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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김시습에 대한 기억 서사의 층위와 전개
The layers and development of memory narratives about MaeWolDang Kim Si-sup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 #40;B유형& #41;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
연구과제번호 2020S1A5B5A17088652
선정년도 2020 년
연구기간 1 년 (2020년 09월 01일 ~ 2021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강창규
연구수행기관 부산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는 매월당 김시습에 대한 기억의 층위를 검토하고 이런 기억들이 이루어지게 된 맥락들을 살피는 한편, 이를 통해 김시습이란 인물로 조선 시대 지성 담론의 한 흐름을 파악해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현재 기억의 관점으로 김시습을 검토한 연구는 거의 없다. 김시습 자체에 대한 연구는 그간 많이 이루어진 편이지만, 그의 사후에 전개된 양상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다. 김시습에게는 여러 얼굴이 있다. 《금오신화》를 창작한 ‘소설가’, 어디에도 소속을 거부한 ‘방외인’, 세종과 단종을 위한 의리를 보여준 ‘생육신’, 《조동오위요해》를 지은 뛰어난 ‘불자’, 전국을 방랑하며 노래한 ‘시인’ 등이 그것이다. 이런 여러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서 각 시대적 맥락과 이를 기억하는 기억 주체에 의해 다양하게 변주하고, 때론 강고하게 형성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기억의 여러 흐름과 그 기억이 발생하게 된 구체적인 맥락을 파악한 후, 이를 서사적 관점으로 꿰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실제, 초기 생애 자료에서 보이던 도술의 면모, 승려로서의 면모는 당시 정치ㆍ문화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사대부의 주류담론에 의해 지워지거나 비주류 담론으로 밀려나는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전기에 생산된 김시습의 생애자료를 보면, 그의 신이한 행적이라든가 독특한 행동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그런 류의 기억은 점점 줄어들고 ‘절의의 상징’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수렴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생애 자료를 다룰 때, 우리는 그동안 연보와 행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짙었다. 하지만 이런 자료들은 후대인들에 의해 윤색과 가공이 덧붙여지기도 한 것이다. 어떤 기록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생산되게 된 문화적ㆍ시대적 배경뿐만 아니라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속성을 지니게 마련이며, 더 나아가 개인의 내밀한 경함까지도 그 기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시대적 맥락’과 ‘개인적 공감’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려하면서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다.
    여러 자료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체적 맥락을 이해하는 방식은 우리를 보다 그 시대의 진실에 가깝게 다가가도록 만들어준다. 그 달라지는 맥락을 파악하는 것은 한 인물이 가지고 있는 고정된 이미지를 해체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려고 했던 기억 주체의 내밀한 의도를 파악하는 작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작업을 통해 그동안 만들어진 이미지들에 대해 재고하고 다시금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지점을 부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본 연구의 목표이다.
  • 기대효과
  • 기억의 관점으로 김시습을 연구하는 방법은 거대담론의 한계를 비판하고 미시적 관점으로 과거를 반성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현재 학계의 경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런 미시적 관점으로 각각의 개인들이 김시습을 어떠한 맥락 속에서 기억하고 있는지를 살펴본 후, 그 기억들의 전체적인 흐름을 읽어낼 수 있다면, 김시습 한 명의 인물로 조선시대 지성담론의 한 맥락을 새롭게 조망하는 것 또한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상을 이해하게 된다면 이는 현재 답보 상태에 있는 김시습 자체에 대한 연구에도 한 돌파점이 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김시습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인물을 선정하여 기억의 관점에서 재구성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론은 김시습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여러 인물로 파생되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역사 속에 명멸해간 수많은 인물을 대상으로 그들이 시대마다, 기억주체에 따라 어떻게 기억됐는지 역추적하는 방식은 늘 새로운 관점과 시사점을 가져다 줄 것이다. 더불어 현대는 기억의 시대다.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늘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말을 자주 접하게 된다. 과거 김시습에 대한 기억들을 연구하는 것은 지금 현대의 여러 기억투쟁에 대해서도 많은 의미를 던져줄 것이다.
  • 연구요약
  • 전반기 4개월, 후반기 8개월로 나누고 전반기에는 조선 전기를 대상으로 김시습을 기억한 인물들에 대해 연구하고, 후반기에는 조선 후기를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하겠다. 조선 전기에 비해 조선 후기는 기억의 강화, 기억 공간의 창출, 지역 사회로의 기억전파 등 여러 국면이 있기에 더 많은 기간을 할당하였다.
    조선 전기에 주요한 인물들은 서거정, 남효온, 홍유손, 이자, 윤춘년, 이황, 이이를 들 수 있다. 이들의 김시습에 대한 기억은 시승, 유학자, 불자, 기이한 인물 등 다양하다. 이 기억들은 시대적 맥락과 개인적 공감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써 최종 기억으로 남게 된 맥락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 후기로 넘어가게 되면, 다양한 기억들이 ‘절의’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수렴되는 양상이 보인다. 그나마 김시습의 다양한 면모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던 북인정권이 몰락한 후, 서인이 집권하게 됨으로써 율곡 이이의 심유적불 발언이 힘을 얻고서 전승ㆍ강화되는 것이다. 이에 송시열과 윤증은 후대 청일사로 사액받는 김시습을 추모하는 기억공간을 창출하게 되고, 그 연장선 상에서 김수증은 유지당, 박세당은 청절사를 건립하게 된다. 여기에 숙종과 영조ㆍ정조와 같은 강력한 왕권을 가진 국왕과 이에 동조하는 사대부들에 의해 사육신과 생육신의 범위가 구체화되고 김시습은 생육신으로서 더욱 그 위치를 강고하게 점유하게 된다. 그렇게 조선 후기 공식기억으로 자리잡은 ‘절의의 상징’으로서의 김시습을 기억하는 공간은 다시 지역 사족들에 의해 전국 곳곳으로 퍼져나간다. 일종의 모방기억으로서 자신의 지역 사회 내에서 김시습과 같은 인물을 더욱 추숭하기 위한 노력이었던 것이다.
    이런 기억들은 층위를 지을 수 있는데, 첫 번째 김시습과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의 기억, 두 번째 김시습 사후 유교 지식인들의 기억, 세 번째 국왕의 기억, 네 번째 지역 사회로 확산된 기억이다. 이런 각 기억들은 결국 자신 및 자신이 속한 그룹의 입장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 기억은 나름의 서사화 과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각 기억의 서사화 양상뿐만 아니라, 그 기억들은 전체적인 큰 맥락에서 놓고 보았을 때, 다시금 서사로써 꿰어낼 수 있다. 초기의 다양한 기억들이 여러 시대적ㆍ개인적 맥락에 따라 변모하게 되고 이는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머릿속에 하나의 이미지로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을 역추적할 때, 조선의 지성들이 추구했던 담론의 한 현장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당초 연구의 목적은 조선시대에 이루어진 김시습에 대한 기억의 층위를 검토한 후, 이런 기억들이 이루어지게 된 맥락을 밝히고 이를 전체적으로 꿰어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우선 조선전기에 김시습을 기억한 인물들을 정리하고, 남겨진 기록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조선전기에 김시습을 기억한 대표적 인물들은 서거정, 김수온, 남효온, 홍유손, 조신, 이자, 윤춘년, 이황, 이이이다. 이들은 각자의 시대적ㆍ정치적ㆍ개인적 맥락에 따라 김시습을 서로 다르게 기억하였다.
    이후 조선후기에는 기자헌, 유몽인, 허목, 송시열, 윤증, 박세당과 같은 인물들이 김시습을 기억하고 추모하였다. 기자헌과 유몽인은 북인계열의 인물들로서 이자의 행유적불을 이어받아 김시습을 추모하였다. 이후 필자는 17세기 김시습에 대한 기억에 주목하여 살펴보고 이에 관한 논문을 제출하였다. 앞서 살펴본 서인과 북인의 김시습에 대한 기억은 17세기 허목과 송시열에게 계승되었다. 허목은 북인계 남인으로서 이자의 행유적불을 인용하면서 김시습의 불교적 면모를 숨기지 않았으며, 송시열은 이이의 심유적불을 계승하면서 백이와 더불어 태백을 끌어와 김시습의 절의를 설명하였다. 허목은 세상의 변고를 만났을 때 신하가 취할 수 있는 ‘淸’을 강조하고, 송시열은 신하가 무엇보다 지켜야 하는 ‘節’을 강조하였다. 일찍이 맹자는 백이를 聖之淸者라고 표현했는데, 허목과 송시열은 이런 백이에게서 볼 수 있는 청과 절의 모습을 김시습에게도 적용하면서도, 서로 강조점이 달랐던 것이다.
    연구결과를 통해 앞으로 더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전기의 지형도 및 양상을 좀 더 다각도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 절의 담론을 통해 조선시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셋째, 기억을 연구방법론으로 사용함으로써 그동안 우리 문학사에서 잊혀진 부분을 복원할 수 있다는 점이다. 넷째, 기록이 현재 남아있게 된 구체적 맥락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앞으로 18세기 이후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절의 선양 작업뿐만 아니라, 지역의 사족들이 어떻게 자기 선현을 추숭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고찰이 더욱 필요하다. 또한 식민지 시기에 충절의 가치가 다시금 재기억되면서 전통지식인들이 자기 선현의 충절과 자신이 현재 처한 구국의 열망을 어떻게 동일시하는지에 대한 연구도 앞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 영문
  • The original purpose of the study was to examine the hierarchy of memories about Kim Si-seup during the Joseon Dynasty, and to clarify the context in which these memories were made and to understand them as a whole.
    First of all, I tried to organize the characters who remembered Kim Si-seup in the early Joseon Dynasty and understand the meaning of the records left behind. Representative figures who remembered Kim Si-seup in the early Joseon Dynasty were Seo Geo-jeong, Kim Soo-on, Nam Hyo-on, Hong Yu-son, Joshin, Iza, Yoon Chun-nyeon, Lee Hwang, and Yi I. They remembered Kim Si-seup differently according to their respective times, politics, and personal contexts.
    Later in the late Joseon Dynasty, characters such as Ki JA-Heon, Yoo Mong-in, Heo Mok, Song Si-yeol, Yoon Jeung, and Park Se-dang remembered and commemorated Kim Si-seup. Ki JA-Heon and Yoo Mong-in were the characters of the Bukin line, and took over Lee Ja's Haengjeokbul and commemorated Kim Si-seup. Afterwards, I focused on the memory of Kim Si-seup in the 17th century and submitted a paper on it. The memories of Seo-in and Buk-in's Kim Si-seup examined earlier were inherited by Heo Mok and Song Si-yeol in the 17th century. Heo Mok, a Buk-in, did not hide Kim Si-seup's Buddhist aspect by citing Yi Ja's HaengYuJeokBul(行儒迹佛) and Song Si-yeol inherited Yi I's ShimYuJeokBul(心儒迹佛) and brought Taebaek along with BaekYi to explain Kim Si-seup's courtesy. Heo Mok emphasized the ‘Cheong(淸)’ that the servant could take when he met the world's troubles, and Song Si-yeol emphasized the ‘Jeol(節)’ that the servant should keep above all else. In the early days, Mencius expressed BaekYi as a saint, Heo Mok and Song Si-yeol also applied the images of Cheong and Jeol, which can be seen in BaekYi, to Kim Si-seup, but emphasized different things.
    The following are the ways that can be used further in the future through the research results. First, the topographic map and pattern of the early Joseon Dynasty can be grasped from more various angles. Second, through the discourse of the JeolUi(節義), you can see the entire Joseon Dynasty. Third, by using memory as a research methodology, it is possible to restore the forgotten part of our literary history. Fourth, it is possible to grasp the specific context in which the record currently remains.
    After the 18th century, it is necessary to further consider not only the JeolUi discourse centered on the king, but also how local clans want to honor their ancestors. In addition, as the value of JeolUi was remembered again during the colonial period, research on how traditional intellectuals remember JeolUi of their ancestors will be conducted in the future.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당초 연구의 목적은 조선시대에 이루어진 김시습에 대한 기억의 층위를 검토한 후, 이런 기억들이 이루어지게 된 맥락을 밝히고 이를 전체적으로 꿰어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유자로 태어나 불자로 살기도 했고, 여러 신이한 행적을 보이기도 한 김시습은 조선 시대의 수많은 인물 중 가장 파악하기 힘든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김시습을 후대의 기억 맥락을 통해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김시습을 탐구하는 동시에 조선시대에 김시습을 기억하였던 기억주체들의 면모를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억주체의 개인적 경험뿐만 아니라 시대적ㆍ정치적 맥락에 따라 서로 다르게 김시습을 기억하고자 했음을 밝히고자 한 것이었다.
    김시습이라는 인물은 워낙 독특하고,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 《금오신화》를 창작한 ‘소설가’, 어디에도 소속을 거부한 ‘방외인’, 세종과 단종을 위한 의리를 보여준 ‘생육신’, 《조동오위요해》를 지은 뛰어난 ‘불자’, 전국을 방랑하며 노래한 ‘시인’ 등이 그것이다. 이런 여러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서 각 시대적 맥락과 이를 기억하는 기억 주체에 의해 다양하게 변주하고, 때론 강고하게 형성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당초의 연구는 이러한 기억의 여러 흐름과 그 기억이 발생하게 된 구체적인 맥락을 파악한 후, 이를 서사적 관점으로 꿰어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실제, 초기 생애 자료에서 보이던 도술의 면모, 승려로서의 면모는 당시 정치ㆍ문화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사대부의 주류담론에 의해 지워지거나 비주류 담론으로 밀려나는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전기에 생산된 김시습의 생애자료를 보면, 그의 신이한 행적이라든가 독특한 행동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그런 류의 기억은 점점 줄어들고 ‘절의의 상징’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수렴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서거정, 남효온, 홍유손, 이세인, 이자, 유희령, 어숙권, 윤춘년, 이황, 이이, 이산해 등 기라성과 같은 조선의 문인들이 김시습에 대한 언급을 남겼음을 파악하고, 이들의 기록을 정리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서거정과 같은 훈구관료문인은 김시습을 승려로 바라보았고, 남효온과 홍유손과 같은 신진사류이자 김시습을 師友로 여겼던 인물들은 유자로서 바라보았다. 이후 이세인이 김시습의 문집 편찬을 건의하고, 이자는 󰡔매월당집󰡕을 편찬하여 서문을 썼다. 유희령과 어숙권 역시 김시습에 대한 여러 논란을 기록하였으며, 윤춘년은 김시습을 공자에 빗대며 추앙하였다. 이후 이황은 색은행괴의 무리라고 혹평하기도 하였고, 이이는 심유적불로서 김시습의 유자로서의 마음과 절의를 집약하였다. 북인 계열의 이산해는 김시습의 선조의 명으로 󰡔매월당집󰡕의 서문을 작성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기자헌, 유몽인, 송시열, 윤증, 김수증, 박세당과 같은 문인들 뿐만아니라, 숙종과 영조ㆍ정조와 같은 군주들도 김시습에 대한 언급을 남겼다. 기자헌은 󰡔매월당시사유록󰡕을 편찬하면서 후서를 남겼고,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김시습 관련 일화를 여러 편 서술하였다. 이들은 북인계 문인으로서, 김시습에 대한 후대의 기억을 연구할 때, 그동안 전혀 다루어지지 않은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리고 송시열은 서인의 영수 이이의 심유적불의 맥락을 이어받으면서 김시습을 배향한 동봉사를 건립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으며, 윤증은 송시열과 함께 이 작업을 진행하면서 「청풍각기」를 지었다. 김수증 역시 노론계 문사로서 송시열의 맥락을 따르면서 김시습과 제갈량르 모신 유지당을 건립하였다. 박세당은 소론계 인물로서 김시습이 성종 시기 머물던 수락산에 은거하여 김시습을 추모하는 청일사를 건립하며, 김시습을 숭앙하는 여러 편의 글을 남겼다. 숙종은 홍산의 동봉영당에 청절이라 사액하였으며, 김시습을 집의로 추증하였다. 그리고 영조 때 비로소 생육신의 범위가 구체적으로 정해지기 시작하였으며, 정조는 장릉배식단을 만들고 정의제신 멤버에 김시습을 포함시키면서 생육신이자 절의의 화신으로서의 김시습을 국가적으로 공인하였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우선 조선전기에 김시습을 기억한 인물들을 정리하고, 남겨진 기록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조선전기에 김시습을 기억한 대표적 인물들은 서거정, 김수온, 남효온, 홍유손, 조신, 이자, 윤춘년, 이황, 이이이다. 이들의 기억은 모두 같지 않았다. 서거정은 󰡔사가집󰡕에서 김시습을 불자로 바라보면서도 유불도에 통달한 고매한 학자로서 김시습을 인정하였다. 김수온은 󰡔식우집󰡕에서 김시습을 불자로 대하면서도 과거 유자였던 모습을 기억하고, 은자로서의 면모도 잊지 않았기에 굴원에 빗대어 김시습을 표현하였다. 남효온은 󰡔추강냉화󰡕와 󰡔사우명행록󰡕에서 김시습을 師友로 대하면서 유자이자 비분강개한 인물로 기억하였다. 김시습의 불자적 모습이 아닌, 유자로서의 강개한 절의를 기억하고 미치광이의 모습은 본래의 모습이 아니었음을 강조하였다. 홍유손은 「祭金悅卿文」에서 김시습을 유자로 기억하면서도 유불 모두에 통달한 면모를 숨기지 않았다. 남효온ㆍ홍유손과 같은 신진사류인 조신은 󰡔소문쇄록󰡕에서 김시습을 불자로 기록하고 있다. 조신이 김시습을 불자로 기억한 것은, 그가 서출이었다는 점과 훈구관료들과 친했던 점이 있었기에 그러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듯 우리는 조선전기를 훈구-사림으로 이분하거나, 훈구-사림-방외로 삼분하는데, 결코 집단의 모습을 정확히 대변하고 있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기억은 집단의 견해/이익을 표현하면서도 개인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서로 갈라지는 지점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김시습 사후, 󰡔매월당집󰡕의 간행이 논의되었지만, 이루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기묘사화 이후, 음애 이자는 자신의 은거지로 숨어들면서 그동안 모았던 김시습의 시문을 󰡔매월당집󰡕으로 편찬하였다. 이자는 낙백한 자신의 처지를 김시습과 동일시하면서 「매월당집서」를 지었고, 그곳에서 ‘행유적불’로서 김시습의 유자로서의 절의를 강조하고, 불자로서의 박식함을 표현하였다. 이후 윤춘년은 김시습의 遠遊에 주목하고 󰡔유관서관동록󰡕을 편찬하고, 「매월당전」을 지으면서 김시습을 공자에 비견하는 성인으로 추앙하였다.
    이이는 그동안 기억들을 선택ㆍ배제하면서 「김시습전」을 작성하였다. 이이의 유명한 ‘심유적불’은 김시습의 마음속 깊은 곳은 유자였음을 천명하고, 행적에 불자로서의 자취가 있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였다. 유자로서의 절의를 최상의 가치에 두고 백이에 견주면서, 김시습은 조선의 백이로서 상징되었다. 다만 이황은 김시습을 ‘색은행괴’의 무리로 치부하면서 김시습을 자신을 훼손시킨 은자로 파악하였다. 절대적으로 순선한 리를 강조한 이황에게 김시습은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진 못했다. 이이의 심유적불은 이이가 어렸을 적 금강산에 입산수도한 경험을 정적들이 공격한 정치적 난관을 극복하고, 마음이 중요시되던 16세기의 시대적 상황과 결부되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런 기억의 개인성과 집단성은 조선후기도 마찬가지다. 광해군 시기 김시습을 기억하였던 기자헌과 유몽인은, 북인계열의 인물들로서 이자의 행유적불을 이어받아 김시습을 추모하였다. 기자헌은 󰡔매월당시사유록󰡕을 간행하였으며,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김시습의 강개한 면모를 기록하였다. 이이는 「김시습전」에서 김시습이 세조가 개최한 원각사낙성회에 참여한 장면을 삭제하고 기록하지 않았고, 󰡔매월당집󰡕에도 관련 시문을 싣지 않았다. 하지만 기자헌은 󰡔매월당시사유록󰡕을 편찬하면서 김시습의 불교와 관련된 시를 감추지 않고 실으면서 김시습의 본래 행적을 그대로 기술하려 노력하였으며, 그 속에 담긴 울분과 저항의 정신을 느끼고자 하였다.
    연구결과를 통해 앞으로 더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전기의 지형도 및 양상을 좀 더 다각도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 절의 담론을 통해 조선시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셋째, 기억을 연구방법론으로 사용함으로써 그동안 우리 문학사에서 잊혀진 부분을 복원할 수 있다는 점이다. 넷째, 기록이 현재 남아있게 된 구체적 맥락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 색인어
  • 김시습, 기억, 기억서사, 허목, 송시열, 생육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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