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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조선 초 활자 인쇄의 선택과 활성화: 조선 초 활자 인쇄본들의 성격 분석과 기술변화를 중심으로
Selection and activation of type printing in the early Joseon Dynasty: A Study on the Character Analysis and Technology Changes of Printed Books in the Early Joseon Period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 #40;B유형& #41;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
연구과제번호 2021S1A5B5A17054875
선정년도 2021 년
연구기간 1 년 (2021년 09월 01일 ~ 2022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김화선
연구수행기관 전북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이 연구는 조선 초 활자 인쇄가 왜 선택되었고 어떻게 활성화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우리나라에서 활자 인쇄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관련 역사기록들을 통해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고려, 약 13세기 초부터 우리나라에서 활자 인쇄가 성행하고 있었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고, 고려시대의 활자 인쇄의 수준은 차치하더라도 고려시대에는 지방에서까지 활자 인쇄가 성행하였다는 점은 명백히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려조에 있었던 다양한 변란들을 통해 서적의 소실과 그에 대한 대안으로써 활자 인쇄의 활용을 설명하는 연구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고려시대부터 중앙 뿐 아니라 지방 사찰에서조차까지 활자 인쇄가 성행하였던 역사로 인해 조선에서도 활자 인쇄의 선택을 고려시대의 활자 인쇄 문화를 계승한 정도로 해석하기에는 다소 과소평가하는 면이 없지 않다. 조선 전시기를 두고 보았을 때 조선 초기의 활자 인쇄는 가장 성행하였고, 가장 활성화 되었던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고려의 활자 인쇄의 선택과 성행을 당시 여러 변란으로 설명하듯 조선 초의 활자 인쇄의 선택과 활성화를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조선 초 활자 인쇄를 선택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뚜렷한 내력을 찾아볼 수 없다. 고려 말 정도전은 서적포를 설치하고 동활자를 만들어서 모든 서적들을 인출하자고 제안한 것이나 태종이 주자소를 설치하면서 서적의 부족 문제를 제기한 것, 목판의 판각이 쉽게 훼손되는 것과 목판은 천하의 모든 서적을 인쇄해낼 수 없다는 점을 언급한 정도를 통해 활자 인쇄 선택 배경을 이해할 뿐이다.
    그런데 같은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던 중국의 상황을 보았을 때 조선의 활자 인쇄의 선택은 쉽사리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었다. 중국은 활자인쇄보다 목판인쇄를 훨씬 더 많이 활용하였다. 예측할 수 있듯이 한자를 활자로 주조하는 것도 어렵지만, 한 종류의 서적을 인출할 때 필요한 한자들을 구비하려면 최소한 10만자에서 많게는 30여만 자가 소요되고 이를 동(銅)으로 주조하기 위해서 소요되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또한 활자 인쇄는 인출하는 과정에서도 각 과정별로 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이미 목판인쇄에 적합한 인쇄 하부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목판인쇄에 적합한 먹과 제지술은 활자 인쇄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따라서 활자로 인쇄를 하기 위해서는 활자 인쇄에 적합한 제반 기술들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미 목판인쇄를 통한 출판사업이 자리를 잡고 있던 중국내 문화에서 새로운 기술로 갈아타는 것은 어려웠다.
    중국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활자 인쇄가 성행하기에는 조선도 별다를 바가 없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조선은 더욱더 활자 인쇄를 활성화시켰다. 조선의 태종은 내탕금을 내어 주자소를 설치하고 계미자를 만들었고 세종대에는 조선의 인쇄문화가 꽃피웠다고 말할 정도로 활자 인쇄가 활성화되었다.
    활자 인쇄를 선택하는 것은 중국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는 고려 말 이미 활자 인쇄를 선택하였었지만 관련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에 고려 말의 활자 인쇄 선택을 당대 있었던 여러 변란들을 통해 설명한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를 고려 활자 인쇄문화의 계승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 심지어 조선은 활자 인쇄를 더욱 더 강화시켰다.
    본 과제에서는 먼저 활자를 선택하게 된 요인들과 그것이 활성화될 수 있었던 요인들을 찾아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현재 전하는 기록에서는 그에 대한 내용들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통해 이 문제를 접근해보고자 한다. 먼저 중국에서 활자 인쇄가 성행하지 못했던 요인들을 분석해볼 것이다. 이 문제는 거꾸로 활자 인쇄가 원활히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제반 요건들이 갖추어져야 할 건인지에 대한 대략의 요소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는 조선 초기에 인쇄된 활자본들의 특징과 성격들을 분석해볼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당대 활자 인쇄를 어떠한 서적에 활용하였는지, 당대 위정자들과 신진사대부들은 활자 인쇄를 어떠한 수단으로 바라보았는지 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로는 활자 인쇄를 선택하고 가능하게 하고 나아가 활성화까지 이룩하는 데 기술적인 요소들은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필자는 중국의 활자 인쇄의 불활성화는 기술적인 요소들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즉 이는 조선 초 활자인쇄의 선택의 맥락에서도 활성화를 이룩하는데 있어서도 제반 기술 여건의 충족여부가 중요하게 작용하였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 기대효과
  • 첫째, 본 과제는 조선 초 활자 인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 특히, 선행연구들을 통해 이미 조선 초 어떠한 활자가 있었고, 어떠한 서적을 찍는데 활용했는지 등에 대한 내용은 많은 연구자들을 통해 제출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러한 결과물들이 어떠한 맥락에서 또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미비하다. 따라서 기존 연구들과 실록 기사들을 바탕으로 정량적으로 수행된 결과들을 분석하고 그 성격을 파악한 후 보여지는 특징적인 모습들은 조선 초 활자 인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간이 될 수 있다.
    둘째, 활자인쇄를 어떻게 활용하였는지를 살펴보기 위한 활자 인쇄본 서적들의 특성 분석은 다른 한편으로는 그간 활자인쇄의 활용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수 있다. 활자인쇄는 다품종 소량 인쇄에 적합하고, 거질의 인쇄에는 활용되지 않았으며, 활자인쇄의 선택에서도 유생들을 위한 서적 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되었다고 일반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본 연구를 통해 보여지는 조선 초 활자 인쇄본들의 특징적인 모습들은 그렇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활자 인쇄에 대한 인식은 근현대인들의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며, 당대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활자 인쇄는 다양한 서적의 신속한 인쇄에 의미를 두었다기보다는 시의적절하게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문서나 서적들을 인쇄하는 즉 국가 체제 질서 유지와 정비를 위해 필요한 서적들을 인출하려는 목적으로 활용되었다는 점도 보여줄 수 있다.
    셋째, 본 연구과제는 기년도에 제시된 연구와 함께 필자의 “조선 초 활자 인쇄술의 정착과 시스템화”라는 큰 연구 주제 아래로 묶이게 된다. 기년도부터 필자는 “조선 금속활자의 백미“갑인자”에 대한 평가의 의미 재고”의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기존의 갑인자에 대한 평가를 여러 각도에서 찾아보고 그것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이번에 제출하는 과제를 통해 조선 초 활자 인쇄를 바라보는 위정자와 신진사대부들의 활자 인쇄에 대한 인식과 활용 상황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기술적인 요소의 충족이 조선의 활자 인쇄의 활성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보여줄 것이다.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조선 초 활자 인쇄술의 정착과정과 그것이 시스템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자 한다. 시스템화라는 것은 인쇄술의 개량과 정착 나아가 인쇄 절차 및 제도적 보완이 이루어지는 것의 총체적인 것을 지칭하며, 이에 따라 후속 연구는 인쇄 기술의 정착과 인쇄의 절차 나아가 제도화까지 이루어지는 과정을 다루는 주제를 수행하려고 한다.
  • 연구요약
  • 본 과제에서는 먼저 활자를 선택하게 된 요인들과 그것이 활성화될 수 있었던 요인들을 찾아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필자는 먼저 중국에서 활자 인쇄가 성행하지 못했던 요인들을 분석해볼 것이다. 이 문제는 활자 인쇄가 원활히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제반 요건들이 갖추어져야 할 건인지를 찾아볼 수 있게 할 것이다. 두 번째로는 조선 초기에 인쇄된 활자본들의 특징과 성격들을 분석해볼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당대 활자 인쇄를 어떠한 서적에 활용하였는지, 당대 위정자들과 신진사대부들은 활자 인쇄를 어떠한 수단으로 바라보았는지 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로는 활자 인쇄를 선택하고 가능하게 하고 나아가 활성화까지 이룩하는 데 기술적인 요소들은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이는 조선 초 활자인쇄의 선택의 맥락에서도 활성화를 이룩하는데 있어서도 제반 기술 여건의 충족여부가 중요하게 작용하였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중국은 왜 활자 인쇄가 활성화되지 못했을까? 중국에서는 활자 인쇄가 발명되고 목활자를 개량했지만 활자인쇄는 주된 인쇄방법이 되지 못했다. 이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와 조선 초 활자 인쇄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에 대해 중국의 문자체계인 표의문자의 한계점, 활자 인쇄 과정에서 필요로 하는 다양한 기술적인 문제의 결함, 목판인쇄를 중심으로 하는 서적출판문화의 정착, 활자 인쇄의 1회성 원가가 너무 높은 점, 그리고 정부의 중시 여부에 따른 지원 등의 이유를 들고 있다. 그 중에서도 중국의 표의문자체계의 한계는 활자 인쇄 활성화에 치명적이었다고 평가하였다. 그런데 조선은 중국과 같은 표의 문자 체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활자 인쇄를 성공적으로 활성화시켰다. 조선의 활자 인쇄의 선택은 위정자들의 중시가 중요하게 작용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정부의 중시만으로 모든 요소들이 해결될 수는 없다. 기본적인 여건들이 충족되어야만 정부의 활자 인쇄 중시도 인쇄 기술의 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다. 이에 따라 중국의 활자 인쇄의 활성화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여지는 요소들이 조선에서는 어떻게 작용하였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은 활자 인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을까? 활자 인쇄를 선택하는 데에는 여러 요인들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 필자는 당대 인쇄된 활자본들을 분석한다. 이러한 분석이 유의미할 수 있는 것은 조선초에 인쇄된 활자본들의 성격과 특징들을 통해 당대 위정자를 비롯한 신진사대부들이 활자인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활용했는지를 추정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먼저, 『실록』에서 주요 용어 검색과 분류색인을 통해 “인쇄”, “서책”분류에 해당하는 기사들을 전수 조사한다. 두 번째 방법으로는 『실록』에 등장하지 않는 활자인쇄본들의 목록을 선행연구자들의 성과를 통해 목록 리스트를 만든다. 이를 분석하여 어떠한 서적들이 인출되고 반사되었는지 조사하고 경사자집의 분류법에 근거하여 분류 및 분석할 것이다. 이는 당시 어떠한 서적들을 활자 인쇄로써 인출하였는지를 살펴보는 동시에 활자 인쇄의 선택이 비단 유생들의 서적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었는가에 대한 결과도 얻어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러한 조사와 분석의 결과는 조선 초 활자 인쇄본들의 일련의 특징들과 성격들을 담게 될 것이며 이로써 당대 위정자와 신진사대부들이 활자 인쇄를 왜 선택했는지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요컨대 조선 초 활자본들의 성격과 특징의 분석은 당대 위정자와 신진사대부들이 활자 인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활용했는지를 추정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다.
    활자인쇄의 선택과 활성화를 위해서는 어떠한 기술이 필요했고, 충족되었는가? 마지막으로 조선 초 활자 인쇄의 선택을 하고 활성화를 이룩하는데 있어서 기술적인 요소들은 어떻게 작용하였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앞서 중국에서 활자인쇄가 활성화되지 못한 요인들 중 기술적인 요소들의 부재가 그러한 결과에 이르게 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결국 조선에서 활자 인쇄가 선택되고 활성화되는데 있어서 활자 인쇄 제반 여건들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다양한 기술적 문제의 결함이 중국에서 활자 인쇄가 활성화되지 못한 이유들 중 가장 큰 요인이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이를 조선의 활자 인쇄 활성화의 문제에 적용시켜보고자 한다. 특히 목판인쇄에 적합한 종이와 먹을 보유하고 있었던 중국에 비해 조선은 두껍고 질긴 닥지와 활자 인쇄에 적합한 먹을 보유가 활성화로 이어졌다는 점을 보일 것이다. 그리고 활자를 주조하는 방식의 정착과 조판술의 개량이 결국 활자 인쇄의 활성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려고 한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이 연구는 조선 초 금속활자 인쇄기술을 선택하게 된 계기와 활성화된 사항을 『조선왕조실록』에 드러난 기사와 조선 초기에 인출된 금속활자 인쇄본들의 분석을 통해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활자 인쇄의 개념을 처음으로 시작한 것은 중국이었지만, 중국과 문자체계를 같이 하고 있었던 조선에서 금속활자 인쇄를 선택하고 활성화시켰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활자 인쇄가 정확하게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확실하게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대체적으로 약 13세기 초부터 활자 인쇄가 성행하였던 것으로 본다. 고려의 활자 인쇄 사례와 실물 활자는 그 인쇄의 수준은 차치하더라도 중앙은 물론이고 지방에서도 활자 인쇄가 실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보여준다. 이와 같은 고려의 활자 인쇄의 선택 계기에 대해서는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금속활자 인쇄가 가장 활성화되었다고 평가받는 조선 역시 활자 인쇄의 선택 계기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보니, 후대의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금속활자 인쇄를 선택한 계기가 금속활자가 지닌 장점 때문이라고 해석하였다. 활자 인쇄는 목판에 비해 다품종 소량인쇄에 적합한 방법이라고 여겼다던가, 활자로 인쇄하면 신속하게 서적을 인쇄해 낼 수 있기 때문에 주목을 했던 것이라고 보는 등 조선 건국 초기에 직면했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조선의 금속활자의 선택을 이해해온 면이 없지 않다.
    이에 따라 본 글에서는 조선 초기 금속활자 인쇄기록과 인쇄본 서적들을 분석하여 조선 초기 금속활자가 왜 선택되었고 어떻게 활용되었는지에 대해 분석하였다. 그 결과 조선 초 위정자들의 금속활자 인쇄에 대한 유용성은 고려 때 금속활자를 인쇄해 본 경험이 유의미하게 작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세종 대까지의 『조선왕조실록』의 금속활자본 기사와 지금까지 조사된 금속활자 인쇄본 서적의 목록을 통해 조선 초 금속활자 인쇄의 특징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본 연구의 결과를 통해 최소한 조선 초기에 금속활자 인쇄는 조선 초 체제 질서를 마련하는데 필요한 모든 범위 내에서 활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선행연구자들의 논의와 같은 조선의 금속활자 인쇄는 다품종소량인쇄에 적합했다고 보는 시각은 최소한 조선 초기의 상황에는 대입할 수 없다는 점을 재고하면서 조선 초기의 금속활자는 필요한 모든 성격과 분량의 서적을 인쇄해낼 수 있는 기술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영문
  • This study attempted to find answers to the following two questions through the analysis of early Joseon records(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朝鮮王朝實錄) and metal type printed books. First, why did you choose metal type technology? Second, what characteristics does metal type printing have in the early Joseon Dynasty? It was China that first started the concept of type printing, but it is undeniable that metal type printing was selected and activated in Joseon, which had a writing system with China.
    It is difficult to determine exactly when type printing began in Korea, but in general, type printing has been prevalent since the early 13th century. The case of type printing in Goryeo and the actual type fully show that type printing was being carried out not only in the center but also in the provinces, regardless of the level of printing. There are no related records on the selection for such metal type printing technology of Goryeo.
    In Joseon, where metal type printing is considered the most active, there is no record of what was the reason for choosing type printing. Therefore, among preceding researchers, it was interpreted that the reason for choosing metal type printing was due to the advantages of metal types. In short, type printing was considered a suitable method for printing a variety of small-volume printing compared to woodblocks. Or, if printed in type, the book could be printed quickly. In other words, the choice of metal type printing in Joseon was understood in the situation of the times faced in the early days of Joseon's founding.
    Accordingly, in this study, metal type printing records and printed books in the early Joseon Dynasty were analyzed to analyze why metal types were selected and how they were used. The experience of printing metal types during the Goryeo Dynasty was significant for Joseon rulers. In addition, the metal type printing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s Annals and the list of metal type printing books in the early Joseon Dynasty showed the characteristics of metal type printing in the early Joseon Dynasty.
    In conclusion, it could be seen that at least metal type printing in the early Joseon Dynasty was used within all ranges necessary to prepare the system order in the early Joseon Dynasty. In other words, the choice of metal type printing in the early Joseon Dynasty was not because it was suitable for small-volume printing of various types. It can be seen that the discussion of previous researchers needs to be revised, and at least it cannot be applied to the situation in the early Joseon Dynasty. Metal type in the early Joseon Dynasty was used as a technology that could print all books regardless of the nature or amount of book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이 연구는 조선 초 금속활자 인쇄기술을 선택하게 된 계기와 활성화된 사항을 『조선왕조실록』에 드러난 기사와 조선 초기에 인출된 금속활자 인쇄본들의 분석을 통해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활자 인쇄의 개념을 처음으로 시작한 것은 중국이었지만, 중국과 문자체계를 같이 하고 있었던 조선에서 금속활자 인쇄를 선택하고 활성화시켰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활자 인쇄가 정확하게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확실하게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대체적으로 약 13세기 초부터 활자 인쇄가 성행하였던 것으로 본다. 고려의 활자 인쇄 사례와 실물 활자는 그 인쇄의 수준은 차치하더라도 중앙은 물론이고 지방에서도 활자 인쇄가 실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보여준다. 이와 같은 고려의 활자 인쇄의 선택 계기에 대해서는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금속활자 인쇄가 가장 활성화되었다고 평가받는 조선 역시 활자 인쇄의 선택 계기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권근의 계미자 ‘주자발’문에 태종이 말하기를 “판각(板刻)은 쉽게 닳아서 망가질 뿐 아니라, 세상의 책을 모조리 간행할 수도 없다.”라는 구절이 있고, 이와 같은 예를 통해 목판인쇄가 가진 한계를 금속활자로써 극복하고자 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보니, 후대의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금속활자 인쇄를 선택한 계기가 금속활자가 지닌 장점 때문이라고 해석하였다. 활자 인쇄는 목판에 비해 다품종 소량인쇄에 적합한 방법이라고 여겼다던가, 활자로 인쇄하면 신속하게 서적을 인쇄해 낼 수 있기 때문에 주목을 했던 것이라고 보는 등 조선 건국 초기에 직면했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조선의 금속활자의 선택을 이해해온 면이 없지 않다.
    이에 따라 본 글에서는 조선 초기 금속활자 인쇄기록과 인쇄본 서적들을 분석하여 조선 초기 금속활자가 왜 선택되었고 어떻게 활용되었는지에 대해 분석하였다. 그 결과 조선 초 위정자들의 금속활자 인쇄에 대한 유용성은 고려 때 금속활자를 인쇄해 본 경험이 유의미하게 작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세종 대까지의 『조선왕조실록』의 금속활자본 기사와 지금까지 조사된 금속활자 인쇄본 서적의 목록을 통해 조선 초 금속활자 인쇄의 특징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첫째, 금속활자 인쇄는 서적의 성격에 따라 선택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조선 초기의 금속활자 인쇄는 서적의 성격을 분간하지 않고 인쇄에 활용이 되었다. 즉 서적의 성격은 인쇄 방법의 선택에서 중요하게 작용한 요인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둘째, 금속활자 인쇄의 선택은 서적의 분량에 의해 좌우된 것도 아니었다. 조선 초기에는 서적의 분량에 상관없이 금속활자로 인쇄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금속활자 인쇄는 분량이 많은 서적에 더 특화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선 초기의 다권본 서적의 활자 인쇄는 목판 인쇄보다 더 활용성이 높이 평가된 것으로 생각된다.
    셋째, 금속활자 인쇄는 서적을 다량 찍어내는 데에도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서적의 분량이 목판과 활자를 선택하는 기준이 되지는 못했다.
    넷째, 활자 인쇄는 개별 관청과 백성들을 위한 서적과 문서 인쇄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다섯째, 판본이 없거나 서적이 한권 밖에 없는 경우에는 금속활자 인쇄가 선택되었다.
    여섯째, 조선 초 금속활자 인쇄 활용의 예를 보면 갑인자보다는 경자자의 활용예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곱 번째, 금속활자는 저본을 생산하는 데에도 활용되었다.
    본 연구의 결과를 통해 최소한 조선 초기에 금속활자 인쇄는 조선 초 체제 질서를 마련하는데 필요한 모든 범위 내에서 활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선행연구자들의 논의와 같은 조선의 금속활자 인쇄는 다품종소량인쇄에 적합했다고 보는 시각은 최소한 조선 초기의 상황에는 대입할 수 없다는 점을 재고하면서 조선 초기의 금속활자는 필요한 모든 성격과 분량의 서적을 인쇄해낼 수 있는 기술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첫째, 본 과제에서 수행한 연구 성과를 확산시키기 위해 학회에서 발표하고, 논문을 투고 할 것이다. 2023년 8월 21~25일 독일의 Frankfurt에서 개최되는 동아시아과학사학회(ICHSEA)에서 발표를 할 예정이다. 서양 금속활자 인쇄의 본 고장이자 중심이라고 볼 수 있는 독일의 Frankfurt에서의 발표는 조선의 금속활자 인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져올 것이며, 서양의 여러 학자들과 조선의 금속활자 인쇄에 대해 논의해 보는 중요한 자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본 논문을 전문학회지에 투고할 것이다.
    둘째, 본 연구과제에서 수행한 연구의 결과는 2020년도 선정된 연구결과와 함께 “조선 초 금속활자 인쇄기술의 시스템화”라는 필자의 큰 연구 주제 아래로 묶이게 된다. 본 과제를 통해 조선 초 금속활자 인쇄를 바라보는 위정자와 신진사대부들의 기술인식과 활용 상황을 살펴보았다. 필자는 조선의 금속활자 인쇄가 조선시대 내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조선 초기에 금속활자 인쇄기술의 체제를 마련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본 과제는 필자가 주장하는 ‘조선 초기에 금속활자 인쇄기술 체제가 성립되었다’는 과정을 설명하는데 주요한 동기를 설명하는 근간이 될 수 있었다. 나아가 본 논문에서 다루었던 내용 중 일부는 향후 연구과제로 활용할 예정이다. 예컨대, 활자의 저본 이용 사례는 이후 연구를 계획하고 있는 조선 후기의 목판 연구와 연결하여 활용할 예정이다.
    셋째, 연구 과정에서 수집한 자료와 정리한 내용들은 ‘과학사’,‘한국과학기술사’또는 “한국과학문화재”와 같은 교양이나 전공강의에 적극 활용할 것이다. 성과가 반영된 강의는 수강생들로 하여금 조선 초 금속활자의 인쇄의 선택에 어떠한 요인들이 작용하였는지, 그리고 조선이 금속활자 인쇄기술을 조선시대 내내 지속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계기는 무엇 때문이었는지를 이해시키는데 기여할 것이다. 또한 조선 초 금속활자 인쇄기술의 선택에 대한 편중된 시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나아가 이는 우리의 금속활자 인쇄에 대한 후속세대들의 시야를 넓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 색인어
  • 금속활자, 인쇄, 조선 초, 세종, 금속활자인쇄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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