 것은 헨리 5세 치하의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이었다. 그렇다면 15세기 이전 영국에서는 모국어인 영어에 대한 자각은 없었는가? 어떻게 헨리 5세는 왕의 언어였던 앙글로-프랑스어 대신 토착어인 영어를 국어로 채택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 등을 분석하고자 한다.
    7. 중세 영국에서 앙글로-프랑스어의 형성과 전개는 앙글로-프랑스어, 중세프랑스어, 중세불문학, 방언학은 물론 프랑스어발달사 연구의 훌륭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또한 본 연구는 앙글로-프랑스어가 중세영어에 어떤 영향을 끼쳐 현대영어로 거듭날 수 있었는지 살펴봄으로써 영어발달사는 물론 비교언어학, 사회언어학 연구 방안을 모색 제언해보고자 한다.
  • 기대효과
  • 1. 학문발전에 대한 기대효과

    ① 우리나라 학계의 프랑스어발달사에 대한 연구는 부진하며, 특히 앙글로-프랑스어에 대한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다. 이러한 국내 프랑스학 연구의 열악한 상황에서 앙글로-프랑스어의 형성과 전개과정에 대한 연구는 프랑스어발달사 뿐만 아니라 중세 유럽의 언어 상황에 대한 연구의 폭을 확장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② 본 연구는 앙글로-프랑스어의 형성과 전개를 언어와 정치, 사회, 문화와의 역학관계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으로 인문학 연구의 지평 확장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③ 11-15세기 중세 영국 왕들의 언어인 앙글로-프랑스어에 대한 본 연구는 중세유럽의 정치, 사회, 문화, 역사적 측면에서 검토되어야하기 때문에 이에 관련된 여러 관련 학문분야들, 예컨대 중세사학, 법학, 정치학, 행정학, 문화사, 예술, 언어학 등의 학제적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④ 본 연구는 중세프랑스어의 한 지류를 고찰한다는 점에서 현대 프랑스어에 치중되어 있는 프랑스학 연구의 관심을 중세프랑스어, 프랑스어발달사 뿐만 아니라 방언학, 사회언어학 등의 영역으로 확장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⑤ 앙글로-프랑스어발달사 연구는 그동안 어휘 및 형태 통사연구에 한정되어온 중세영어 연구자들에게 사회언어학적 고찰과 영어발달사 분야로 연구의 영역을 확장시키는데 공헌할 것이다.
    ⑥ 본 연구는 영상매체를 활용한 유럽문화예술사 관련 교육현장에서 학습지도계획, 교수· 학습과정안, 수업시간에 사용할 활동지와 학생들과의 토론내용 등을 고찰하는 후속연구로 이어질 수 있다.

    2. 교육에서의 기대효과

    ① 본 연구는 기본적으로 프랑스어발달사에서 앙글로-프랑스어를 이해하기 위한 참고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특히 언어의 형성과 전개에 관한 왕의 역할에 중점을 둔 본 연구는 대다수 학교의 교양과목으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프랑스테마기행’, ‘유럽사회문화사’ 등의 강의에서 언어와 민족의 형성과 전개에서 왕권의 역할과 정치, 사회와의 역학관계를 알리는 데 유용한 지침서로 활용될 것이다.
    ② 본 연구는 앙글로-프랑스어의 형성과 전개에 관한 연구이므로 영문학, 영어학 수업은 물론 프랑스문학, 프랑스어학 강의에서 유용한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③ 본 연구는 ‘서양 중세사’, ‘중세 행정사’, ‘서양법학사’은 물론 ‘유럽문화사’ 등의 강의에서 ‘프랑스의 왕권’의 한 꼭지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④ 본 연구는 왕권과 언어에 관한 연구로 인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서양 학문에 기초하는 전공자 및 연구자들에게 바람직한 인문학적 소양을 쌓는 교육의 한 방식을 제공할 것이다.
    ⑤ 본 연구는 ‘인문학의 위기’로 우려되는 현 시점에서 '왕권과 언어'를 통섭의 인문학적 관점으로 시민강좌 등에서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3. 연구결과의 사회적 기여도

    ① 국내에서도 중세관련 영화가 상영되어 중세에 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특히 1992년 <헨리 5세>와 2000년 <잔 다르크>가 개봉되어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 두 영화는 중세에 대한 이해를 넘어 영국과 프랑스의 왕권과 언어를 이해하는데 결정적 자료로 평가된다. 헨리 5세는 영어를 모국어로 처음 사용한 헨리 4세의 아들로 프랑스와의 100년 전쟁 당시 아쟁쿠르(Azincourt) 전투에서 승리하여 영국민들에게 영어의 정체성을 심어준 왕이었다. 셰익스피어는 이 사실에 영감을 받아『헨리 5세』를 저술하여 영국인의 애국심을 고취시켰고 1599년 초연되어 호평을 받은 바 있다. 또한 잔 다르크는 100년 전쟁 당시 영국군으로부터 오를레앙을 해방시킨 구국의 영웅이었다. 이처럼 헨리 5세와 잔 다르크는 영국과 프랑스사에서 민족과 언어의 정체성 확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이 작품들은 단순한 역사물이 아닌 두 나라의 문화를 홍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본다. 왕권과 언어와의 관계를 통해 영국에서의 프랑스어발달사를 고찰해보는 본 연구의 결과는 우리나라에도 기 개봉된 <세종대왕>(1978)에 머무르지 않고 <헨리5세>와 <잔 다르크>처럼 잘 만들어지고 흥행에도 성공한 ‘인물영화’나 ‘소설’ 또는 드라마 제작에 좋은 영감을 줄 것으로 사료된다.
    ② 본 연구는 겉으로는 딱딱한 언어발달사에 대한 연구로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역사 속에서 언어란 문화현상에 대한 관심을 독려한다. 한글의 세계화, 한글로 된 팝의 세계화에 걸맞게 ‘세종대왕의 왕권과 언어(한글)’에 초점을 맞춰 <헨리5세>와 같은 영화나 드라마가 제작된다면 본 연구 성과가 대학에만 머물지 않고 보다 대중 속으로 깊게 파고드는 한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연구요약
  • 11-15세기 중세 언어사의 복잡성 속에서 영국왕들의 언어였던 앙글로-프랑스어의 형성과 전개를 프랑스어발달사의 측면에서 살펴보려는 본 연구과제는 다음 두 단계로 나뉘어 진행될 예정이다. 먼저 토대연구로서 앙글로-프랑스어의 개념과 기원,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국내에서의 앙글로-프랑스어 연구에 대해 개관해 본다. 또한 앙글로-프랑스어가 영국에 이식된 과정을 정치, 사회문화사적 측면에서 조명해본다. 본론에서는 토대연구에서 도출한 중세영국 언어사의 이론적 배경을 11-15세기 영국에서 왕의 언어였던 앙글로-프랑스어를 통해 구체적으로 분석하게 될 것이다.
    1. 토대연구: 11-15세기 중세 영국 언어사의 이론적 접근시도
    11-15세기 중세 영국언어사의 이론적 접근 시도와 함께 현재까지의 연구상황을 추적해보고 앙글로-프랑스어의 위상을 개관해 본다. 이 단계의 연구는 아래의 질문들을 중심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① 중세 프랑스와 영국의 언어상황은 어떠한가? 언어의 분화는 왜 일어났는가?
    ② 앙글로-프랑스어의 개념은 무엇인가? 앙글로-프랑스어는 노르망디에서 영국에 이식된 프랑스어에만 한정되는가? 파리어인 프랑시앵어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③ 앙글로-프랑스어가 영국에서 13세기 이후 퇴색된 주된 원인은 무엇인가?
    ④ 앙글로-프랑스어에 대한 가스통 파리(Gaston Paris) 이후 프랑스 언어사가들의 견해는 무엇인가? 현재 국내외의 앙글로-프랑스어 연구 현황은 어떠한가?
    ⑤ 1066년 기욤이 채 1만도 안 되는 병력으로 영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배경과 영국에 이식된 프랑스어가 영국을 지배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인가?
    ⑥ 프랑스어가 노르만 왕조에서 플랜타주네 왕조 말까지 왕실의 문어로 행정, 법률에서 라틴어와 함께 왕실의 언어로 군림한 배경은 무엇인가?
    ⑦ 프랑스어가 문학어로 정체되는 시기에 오히려 왕실의 문어로 왕의 언어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⑧ 중세 영국에서 영어는 일반 대중의 구어였는데 문어인 앙글로-프랑스어는 어떤 기능을 하였는가?
    ⑨ 중세 영문학에서 초서를 가장 위대한 작가로 꼽는데 앙글로-프랑스어는 초서의 언어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⑩ 중세영어는 15세기 동안 어휘, 통사, 철자 등 통일성을 갖춰 앵글로-색슨어와 완전히 다른 모습을 갖추게 되는데 왜 이 시기에 이러한 언어적 변화가 완성되는가?

    2. 왕의 언어로서 앙글로-프랑스어 정밀분석 연구:
    기욤의 영국 정복 이후 약 4세기 동안 프랑스어는 영국왕실의 언어였고 15세기 초반 이후 제2언어로 전락하였다. 본론에서는 이같은 앙글로-프랑스어발달사를 정밀하게 분석한다. 이 연구는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① 앙글로-프랑스어는 영국왕의 언어와 법률어로서 라틴어와 어떤 관계였는가?
    ② 앙글로-프랑스어가 13세기부터 헌장과 법률어로 라틴어를 제친 배경은 무엇인가? 특히 <대헌장Magna Carta>의 앙글로-프랑스어 번역본이 이 시기에 만들어진 배경은 무엇인가?
    ③ 영국 왕실의 행정문서에서 앙글로-프랑스어가 사용된 배경은 상서국의 역할이 컸는데 상서국의 역할은 무엇인가?
    ④ 중세 영국 국회보고서는 라틴어와 앙글로-프랑스어로 작성되었으나 1440년부터 영어로 작성되는데 왜 이 시기부터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는가?
    ⑤ 중세 영국에서 관습법(common law)이 통용된 배경은 무엇이고 왜 이 법이 라틴어나 영어가 아닌 앙글로-프랑스어로 작성되었는가?
    ⑥ 13세기부터 영국 법정에서 라틴어 대신 앙글로-프랑스어로 재판과 변론이 진행된 이유는 무엇인가?
    ⑦ 앙글로-프랑스어의 사용은 영국에만 한정되었는가? 이 시기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의 언어상황은 어떠했는가?
    ⑧ 100년 전쟁 당시 에드워드 1세와 3세가 앙글로-프랑스어를 사용하면서 영국의 귀족들을 이 전쟁에 끌어들인 배경은 무엇인가?
    ⑨ 15세기 초반 이후 영국에서 앙글로-프랑스어가 왕의 언어로의 생명력이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3세기 동안 계속해서 Law French가 영속한 이유는 무엇인가?
    ⑩ 왜 최초의 프랑스어 학습서(어휘, 회화, 문법)가 프랑스가 아닌 영국에서 출간되었고 영국대학에 프랑스어 강좌가 개설된 이유는 무엇인가?
    ⑪ 왜 14세기 초부터 영어로 연대기와 문학작품이 만들어지고 초서(Chaucer)가 등장하는가?
    ⑫ 영국의 민족주의는 헨리 4세부터 시작되어 헨리 5세 치세에서 절정기를 맞이한다. 헨리 4세와 헨리 5세가 영어보급을 위해 취한 조치는 무엇인가?
    ⑬ 영국 관습법에서 프랑스어의 사용은 1731년 법규로 완전히 추방되는데 1539년 프랑수와 1세의 빌레르-코트레(Villers-Cottrêts) 칙령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⑭ 앙글로-프랑스어의 프랑스어발달사에서의 위상은 무엇인가?
    ⑮ 현재 세계의 공통어로 부상한 영어의 원천을 서양 중세의 게르만, 라틴적 전통과 기독교에서 찾을 수 있는가?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1066년 기욤의 영국 정복 이후 영국에 세워진 노르만 왕조의 기욤은 10년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전 영국을 통치하였다. 이것은 그가 프랑스의 봉건제도를 영국에 도입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기욤은 영국을 37개의 백작령으로 구분하고 프랑스의 사법, 행정제도를 도입하여 통치하였다. 기욤의 영국 정복 당시 채 1만도 안 되는 노르망디인들은 영국의 왕실, 행정, 교회를 모두 장악하였다. 당시 카페왕조의 프랑스는 여러 봉건 제후로 분할되었고, 언어 또한 지역 방언으로 나뉘어 언어적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시기였다. 기욤의 공작령이었던 노르망디는 프랑스 지역방언인 노르망어를 사용하였고, 기욤의 영국정복과 더불어 영국에 노르망디어 지방의 방언이었던 노르망어가 이식된 것이었다. 이렇게 영국에 이식된 노르망어는 프랑스 왕실의 프랑시앵어와 함께 중세의 중요한 언어였다. 기욤에 의해 영국에 이식되어 영국왕실 및 행정 사법어로 영국에서 사용된 언어를 앙글로-노르망어 또는 앙글로-프랑스어라 부른다.
    기욤의 노르만 정복 이후 노르만 왕조의 프랑스의 노르망디 공국에 대한 관심은 계속되었다. 이 같은 정치적 상황은 노르만 왕조의 왕들이 영국과 노르망디를 오가며 양국간의 관계를 유지하며 사회문화적 교류가 계속하여 이어졌다.
    노르만 왕조에 이은 헨리2세의 플랜타저넷 왕조에서도 앙글로-프랑스어는 왕의 언어로서 권위를 계속하여 이어나갔고, 마침내 헨리4세의 랑카스터 왕조의 등극으로 영어를 말하는 왕조가 시작되면서 프랑스어는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앙글로-프랑스어는 구어인 영어의 곁에서 제2의 언어로 학습을 통하여 배워야하는 언어로 전락하였으나 여전히 영국 상류층의 언어였다. 대부분의 영국의 인구층은 구어인 영어를 사용하였으나 프랑스어는 왕의 언어로서 계속하여 기능하였다.
    플랜타저넷 왕조에서 주목되는 것은 헌장과 법률이 13세기부터 앙글로-프랑스어로 작성되었고, 라틴어 교본인 Magna Carta의 프랑스어 번역본이 유통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어 1250~60년에 Common Law 프랑스어 법전이 만들어졌다. 행정 분야에서도 상서국의 역할이 확대되면서 화폐주조나 숲 관련 문서에 앙글로 프랑스어를 사용하였고 국회에서도 15세기까지 앙글로-프랑스어가 사용되었다. 또한 봉인된 문서에서 개인도장과 서명이 선호되면서 앙글로-프랑스어는 특히 에드워드 3세와 리처드2세 치세동안 지배적인 언어로 사용되었다. 법원에서는 관습법과 Year Books의 발달과 더불어 앙글로-프랑스어의 중요성이 더욱 확대되었다. 특히 에드워드 1세(1272-1307) 치세 하에서 앙글로-프랑스어의 사용이 크게 확대되는데 Year Books와 소송이 모두 프랑스어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방의 모든 백작령의 재판소의 소송절차는 프랑스어로 진행되었고 법정에서 프랑스어의 사용은 1731년에 가서야 법규로 마침내 금지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프랑스의 빌레르 코트레 칙령(1539)을 상기시킨다. 다만 영국은 프랑스어 사용을 금지하는 조치였고 프랑스는 라틴어 사용을 금지했다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플랜타저넷 왕조의 왕실, 법규, 사법, 행정에서 앙글로-프랑스어 사용은 절대적이었다. 따라서 상류층은 반드시 프랑스어를 알아야했고 이들에겐 프랑스어 학습이 필요했다. 12세기 영국에서 다량의 프랑스어 학습서가 출현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기인한다. 프랑스어 어휘집(Nominalia)를 시작으로 Femina, Treitiz를 비롯하여 최초의 프랑스어문법서인 Donait Francois(1400)가 영국에서 간행되었고, Oxford와 Cambridge 대학에서 프랑스어 강좌가 개설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래의 법률가 양성을 위한 전문학교인 Gray’s Inn, Lincoln’s 등이 런던에 설립되었다.
    하지만 이같은 권위를 누리던 앙글로-프랑스어는 랭커스터 왕조에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신왕조의 등극은 영국국민의 신임을 필요로 하였다. 특히 헨리5세 치세부터 프랑스어는 봉인문서에서 사라지고 영어가 그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대중여론에 대한 신왕조의 화답이었다. 특히 백년전쟁은 언어와 국민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여 영국에서 영어사용을 가속화시켰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의 승리가 영어의 파괴를 의미할 것이라며 남작들에게 전쟁참여를 호소함으로써 백년전쟁 참여를 독려하였다. 특히 헨리5세는 아쟁쿠르 전투(1415)에서 승리하여 영국민 국민의식을 고취시켰고, 그의 후원을 받은 Chaucer의 등장은 영어가 왕의 언어로 프랑스어를 대체하게 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기욤의 영국 정복 이전까지 앵글로 색슨 문학은 알프레드 왕조에서 크게 번성하였으나 기욤의 정복이후 희귀해졌다가 초서에 의해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그리하여 15세기 중엽부터 영국 왕실에서 영어가 프랑스어를 대체하기 시작하였다.
    랭커스터 왕실의 영어는 1420~40년 사이에 왕의 언어가 되어 1460년부터 전 영국으로 퍼져나갔고 영어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16세기 동안 라틴어 어원의 어휘 대부분에서 자음의 묵음화 현상이 일어나고(예컨대 debt, doubt의 자음 b, receipt의 자음 p) 영어의 라틴어화 현상이 일어난 것은 모두가 왕실 영어의 영향이었다. 이처럼 랑카스터 왕실의 영어는 현대영어 탄생의 주역이 되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기욤의 노르만 정복 당시 앵글로 색슨어가 문학어로서 권위를 가졌으나 기욤의 영국정복과 더불어 앙글로-프랑스어는 왕의 언어와 행정, 법률어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영국왕실에서 앙글로-프랑스어의 권위는 막강했으며, 대중어이자 구어인 영어는 헨리5세의 초서 시대에 가서야 비로소 문학어로 회복되었다. 특히 이 기간 동안 앵글로 색슨어가 통사, 철자, 어휘 측면에서 크게 변형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중세 말 중세영어 어휘의 22%가 프랑스어 단어에서 온 것은 초서를 비롯한 앙글로-프랑스어의 강한 영향이었다. 예컨대 귀족을 가르키는 count, duke, peer, 법률어 court, crime, judge 정치어 chancellor, government, nation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특히 중세영어는 노르망어 뿐만 아니라 프랑스 북부와 서부 그리고 파리지방의 프랑시앵어를 차용하였다. 파리 프랑시앵어의 ei형, 경음 c의 ch(kival<cheval), w의 gu로의 변화(warder>garder)가 한 예이다. 이것은 현대프랑스어 proie, voile, chat, chasser, gage, guerre와 영어 prey, veil, cat, catch, wage, war의 어원이 같음을 보여준다. 또한 앙글로-프랑스어는 영어철자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앵글로 색슨어 문어형은 노르만 정복기에 고정되었다. 영국에 정착한 노르망디인들은 자신들이 듣는 대로 철자를 선택하였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영어철자 체계를 점차적으로 변형시켰다. 그래서 앵글로 색슨어 sunu(아들), cuman(오다), lufu(좋아하다)는 중세영어에서 현대영어 철자표기인 sone, comen, love로 표기되었다. 마찬가지로 1300년부터 đ와 1400년부터 þ가 현대 영어 th로 대체되었다.
    기욤의 노르만 정복 이후 앙글로-프랑스어는 영국에서 3세기 이상 왕의 언어로 군림하였으나 결코 영국의 대중어로 자리매김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바와 같이 왕의 언어인 앙글로 프랑스어는 영어에 큰 흔적을 남겼다.
    이처럼 영국에 이식된 노르망디지방의 지역어인 앙글로-프랑스어는 11-15세기 중세의 프랑스 왕실 프랑스어인 프랑시앵어와 함께 프랑스어의 가장 중요한 분파였다.
  • 영문
  • Founded in England after Guillaume's conquest of England in 1066, Guillaume of the Norman dynasty ruled all of England in less than 10 years. This was possible because he introduced the French feudal system into England. Guillaume divided Britain into 37 counts and ruled by introducing the French judicial and administrative system. At the time of Guillaume's conquest of England, less than 10,000 Normandy took control of the British royal family, administration, and church. At that time, France of the Capet Dynasty was divided into several feudal lords, and the language was also divided into regional dialects, and linguistic unification was not achieved. Normandy, the Duchy of Guillaume, spoke the French regional dialect, Norman, and with Guillaume's conquest of England, the Norman language, a dialect of the Normandy language, was transplanted into England. Norman language, which was thus transplanted into England, was an important language in the Middle Ages along with the French royal language. The language used in England as a British royal and administrative judicial language by Guillaume is called Anglo-Norman or Anglo-French.
    After Guillaume's conquest of Norman, the Norman dynasty's interest in the French duchy of Normandy continued. This political situation was followed by social and cultural exchanges between the kings of the Norman dynasty and England and Normandy, maintaining relations between the two countries.
    In Henry II's Plantagenet dynasty, following the Norman dynasty, Anglo-French continued its authority as the king's language, and the English-speaking dynasty began to decline with the rise of Henry IV's Lancaster dynasty. However, Anglo-French was a second language beside spoken English, but it was still the language of the upper class of England. Most of the British population spoke spoken English, but French continued to function as the king's language.
    In the Plantagenet dynasty, the charter and laws were written in Anglo-French from the 13th century, and French translations of the Latin text Magna Carta were circulated. The Common Law French Code was created in 1250–60. As the role of chancellor expanded in the administrative sector, Anglo-French was used in monetary casting and forest-related documents, and Anglo-French was used in the National Assembly until the 15th century. In addition, with the preference for personal seal and signature in sealed documents, Anglo-French was used as the dominant language, especially during the reign of Edward III and Richard II. With the development of common law and Year Books in the courts, the importance of Anglo-French was further expanded. In particular, the use of Anglo-French under Edward I(1272-1307) was greatly expanded because both Year Books and lawsuits were conducted in French. Of course, the court proceedings of all Counts in the province were conducted in French, and the use of French in court was finally prohibited by law in 1731.
    This action reminds us of the French Edict of Viller-Cottrêts(1539). However, there is a difference that the UK banned the use of French, and France banned the use of Latin. The use of Anglo-French was absolute in the royal, legal, judicial, and administrative affairs of the Plantagenet dynasty. Therefore, the upper class had to know French and they needed to learn French. This is why large quantities of French study books emerged in England in the 12th century. Starting with the French lexicon (Nomalia), the first French grammar book, Donait Francois (1400), was published in the United Kingdom, including Femina and Treitiz, and French courses were offered at Oxford and Cambridge. In addition, Gray's Inn and Lincoln's were established in London as specialized schools to foster future lawyers.
    However, the Anglo-French language, which enjoyed this authority, began to retreat from the Lancaster dynasty. The ascension of the New Dynasty required the confidence of the British people. In particular, from the reign of Henry V, French disappeared from sealed documents and English took over its function, which was the answer of the New Dynasty to public opinion. The Hundred Years' War, in particular, accelerated the use of English in the United Kingdom by establishing language and national identity. Edward III encouraged the barons to participate in the Hundred Years' War by appealing to them to participate in the war, saying that the French victory would mean the destruction of English. Henry V, in particular, won the Battle of Azincourt(1415), which inspired the British people's consciousness, and the emergence of Chaucer, who was sponsored by him, was a decisive factor in replacing French as the king's language. Prior to Guillaume's conquest of England, Anglo-Saxon literature flourished greatly in the Alfred dynasty, but it became rare after Guillaume's conquest and was revived splendidly by Chaucer. Thus, in the mid-15th century, English began to replace French in the English royal family.
    Lancaster's royal English became the language of the king between 1420 and 40 and spread to England from 1460 and had a great influence on the development of English. During the 16th century, most of Latin's vocabulary was silent on consonants (e.g., debt, doubt's consonant b, receipt's consonant p) and Latinization of English was all influenced by royal English. Thus, Lancaster's royal English became the birthplace of modern English.
    As can be seen above, Anglo-Saxon was authorized as a literary language during Guillaume's conquest of Norman, but with Guillaume's conquest of England, Anglo-French became the language of the king, administration, and law. The Anglo-French authority in the British royal family was immense, and it was not until the early days of Henry V's reign that English, the popular and spoken language, was restored as a literary language. In particular, it is a well-known fact that Anglo-Saxon has been greatly modified in terms of syntactic, spelling, and vocabulary during this period. In particular, 22% of the medieval English vocabulary at the end of the Middle Ages came from French words, which were strongly influenced by Anglo-French, including Chaucer. Examples include count, duke, peer, legal court, creme, and political word chancellor, government, and nation, which refer to aristocrats. In particular, medieval English borrowed the Franch languages of northern, western and Paris as well as the Normans. An example is the ei-type of the Paris Francian language, ch (kival<cheval) and w (warder>garder). This shows that modern French proie, voile, chat, chaser, gage, guere and English free, veil, cat, catch, wage, war have the same origin. The Anglo-French language also greatly influenced English spelling.
    The Anglo-Saxon written letter was fixed during the Norman Conquest. The Normandy people who settled in England chose to spell as they heard, which resulted in a gradual transformation of the English spelling system. The Anglo-Saxon words "sunu" (son), "comen" and "lupu" (likes" in Middle English, are therefore spelled "son", "comen", "love" in modern English. Similarly, from 1300 onwards đ and 1400 onwards þ were replaced by modern English "th".
    Following Guillaume's conquest of Norman, Anglo-French reigned in England as the language of the king for more than three centuries, but it never established itself as a popular English language. However, as we have seen so far, Anglo French, the king's language, left a big mark on English.
    The Anglo-French language, a local language of the Normandy region that was transplanted into Britain, was the most important branch of French language, along with the French French of the 11th–15th century.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11-15세기 중세 언어사의 복잡성속에서 영국 왕들의 언어였던 앙글로-프랑스어의 형성과 전개를 프랑스어발달사의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1066년 기욤의 영국 정복 이후 영국에 세워진 노르만 왕조의 기욤은 10년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전 영국을 통치하였다. 이것은 그가 프랑스의 봉건제도를 영국에 도입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당시 카페왕조의 프랑스는 여러 봉건 제후로 분할되었고, 언어 또한 지역 방언으로 나뉘어 언어적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시기였다. 기욤의 공작령이었던 노르망디는 프랑스 지역방언인 노르망어를 사용하였고, 기욤의 영국정복과 더불어 영국에 노르망디어 지방의 방언이었던 노르망어가 이식된 것이었다.
    기욤의 노르만 정복 이후 노르만 왕조의 왕들은 영국과 노르망디를 오가며 양국간의 관계를 유지하며 사회문화적 교류가 계속하여 이어졌다. 헨리2세의 플랜태저넷 왕조에서도 앙글로-프랑스어는 왕의 언어로서 권위를 계속하여 이어나갔고, 마침내 헨리4세의 랭커스터 왕조의 등극으로 영어를 말하는 왕조가 시작되면서 프랑스어는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플랜태저넷 왕조에서 주목되는 것은 헌장과 법률이 13세기부터 앙글로-프랑스어로 작성되었고, 라틴어 교본인 Magna Carta의 프랑스어 번역본이 유통되었다는 점이다. 이어 1250~60년에 Common Law 프랑스어 법전이 만들어졌다. 행정 분야에서도 상서국의 역할이 확대되면서 화폐주조나 숲 관련 문서에 앙글로 프랑스어를 사용하였고 국회에서도 15세기까지 앙글로-프랑스어가 사용되었다. 또한 봉인된 문서에서 개인도장과 서명이 선호되면서 앙글로-프랑스어는 특히 에드워드 3세와 리처드2세 치세동안 지배적인 언어로 사용되었다. 법원에서는 관습법의 발달로 앙글로-프랑스어의 중요성이 더욱 확대되었다. 특히 에드워드 1세 치세 하에서 앙글로-프랑스어의 사용이 크게 확대되는데 소송이 모두 프랑스어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방의 모든 백작령의 재판소의 소송절차는 프랑스어로 진행되었고 법정에서 프랑스어의 사용은 1731년에 가서야 법규로 마침내 금지되었다. 이처럼 플랜태저넷 왕조의 왕실, 법규, 사법, 행정에서 앙글로-프랑스어 사용은 절대적이었다. 따라서 상류층은 반드시 프랑스어를 알아야했고 이들에겐 프랑스어 학습이 필요했다. 12세기 영국에서 다량의 프랑스어 학습서가 출현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기인하였다. 프랑스어 어휘집(Nominalia, Femina, Treitiz)과 최초의 프랑스어문법서인 Donait François(1400)가 영국에서 간행되었고, Oxford와 Cambridge 대학에서 프랑스어 강좌가 개설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래의 법률가 양성을 위한 전문학교인 Gray’s Inn, Lincoln’s 등이 런던에 설립되었다.
    하지만 앙글로-프랑스어는 랭커스터 왕조에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신왕조의 등극은 영국국민의 신임을 필요로 하였다. 특히 헨리5세 치세부터 프랑스어는 봉인문서에서 사라지고 영어가 그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대중여론에 대한 신왕조의 화답이었다. 특히 백년전쟁은 언어와 국민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여 영국에서 영어사용을 가속화시켰다. 특히 헨리5세는 아쟁쿠르 전투(1415)에서 승리하여 영국민 국민의식을 고취시켰고, 그의 후원을 받은 Chaucer의 등장은 영어가 왕의 언어로 프랑스어를 대체하게 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랭커스터 왕실의 영어는 1420~40년 사이에 왕의 언어가 되어 1460년부터 전 영국으로 퍼져나갔고 영어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16세기 동안 라틴어 어원의 어휘 대부분에서 자음의 묵음화 현상이 일어나고 영어의 라틴어화 현상이 일어난 것은 모두가 왕실 영어의 영향이었다. 특히 중세 말 중세영어 어휘의 22%가 프랑스어 단어에서 온 것은 초서를 비롯한 앙글로-프랑스어의 강한 영향이었다. 특히 중세영어는 노르망어 뿐만 아니라 프랑스 북부와 서부 그리고 파리지방의 프랑시앵어를 차용하였다. 또한 앙글로-프랑스어는 영어철자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앵글로 색슨어 문어형은 노르만 정복기에 고정되었다. 노르망디인들은 자신들이 듣는 대로 철자를 선택하였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영어철자 체계를 점차적으로 변형시켰다.
    이처럼 앙글로-프랑스어는 11-15세기 중세의 프랑스 왕실 프랑스어인 프랑시앵어와 함께 프랑스어의 가장 중요한 분파였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는 학문발전에 대한 기대효과와 교육에서의 기대효과를 동시에 창출할 것이다. 먼저 학문발전에 대한 기대효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학문발전에 대한 기대효과
    ① 우리나라 학계의 프랑스어발달사에 대한 연구는 부진하며, 특히 그 하부 장르인 중세프랑스어의 한 지류인 앙글로-프랑스어에 대한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다. 이러한 국내 프랑스학 연구의 열악한 상황에서 앙글로-프랑스어의 형성과 전개과정에 대한 연구는 프랑스어발달사 뿐만 아니라 물론 중세 유럽의 언어 상황에 대한 연구의 폭을 확장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② 본 연구는 앙글로-프랑스어의 형성과 전개를 언어와 정치, 사회, 문화와의 역학관계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으로 인문학 연구의 지평 확장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③ 11-15세기 중세 영국 왕들의 언어인 앙글로-프랑스어에 대한 본 연구는 중세유럽의 정치, 사회, 문화, 문학, 역사적 측면에서 검토되어야하기 때문에 이에 관련된 여러 관련 학문분야들, 예컨대 중세사학, 법학, 정치학, 행정학, 문화사, 예술, 언어학 등의 학제적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④ 앙글로-프랑스어발달사를 분석하는 본 연구는 중세프랑스어의 한 지류를 고찰한다는 점에서 현대 프랑스어에 치중되어 있는 프랑스학 연구의 관심을 중세프랑스어, 프랑스어발달사 뿐만 아니라 방언학, 사회언어학 등의 영역으로 확장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⑤ 특히 앙글로-프랑스어의 철자, 어휘, 통사의 다양성이 중세영어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여 현대영어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동안 중세영어 연구에서 어휘 및 형태 통사연구에 한정되어온 중세영어 연구자들에게 사회언어학적 고찰과 영어발달사 분야로 연구의 영역을 확장시키는데 공헌할 것이다.

    2. 교육에서의 기대효과
    ① 본 연구는 기본적으로 프랑스어발달사에서 중세프랑스어의 한 지류인 앙글로-프랑스어를 이해하기 위한 참고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② 본 연구는 영국문학사, 영어발달사 그리고 프랑스문학사와 프랑스어발달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앙글로-프랑스어의 형성과 전개에 관한 연구로 영문학, 영어학 수업은 물론 프랑스문학, 프랑스어학 강의에서 유용한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③ 본 연구는 사학과의 ‘서양 중세사’, 행정학과의 ‘중세 행정사’, 법학과의 ‘서양법학사’은 물론 ‘유럽문화사’ 등의 강의에서 ‘프랑스의 왕권’의 한 꼭지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④ 본 연구는 어떻게 모국어가 아닌 프랑스어가 4세기 동안 영국을 지배하였고, 어떻게 영어가 15세기 말 이후 영국에서 모국어로 다시 사용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연구로 인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서양 학문에 기초하는 전공자 및 연구자들에게 바람직한 인문학적 소양을 쌓는 교육의 한 방식을 제공할 것이다.
    ⑤ 본 연구는 ‘인문학의 위기’로 우려되는 현 시점에서 ‘언어와 민족’라는 주제로 통섭의 인문학(언어, 문학, 역사, 정치, 문화, 예술)의 관점에서 언어의 형성과 전개과정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시민강좌 등에서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 색인어
  • 노르만 정복, 앙글로-노르망어, 앙글로-프랑스어, 프랭시앵어, 중세영어, 노르만 왕조, 플랜타저넷 왕조, 랭커스터 왕조, 백년전쟁, 에드워드 3세, 헨리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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