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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20세기 중반 洞契와 마을자치 - 전남 長興郡 蓉山面 語西里 사례를 중심으로 -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19세기 후반~20세기 중반 洞契와 마을자치 - 전남 長興郡 蓉山面 語西里 사례를 중심으로 - | 2004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이용기(서울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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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번호 A00002
선정년도 2004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7년 04월 30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7년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이 논문은 전남 장흥군 용산면 어서리 동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중반에 걸친 근대로의 이행과 그 제도화 과정에서 마을의 자치적 운영이 국가의 지배력에 대응하고 변화하는 양상을 파악하려는 연구이다. 본고에서 동계를 분석대상으로 삼는 이유는 동계가 마을의 공동체적 질서가 제도화된 조직체이자, 마을의 자율적 운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마을자치조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계를 통해 마을자치의 실상과 그 변화 양상을 파악하는 것은 국가의 지배와 마을/농민의 자율성이라는 두 측면이 어떻게 맞물리고 길항하는가 하는 점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어서리 동계는 부세대응의 목적에서 자연촌을 범위로 1838년에 중수되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어서리 동계 운영의 실상을 보면, 부세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공동체적 결속을 강화시켰으며, 중수 당시에 표방했던 신분적 질서는 상당정도 약화되었다. 또한 동계의 운영방식은 동민들의 다수가 동계 운영의 책임과 권리를 공유하는 경향을 띠었다. 어서리 동계는 19세기 후반에 기존의 신분지배적 동계의 성격에서 벗어나 생활공동체적 성격의 동계로 전화되었으며, 이는 동계가 마을자치조직으로 정립되었음을 의미했다.
    어서리는 식민지기에 근대적 면행정 체제에 편입되었지만, 그 영향력에 일방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다. 1930년대 중반까지도 식민권력은 모든 마을의 자율적 질서를 해체시킬 정도가 아니었으며, 어서리는 식민권력에 의해 강요되는 관료적 질서에 거리를 두면서 동계를 중심으로 한 마을자치를 지속시켰다. 그렇다고 어서리의 대응이 정태적인 것만은 아니어서, 노동력의 공동판매(공동노동)나 동계 운영에서의 효율성 추구 등 근대적 질서를 나름대로 수용하는 면도 있었다. 결국 어서리는 근대로의 전환이라는 사회변동에 대하여 권력이 규정하는 대로가 아니라, 나름의 독자적인 권위체계(동계·동제)를 통해 자율적으로 적응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일제말 전시동원체제가 가동되면서 어서리는 마을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권력의 힘에서 벗어날 여지가 구조적으로 봉쇄되었다. 어서리는 전시동원체제에 직면하여 동계를 중심으로 작동하던 공동체적 결속을 통해 위기의 순간을 함께 넘어서고자 했다. 그러나 동계는 전시동원의 부담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효율성과 ‘공동운명’이라는 동원의 논리와 맞물리면서 행정력에 밀착·포섭되어 갔다. 해방은 마을 단위까지 장악해 들어오던 동원체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지만, 국민국가 건설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과 대립의 와중에서 그 가능성은 이내 새로운 통제체제의 구축으로 대체되었다. 해방후의 사회적 갈등과 곧이어 등장한 통제체제의 억압, 그리고 한국전쟁을 경과하면서 어서리는 내적 균열을 보였고 동계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적 결속력을 잃어갔다.
    어서리 동계는 일제말에서 해방후로 이어지는 동원과 통제의 부담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활력이 소진되었으며, 한국전쟁을 계기로 마을 내의 위상을 재정립하게 된다. 1950년대부터는 동계가 마을의 행정적 차원의 업무와 부담에서 손을 뗀 것이다. 이제 동계는 마을자치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던 이전과 달리 마을운영의 중심축을 이장 중심의 마을행정 영역으로 넘기고 마을공동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재조정하였다. 그럼에도 이장을 중심으로 마을운영이 이루어지는 저변에는, 항상 드러나지는 않지만 현실의 질서를 뒷받침하는 마을의 공동체적 질서가 있었다. 그리고 동계는 그러한 질서의 담지자이자 마을공동체의 최종적인 안전망이었다.
  • 영문
  • This research aims to understand the characteristics and the change of the village autonomy during the modernization process from the late 19th century to the mid-20th century, through the case study on Dong-gye(洞契) in Junranam-do Janghung-gun Yongsan-myun Usur-ri(全羅南道 長興郡 蓉山面 語西里). Dong-gye was the institutionalized organization of communal order of the village and the central organization for village autonomy. Therefore we can understand the aspects how the village/peasants autonomy engaged and conflicted with the dominance of the state, if we could grasp the situation and the changing process of the self-governing management of village through analyzing Dong-gye.
    Dong-gye of Usur-ri was re-established in 1838 for the purpose of coping with the imposition of taxes on the village. Usur-ri Dong-gye strengthened communal unity in the course of performing its common duties of villagers and relieved the distinction of rank and the status hierarchy through late 19th century. And the most of villagers shared the right and duty on Dong-gye. It means that Usur-ri Dong-gye which had been the local organization to control the lower classes by high classes(Sa-jok, 士族) was transformed to the organization for village autonomy through late 19th century.
    Usur-ri was included within the modern administrative system of local level, that is Myun(面), but it was never incorporated in that system and power through one-sided process. The colonial authorities could not dissolve the autonomous order in every villages up to the mid-1930's. And Usur-ri kept its distance to the official order, but maintained village autonomy operated by Dong-gye. However Usur-ri accepted modern order in some aspects, especially the pursuit of efficiency in operating Dong-gye. Usur-ri was adapted to the transition stage to modern period through the self-controled process with independent authority system(Dong-gye and village ritual), but not in the course controled by the colonial authorities.
    From 1938, the mobilizing system for the total war started to work, and Usur-ri could not sneak away from the state power which was infiltrating into the village. Usur-ri intended to overcome the burden of the mobilizing system in the way of communal unity centered around Dong-gye. But Usur-ri Dong-gye was joined with and included in the administrative system in the course of coping with the burden of the mobilizing system through the logic of efficiency and 'common destiny' that was the logic of villagers and also of the colonial authorities. In 1945 Japanese colonial system was broken down, but the authoritarian control system was re-established before long. Usur-ri exposed internal crack and went to lost the power of communal unity centered around Dong-gye in the course of going through social conflict after the liberation in 1945, re-established control system, and the Korean War.
    After the Korean War in 1950, Usur-ri Dong-gye lost its dynamics and refixed its status and role in the village. It got off its hand from the administrative realm and burden of the village. Dong-gye, which had performed the core role in village autonomy, transferred the central axis of village autonomy to the administrative line in the village, and readjusted its role to support village community. Though the village administration was performed under the control of village officer(I-jang, 里長), there was a communal order of the village at the back of the village administration which did not always appear on the surface but support the external order. Dong-gye embodied that internal communal order of the village and the conclusive safety net of village community.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이 논문은 전남 장흥군 용산면 어서리 동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중반에 걸친 근대로의 이행과 그 제도화 과정에서 마을의 자치적 운영이 국가의 지배력에 대응하고 변화하는 양상을 파악하려는 연구이다. 본고에서 동계를 분석대상으로 삼는 이유는 동계가 마을의 공동체적 질서가 제도화된 조직체이자, 마을의 자율적 운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마을자치조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계를 통해 마을자치의 실상과 그 변화 양상을 파악하는 것은 국가의 지배와 마을/농민의 자율성이라는 두 측면이 어떻게 맞물리고 길항하는가 하는 점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어서리 동계는 부세대응의 목적에서 자연촌을 범위로 1838년에 중수되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어서리 동계 운영의 실상을 보면, 부세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공동체적 결속을 강화시켰으며, 중수 당시에 표방했던 신분적 질서는 상당정도 약화되었다. 또한 동계의 운영방식은 동민들의 다수가 동계 운영의 책임과 권리를 공유하는 경향을 띠었다. 어서리 동계는 19세기 후반에 기존의 신분지배적 동계의 성격에서 벗어나 생활공동체적 성격의 동계로 전화되었으며, 이는 동계가 마을자치조직으로 정립되었음을 의미했다.
    어서리는 식민지기에 근대적 면행정 체제에 편입되었지만, 그 영향력에 일방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다. 1930년대 중반까지도 식민권력은 모든 마을의 자율적 질서를 해체시킬 정도가 아니었으며, 어서리는 식민권력에 의해 강요되는 관료적 질서에 거리를 두면서 동계를 중심으로 한 마을자치를 지속시켰다. 그렇다고 어서리의 대응이 정태적인 것만은 아니어서, 노동력의 공동판매(공동노동)나 동계 운영에서의 효율성 추구 등 근대적 질서를 나름대로 수용하는 면도 있었다. 결국 어서리는 근대로의 전환이라는 사회변동에 대하여 권력이 규정하는 대로가 아니라, 나름의 독자적인 권위체계(동계·동제)를 통해 자율적으로 적응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일제말 전시동원체제가 가동되면서 어서리는 마을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권력의 힘에서 벗어날 여지가 구조적으로 봉쇄되었다. 어서리는 전시동원체제에 직면하여 동계를 중심으로 작동하던 공동체적 결속을 통해 위기의 순간을 함께 넘어서고자 했다. 그러나 동계는 전시동원의 부담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효율성과 ‘공동운명’이라는 동원의 논리와 맞물리면서 행정력에 밀착·포섭되어 갔다. 해방은 마을 단위까지 장악해 들어오던 동원체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지만, 국민국가 건설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과 대립의 와중에서 그 가능성은 이내 새로운 통제체제의 구축으로 대체되었다. 해방후의 사회적 갈등과 곧이어 등장한 통제체제의 억압, 그리고 한국전쟁을 경과하면서 어서리는 내적 균열을 보였고 동계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적 결속력을 잃어갔다.
    어서리 동계는 일제말에서 해방후로 이어지는 동원과 통제의 부담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활력이 소진되었으며, 한국전쟁을 계기로 마을 내의 위상을 재정립하게 된다. 1950년대부터는 동계가 마을의 행정적 차원의 업무와 부담에서 손을 뗀 것이다. 이제 동계는 마을자치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던 이전과 달리 마을운영의 중심축을 이장 중심의 마을행정 영역으로 넘기고 마을공동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재조정하였다. 그럼에도 이장을 중심으로 마을운영이 이루어지는 저변에는, 항상 드러나지는 않지만 현실의 질서를 뒷받침하는 마을의 공동체적 질서가 있었다. 그리고 동계는 그러한 질서의 담지자이자 마을공동체의 최종적인 안전망이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이 글은 전남 長興郡 蓉山面 語西里 洞契에 대한 분석을 통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중반에 걸친 근대로의 이행과 그 제도화 과정에서 마을의 자치적 운영이 국가의 영향력에 대응하고 변화하는 양상을 추적해 보고자 하였다.
    동계는 단지 전근대 시기의 유물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로의 이행 국면에서 농민의 일상적 삶의 공간으로 활성화된 마을의 자치적 운영의 중심을 이루었다. 또한 어서리 동계는 식민지 시기와 해방~전쟁의 격동기를 거치면서도 마을의 자율적 운영에서 중심 조직으로 기능하였으며, 현재까지도 마을공동체의 유지에서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결국 동계는 마을의 공동체적 질서가 제도화된 조직체이자, 마을의 자율적 운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마을자치조직인 것이다. 물론 마을자치는 다양한 방식, 수준, 내용을 가지며, 시기적으로도 크게 변화할 것이다. 또한 마을자치는 마을공동체의 자기완결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을을 지배 대상으로 삼는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동계를 통해 마을자치의 실상과 그 변화 양상을 파악하는 것은 국가의 지배와 마을/농민의 자율성이라는 두 측면이 어떻게 맞물리고 길항하는가를 ‘아래로부터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다. 본고에서도 여전히 ‘지배와 자율성’의 문제를 명쾌하게 파악하기는 힘들었지만, 기존의 정책사 중심의 위로부터의 시각이나 도식적인 민중운동사의 시각에서는 제대로 포착하기 어려웠던 지배와 자율의 복합적·모순적 관계를 이해할 단초를 발견할 수는 있었다. 농민층은 근대의 제도적 폭력에 일방적으로 순치되지 않고 나름의 공동체적 결속과 대응을 통해 자신의 자율적 세계를 지키려는 지속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그럼에도 동시에 마을의 자율성은 국가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국가의 지배력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의 공동체적 결속과 자치적 질서에 제약되기도 했다. 그리고 어서리의 자율적 마을질서가 일제말 전시동원체제와 해방~전쟁의 격동기를 경과하면서 계기적으로 관치적 질서로 포섭·편입되는 과정을 엿볼 수 있었다.
    본고는 어서리 동계에 대한 사례연구의 방법을 취했는데, 이와 같은 ‘마을 안으로부터’의 미시적 분석은 나름의 강점을 갖는다. 어서리는 19세기 이후 현재까지 동계 자료가 일관되게 작성되었기 때문에 중기적 시간대에 걸쳐 시계열적으로 일관되게 분석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의 한국 근현대사 연구가 조선시대와 단절되고, 개항기, 일제시기, 해방후 등으로 분절되어 이루어졌던 한계를 넘어, 지역사회의 근대적 재편 과정에서 동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마을자치가 작동·변화하는 양상을 마을 주민들의 실제 경험을 통해 비교적 장기적으로 파악하였다.
    본고는 한 마을의 사례연구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다양한 사례를 비교 검토하여 개별적 특수성을 보다 명확히 하면서도 일정한 유형화와 함께 보다 일반화된 인식을 확보해야 하는 과제를 남기고 있다. 또한 동계 분석이 단지 사례연구에 그치지 않고 ‘아래로부터’의 관점에서 전체를 조망하는 연구로 진전되기 위해서는 동계에 반영되는 전사회적 맥락이나 국가의 지배방식에 대한 보다 정치한 분석이 필요하다. 이 논문은 이러한 앞으로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자 기본적인 설명틀에 대한 하나의 입론으로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 색인어
  • 동계, 마을자치, 마을공동체, 마을질서, 국가의 지배, 행정적 마을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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