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정약용 저술에 등장하는 天, 上帝, 天命 등(이하 상제론)의 의미를 다루고 있다. 정약용은 天을 주재적 인격신인 上帝로 보기 때문에, 여기서는 天(=上帝)과 인간의 관계성 분석에 집중하고자 한다. 天命, 즉 하늘의 명령은 그 자체로 명령을 받드는 ‘대상’을 지시하고 있 ...
본 논문은 정약용 저술에 등장하는 天, 上帝, 天命 등(이하 상제론)의 의미를 다루고 있다. 정약용은 天을 주재적 인격신인 上帝로 보기 때문에, 여기서는 天(=上帝)과 인간의 관계성 분석에 집중하고자 한다. 天命, 즉 하늘의 명령은 그 자체로 명령을 받드는 ‘대상’을 지시하고 있고, 구체적으로는 인간과의 소통을 함축하고 있다. 정약용의 상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상제가 어떠한 모습으로 인간사에 드러나는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또 본 연구가 강조하는 바이지만, 상제의 표면적인 이미지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상제와 인간이 관계하는 소통 방식에 대한 충분한(sufficient) 분석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다산 정약용에 대한 선행 연구에서는 서학과의 관계성이 적지 않게 다루어졌고, 그 연구 성과를 통해 우리는 그의 상제관에 서양의 주재적 유일신 이론이 깊게든 얇게든 스며들어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서양의 자유의지 개념을 적용하여 해석된 自主之權은 그의 고유한 철학적 특징으로 자주 언급되어 왔다. 이때에 인간의 자율적 선택과 행위 책임을 강조하는 그의 윤리이론이 과연 그의 상제관과 정합적일 수 있느냐는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이른바 ‘자율적 인간과 상제’의 정합성 혹은 모순성을 따지는 이러한 난제는 어떤 방식으로든 적절한 해명이 요구된다.
본 논문은 위와 같은 대립적 주장들이 우선 정약용의 상제론, 특히 그의 天命 개념이 포함된 복잡한 구조에서 비롯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우선 필자는 위와 같은 선행 연구의 이율배반적 대립이 정약용의 상제론이 가지는 자체적 모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자 한다. 이를 위해 정약용 본인이 천명의 두 가지 구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두 천명의 영역을 판명하게 구분함이 기존 연구의 이율배반적 주장들의 난점 해소에 효과적인 해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방법적으로 기존 논의의 방향을 전환하여, 정약용 저술에 등장하는 상제의 이미지적 측면이 아니라, ‘인간과의 소통 방식’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그의 윤리 이론에서 신앙적 요소를 구분함과 동시에, 후자의 종교적 측면이 어떻게 정약용 철학에서 이해 가능한지를 검토해볼 것이다. 기존 상제 연구에서 도덕적 요청의 측면과 (계시)신앙의 측면은 양립 불가능한 선택지로 놓여 있었다면, 본 연구에서 정약용의 상제이론은 윤리가 기초된 바탕 위에서 (계시)신앙으로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일 것이다.
구체적으로 연구자는 논문의 서두에서 정약용의 저술에 나타나는 天, 天命, 上帝 등과 도덕적 자율성의 관계에 관한 기존 선행연구들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하고, 두 연구의 결론이 이율배반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점을 보였다. 연구자는 그러한 서로 상반되는 주장의 근거에 정약용의 두 가지 천명이 자리하고 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나아가, 孟子의 「萬章」篇의 “天與之者, 諄諄然命之乎” 구절에 대한 정약용의 독특한 재해석을 통해 두 가지로 드러나는 ‘天命’의 서로 다른 접근 방식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 하나는 天命이 인간의 도덕적 마음인 道心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는 매순간 어떤 구체적인 일에 직면해서 도덕적인 하나의 명령으로, 각자 개인의 마음에 선하게 행위하라고 명령한다. 그렇다면 이 방법이 하늘이 그 뜻을 드러내는 유일한 상제인가? 아니다. 상제는 도덕적인 마음 이외에도 인간에게 그 뜻을 계시하고 있다. 인간은 상제에게 그 뜻을 물을 수 있고, 상제는 인간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의 결과를 계시하여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두 天命은 상호 모순적인가? 아니, 정약용의 두 天命은 상호 모순적일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는가? 연구자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상호 모순적일 수 있는 가능성은 존재할 수 없다. 그 까닭은 정약용이 일의 결과를 계시하는 天命에 대해서 제한하고 있는 몇 가지 조건 때문이다. 상제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물을 수 있는 경우는 ‘公正의 善’과 관련된 경우로 제한되며, 또 일이 ‘公正의 善’인지 여부는 도심을 통해서 드러난다. 따라서 도덕적 마음에 드러나는 天命은 일의 결과를 계시하는 天命에 선행 조건이기 때문에 두 天命이 상충하는 경우는 존재할 수 없다.
다음으로, 그렇다면 인간 내부에서 드러나는 도심에는 왜 상제라는 초월자의 존재가 필요한가라는 물음이 던져진다. 이른바, 상제는 왜 요청되는가? 이는 불필요한 ‘개념’의 과잉인지, 아니면 정약용의 윤리 체계에서 어떠한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등이 밝혀질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정약용이 설명하는 福善禍淫의 심판자, 즉 인간의 행위에 대한 상벌의 주재자로서의 상제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가 하나의 관건이 된다. 도덕적인 동기로서 인간의 도심보다 우선하는 조건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 이는 위에서 살펴본바, 천명이 인간에게 드러나는 두 가지 방식이 서로 모순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즉, 禍⋅福에 대한 고려는 전적으로 도심을 통해 드러나는 ‘公正의 善’의 선행 조건일 수 없다. ‘禍⋅福’을 주관하는 심판자인 상제에 대한 고려 또한 ‘公正의 善’의 선행 조건일 수 없다. ‘禍⋅福’을 통해 그 뜻을 드러내는 상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위와 같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모든 일들에 이기고 지는 成敗가 있기 마련이지만, 그 일의 功을 이루는 것은 오직 하늘天임을 강조한다.(然及其成功則天也) 정약용은 인간에 의해 그 결과의 성공여부가 결정될 수 없는 문제에 매달린다면 감정이 일어나 마음을 난동케 해 부동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결국, 행위에 앞서 成敗나 利鈍, 死生, 禍福 등의 요소는 윤리적 행위를 규정하는 원인으로 작용되어선 안된다. 즉, 부동심을 지향하는 윤리적 실천가는 응당 일의 成敗나 利鈍, 死生, 禍福 등에서 그 결과가 결코 긍정적이지 않더라도 만약 그 일이 ‘公正의 善’에서 나온 것이라면 행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卜·筮에 대해 누구보다 깊게 궁구하였으나, 그에 대한 쓰임에 있어 부정적으로 바라본 그의 모호한 태도는 바로 卜·筮가 비과학적이라거나 미신에 불과하기 때문이 아니라, 위와 같은 실천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임을 추정케 한다.
다음으로, 기존 선행연구에서 정약용의 초월적 상제론과 자율적 윤리이론 간의 정합성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도심으로 드러나는 상제의 천명이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인륜의 실천에 관계하며, 따라서 상제에 대한 두려움 또한 윤리적 실천을 위해 작용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모순성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정약용의 사상이 다른 윤리이론(특히, 성리학적 체계)과 비교해 타율적이라 비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관건은 윤리적 실천을 위한 자율적 선택과 그 행위가 어떻게 인간의 특별한 심적 태도, 즉 상제를 향한 두려움과 관계하는지를 규명해내는 데에 있다. 연구자는 본 논문에서 심판자인 상제에 대한 ‘두려움’은 그 자체로는 윤리적 실천의 동기로서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밝히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도심을 강화하는 조건으로 작용할 여지가 있다.
끝으로, 본 논문에서 다룬 주제를 다음의 세 가지 특징으로 정리하고, 세 물음에 답하는 형식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① 상제에 접근 가능한 지식 유형의 구분(내부의 道心과 외부의 卜筮) ② 두 지식 간의 모순 가능성 검토 ③ 마지막으로, 도심과 상제라는 존재자와의 관계성 규명 등을 다루었다.
첫째, 정약용의 철학에서 상제는 인간에게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는가, 즉, 상제에 대한 인간의 인식 가능성은 어떠한가? 정약용은 이를 두 가지 천명으로 나누어서 제시하고 있으며, 그 각각에 서로 다른 앎(지식)의 유형을 제시하고 있다.
둘째, 인간의 도심 외부에서 계시하는 상제의 명령은 서로 모순적일 수 있는가? 본 논문에서는 이를 접근 가능한 앎의 문제로 전환하여 살펴보았다. 사생⋅화복⋅영욕 등을 주관하는 상제의 명령(天命)은 도덕적 명령과 모순될 수 있는가? 본문에서 다룬 방식은 다소 추상적이기에 이와 관련한 하나의 예시를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가령 ‘길거리에서 만난 불량배가 힘 없는 어르신들을 괴롭히는 상황’, 또는 이보다 더 거시적인 문제인 ‘한국가의 부정한 침탈 행위에 대항하여 국가적 결단이 요구되는 상황’을 살펴보자. 정약용에 따르면, 전자의 경우에 일단 그들이 어르신을 괴롭히는 것이 비윤리적임이 확인될 수 있어야 한다. 도심은 부당한 상황에서 바로 도덕적으로 행위하라고 명령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만 그치는게 아니라, 과연 지금 당장 그 불량배에게 달려가 구해낼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방식이 있을 수 있는지 등 보다 이해타산적인 사유가 요구된다 “어떻게 해야 그 비윤리적인 인간을 응징하고 선량한 어른을 구해내는 데에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은 일의 성공 여부에 초점이 있다는 점에서 도심의 영역(즉각적 시비판단)을 넘어서는 것이다. 또한 후자의 경우를 보자. 이는 위의 경우보다 관계된 변수가 복잡하기에 그 성공 여부를 확인하기가 훨씬 어렵고, 정약용이 말하는 ‘성인의 易 제작 의도’에 보다 부합하는 예라고 볼 수 있겠다. 이 경우에 부정한 침탈에 저항하라고 인간의 도덕적 마음(이 경우 위정자인 왕이나 신하의 마음)은 명령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어떤 방식으로 저항해야 성공 가능한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 한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는 집단의 利害 문제에서도 정약용은 전지가능성, 즉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앎이 일정 정도 ‘상제의 계시’를 통해 가능하다고 보았다.
셋째, 정약용의 윤리 이론에서 인간 내부의 도심이 인간의 윤리적 행위의 주관적 규정 근거라면, 왜 그에게서 상제라는 초월자의 두려움이 필요하며, 또 강조되는가? 앞서도 말했지만, 행위의 원인이 초월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면 이는 인륜(사람 간의 관계 윤리)에 기반한 행위라 할지라도 자율적 도덕 행위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몇몇 선행연구에서는 이를 정약용의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인식, 즉 ‘인간의 形强神弱과 勢의 어렵고, 쉬움(難易)’에 의한 외적 강제자의 필요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하고, 또 정약용이 처한 시대적 상황의 영향을 결부시켜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더라도 다음과 같은 물음이 계속 던져질 수 있다. 그러한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인식을 반영한 그의 상제론은 자율성을 강조하는 그의 윤리이론과 상호 모순적인 것인가? 이를 위해서 정약용이 ‘순전히 도심에 따르는 행위’와 ‘그 도심을 상제의 천명으로 깨닫고 따르는 행위’를 구분하고 있는지 살피는 게 중요하다. 단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인간 내면의 양심인 도심에 따르되, 그것이 하늘의 소리임을 모르고 행위하는 자, 즉 신이란 존재를 모르는 자도 윤리적일 수 있는가 ?” 연구자는 정약용이 이에 긍정적으로 대답할 것이라고 보며, 나아가 그의 윤리학에서 이 두 행위의 차이를 구분할 해석의 공간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도심과 천명이 둘은 아니지만, 숫적으로 하나로 같다는 표현 또한 아님이 중요하다고 본다. 오히려 그의 윤리이론에서 도심이 곧 천명이며, 따라서 상제천과 그의 명령이 동일하다는 전제로 인해서 이 문제에 답하기가 곤란해진 측면이 있다. ‘도심이 곧 천명’(道心卽天命)이라는 것은 정약용 개인의 깨우침이며, 수양론적 관점에서는 이미 경지에 이른 이후의 내적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아야 한다. 일반인은 반드시 그 깨우침을 갖는 것이 아니며, 또 그 깨우침이 반드시 도덕적 행위에 전제되는 것도 아니다. 이에 대한 정약용의 독법을 보면 도덕적 마음은 누구라도 그것을 가지고 있고, 의식하지 않더라도 어떤 상황에서도 내면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제라는 초월자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믿게 되면서) 인간은 윤리적 마음의 근원을 상제라는 초월자까지 소급해 올라가며, 이 존재자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간의 도덕적 마음이 보다 강화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여기가 그의 윤리 이론에 종교적 의미가 덧입혀지는 지점일 것이다. 이는,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윤리적 종교’(윤리가 기초가 되는 종교)라는 명칭이 타당할 것이다. 위처럼 性의 발현인 ‘道心’과 상제의 ‘命’의 거리를 어느 정도 유지하여야만 그의 윤리이론에서 자율성을 강조하는 대목과 상제라는 외적 초월자, 그리고 그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심적 태도의 강조가 상호 모순적이지 않게 이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