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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동번풍속기』를 통해 본 6세기 중반의 한강 유역
Han River Basin in the Mid-6th Century from Dongfanfengsuji(東藩風俗記)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 #40;B유형& #41;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
연구과제번호 2020S1A5B5A17090101
선정년도 2020 년
연구기간 1 년 (2020년 09월 01일 ~ 2021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전상우
연구수행기관 단국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한국 고대사 연구의 새로운 논의를 위하여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기존 사료의 재검토이다. 실제로 최근의 연구 성과를 살펴보면, 사료를 해석함에 있어 글자 하나의 뜻을 새로 새기거나, 각종 사서에서의 용례를 파악하여 새로운 결과를 도출하고 있다. 당연하듯이 해석되어 온 글자의 재검토를 진행한 것이다. 이밖에 사료의 원전을 검토하려는 시도도 이루어지고 있다. 사료의 원전 추적은 새로운 한국 고대사상은 물론 당시 사서 편찬자의 역사상 혹은 국가의 정치적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본 연구에서는 사료의 원전 연구를 수행하며 중국 정사 동이전 중 『수서』 신라전의 원전을 추적하여 그 결과를 한국 고대사의 연구에 적용하고자 한다. 이미 『수서』 신라전의 원전으로 『동번풍속기』가 지목되었지만, 『수서』 신라전의 어떠한 구절이 『동번풍속기』와 관련이 있는지 그 구체적인 양상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가 미진한 상황이다. 이에 『수서』 신라전과 『동번풍속기』 간의 구체적인 관련성을 검토하여 제시할 계획이다.
    또한 위의 과정을 토대로 밝혀낸 『수서』 신라전과 『동번풍속기』의 관계를 통해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다루고자 한다. 특히 『수서』 신라전에 전하는 신라의 영역 확장 과정은 기존 연구와 달리 원전의 분석을 통해 재검토되어야 할 여지가 존재한다.
    이처럼 본 연구는 『수서』 신라전과 그 원전으로 추정되는 『동번풍속기』 간의 상관관계를 규명한 후, 규명 결과를 한국 고대사의 연구에 활용하여 새로운 논의를 전개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 기대효과
  • 본 연구에서 수행하는 연구의 기대효과와 활용방안은 첫째, 『수서』 신라전이 가지는 사료적 가치의 재평가이다. 『동번풍속기』의 원문의 복원을 통해 『수서』 신라전의 구절을 재평가하고 향후 역사 연구에서 사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551년 전후 한강 유역의 향방을 보다 다채롭게 이해할 수 있다.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의 새로운 요인으로 한강 유역에 배치된 고구려군의 이탈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고구려의 한강 유역 지배 방식에 대한 논의를 추가할 수 있다. 『수서』 신라전에 전하는 ‘高麗人不堪戎役’을 신뢰할 수 있다면, 고구려가 한강 유역에서 병역을 동원한 사례로 인정이 가능하다. 아울러 한강 유역에서 발굴된 삼국의 유적 혹은 유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 연구요약
  • 551년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의 공격으로 한강 유역을 상실했다. 고구려가 백제에게 6군, 신라에게 10군이라는 넓은 지역을 짧은 시간에 빼앗긴 것이다. 기존 연구에서는 그 원인을 요서 일대에서의 유연과 돌궐 혹은 북제의 활동에 따른 병력의 집중, 지배층의 내란으로 인한 지방 통제의 약화 등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고구려가 한강 유역에서 제대로 된 방어 작전을 펼치지 못하고 넓은 전선에서 단기간에 물러난 이유를 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한 것으로 사료된다. 한편 『단양신라적성비』에 신라가 야이차의 공로를 치하한 것을 근거로 550년대 무렵 신라가 한강 유역에 있던 고구려 재지 세력을 적극적으로 포섭하였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주목할 만하다. 다만, 고구려가 한강 유역에서 철수하고,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게 된 계기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 고구려의 한강 유역 상실에 대해 수많은 논고가 발표되었지만, 위의 견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삼국사기』·『일본서기』·『삼국유사』와 같은 사료에만 의지한 결과로 판단된다. 기존 연구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던 『수서』 신라전을 새롭게 볼 필요가 있다.
    『수서』 신라전에는 “그 선조는 백제에 부용했는데, 후에 백제가 고려를 치자, 고려인이 병역을 견디지 못하고 서로 이끌어 (신라로) 귀부하니 마침내 강성해졌으며, 이로 인해 백제를 치고 가라국에 부용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다. 기존에 이 구절은 신라의 선조가 백제에게 부용했다는 점, 신라가 백제를 치고 가야에 부용했다는 점으로 인해 신뢰하기 힘들다고 이해했다. 여러 사서들과 대조하면 역사적 사실과 다른 내용을 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유사한 구절이 『한원』 등에 전한다. 이에 따르면 『수서』 신라전의 해당 구절은 『동번풍속기』라는 사서에 의거한 구절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러 사서의 대조를 통해 『동번풍속기』의 기사를 복원할 수 있다면 551년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 과정을 재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추정에 무리가 없다면, 551년 한강유역에서의 고구려의 철수 및 신라의 진출 방식은 누적된 병역의 피로를 견디지 못한 고구려 병력들의 이탈에서 비롯되었으며, 신라는 그 병력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여 단기간에 한강상류를 장악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삼국사기』 거칠부전에 전하는 고구려 승려 혜량의 신라로의 항복, 『단양신라적성비』에 기록된 신라의 적성 진출에 공을 세운 야이차에 대한 치하 등의 기록과도 상통한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여러 사서에 혼재한 『동번풍속기』의 일문을 재구성한 결과 ‘金姓相承三十餘代. 其先附庸於百濟. 後因百濟征高麗, 高麗人不堪戎役, 相率歸之, 遂致强盛. 因襲百濟, 附庸於迦羅國.’은 『동번풍속기』의 문장임을 확인하였다. 또한 『동번풍속기』은 『제번풍속기』의 일부이며, 수 양제의 고구려 공격 준비의 일환으로 610년을 전후하여 편찬되었다고 추론하였다. 그리고 『서역도기』, 『고려기』의 편찬 방식과 『동번풍속기』 기사의 분석을 통해 『동번풍속기』의 전거는 중국의 전적과 당시 사람들의 진술을 토대로 하였다고 보았다. 복원한 『동번풍속기』의 기사는 6세기 중반 삼국의 정세를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동번풍속기』의 기록이 새로운 사실을 전한다고 하기 어렵지만, 여러 사서에 전하는 사건을 보다 다채롭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동번풍속기』에 당시 사람들의 인식이 투영되었다는 점과 함께 『동번풍속기』가 가지는 사료적 가치라고 하겠다.
    다만 본 연구에서는 당초 계획했던 백제 혹은 고구려가 사용한 고분을 신라가 재활용한 것으로 보이는 안성 장원리, 청원 주성리, 홍천 역내리, 서울 천왕동의 고분군을 『수서』 신라전이 인용한 『동번풍속기』의 기록과 결부지어 이해하는 데 이르지는 못하였다. 아울러 『동번풍속기』가 『수서』 경적지, 『구당서』 및 『신당서』에 기재되지 않은 이유 등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검토하지 못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해당 연구를 KCI 등재 학술지에 투고하는 과정에서 최대한 보완할 계획이며, 그러지 못한다면 차후의 연구 과제로 남겨두고자 한다.
  • 영문
  • As a result of reconstructing 『Dongfanfengsuji(東藩風俗記)』 mixed in various librarians, it was ‘金姓相承三十餘代. 其先附庸於百濟. 後因百濟征高麗, 高麗人不堪戎役, 相率歸之, 遂致强盛. 因襲百濟, 附庸於迦羅國.’ In addition, it was inferred that 『Dongfanfengsuji(東藩風俗記)』 was part of 『Zhufanfengsuji(諸蕃風俗記)』 and was compiled around 610 as part of preparation for the Koguryeo attack. And through the compilation method of 『Xiyutuji(西域圖記)』 and 『Gaoliji(高麗記)』, 『Dongfanfengsuji(東藩風俗記)』's previous work was based on the history of China and the statements of people at the time. Although it is difficult to say that 『Dongfanfengsuji(東藩風俗記)』's record conveys new facts, it can be said that it helps to understand events delivered to various librarians more diversely. This is the historical value of 『Dongfanfengsuji(東藩風俗記)』 along with the fact that people's perceptions were projected at the time.
    However, in this study, the ancient tombs of Jangwon-ri, Cheongwon Juseong-ri, Hongcheon Stationnae-ri, and Cheonwang-dong, Seoul which appear to have been recycled by Silla, were not combined with the records of 『Dongfanfengsuji(東藩風俗記)』 cited by The Records of Silla of Suishu(隋書 新羅傳). In addition, it was not possible to specifically review the reason why 『Dongfanfengsuji(東藩風俗記)』 was not listed in the "Suishu jingjizhi(『隋書』 經籍志)" horn site. In this regard, we plan to supplement the study as much as possible in the process of submitting it to KCI-registered journals, and if not, we will leave it as a future research project.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여러 사서에 혼재한 『동번풍속기』의 일문을 재구성한 결과 ‘金姓相承三十餘代. 其先附庸於百濟. 後因百濟征高麗, 高麗人不堪戎役, 相率歸之, 遂致强盛. 因襲百濟, 附庸於迦羅國.’은 『동번풍속기』의 문장임을 확인하였다. 또한 『동번풍속기』는 『제번풍속기』의 일부이며, 수 양제의 고구려 공격 준비의 일환으로 610년을 전후하여 편찬되었다고 추론하였다. 그리고 『서역도기』, 『고려기』의 편찬 방식과 『동번풍속기』 기사의 분석을 통해 『동번풍속기』의 전거는 중국의 전적과 당시 사람들의 진술을 토대로 하였다고 보았다. 복원한 『동번풍속기』의 기사는 6세기 중반 삼국의 정세를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동번풍속기』의 기록이 새로운 사실을 전한다고 하기 어렵지만, 여러 사서에 전하는 사건을 보다 다채롭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동번풍속기』에 당시 사람들의 인식이 투영되었다는 점과 함께 『동번풍속기』가 가지는 사료적 가치라고 하겠다.
    다만 본 연구에서는 당초 계획했던 백제 혹은 고구려가 사용한 고분을 신라가 재활용한 것으로 보이는 안성 장원리, 청원 주성리, 홍천 역내리, 서울 천왕동의 고분군을 󰡔수서󰡕 신라전이 인용한 󰡔동번풍속기󰡕의 기록과 결부지어 이해하는 데 이르지는 못하였다. 아울러 󰡔동번풍속기󰡕가 󰡔수서󰡕 경적지, 󰡔구당서󰡕 및 󰡔신당서󰡕에 기재되지 않은 이유 등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검토하지 못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해당 연구를 KCI 등재 학술지에 투고하는 과정에서 최대한 보완할 계획이며, 그러지 못한다면 차후의 연구 과제로 남겨두고자 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에서 수행하는 연구의 기대효과와 활용방안은 첫째, 『수서』 신라전이 가지는 사료적 가치의 재평가이다. 『동번풍속기』의 원문의 복원을 통해 『수서』 신라전의 구절을 재평가하고 향후 역사 연구에서 사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551년 전후 한강 유역의 향방을 보다 다채롭게 이해할 수 있다.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의 새로운 요인으로 한강 유역에 배치된 고구려군의 이탈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고구려의 한강 유역 지배 방식에 대한 논의를 추가할 수 있다. 『수서』 신라전에 전하는 ‘高麗人不堪戎役’을 신뢰할 수 있다면, 고구려가 한강 유역에서 병역을 동원한 사례로 인정이 가능하다.
  • 색인어
  • 『수서』 신라전, 『동번풍속기』, 한강 유역, 고구려,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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