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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戊戌變法期 淸의 조선정책과 근대 외교의 수립(1895-1899)
A Study of Paradigm Shift on the Modern Korea-Sino relations (1895-1899)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B유형)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
연구과제번호 2020S1A5B5A17089345
선정년도 2020 년
연구기간 1 년 (2020년 09월 01일 ~ 2021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김봉준
연구수행기관 (사)한국대학교육협의회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本稿는 19세기 말 청조의 변강 및 속방 정책의 수립과정 중 무술변법기(1895-1899) 전후의 對조선 정책사례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한중관계의 근대적 전환과 중화질서의 해체과정을 검토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특히 지금까지의 국내·외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연구는 대다수 중일관계를 그 주제로 삼고 있어 편향적인 관점에서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를 인식해왔다. 이 시기의 한중관계와 관련하여, 《光緖籌辦夷務始末》(未刊), 《英案》 등은 당시 청의 조선정책과 조선의 반응을 소상히 알려줄 수 있는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19세기 말 청조의 속방정책과 그 전환을 분석하고 아울러 중화질서의 해체과정을 규명하고자 한다. 또한 한편으로는 현재 동아시아 국제관계 연구 및 인식에 있는 고정관념을 해소하면서 중일관계 등 일부 영역에 편중적인 연구 경향에 대한 換氣를 목표로 하고 있다.
    19세기 말의 청 조정의 변화된 대외 및 속방정책의 주요 골자는 이른바 “中國體制”를 유지하면서 근대적 공법체제에 적응하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고 있었다. 특히 일본의 대외확장에 대한 대처를 위해 청 조정은 최대의 조공국인 조선에 대한 정책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즉 時宜에 따라 舊章을 變通하여 최선의 결과를 얻어내려고자 하는 청의 방침 아래에서 조선에 대한 정책 역시 변화하게 되는데, 조선으로 하여금 공법체제에 적용받게 하여 공법 질서 속에 둠으로써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넓히고자 하는 일본과 러시아 등 국가가 속방인 조선을 병탄하지 못하도록 조처하려고 시도하였다. 속방을 보전하는 동시에 청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우월적인 지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이 정책은 중국을 중심로 한 천하관과 주권 개념의 변화와도 연관이 있다.
    1870년부터 청일전쟁 직전의 조선의 상황은 전통적인 사대질서와 평등에 기초한 공법질서의 사이에서 과도기를 겪으며, 형세에 수동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는 시기였다고 한다면, 청일전쟁 이후 1890년대 중반 이후의 정세는 좀 더 복잡한 국면으로 접어든다. 특히 1880년 이후 조선과 청의 종속 관계 문제는 청과 일본의 대립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은 청을 빌미로 자국을 보호하고 있었고 청 역시 조선을 속국으로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있었으므로 일본이 조선에 영향력을 신장시키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청과의 종속관계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1882년 임오군란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조항에서와 같이 청이 속국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파견하고 경제적인 유대를 강화하는 것은 1876년 조일수호조규에서 조선을 자주국으로 규정한 일본의 의도와도 배치되는 것이었다. 1894년 동학당의 난의 진압을 빌미로 일본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고 청의 군대와 교전함으로써 일어난 청일전쟁은 일본이 조선을 청의 영향권 안에서 이탈시키고자 조선의 독립과 내정개혁을 개전의 명분으로 삼아 벌인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발발한 청일전쟁은 청의 패전이라는 결과를 남겼으며. 서구국가들이 청의 영토 내에서 이권의 경탈을 가속화시켰다. 이른바 속방의 상실로 인한 중국 본토에 대한 “과분의 위기”가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이러한 위기는 청의 내부개혁에 대한 필요성과 지식인들의 각성을 촉구시켰다. 청일전쟁은 1860년대 “洋務”를 주도했던 세력의 축소와 축출을 의미하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이 권력의 공백은 강유위를 비롯한 새로운 개혁가들이 전면에 나서면서 청 내외정에서 새로운 단계가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술변법의 위정자들은 광서제의 개혁 의지 아래 청일전쟁의 패배와 후유증을 최소화하고 새로운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개혁을 단행한다.
    기존의 연구들이 무술변법의 내정개혁 측면에 주목하였지만, 이 변법은 청의 외교와 대외정책의 전환에도 적지 않은 의의를 남겼다고 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무술변법 직전 총리아문의 책임자였던 혁흔이 1898년 5월 29일에 사망하였다. 혁흔의 죽음은 총리아문의 개설 이래 유지되어왔던 대외정책의 변화를 예고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무술변법이 시작되면서 청의 대외정책 전반에도 큰 전환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청일전쟁의 패전은 이전 정국을 주도했던 혁흔, 이홍장, 서태후 등 소위 양무파 인물들의 정치적 입지와 영향력을 감소시켰다. 무술정변으로 서태후가 다시 집권하게 되지만, 당시 혁흔의 사망은 다가오는 무술변법에서 새로운 대외정책의 장이 열릴 것을 시사하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과의 새로운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계기 역시 무술변법 전후에 이미 준비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기대효과
  • 기존 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연구는 주로 청일전쟁을 기점으로 하여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질서가 해체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관련연구들은 내부집단의 정치적 관계와 갈등이 대외정책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은 실정이며, 동아시아 세계의 근간을 구축하고 있던 중화질서는 피상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청일전쟁의 결과라고 인식되었다. 그래서 여기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다양한 관점을 통해 질서의 해체과정을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며, 이 연구를 통해 기존 중일관계에 편향적인 연구관점을 해소하는 동시에 한중관계에도 그 무게중심을 옮겨가면서 동아시아 국제관계 연구의 균형을 이루고자 한다. 아울러, 이 연구를 통해 중화질서의 세계관이 가진 근본적인 속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 아울러 기존에 활용되지 않았던 《光緖籌辦夷務始末》과 같은 미간사료 역시 활용할 예정이다. 한중관계의 전환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는 국내외 사료를 수집·정리·분석을 진행하여, 해당 자료의 활용도를 제고하고 향후 관련연구에도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다.
    또한 본 연구는 19세기 말 청조의 속방정책에 대한 분석을 통해 현재 동아시아 국제관계 연구 및 인식에 있는 고정관념을 해소하고 중일관계 등 일부 영역에 편중적인 연구 경향에 대한 換氣를 목표로 하고 있다. 특히 중국과 속방을 階序적인 상하관계로만 보는 기존시각에서 탈피하여 중국과 속방을 ‘天下’를 구성하는 대칭적인 관계로 설정하는 것에 해석의 기반으로 설정하였다. 또한 J. Kennan와 H.Morgenthau의 현실주의 국제관계 이론에 기반하여 국내 정치가 대외정책 성립의 주요 요소가 된다고 보고, 이를 적용하여 청조의 내부 정치관계와 대외정책의 상호관계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아울러 조약과 장정 그리고 외교문서에 기반하는 외교사 연구의 특성을 반영하여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과 《한청통상조약》 등을 사례로 분석하면서 근대 한중관계의 변용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자 한다.
    따라서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기존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연구에서 관습적으로 혹은 무비판적으로 사용해 왔던 개념에 대한 재고찰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청의 속방정책에 대한 논의를 다루면서, 이 정책과 내부집단의 이항적 길항관계가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사료의 측면에 있어서는 아직 한국학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료인 대만 고궁박물원 문헌관 소장 《光緖籌辦夷務始末》와 수록되어 있는 조선 관련 문건들을 적극 활용할 것이다. 《光緖籌辦夷務始末》는 王亮이 주편한 《淸季外交史料》의 저본이 되는 자료로써, 《淸季外交史料》와 중복되는 문건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중에는 《光緖籌辦夷務始末》에만 수록되어 있는 문건들이 있다. 따라서 이 연구를 통해 《光緖籌辦夷務始末》의 활용도를 제고하고 조선과 관련된 문건들을 정리·해제하여 향후 근대 조청관계 연구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연구는 중국과 일본의 관계를 곧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중심축으로 설명하고 기존 중일관계 연구에 비판적인 관점에서 접근한다. 이러한 중일관계를 기반으로 구축되어 있는 동아시아 국제관계사의 경향에서 벗어나 한중관계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변화를 이해하는 것에 핵심 목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 연구요약
  • 본 연구와 방법은 외교사의 영역에 속한다. 외교사 연구는 기본적으로 외교문서에 대한 수집, 이해, 분석을 기반으로 구축된다. 또한 이 연구에서는 현실주의 국제관계학의 이론에 기초하여,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세력균형(均霑) 속에서 내부 집단과 대외정책의 연관관계가 미친 영향을 분석하여 내부 정치와 외교의 상호작용에도 주목하였다.
    해당 연구는 기본적으로 단일한 측면이 아닌, 다각도의 측면에서 당시의 국제관계를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한국의 규장각, 대만의 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 및 고궁박물원 문헌관, 중국의 북경제일역사당안관, 일본의 공문도서관 아시아역사자료센터 등 중요 자료고에 있는 사료 등 각국의 입장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이 필요하다. 히 대만 고궁박물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光緖籌辦夷務始末記》은 19세기 말 청조의 대외정책을 분석하는데 있어 관건이 되는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이 자료는 《淸季外交史料》의 저본이 되는 자료로써 《淸季外交史料》에 수록되지 않은 문건을 포함하고 있으며, 조선과 관련된 중요 문건들 또한 수록하고 있다. 아울러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자료 중에는 조청관계 관련 자료집인 《華案》과 조영관계의 《英案》이 있다. 이 중 《英案》에는 청일전쟁 직후 조선에 있는 청국상민들과 관련한 사무를 주조선영국공서에서 唐紹儀에게 위탁을 받아 대신 담임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어 청일전쟁 직후의 조선에서 청국상민의 상황과 조청관계를 소상히 규명할 수 있는 중요 자료이다.
    기존 19세기 동아시아의 질서와 세계관에 대한 문제의식은 중화질서 혹은 조공체제의 붕괴 및 근대적 질서 혹은 조약체제의 도입과 이 두 체제의 갈등이라는 구도로 해석하고 있다. 즉, 동아시아 근현대사 연구과 인식은 비서구권의 복합적인 근대의 궤적과 근대국가건설의 이론에 부합시키려는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할 수 있다. 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역시 이러한 연구 경향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의식을 통해 그 맥락과 인식을 설명해왔다.
    특히 근래의 한국학계에서는 조선을 중심으로 중국, 일본의 관계 등 질서의 변동을 해석하고자 시도하였다. 중화질서에서 공법질서로의 전환과 수용을 주제로 하여 역사적 맥락과 구조적 이해를 이해하려고 시도하였다. 예를 들어 만국공법을 하나의 근대적 질서가 도입하는 중요 매개로 삼고 이 국제법을 기준으로한 질서의 전환 및 국가 간의 평등에 입각한 교섭이라는 국제질서의 수용과정에 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선행연구와 관련하여, 박정현, 박준형 등은 청일전쟁 직후의 조청관계 및 조일관계와 관련된 연구를 축적한 바가 있으며, 주로 전쟁 이후의 각국 상민의 지위와 상호 인식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다만, 현재까지의 관련 연구 중에는 국가 관계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서는 소략하거나 중심적인 주제로 다루어지지 않은 실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특히 조선을 중심으로 한 연구는 많은 성과를 거둔 바가 있으나 조선의 교섭상대국, 관련국가의 정책이 어떠한 변화가 있었으며, 또 이 변화가 어떠한 결과를 가지고 왔는지에 대한 내부적 정책 요인에는 주목한 연구는 많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중일관계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형세 변화에 주목한 기존 연구들은 대부분 청일전쟁을 기점으로 하여 중화질서가 해체되고 동아시아의 형세가 급격히 변화하였는 등의 피상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결과를 도출하고 있다.
    그러나 중화질서의 해체는 기존 동아시아 국제관계연구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청일전쟁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인식하기보다 실질적으로는 이 《한청통상조약》을 통해 실현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899년 《한청통상조약(Treaty of Seoul)》은 조청 양국 사이에서 주권 국가 간에 대등한 관계를 전제로 체결된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장정의 사례가 서구공법체제의 형식을 차용하여 ‘屬邦’ 조선과의 전통적인 관계를 보장받으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한다면, 이 조약은 청이 조선에 대한 우월적인 지위를 적용하지 않았다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그리고 청 내부의 권력 변화를 통해 중화질서 해제의 맥락과 배경을 이해해볼 필요가 있다. 간략히 말하자면, 1899년의 조선과의 조약은 청일전쟁 직후 내부적으로 이전 청 조정의 정책의 향방을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이홍장 등 양무파에 의해 주도되지 않았다는 점을 중요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茅海建의 연구에서 단초를 제시한 바가 있듯이 청일전쟁의 결과로 인한 양무파의 실각은 이어진 무술변법의 영향 아래에서 광서제와 새롭게 기용된 인사들에 의해 주도된 바가 크다는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무술변법은 100여 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실행된 개혁이었지만, 청일전쟁 이후 청 내부에 가장 큰 정치적 반향을 일으켰으며, 이후 청의 정치와 사회의 향방을 결정하는 데 있어 중요한 기점이 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변법에 관한 기존 연구 가운데는 대부분 변법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영향 등을 다룬 연구는 많지만, 외교사 혹은 대외관계의 측면에서 변법을 다룬 연구가 충분하다고 할 수 없으며, 특히 변법 기간에 있었던 조선과의 국교 재개와 그 전후 과정을 다룬 연구는 더욱 적은 실정이다. 이 글에서는 청일전쟁 이후 전후처리의 수습과 무술변법 전후(明定國是 선포) 중심으로 청의 대외관계에 있어 전후처리라는 수습의 과정과 무술변법의 개혁을 하나의 맥락으로 파악하여, 조선과의 수교 재개의 이면에 있는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앞서 전후 수습과 처리의 과정에서 보듯, 전후 청 조정 내의 논의는 일본과의 관계를 어떻게 재설정하는지를 가장 염두에 두고 있었다. 기존 정책이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여왔다면, 무술변법 기간 중 변법파 관료들의 대일인식과 정책은 일본과 협력 관계를 세우는 것에 있었다. 이를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재상으로 초빙하여 새로운 내각에 힘을 실어주는 ‘借才論’과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으로 영국·미국·일본과 연합해야 한다는 ‘合邦論’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즉, 조선과의 관계를 재개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조선 내 청국 상민의 보호와 무역통상을 유지하는 것이 있으며, 다른 하나는 일본과의 관계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조선에 이전과 같은 우월적인 지위와 영향력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조선과의 국교 재개와 그 목적은 일본 등 다른 국가와의 연합과 이해관계를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두 번째는 러시아의 압박하기 위해 국가 간의 협력관계를 모색한 것에 있다. 삼국간섭 이후 러시아의 요구가 점점 심해지면서, 청은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 일본 등 이해관계가 합치하는 국가와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였다. 특히 러시아와 직접 국경이 맞닿아 있는 동삼성 지역의 보전을 위해 역시 이 지역과 인접해 있는 조선과의 국교를 재개하여 유사시 조선과 협상할 수 있는 물꼬를 트고자 한 것이다.
    조선 측 역시 조선 내 청국 상민과 이주민, 국경 문제, 그리고 조선 정부 내에서의 러시아와 일본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청과의 수교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특히 주조선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가 조선 내의 반러감정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 바와 같이 청과의 수교는 러시아에 대해 반감이 커지고 있던 조선 내부의 사정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 영문
  • Hundred Days of Reform was a reform implemented in a short period, but it caused the biggest political repercussions within the Qing Court after the Sino-Japanese War, and it can be said to be an important starting point in determining the political and social direction of the Qing Dynasty. Most of the existing studies on this Reform with the political and social effects, but there are not enough studies dealing with Reform period in terms of diplomatic aspects or external relations, especially less studies dealing with the resumption of diplomatic relations with Joseon and the post-war process. In this article, focusing on the settlement of post-war treatment after the Sino-Japanese War and the declaration of Reform, and the process of settlement of post-war treatment and of Reform are understood in one context.
    As previously seen in the process of post-war settlement and processing, the discussion within post-war administration adjustment was most concerned about how to reset the relationship with Japan. While the existing policy has kept Japan's influence in check and showed a hostile attitude, the perception and policy of defense officials during the New Reform period were to establish cooperative relations with Japan. To this end, Ito Hirobumi was invited as the prime minister to empower the new cabinet, and the "Union of Nations" that it should be allied with Britain, America, and Japan for the purpose of opposing Russia.
    In other words, it can be said that there are three main reasons for resuming relations with Joseon. First, there is the protection of ordinary people in the Qing Dynasty and the maintenance of trade trade trade, and the other is with Japan in mind. In a situation where Joseon could not maintain its superior status and influence as before, the resumption of diplomatic relations with Joseon and its purpose were transformed to aim for alliances and interests with other countries such as Japan.
    The second is to seek cooperative relations between countries to pressure Russia. As Russia's demands intensified after the interference of the Three Kingdoms, the Qing Dynasty sought to improve relations with countries in which interests such as Britain and Japan coincide to counter Russia. In particular, in order to preserve the Northeast region, which is directly bordered by Russia, it also attempted to resume diplomatic relations with Joseon adjacent to the region to open the door for negotiations with Joseon in case of emergency. The Joseon Dynasty was also active in diplomatic relations with Qing to escape from the commercial residents, border issues, and pressure from Russia and Japan within the Joseon.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무술변법은 100여 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실행된 개혁이었지만, 청일전쟁 이후 청 내부에 가장 큰 정치적 반향을 일으켰으며, 이후 청의 정치와 사회의 향방을 결정하는 데 있어 중요한 기점이 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변법에 관한 기존 연구 가운데는 대부분 변법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영향 등을 다룬 연구는 많지만, 외교사 혹은 대외관계의 측면에서 변법을 다룬 연구가 충분하다고 할 수 없으며, 특히 변법 기간에 있었던 조선과의 국교 재개와 그 전후 과정을 다룬 연구는 더욱 적은 실정이다. 이 글에서는 청일전쟁 이후 전후처리의 수습과 무술변법 전후(明定國是 선포) 중심으로 청의 대외관계에 있어 전후처리라는 수습의 과정과 무술변법의 개혁을 하나의 맥락으로 파악하여, 조선과의 수교 재개의 이면에 있는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청일전쟁의 결과는 조청 양국의 관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으나 아직 조선에는 1882년 임오군란과 ‘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의 공포 이후 유입된 청국 상민의 일부가 그대로 조선 영내에 남아 있었고, 사절 문제 등 양국 정부 간에도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1895년 말에 이르면 청의 우방이자 속국으로부터 이탈한 조선에 대해 평등에 기초한 관계를 수립해야만 하는 논의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무술변법 시기의 대외정책 변화는 조선과의 국교 재개에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는 만큼 이 시기 청 내부의 사정에 대해 충분히 알아둔다면, 근현대 양국관계의 이해와 기원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글은 청일전쟁 이후부터 한청통상조약의 체결 직전까지 조선과의 관계가 재편되는 과정 속에서 청의 내부정치와 대외 정황이 실질적으로 조청 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고찰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자 하였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는 청일전쟁 직후(1895)부터 한청통상조약의 체결(1899)까지의 조청관계를 사례로 하여, 중화질서의 해체와 근대외교 체제로 양국이 편입되는 마지막 과정을 이해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 연구를 통해 한국과 중국의 근대외교의 출발점이 언제였는지를 알아보고, 동아시아의 국제정치와의 연관성을 규명하는 데 일조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또한 본 연구는 19세기 말 청조의 속방정책에 대한 분석을 통해 현재 동아시아 국제관계 연구 및 인식에 있는 고정관념을 해소하고 중일관계 등 일부 영역에 편중적인 연구 경향에 대한 換氣를 목표로 하고 있다. 특히 중국과 속방을 階序적인 상하관계로만 보는 기존시각에서 탈피하여 중국과 속방을 ‘天下’를 구성하는 대칭적인 관계로 설정하는 것에 해석의 기반으로 설정하였다. 이를 위해 J. Kennan의 현실주의 국제관계 이론에 기반하여 청 내부의 정치관계과 국제관계를 설명할 것이다. 아울러 조약과 장정 그리고 외교문서에 기반하는 외교사 연구의 특성을 반영하여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과 《한청통상조약》 등을 사례로 분석하면서 근대 한중관계의 변용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자 한다.
    한편으로 이 연구는 중국과 일본의 관계를 곧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중심축으로 설명하고 기존 중일관계 연구에 비판적인 관점에서 접근한다. 이러한 중일관계를 기반으로 구축하고 있는 기존 동아시아 국제관계사의 경향에서 벗어나 한중관계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변화를 이해하는 것에 핵심 목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해당 연구 결과는 중국근현대사학회 정례발표회(2021년 12월 15일)에 발표가 이미 확정되었다. 아울러 『중국근현대사연구』(12월 발간 예정)에도 투고할 예정이며, 이 글을 번역하여 대만 등지의 학회에서 발표 및 투고할 계획도 구상하고 있다.
  • 색인어
  • 무술변법, 조청관계, 광서제, 근대외교, 한청통상조약
  • 연구성과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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