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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代 江蘇省 江陰縣의 抗淸守城史 정리 양상 -‘우리 고장 역사 정리 작업’의 한 사례-
The arrangement of the resist movement against the Qing by Jiangyin people : A case study on 'the arrangement of the historical event occurred at our county' in Qing dynasty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21S1A5A2A01069815
선정년도 2021 년
연구기간 1 년 (2021년 07월 01일 ~ 2022년 06월 30일)
연구책임자 이준갑
연구수행기관 인하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명청 교체는 당시의 한인 지식인들에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격변이나 亡國을 넘어선 亡天下라는 문명사적 위기로 인식되었다. 명을 대체한 청은 한인들이 멸시하던 이민족 왕조인데다가 수치스러워하던 치발을 강요했다. 참담한 현실을 맞이한 한인들은 투항이나 저항 가운데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夷狄이라고 낙인을 찍었던 만주족에게 치발을 하고 투항을 하더라도 구차했고 저항을 하더라도 목숨을 내놓아야 했으므로 살든 죽든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북경이나 산동을 비롯한 화북 지방에서는 청군에 크게 저항하지 않고 투항하였지만 강소성을 비롯한 강남 지역에서는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이는 지역도 드물지 않게 나타났다. 청조는 저항 세력을 소멸시켜야만 정복을 완수할 수 있었으므로 역량을 총동원하여 강남의 저항세력을 진압하였고 도처에서 학살도 서슴지 않았다.
    정복과 투항, 정복과 저항이라는 말은 명청 교체를 설명하는 유용한 개념이었으므로 역사 연구도 주로 두 가지 관점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정복자인 청조는 어떻게 소수의 군대를 동원하여 다수의 한인들을 정복하고 지배할 수 있었을까하는 관점에서 이루어진 연구 성과이다. 다른 하나는 한인들의 입장에서 정복자인 청에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살펴본다는 입장에서 한인들의 투항이나 저항 양상을 살펴본 연구이다. 물론 이런 연구들을 통해서 명말청초 동란기의 중국 사회의 실상이 세세하게 밝혀진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정복, 투항, 저항은 이후의 한인들 특히 신사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다시 말해서 한인 신사와 지식인은 명말 청초의 정복과 투항, 저항이 끝난 후에 청조 치하에서 이를 어떻게 반추하며 반응했는가 하는 의문을 해결하는 데는 이런 개념에서 적절한 단서를 찾아내기 어렵다.
    그래서 본 응모자는 정복, 투항, 저항의 관점이 아니라 신사와 文人들이 남긴 저술을 통해서 이들이 청초의 동란과 자신들의 희생을 어떻게 기억하고 반추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기억과 반추는 청군과의 격렬한 전쟁을 경험한 지역일수록 더욱 선명하고 끈질기게 행해졌다. 강음이나 양주, 가정에서의 학살은 정복과정에서 자행된 삼대 학살이라 일컬어졌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후손들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원한과 고통 속에 살았다. 하지만 가해자인 청조와 청군에게 원한을 갚을 수 있는 현실적인 수단은 없었다. 현실적인 복수 수단이 전혀 없는 처지에서 살아남은 자들과 그 후손들은 그 비극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했는가? 이것이 본 응모자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이다.
    이런 문제의식 하에서 본 응모자가 연구대상 지역으로 선장한 곳이 강소성 江陰縣이다. 팔십여 일 간의 항청 투쟁 끝에 성이 함락되어 십여만 명의 주민이 청군에 모두 학살당했던 이 지역에서는 특이하게도 청대 내내 신사와 문인들이 항청 수성 전투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저술을 통해서 개인적인 차원에서 縣志 간행을 통해서 縣이라는 공식적인 차원에서 자기 고장의 역사를 기록하고 정리했다.
    우리 고장의 아픈 역사를 우리 손으로 정리하자는 작업이었는데 본 응모자는 이런 움직임을 ‘우리 고장 역사 정리 작업’이라는 말로써 표현한다. 현재까지 청대 자기 고장의 역사를 그 지역의 신사나 문인들이 지속적으로 정리한 작업을 분석 대상으로 삼아 진행한 연구 성과는 없었다. 본고는 청대 지방의 역사를 중앙 역사의 일부분이라는 삼인칭이 아니라 우리 고장의 역사라는 일인칭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추적해 보고자 한다.
    이런 관점에서 청초 이래 江陰縣 신사들의 저술에 기록된 강음 항청 수성 투쟁에 대한 내용 그리고 강희, 건륭, 도광 『강음현지』에 실린 강음 항청 수성 투쟁 기록들을 살펴보면서 강음현의 ‘우리 고장 역사 정리 작업’이 청대의 정치적, 사회적 여건의 변화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분석해보도록 하겠다. 광서연간에도 『강음현지』가 간행되었으나 강음 항청 수성 관련 기록은 대부분 도광 『강음현지』의 내용과 겹쳐서 분석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서 명청교체기를 왕조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지역민의 삶의 터전 즉 우리 지방에서 발생한 우리의 고장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면 한다.
  • 기대효과
  • 명말청초는 역사학에서 거대담론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던 격변의 시기를 살던 지식인들은 亡國과 亡天下의 현실을 자책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명청교체기 지식인들에게는 국가라든가 천하가 사고의 단위로 자리 매김하는 현상이 빈번해졌다. 三遺老가 남긴『독통감론』,『명이대방록』,『천하군국이병서』는 국가나 천하를 사유 단위로 삼은 저작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명말청초는 일종의 거대 담론의 시대였다고도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청대에는 국가가 주도하는 담론의 흐름도 있었다. 건륭제는 청초의 정복과정에서 명조의 신하였다가 투항하여 청조 지배에 협조한 자들이라든가 청에 저항하고 투쟁하다가 희생된 자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새롭게 하고자 했다. 이전의 평가 기준이 청조 정복에의 도움 여부라는 공리적인 측면이었다면 이제는 상황과 시대를 뛰어넘는 불변의 충절이라는 윤리적 측면이었다. 이 새로운 기준에 입각하여 건륭제는 『勝朝殉節諸臣錄』과 『貳臣傳』을 편찬하도록 신하들에게 명령했다. 충절을 절대적 가치 기준으로 삼는 청조 판 역사 재정비 사업이 본격화되어 투항자들은 이신으로 폄훼되고 항청 인물들은 순절자로 현창되었다. 건륭제는 왕조의 안정을 도모하려고 명말청초 인물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기준을 바꾸었다.
    본고는 명말청초의 거대담론, 청대의 국가주도의 담론과는 차원이 다른 우리 고장에서 발생한 우리지역의 역사를 어떻게 기록하고 반추해 가는가 하는 움직임에 주목하여 작성한 것이다. 우리 고장의 역사를 말한다는 의미에서는 거대 담론에 맞서는 미시담론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지방의 신사나 문인들이 역사를 기록한다는 의미에서는 국가주도의 담론에 맞선 민간주도의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본고를 통해서 거대담론, 국가주도 담론에 주목하여 연구하는 경향에서 벗어나 미시담론, 민간주도의 담론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연구 조류가 형성될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
  • 연구요약
  • 연구는 크게 다음 세가지 방면에서 진행할 것이다.
    첫째 : 江陰의 抗淸守城史 저술과 紳士·文人들의 사명감에 대한 분석
    강음현의 수성과 대학살이라는 참극이 발생하자 이 지방의 신사들과 문인들은 이 사건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했고 실제로 사명감에서 많은 기록을 남겼다. 그러면 저자들이 지녔던 사명감이나 책임의식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韓菼은 『江陰城守紀』에 따르면 綱常과 節義를 지키려고 청에 저항하다 10만이 목숨을 잃은 강음의 참극을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의 충절을 밝히는 일이 자신의 사명이자 책임이라는 의미이다. 기록의 궁극적 목적은 강음인의 죽음과 희생을 충절로 현창하는 것이었다. 희생자들을 충절의 사람으로 현창하려는 움직임은 청대 강음현의 우리 고장 역사 정리 사업에서 일관되게 관통하는 큰 흐름이다.
    둘째 : 紳士·文人의 抗淸守城史 개인 저술에 나타난 청군에 대한 적대감, 자기반성, 殉節者 顯彰
    강음의 신사와 문인들은 강음 항청 수성에 대한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 그 내용은 내용은 대체로 청조가 파견한 강음 지현의 치발 강요, 신사들을 중심으로 한 주민들의 거부와 항청 투쟁 결의, 전임 典史 염응원, 진명우의 영도, 휘주 상인이자 국자감생 程璧의 기부와 강음 주민들의 조직적이고 적극적 협력, 청군의 투항 권유 거절과 처절한 전투, 외부 지원 세력의 쓸모없음, 함락 후의 강음 주민들의 장렬한 최후, 항청 투쟁에 대한 평가로 구성되었다. 여러 저술들에서 나타나는 내용은 청군에 대한 적대감, 희생자들을 순절자로 현창요구, 신사와 문인들의 자기반성 등이었다. 특히 순절자에 대한 현창 요구는 청대 강음의 우리 고장 역사 정리 사업에서 일관되게 요구하는 사항이었다.
    셋째 : 『江陰縣志』를 통한 縣의 공식적 抗淸守城史 정리 양상에 대한 분석
    抗淸 흔적 감추기 : 康熙 『江陰縣志』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대단히 긴장된 비상시기에 편찬, 간행되었다. 청조 지배를 뿌리 채 뒤흔든 삼번의 난이 강희 12년에서 강희 20년에 걸쳐 전개되었으므로 초고 편찬과는 시간상 겹친다. 청조의 입장에서는 현재의 사건이냐 과거의 사건이냐 하는 시기상의 차이만 있을 뿐 삼번의 반청 거병과 강음의 항청 수성은 모두 逆徒들이 무력으로 저항한 반역 행위였을 뿐이었다. 따라서 삼번의 난이라는 비상시기에 지방지 편찬에 나선 강음의 신사나 관료들의 입장에서는 청조 지배자들에게 원하지 않은 기억을 되살리지 않도록 조심하였다.
    항청 守城史에 대한 공식 기록의 완성 : 乾隆 『江陰縣志』는 청대 편찬된 어떤 『강음현지』 보다도 항청 수성 관련 사항을 풍부하고 다양하게 기록하였다. 강음현의 신사와 지방관은 乾隆 『江陰縣志』를 편찬함으로써 항청 수성사에 관한 縣의 공식 기록을 완성했다.
    항청 守城 희생자의 제도적 현창과 반청 분위기의 부활 : 道光『江陰縣志』 1840년에 간행된 道光『江陰縣志』는 청대 강음현의 우리고장 역사 정리 작업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반영한 지방지였다. 그보다 앞서 편찬된 강희, 건륭『강음현지』는 내용이 길건 짧건 상관없이 모두 항청 수성 전투 경과 즉 ‘편일체’ 기록과 희생자에 대한 기록 즉 열전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도광 『강음현지』에서는 전자의 내용은 완전히 빠지고 후자와 관련된 내용이 극단적으로 강조되어었다. 건륭 『강음현지』를 편찬한 이후 30여년이 지난 건륭 41년(1776)에 추후의 강음 縣志를 편찬하는데 있어서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중대한 조치가 취해졌다. 건륭제가 『勝朝殉節諸臣錄』을 편찬하도록 명령하여 강음 항청 수성 전투의 지도자들도 조정의 시호를 받게 된 것이다.
    그후에도 강음현의 신사와 주민들은 더 많은 순절자들의 현창 사업을 지속했다. 도광 6년(1826)에는 강음 士民들이 성이 함락될 때 節義를 지키다 희생당한 138명을 忠義祠에 모셔달라고 요청하여 이듬해에 황제의 윤허를 받았다. 도광 16년(1836)에 강음현 사민들은 다시 한번 134명의 희생자를 충의사에 모시는 것을 허락해 주도록 조정에 요청하여 승인을 얻었다.
    그러나 도광 『강음현지』에는 반청적인 분위기도 반영되어 있다. 도광 『강음현지』권25, 예문2에는 황희가 쓴「明江陰縣典史閻公死守孤城狀」이란 글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는 강음을 공격하는 청군을 敵으로, 명의 장수였다가 청에 투항하여 강음 공격의 선봉이 된 유양좌를 반역한 장수(逆鎭)로 부르고 있으며 청의 順治 연호가 아니라 남명의 弘光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 강희 『강음현지』에서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반청 분위기가 도광 『강음현지』에서 감돌고 있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명청 교체는 당시의 한인 지식인들에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격변이나 亡國을 넘어선 亡天下라는 문명사적 위기로 인식되었다. 명을 대체한 청은 한인들이 멸시하던 이민족 왕조인데다가 수치스러워하던 치발을 강요했다. 참담한 현실을 맞이한 한인들은 투항이나 저항 가운데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夷狄이라고 낙인을 찍었던 만주족에게 치발을 하고 투항을 하더라도 구차했고 저항을 하더라도 목숨을 내놓아야 했으므로 살든 죽든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북경이나 산동을 비롯한 화북 지방에서는 청군에 크게 저항하지 않고 투항하였지만 강소성을 비롯한 강남 지역에서는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이는 지역도 드물지 않게 나타났다. 청조는 저항 세력을 소멸시켜야만 정복을 완수할 수 있었으므로 역량을 총동원하여 강남의 저항세력을 진압하였고 도처에서 학살도 서슴지 않았다.
    정복과 투항, 정복과 저항이라는 말은 명청 교체를 설명하는 유용한 개념이었으므로 역사 연구도 주로 두 가지 관점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정복자인 청조는 어떻게 소수의 군대를 동원하여 다수의 한인들을 정복하고 지배할 수 있었을까하는 관점에서 이루어진 연구 성과이다. 다른 하나는 한인들의 입장에서 정복자인 청에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살펴본다는 입장에서 한인들의 투항이나 저항 양상을 살펴본 연구이다.
    그런데 정복, 투항, 저항은 이후의 한인들 특히 신사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다시 말해서 한인 신사와 지식인은 명말 청초의 정복과 투항, 저항이 끝난 후에 청조 치하에서 이를 어떻게 반추하며 반응했는가 하는 의문을 해결하는 데는 이런 개념에서 적절한 단서를 찾아내기 어렵다.
    그래서 본고는 정복, 투항, 저항의 관점이 아니라 신사와 文人들이 남긴 저술을 통해서 이들이 청초의 동란과 자신들의 희생을 어떻게 기억하고 반추했는가를 살펴보았다. 기억과 반추는 청군과의 격렬한 전쟁을 경험한 지역일수록 더욱 선명하고 끈질기게 행해졌다. 강음이나 양주, 가정에서의 학살은 정복과정에서 자행된 삼대 학살이라 일컬어졌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후손들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원한과 고통 속에 살았다. 하지만 가해자인 청조와 청군에게 원한을 갚을 수 있는 현실적인 수단은 없었다. 현실적인 복수 수단이 전혀 없는 처지에서 살아남은 자들과 그 후손들은 그 비극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했는가? 이것이 본고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이었다.
    이런 문제의식 하에서 본고에서 연구대상 지역으로 선장한 곳이 강소성 江陰縣이다. 팔십여 일 간의 항청 투쟁 끝에 성이 함락되어 십여만 명의 주민이 청군에 모두 학살당했던 이 지역에서는 특이하게도 청대 내내 신사와 문인들이 항청 수성 전투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저술을 통해서 개인적인 차원에서 縣志 간행을 통해서 縣이라는 공식적인 차원에서 자기 고장의 역사를 기록하고 정리했다.
    우리 고장의 아픈 역사를 우리 손으로 정리하자는 작업이었는데 본고에서는 이런 움직임을 ‘우리 고장 역사 정리 작업’이라는 말로써 표현했다. 현재까지 청대 자기 고장의 역사를 그 지역의 신사나 문인들이 지속적으로 정리한 작업을 분석 대상으로 삼아 진행한 연구 성과는 없었다. 본고는 청대 지방의 역사를 중앙 역사의 일부분이라는 삼인칭이 아니라 우리 고장의 역사라는 일인칭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추적해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청초 이래 江陰縣 신사들의 저술에 기록된 강음 항청 수성 투쟁에 대한 내용 그리고 강희, 건륭, 도광 『강음현지』에 실린 강음 항청 수성 투쟁 기록들을 살펴보면서 강음현의 ‘우리 고장 역사 정리 작업’이 청대의 정치적, 사회적 여건의 변화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분석해보았다. 본 연구를 통해서 명청교체기를 왕조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지역민의 삶의 터전 즉 우리 지방에서 발생한 우리의 고장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면 한다.
  • 영문
  • The collapse of the Ming Dynasty and the new owner of the Qing Dynasty were upheaval in which the sky collapsed and the ground split for Chinese intellectuals at the time. This situation was recognized as a civilization and historical crisis, not just the destruction of the state. The Qing Dynasty was a dynasty despised by the Han Chinese. But the Qing dynasty forced the Han Chinese to braid pig tail that they were ashamed of. In the face of the disastrous reality, the Han Chinese had no choice but to surrender or resist. However, it was lame to surrender or to resist. Therefore, the Han people were miserable whether they lived or died. In northern China, including Beijing and Shandong, they surrendered without much resistance to the Qing army. In the Yangzi basin, including Jiang su Province, it was not uncommon for people to struggle for their lives. The Qing Dynasty was able to complete the conquest only by extinguishing the insurgents, so it suppressed the insurgents and did not hesitate to slaughter them everywhere.
    Conquest and surrender, conquest and resistance were useful concepts that explained the fall of the Ming Dynasty and the rule of the Qing Dynasty. Therefore, historical research was mainly conducted from the two perspectives. One is the research result from the perspective of how the conqueror, Qing Dynasty, was able to conquer and control a large number of Han Chinese by mobilizing a small number of troops. The other is a study that examines Han Chinese's surrender and resistance patterns from the perspective of looking at how to respond to Qing, a conqueror,
    This study examined how Han Chinese remembered and reflected on the disturbance of Qing dynasty and their sacrifices through writings left by gentlemen and literary figures, not from the perspective of conquest, surrender, and resistance.
    JIang su Jiang yin is the place where after more than 80 days of protest, the castle fell and all 100,000 residents were slaughtered by the Qing army. Unusually in this area, gentry and writers keep records of the Battle of the Fortress throughout the Qing Dynasty. Through writing, he recorded and organized the history of his hometown at the official level. It was a task to organize the painful history of our hometown by ourselves. In this study, this movement was expressed in the phrase 'the work of organizing the history of our hometown'.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고는 명말 청초를 왕조교체라는 국가사(왕조사)적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신사층과 문인이 우리의 고장의 역사라는 입장에서 바라보고 기록했던 지방사의 관점도 존재했음을 논증하기 위해 작성했다. 이런 문재 의식하에서 연구대상 지역으로 선정한 곳이 강소성 江陰縣이다. 팔십여 일 간의 항청 투쟁 끝에 성이 함락되어 십여만 명의 주민이 청군에 모두 학살당했던 이 지역에서는 특이하게도 청대 내내 신사와 문인들이 항청 수성 전투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저술을 통해서 개인적인 차원에서 縣志 간행을 통해서 縣이라는 공식적인 차원에서 자기 고장의 역사를 기록하고 정리했다. 우리 고장의 아픈 역사를 우리 손으로 정리하자는 작업이었는데 본고에서는 이런 움직임을 ‘우리 고장 역사 정리 작업’이라는 말로써 표현했다. 현재까지 청대 자기 고장의 역사를 그 지역의 신사나 문인들이 지속적으로 정리한 작업을 분석 대상으로 삼아 진행한 연구 성과는 없었다. 본고는 청대 지방의 역사를 중앙 역사의 일부분이라는 삼인칭이 아니라 우리 고장의 역사라는 일인칭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추적했다.
    명말청초는 역사학에서 거대담론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던 격변의 시기를 살던 지식인들은 亡國과 亡天下의 현실을 자책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명청교체기 지식인들에게는 국가라든가 천하가 사고의 단위로 자리 매김하는 현상이 빈번해졌다. 三遺老가 남긴『독통감론』,『명이대방록』,『천하군국이병서』는 국가나 천하를 사유 단위로 삼은 저작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명말청초는 일종의 거대 담론의 시대였다고도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청대에는 국가가 주도하는 담론의 흐름도 있었다. 건륭제는 청초의 정복과정에서 명조의 신하였다가 투항하여 청조 지배에 협조한 자들이라든가 청에 저항하고 투쟁하다가 희생된 자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새롭게 하고자 했다. 이전의 평가 기준이 청조 정복에의 도움 여부라는 공리적인 측면이었다면 이제는 상황과 시대를 뛰어넘는 불변의 충절이라는 윤리적 측면이었다. 이 새로운 기준에 입각하여 건륭제는 『勝朝殉節諸臣錄』과 『貳臣傳』을 편찬하도록 신하들에게 명령했다. 충절을 절대적 가치 기준으로 삼는 청조 판 역사 재정비 사업이 본격화되어 투항자들은 이신으로 폄훼되고 항청 인물들은 순절자로 현창되었다. 건륭제는 왕조의 안정을 도모하려고 명말청초 인물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기준을 바꾸었다.
    본고는 명말청초의 거대담론, 청대의 국가주도의 담론과는 차원이 다른 우리 고장에서 발생한 우리지역의 역사를 어떻게 기록하고 반추해 가는가 하는 움직임에 주목하여 작성한 것이다. 우리 고장의 역사를 말한다는 의미에서는 거대 담론에 맞서는 미시담론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지방의 신사나 문인들이 역사를 기록한다는 의미에서는 국가주도의 담론에 맞선 민간주도의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팔십여 일간의 항청 투쟁 끝에 성이 함락되어 십여만 명의 주민이 청군에 모두 학살당했던 강소성 江陰縣에서는 특이하게도 청대 내내 신사(와 문인)들이 항청 수성 전투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신사들은 綱常과 節義를 지키려고 청에 저항하다 10만이 목숨을 잃은 강음인들의 충절을 밝히는 일이 자신의 사명이자 책임이라고 인식했다. 기록의 궁극적 목적은 강음인의 죽음과 희생을 충절로 현창하는 것이었다. 저술을 통해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縣志 간행을 통해서 縣이라는 공식적인 차원에서 강음인의 희생을 기록하고 정리했다. 기록의 궁극적인 목적은 희생자들을 충절의 사람으로 현창하려는 것이었는데 이런 움직임은 청대 강음현의 우리 고장 역사 정리 사업에서 일관되게 관통하는 큰 흐름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고는 명말청초의 거대담론, 청대의 국가주도의 담론과는 차원이 다른 우리 고장에서 발생한 우리지역의 역사를 어떻게 기록하고 반추해 가는가 하는 움직임에 주목하여 작성한 것이다. 우리 고장의 역사를 말한다는 의미에서는 거대 담론에 맞서는 미시담론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지방의 신사나 문인들이 역사를 기록한다는 의미에서는 국가주도의 담론에 맞선 민간주도의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본고를 통해서 거대담론, 국가주도 담론에 주목하여 연구하는 경향에서 벗어나 미시담론, 민간주도의 담론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연구 조류가 형성될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
    본고를 작성한 후에 역사학 관련 전문학술지에 발표하여 그 결과를 연구자들과 함께 공유할 것이다.
  • 색인어
  • 청대, 강음현, 항청, 신사, 문인, 강희, 건륭, 도광, 강음현지, ‘우리 고장 역사정리 사업’
  • 연구성과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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