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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rm.or.kr/krmts/link.html?dbGubun=SD&m201_id=10011652&local_id=10019208
朝鮮 初期 王室文學 硏究
Reports NRF is supported by Research Projects( 朝鮮 初期 王室文學 硏究 | 2005 Year 신청요강 다운로드 PDF다운로드 | 이현지(한국학중앙연구원) ) data is submitted to the NRF Project Results
Researcher who has been awarded a research grant by Humanities and Social Studies Support Program of NRF has to submit an end product within 6 months(* depend on the form of bus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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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searchers have entered the information directly to the NRF of Korea research support system
Project Number A00060
Year(selected) 2005 Year
the present condition of Project 종료
State of proposition 재단승인
Completion Date 2009년 10월 28일
Year type 결과보고
Year(final report) 2009년
Research result report
  • Abstract
  • 성종과 연산군은 ‘문학군주’라 할 정도로 문학을 애호했을 뿐 아니라 문학적 재능이 있었으므로 연회 자리에서 종친, 대신들과 창화를 일삼았다. 이 문예는 ‘연향의 시대’라 일컬어지는 성종 및 연산군의 시대를 살아가는 왕족에게 필수 불가결의 교양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 왕실문학의 융성은 ‘격동의 시대’와 ‘연향의 시대’라 일컬어지는 일견 모순된 시대 문화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본고는 조선 초기 문학군주 成宗(1457~1494), 燕山君(1476~1506) 시대의 전개와 문학적 국면에 대하여 조망하였다. 성종과 연산군을 비롯하여 이 시기 대표적 왕실문인 月山大君 李婷(1454~1488), 朱溪君 李深源(1454~1504), 富林君 李湜(1458~1488), 茂豊正 李摠(?~?)을 논의 대상으로 하여 문학적 성격과 문예미를 구명하였다. 우선 성종의 문예진흥책과 연산군의 시인중용책에 대해 살펴보고, 그 시대의 왕실문인들의 시세계와 이들 문학의 역사적 성격에 대해 검토하였다.
    성종·연산조 왕실문학의 융성은 성종과 연산군의 문학 애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열성어제에 수록되어 있는 시문의 수를 살펴보면 성종은 역대 왕 중에서 가장 많은 시를 지었다. 대부분의 시가 형 월산대군과 창화한 시라는 점에서 보면, 역사에 전하는 대로 그들의 우애는 인륜의 모범이 되는 것이었으며 그 미담의 근거를 성종이 남긴 시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성종은 이처럼 개인의 서정을 읊어 신하들의 논란이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문예 진흥을 목적으로 불시에 명제를 하고 신하들에게 시를 지어 올리게 하여 인사고과에 반영하기도 하고 승진시험인 重試를 증설하는 등 文才가 출세의 첩경이 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문신들은 글귀를 다듬는 데 주력하느라 사무를 방기하는 등 폐단이 생기기도 했지만 시 짓는 풍조가 흥성했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성종 자신이 好文의 군주였기에 文士를 진실로 총애하고 예우한 점은 문풍 진작을 위한 더욱 강력한 동기 유발책이 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성종조에는 태평성대를 즐기는 연회의 노래가 흥성하였다.
    성종이 형제간의 우애나 문풍 진작을 위해 글을 지었다면 성종을 이어 왕위에 오른 燕山君은 문학을 오락, 휴식 등 유희의 대상으로 여겼다. 이로 인해 應製하는 문신이 경계하는 내용을 쓴 글귀는 싫어하고 향렴·옥대체를 선호하였으며 문자 유희라고 할 수 있는 回文詩를 짓기도 하였다. 그 자신이 폐서인이 되어 그의 시문은 『列聖御製』에 수록되어 있지 않지만 『燕山君日記』에서 확인되는 것만 해도 100편이 넘는다. 연산군은 시를 가지고 정치를 하였기에 신하들에게 시를 지어 바치도록 자주 명을 내렸으며, 작시지침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구체적인 작시 형식을 정해 주고서 그와 같은 세부 사항들을 어기는 것까지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므로 향렴체를 좋아하는 연산군의 문학적 경향이 당시의 문단의 흐름을 주도하였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문명이 높은 종실인물이 成宗·燕山朝에 집중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성종·연산조에는 종친들에게 사환을 금지하였으므로 이들은 세속적 욕망을 추구할 수 없었다. 그것이 목숨을 보존하는 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우환으로 인해 세속의 명리를 초월하고자 한 이들의 마음은 구도자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풍류를 즐김에 구도자의 입장과 같이하였다는 점에서 江湖歌道의 선구가 되었다고 하겠다.
  • Research result and Utilization method
  • 본 논문은 조선 초기 문학군주 成宗(1457~1494), 燕山君(1476~1506) 시대의 문학적 국면에 대하여 조망하였다. 성종과 연산군의 문예정책과 시세계를 비롯하여 이 시기 대표적 왕실문인 月山大君 李婷(1454~1488), 朱溪君 李深源(1454~1504), 富林君 李湜(1458~1488), 茂豊正 李摠( ~ )을 논의 대상으로 하여 문학적 성격을 구명하였다. 본 논문의 주요 성과와 의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成宗의 시세계는 治世와 友誼로 집약할 수 있다. 성종은 자신의 은택이 미친 것을 그림이나 시로 표현하여 치란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성종이 지은 시의 대부분이 월산대군과 창화한 것이라는 점에서 역사에 전하는 대로 인륜의 모범이 되는 미담의 근거를 남겼다. 월산대군과의 창화로 인해 성종은 개인의 서정을 읊는 일이 많아 신하들이 그것의 부당함에 대하여 직언을 올리기도 하였으나 그는 월산대군에 대한 우애를 고수하였고, 시의적절한 정책을 펼쳐 태평성대를 구가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성종은 신하들과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위해서 연향을 많이 활용하였는데, 여기에서 태평성대의 비결로 주목되고 있는 성종의 치세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燕山君의 시세계는 불안과 원망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연산군의 삶을 지배한 것은 세상에 대한 불신감이었으며, 특히 신하들에 대한 불신과 원망의 태도가 여러 편의 시로 표현되었다. 그는 형언할 수 없는 불안을 감각적인 자극으로 풀려고 하였다.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향유하며 관능적인 자극을 추구하여 기녀를 찾아 희롱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었다. 이는 연산군의 공허하고 타락한 정신세계를 반영하는데, 연산군이 타락한 원인 중 하나는 성종에 대한 증오와 관계가 있었다. 그는 생모의 죄를 물은 禮敎를 파괴하고 권력의 논리에 따라 정치를 하였다. 자신에게서 어머니를 빼앗은 성종과 성종의 결정에 찬성하거나 묵인한 신하, 참소를 행한 후비, 참소의 근원이 되는 이복동생 등에 대한 복수심으로 살인의 광기에 사로잡혀 결국 모두를 파멸로 몰고 갔다.
    月山大君 李婷의 시세계는 고독과 탈속으로 집약할 수 있다. 월산대군이 관심을 둔 곳은 풍월과 강산이었으며 그가 일삼았던 것은 詩酒였다. 월산대군은 평생의 소원을 풍류로 영위하는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풍류객이라 자부하였다. 바람과 달에 흥을 붙여 인간 세상에 살면서 인간 세상에 욕심을 두지 않는 무심을 지향했기에 현실을 선계로 인식하였고 무위자연을 묘사하였다. 이러한 월산대군의 처세는 바로 태평 정치의 기반을 닦는데 무형의 도움이 되었으므로 그는 무위지치를 한 셈이었다.
    朱溪君 李深源의 시세계는 義憤과 安分의 갈등으로 표현되었다. 이심원은 당대 종실들이 국정에 전혀 개입하지 않고 自娛하던 것과는 달리 강경한 정치적 성향을 띠는 인물이었다. 세조조의 훈신들이 권력을 장악한 시대 현실 속에서, 그는 불의에 맞서 충언을 하다가 도리어 세상 사람들에게 소외당하는 극한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醒狂’은 이러한 자신의 현실적 처지와 심경을 함축한 것이었다. 겉으로는 세속의 가치에서 벗어나 있으나 내심 세속에 복귀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갈등하는 내면 풍경을 그는 ‘濯足’이라 하였다. ‘遠遊’는 이러한 ‘탁족’의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 원유를 통한 인식의 변화는 삶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 내었고, 호 역시 ‘醒狂’에서 ‘太平眞逸’로 수정하였다. 생애 전후반에 상반된 삶의 태도에 따라 문학 역시 변모를 거듭하여 전혀 다른 문학적 경지에 도달했다. 불의의 현실에 대한 울분을 우의적으로 발산하다가 安分自足의 흥취를 묘사하였다.
    富林君 李湜의 시세계는 閑情과 悔恨으로 표현할 수 있다. 현실 속에서 표현된 한정은 당면한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방도를 모색해야 한다는 현세적 인생관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는 군왕의 덕화를 찬양하고 문물의 성대함을 찬미하는 바탕이 되었다. 조정의 반열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훈구파의 행태에 전적으로 공감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진퇴출처에 대해 갈등하는 면모를 보이기도 하지만 변함없는 충심을 여성 정감으로 표현하였다.
    茂豊正 李摠의 시세계는 忠憤의 표출과 獨善의 추구로 요약할 수 있다. 경세제민의 재략이 있었지만 불신으로 점철되어 종친 신분으로 목숨조차 보전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이총은 이상을 실현할 가능성을 상실하고 자신의 처지를 삶의 한계로 받아들였다. 단종의 폐위와 관련된 충현의 억울한 죽음과 그에 대해 추모하지 않는 현실에 대해 개탄하였고 세조의 왕위찬탈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역사의식을 볼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잠령칠현과 뜻을 같이 하며 정치 현실에 대한 충분을 표현하는가 하면, 자연과 합일된 경지를 추구하여 인간사를 초월한 흥취를 표현하였다
  • Index terms
  • 王室, 宗親, 成宗, 燕山君, 月山大君 李婷, 朱溪君 李深源, 富林君 李湜, 茂豊正 李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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