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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풍수신앙 연구-유교와의 상호관계를 중심으로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조선조 풍수신앙 연구-유교와의 상호관계를 중심으로 | 2004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이화(서울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A00015
선정년도 2004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6년 04월 12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6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1. 본 논문은 조선조 풍수신앙이 가지고 있던 종교문화적 위상을 고찰하려고 노력하였다. 아직까지도 풍수가 길흉화복을 단지 선천적인 지리적 조건에만 종속시킨다고 비판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풍수관은 실제 풍수가 조선사회에서 기능하고 논의된 문화적 실상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을 결여하고 있다. 풍수는 기본적으로 공간에 대한 특정한 사유방식일 뿐만 아니라, 공간과 인간의 조화로운 관계에 대한 고뇌를 담고 있는 종교적 신앙의 성격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단지 사변적인 사유에 머물지 않고 삶의 방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풍수가 절실하게 신앙되어온 역사적 현실이 존재한다. 특히 조선시대는 유교라는 정통론적 종교문화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중심문화와의 긴장과 공존이라는 상호관계 속에서 풍수신앙이 존속했다. 이러한 역사적 현실에 함축되어 있는 사람들의 소망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풍수신앙이 가진 종교문화적 위상을 검토해야 한다. 본 논문은 결국 조선조의 풍수신앙이 가진 중층적인 문화적 위상과 역사적 변천양상의 분석을 통해 풍수신앙을 공감적으로 이해하려는 학문적 노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2. 종교문화의 요소라는 차원에서 보면, 풍수는 그 자체로 고전적인 이상과 기복적인 욕망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氣라는 보편적 요소가 천지만물로 다양하게 현현하며, 공간과 인간이 상호영향을 주고받는 것으로 이해하는 유기체적 사유가 풍수에는 담겨있다. 이러한 유기체적 사유로 인해 인간은 주어진 세계의 공간에 의해 선험적으로 조건지워지는 동시에 주체적인 인식과 의지를 통해 공간을 변형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풍수에는 운명론적인 요소와 더불어 인간주체적인 변형 요소가 공존한다.
    3. 유교적 禮敎문화에 기초한 조선조 사회에서 풍수에 대한 유교 지식인들의 태도는 양가적이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풍수를 믿을 수 없는 雜術이나 左道로 보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풍수를 완전히 제거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양가적 태도는 "믿을 수도 없고 폐할 수도 없다(不可信, 不可廢)."는 명제로 표현된다. 유교적 명분과 원리에 벗어나는 방향으로 풍수가 전개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적인 영역에서 풍수는 權道의 위상을 지니면서 제한적인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권도는 유교적 常道의 원칙이 그대로 통용될 수 없는 상황에서 제한적으로 인정되는 變通의 영역이다. 그리고 유교지식인들은 성리학적 가치에 비추어 풍수를 새롭게 수용하는 담론을 구성하였다. 그들은 우선 인간의 禍福이 공간적 조건에 기계적으로 종속된다는 사고를 가장 비판한다. 화복은 人事의 영역으로서 스스로 초래하는 것(自取)이지 地理나 地氣에 의해 결정되지 않으며, 복을 얻으려면 덕을 쌓아야 한다(積德)는 논리가 그것이다. 부모나 조상의 시신을 편안히 모시려는 ‘어질고 효성스런 마음(仁孝之心)’에서 적당한 묘지를 구하는 것은 유교적인 명분에서 당연히 인정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땅의 美醜를 고려하는 수준이었지 ‘追吉避凶’의 욕망을 목적으로 삼아서 정당화된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조선조 풍수는 인간주체적인 정성과 반성의 차원에서 성리학의 고전적 이상을 갖고 있었다.
    4. 담론 수준의 정당화 논리와 별개로 조선조에서 풍수는 일상의 실용적인 필요에 따라 운용되었다. 가령 국가차원에서 수도, 궁궐이나 왕릉의 입지를 선정하는 과정에 절대적인 기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유교적 정통론에 기반한 조선조에서 국가차원의 풍수는 경국책의 방편으로 한정되어 운용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고려시대에 불교라는 중심적 종교문화와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정치적 정통성을 담당한 풍수의 위상이 조선시대에 이르러 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국가에서 陽宅 풍수가 주로 운용된 것에 비해 조선의 民은 묘지라는 陰宅 위주의 풍수를 향유하였다. 게다가 조선후기로 갈수록 祈福에 기반한 吉地 확보의 욕망 등으로 인해 山訟이 빈발하는 상황에 놓였다. 더구나 墳山을 얻기 위한 山訟 자체가 기복 뿐만 아니라 가문이데올로기의 핵심인 孝에 의해 정당화되기도 하였다. 풍수가 民의 신념으로 내면화되면서 풍수적 명당과 그 주인공에 대한 각종 설화들이 생산되고 유포된다. 이러한 문화적 정황은 조선후기에 풍수가 단지 국가적 기능에 한정되지 않고 개인적 신념의 영역으로 정착되었음을 말해준다. 다만 순수한 고전적 이상 차원보다는 發福하려는 욕망에 기초한 묘지 중심의 풍수가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이처럼 고전적 이상과 기복적 열망을 동시에 지닌 조선의 풍수신앙은 기본적으로 權道의 위상으로 존재하면서 유교문화와 역동적인 상호관계 속에서 문화양태를 변화시켰다.
  • 영문
  • 1. In this dissertation, I tried to look at Feng-Shui Belief(風水信仰) in religious and cutural status. So far, some critics point out Feng-Shui is involved in the good/bad luck & fortune/misfortune(吉凶禍福). This point of view, however, misses the whole picture of this theory leaving out its cultural side which was implemented and discussed during Chosun Dynasty. Basically, Feng-Shui is not only about specific way of the thinking of spaces we live in, but also about religious deliberation of the harmonious relation between the spaces and human beings. After all, this dissertation is a product of scientific yearning for understan ding sympathetically Feng-Shui Belief throughout analysis the cultural topology and the historical stream of Feng-Shui Belief in Chosun Dynasty.
    2. In the religious cultural point of view, Feng-Shui has both classical ideal and desire to be fortunate in it. Feng-Shui contains the organic thinking with understa nding in several representation of general element, Gi(氣) and an influencial Impact of space-human about all creatures in the world. By this organic thinking, our future is transcendentally destined by the space we are living in, and at the same time, they also believed we can also change it with our own will. Therefore, Feng- Shui has both fatalistic idea and human-subjective transformational element.
    3. In a Confucian society, scholars had two different ideas about Feng-Shui. They treated Feng-Shui as heterodoxy(左道) while at the same time they knew it can't be totally removed from our life. This irony means, "we can't believe in it nor remove it from our life." Since Chosun Dynasty only admitted theories that goes with Confucian, they only approved the restrictive justness of Feng-Shui with a topology of a way of adapting to exigent circumstances(權道). A way of adapting to exigent circumstances(權道) is the scope of flexibility(變通), the restrictively acceptable scope in the unacceptable context of an unchanging, eternal, normal way(常道) in confucianism. And So, Confucianists composed new discourses and Feng-Shui was translated in a new way. First of all, they criticized the idea that our life is destined by the space shape. Our fortune and misfortune is not destined by the space shape or its influence, but we can attain or given them through our well-behaviors and good deed through our life. On the other hand, to bury our parents or ancestor's body into a nice place, Feng-Shui was approved. This, however, is only about the beauty of the space shape, not about fortune or misfortune. As we can see here, Feng-Shui both contains humanism and classical ideal of Sung-Ri-Hak(性理學).
    4. Feng-Shui also had practical use as well. For example, it's been the crucial method when the state had to locate the places for the palace, capital or loyal tomb. In Confucian Chosun Dynasty, Feng-Shui was limitedly used to statecraft. This tells that Feng-Shui which was as equal as Buddism state religion in Goryeo Dynasty(高麗) had been lost its status since the beginning of the new era, Chosun. Feng-Shui was a standard when the State located places for houses, and for the people, they mostly depended on it to find the best places for the graves of the family members. Furthermore, in the late Chosun Dynasty, because of their ambition to take the family's Tomb-mountain(Bun-san:墳山), there happened a lot of lawsuits, the Mountain Lawsuits (San-Song:山訟). As it wasn't only for the well-being of the family but necessary for the most important ideology for the honor of a family, filial piety, it had been justified legally. After all, Feng-Shui which has both classical ideal and human being's desire to be fortunate, became a part of Confucian culture, a topology of a way of adapting to exigent circumstances(權道) and at the same time influenced its development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1. 본 논문은 조선조 풍수신앙이 가지고 있던 종교문화적 위상을 고찰하려고 노력하였다. 아직까지도 풍수가 길흉화복을 단지 선천적인 지리적 조건에만 종속시킨다고 비판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풍수관은 실제 풍수가 조선사회에서 기능하고 논의된 문화적 실상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을 결여하고 있다. 풍수는 기본적으로 공간에 대한 특정한 사유방식일 뿐만 아니라, 공간과 인간의 조화로운 관계에 대한 고뇌를 담고 있는 종교적 신앙의 성격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단지 사변적인 사유에 머물지 않고 삶의 방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풍수가 절실하게 신앙되어온 역사적 현실이 존재한다. 특히 조선시대는 유교라는 정통론적 종교문화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중심문화와의 긴장과 공존이라는 상호관계 속에서 풍수신앙이 존속했다. 이러한 역사적 현실에 함축되어 있는 사람들의 소망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풍수신앙이 가진 종교문화적 위상을 검토해야 한다. 다른 학문분과에서 수행된 기존의 풍수연구는 풍수 자체를 단편적이고 고립적으로 파악함으로써 풍수의 종교문화적 위상을 총체적이고 역사적인 방식으로 규명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풍수를 삶의 전 영역을 포괄하는 종교문화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이다. 본 논문은 결국 조선조의 풍수신앙이 가진 중층적인 문화적 위상과 역사적 변천양상의 분석을 통해 풍수신앙을 공감적으로 이해하려는 학문적 노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2. 유교적 禮敎문화에 기초한 조선조 사회에서 풍수에 대한 유교 지식인들의 태도는 양가적이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풍수를 믿을 수 없는 雜術이나 左道로 보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풍수를 완전히 제거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양가적 태도는 "믿을 수도 없고 폐할 수도 없다(不可信, 不可廢)."는 명제로 표현된다. 유교적 명분과 원리에 벗어나는 방향으로 풍수가 전개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적인 영역에서 풍수는 權道의 위상을 지니면서 제한적인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권도는 유교적 常道의 원칙이 그대로 통용될 수 없는 상황에서 제한적으로 인정되는 變通의 영역이다. 그리고 유교지식인들은 성리학적 가치에 비추어 풍수를 새롭게 수용하는 담론을 구성하였다. 그들은 우선 인간의 禍福이 공간적 조건에 기계적으로 종속된다는 사고를 가장 비판한다. 화복은 人事의 영역으로서 스스로 초래하는 것(自取)이지 地理나 地氣에 의해 결정되지 않으며, 복을 얻으려면 덕을 쌓아야 한다(積德)는 논리가 그것이다. 부모나 조상의 시신을 편안히 모시려는 ‘어질고 효성스런 마음(仁孝之心)’에서 적당한 묘지를 구하는 것은 유교적인 명분에서 당연히 인정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땅의 美醜를 고려하는 수준이었지 ‘追吉避凶’의 욕망을 목적으로 삼아서 정당화된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조선조 풍수는 인간주체적인 정성과 반성의 차원에서 성리학의 고전적 이상을 갖고 있었다.
    3. 담론 수준의 정당화 논리와 별개로 조선조에서 풍수는 일상의 실용적인 필요에 따라 운용되었다. 가령 국가차원에서 수도, 궁궐이나 왕릉의 입지를 선정하는 과정에 절대적인 기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유교적 정통론에 기반한 조선조에서 국가차원의 풍수는 경국책의 방편으로 한정되어 운용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고려시대에 불교라는 중심적 종교문화와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정치적 정통성을 담당한 풍수의 위상이 조선시대에 이르러 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국가에서 陽宅 풍수가 주로 운용된 것에 비해 조선의 民은 묘지라는 陰宅 위주의 풍수를 향유하였다. 게다가 조선후기로 갈수록 祈福에 기반한 吉地 확보의 욕망 등으로 인해 山訟이 빈발하는 상황에 놓였다. 더구나 墳山을 얻기 위한 山訟 자체가 기복 뿐만 아니라 가문이데올로기의 핵심인 孝에 의해 정당화되기도 하였다. 풍수가 民의 신념으로 내면화되면서 풍수적 명당과 그 주인공에 대한 각종 설화들이 생산되고 유포된다. 이러한 문화적 정황은 조선후기에 풍수가 단지 국가적 기능에 한정되지 않고 개인적 신념의 영역으로 정착되었음을 말해준다. 다만 순수한 고전적 이상 차원보다는 發福하려는 욕망에 기초한 묘지 중심의 풍수가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이처럼 고전적 이상과 기복적 열망을 동시에 지닌 조선의 풍수신앙은 기본적으로 權道의 위상으로 존재하면서 유교문화와 역동적인 상호관계 속에서 문화양태를 변화시켰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이 연구를 계기로 조선조 전반의 종교문화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 색인어
  • 풍수신앙, 종교문화적 위상, 길흉화복, 고전적인 이상, 기복적인 욕망, 乞靈, 追吉避凶, 左道, 常道, 權道, 墳山, 山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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