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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기 공복제도의 특수성과 내적의미 연구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고려 초기 공복제도의 특수성과 내적의미 연구 | 2005 년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임경화(가톨릭대학교) ) 연구결과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지원사업을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은 연구자는 연구기간 종료 후 6개월 이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사업유형에 따라 결과보고서 제출 시기가 다를 수 있음.)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연구과제번호 C00065
선정년도 2005 년
과제진행현황 종료
제출상태 재단승인
등록완료일 2008년 08월 29일
연차구분 결과보고
결과보고년도 2008년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고려 초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조치가 시행된다. 특히 광종 7년에서 11년 사이에는 강력한 왕권강화를 위한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가 확립되면서 관료들의 공복(公服)이 제도화 된다. 광종 11년(960년)에 제정된 관리들의 공복의 색은 ‘자(紫)․단(丹)․비(緋)․록(綠)’의 4색(色)으로, 공복에 단색이 사용된 것은 중국이나 신라․백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려초기에만 나타나는 특징이다.
    본 연구에서는 고려 초기의 정치․사회․문화사 전반에 걸친 분석을 통하여 백관의 공복제정이 정치개혁에서 어떠한 의의를 갖는가를 고찰함으로서 공복에서의 단색이 갖는 의미와 공복색의 분류기준 및 광종대의 4색 공복제도의 시행 시기, 복색의 의미 등을 유추하고자 한다.

    고려 초기 공복제도의 특징과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고려 초기 공복제도는 새로운 세력을 관료체제에 진입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으며 강력한 개혁정치를 펼쳤던 당시의 정치 사회적 산물이었다. 관료체제가 안정화되면서 공복의 정치 개혁적 기능을 사라지고 관리의 복색으로서의 신분 표시의 역할만 남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초기의 공복 수여는 관계(官階)나 관직에 의한 연공서열식으로만 지급된 것이 아니라 왕에 대한 충성도나 공로 등을 기준으로 통치자의 주관적 판단 하에 임의적으로 수여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된다. 광종 대의 공복제도에서 자색 공복 지급 기준인 원윤은 중앙 관료 뿐만 아니라 지방 호족들에게도 수여되어 자삼층이 많았다. 나머지 관료들을 비와 록만으로 구분하기에는 부족하여 ‘단삼’을 상위복색으로 도입하여 ‘단․비․록’의 공복을 사용하였다고 여겨진다. 단색의 공복이 사라진 시기는 전시과 제도에서 유추할 수 있다. 경종 원년의 전시과 제도에서는 공복의 복색에 따라 전시 지급군을 나누고 있지만 목종 원년(998년)의 개정전시과제도에서는 관직의 고하를 기준으로 전시를 지급한 것으로 변화되어 나타난다. 이는 관료체제가 정비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지는데, 관료체제의 정비는 성종 14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고려 초기 ‘자․단․비․록’의 공복제도는 성종 14년에는 ‘자․비․록’으로 변화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변화는 현종 9년(1098년) 장리 공복제도에서 나타나는데 ‘자․비․록․청’으로 변화된 복색이 기록되어 있다.

    2. 공복제도가 공로에 대한 보상체계로 사용되었다.
    고려 초기 공복제도는 외형적으로는 관품과 관직에 의해 구분되었지만 ‘재능’이라는 기준에 의해서도 지급되었다. 전시과 제도의 ‘인품’이나 ‘재능’은 공로에 따라 권력자의 주관적인 판단 하에 평가되어졌다고 여겨지며, 공복을 기준으로 군(群)을 나누어 전시를 지급한 것은 공로에 대한 관리들의 경제적 보상체계를 마련한 것이라 생각된다.

    3. 공복은 외형적으로 관리의 공복을 나타내며 착용자의 신분을 대변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공복제정은 율령반포 등의 체제안정장치를 통하여 왕권을 안정화시킨 후에 이루어지고 있다. 공복제도를 공포하여 관리들을 복색에 따라 세력군 별로 구분하고자 하였고, 공복 착용은 통치자에게 종속하겠다는 것을 의미하여 고려 초기 공복제도는 통치자와 신하간의 종속적 관계를 강조하는 역할로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고려 초기에만 나타나는 단삼층은 왕의 명령과 이를 전달하고 수행하는 집단을 상징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하여 고려초기는 호족연합정권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특별히 왕권 강화에 필요한 집단을 구성하여 동원할 필요가 있었으며, 관료제가 진전되는 상황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관료군을 묶을 필요가 있었다. 이들을 상징하는 복색으로 ‘단색’이 사용되었다고 여겨진다.
    임금의 명령을 적은 문서를 단서(丹書)라 하고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는 자를 단필원이라고 하며, 임금을 축수하는 무용복에 단의(丹衣)가 등장하는 점 등 국왕과 관련되어 ‘단(丹)’의 글자가 사용된 예가 많을 점을 볼 때 ‘단’은 통치자와 연계된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복에서 ‘단’은 단서철권(丹書鐵券)이라 하여 공신들이 충성을 맹세하면 자손에 대대로 죄를 씻어주겠다는 충성 서약적 의미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5. 자색은 공무(公務)를 위한 상징적 복색(服色)이며, 다양한 계층의 위계를 표현한다.
    고려 초기의 자색은 상위계층과 하위계층 모두 사용한 복색이다. 그러나 상위계층은 소매가 넓은 자삼(紫衫)을 착용하였고 하위계층은 소매가 좁은 자의(紫衣)를 착용하였다고 여겨지며, 자색이 공무(公務)를 위한 상징적 복색(服色)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신분이 낮은 계급도 자색을 사용할 수 있었다고 사료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에서는 고려 초기의 정치․사회․문화사 전반에 걸친 분석을 통하여 백관의 공복제정이 정치개혁에서 어떠한 의의를 갖는가를 고찰함으로서 공복에서의 단색이 갖는 의미와 공복색의 분류기준 및 광종대의 4색 공복제도의 시행 시기, 복색의 의미 등을 유추하고자 하였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고려 초기 공복제도는 새로운 세력을 관료체제에 진입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으며 강력한 개혁정치를 펼쳤던 당시의 정치 사회적 산물이었다. 관료체제가 안정화되면서 공복의 정치 개혁적 기능을 사라지고 관리의 복색으로서의 신분 표시의 역할만 남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초기의 공복 수여는 관계(官階)나 관직에 의한 연공서열식으로만 지급된 것이 아니라 왕에 대한 충성도나 공로 등을 기준으로 통치자의 주관적 판단 하에 임의적으로 수여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된다. 광종 대의 공복제도에서 자색 공복 지급 기준인 원윤은 중앙 관료 뿐만 아니라 지방 호족들에게도 수여되어 자삼층이 많았다. 나머지 관료들을 비와 록만으로 구분하기에는 부족하여 ‘단삼’을 상위복색으로 도입하여 ‘단․비․록’의 공복을 사용하였다고 여겨진다. 단색의 공복이 사라진 시기는 전시과 제도에서 유추할 수 있다. 경종 원년의 전시과 제도에서는 공복의 복색에 따라 전시 지급군을 나누고 있지만 목종 원년(998년)의 개정전시과제도에서는 관직의 고하를 기준으로 전시를 지급한 것으로 변화되어 나타난다. 이는 관료체제가 정비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지는데, 관료체제의 정비는 성종 14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고려 초기 ‘자․단․비․록’의 공복제도는 성종 14년에는 ‘자․비․록’으로 변화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변화는 현종 9년(1098년) 장리 공복제도에서 나타나는데 ‘자․비․록․청’으로 변화된 복색이 기록되어 있다.

    2. 공복제도가 공로에 대한 보상체계로 사용되었다.
    고려 초기 공복제도는 외형적으로는 관품과 관직에 의해 구분되었지만 ‘재능’이라는 기준에 의해서도 지급되었다. 전시과 제도의 전시 지급체계와 공복착용의 기준으로 사용된 ‘인품’이나 ‘재능’은 명확한 객관적 분류체계가 아니기 때문에 당시는 객관적인 체계에 의해 관료군이 구분된 것이 아니라 통치자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 인품이나 재능이 평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즉, 공로의 크고 작음에 따라 정해지는 등급에 의해 공복제도가 정해지고 공복의 복색군(服色群)에 따라 품을 나누어 전시를 지급하였다고 여겨진다. 이는 왕을 수호하는 세력 즉 지방 호족층과 신진 세력을 기존 관료 세력에 포함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공복제도가 사용되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3. 공복은 외형적으로 관리의 공복을 나타내며 착용자의 신분을 대변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공복제정은 율령반포 등의 체제안정장치를 통하여 왕권을 안정화시킨 후에 이루어지고 있다. 공복제도를 공포하여 관리들을 복색에 따라 세력군 별로 구분하고자 하였고, 공복 착용은 통치자에게 종속하겠다는 것을 의미하여 고려 초기 공복제도는 통치자와 신하간의 종속적 관계를 강조하는 역할로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고려 초기에만 나타나는 단삼층은 왕의 명령과 이를 전달하고 수행하는 집단을 상징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하여 고려초기는 호족연합정권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특별히 왕권 강화에 필요한 집단을 구성하여 동원할 필요가 있었으며, 관료제가 진전되는 상황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관료군을 묶을 필요가 있었다. 이들을 상징하는 복색으로 ‘단색’이 사용되었다고 여겨진다.

    임금의 명령을 적은 문서를 단서(丹書)라 하고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는 자를 단필원이라고 하며, 임금을 축수하는 무용복에 단의(丹衣)가 등장하는 점 등 국왕과 관련되어 ‘단(丹)’의 글자가 사용된 예가 많을 점을 볼 때 ‘단’은 통치자와 연계된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복에서 ‘단’은 단서철권(丹書鐵券)이라 하여 공신들이 충성을 맹세하면 자손에 대대로 죄를 씻어주겠다는 충성 서약적 의미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5. 자색은 공무(公務)를 위한 상징적 복색(服色)이며, 다양한 계층의 위계를 표현한다.
    고려 초기의 자색은 상위계층과 하위계층 모두 사용한 복색이다. 그러나 상위계층은 소매가 넓은 자삼(紫衫)을 착용하였고 하위계층은 소매가 좁은 자의(紫衣)를 착용하였다고 여겨지며, 자색이 공무(公務)를 위한 상징적 복색(服色)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신분이 낮은 계급도 자색을 사용할 수 있었다고 사료된다.



  • 색인어
  • 공복, 공복제도, 고려초기, 관복, 특수성, 내적의미, 단색, 공로에 대한 보상, 왕권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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